Vol. 65, No. 32014년 5월/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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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yy가 여기 있었다네, Robinson Crusoe - 글: Tom Verde

이 유형의 이야기는 아주 친숙해져서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 무인도에 고립된 한 사나이가 재치와 섬의 자원을 활용하는 기술로 살아남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고립된 지 몇 년이 지났을 때 이웃 섬의 원주민을 만나 동반자가 되어 제자로 삼고, 말 그대로 함께 섬의 사회를 만들어 간다.

1719년에 The Life and Strange Surprizing Adventures of Robinson Crusoe가 출판된 후 나온 수많은 삽화 중에는 1740년 판에 실린 이 그림도 있다. 모험을 중시하면서도 선배 Hayy ibn Yaqzan의 삶처럼 Crusoe의 고독한 삶은 궁극적으로 철학적 사유를 자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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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9년에 The Life and Strange Surprizing Adventures of Robinson Crusoe가 출판된 후 나온 수많은 삽화 중에는 1740년 판에 실린 이 그림도 있다. 모험을 중시하면서도 선배 Hayy ibn Yaqzan의 삶처럼 Crusoe의 고독한 삶은 궁극적으로 철학적 사유를 자극한다.

12세기 알-안달루스(Al-Andalus) 혹은 에스파냐 남부의 Ibn Tufayl이라는 철학자가 Hayy Ibn Yaqzan라고 제목을 붙인 이 이야기를 썼다. 그는 정식 성명으로 인해 중세 서양에 Abubacer로 알려졌다. 본명은 Abu Bakr Muhammad bin ‘Abd al-Malik bin Tufayl al-Qaisi이다. 

약 6세기 후에 학자들은 영국 작가 Daniel Defoe가 Ibn Tufayl의 책을 읽고 표류 실화에서 영감을 받아 고전 Robinson Crusoe를 썼다고 한다.

Defoe는 Hayy의 이야기의 줄거리에만 끌린 것이 아니다. Ibn Tufayl의 소설은 주인공 Hayy ibn Yaqzan ("살아 있는, 늘 깨어 있는 이의 아들")이 어려서부터 사람과 접촉하거나 교육받지 못하며 자라지만 세속적 세계와 신성을 모두 깨닫는다는 우화이다. 그는 자가 교육 지식, 혹은 후대의 학자들이 말하는 "자가 계몽"을 통해 이 일을 한다.  

합리적이고 경험적으로 접근하여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다. Defoe만이 아니라 그 동시대 유럽 계몽주의 시대 사상가, 시인, 작가들에게서 반향을 일으켰다. 베이컨(Bacon), 밀턴(Milton), 로크(Locke)와 다른 이들은 모두, 말하자면, "아랍" 학식, 문학, 철학의 잉크에 펜을 깊이 담그어 과학, 종교, 인간의 조건에 대한 견해를 정립했다. Defoe가 자신의 가장 유명한 소설이 될 글을 쓸 무렵, Ibn Tufayl의 Hayy ibn Yaqzan은 엘리자베스 시대의 "자연주의 철학자(과학자)", 르네상스 인문주의자, 중세 유대 신학자들을 사로잡으며 수세기 동안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이야기의 줄거리와 철학을 접한 이 모든 사람들은 그 책을 jid Fakhry가 연구 저서 이슬람 철학의 역사(A History of Islamic Philosophy)에서 말한 "진리를 향한 마음의 자연적 진보"의 로드맵으로 삼았다. Defoe의 시대 이후에도 스피노자(Spinoza), 볼테르(Voltaire), 루소(Rousseau)와 같은 사람들에게 염감을 불어넣었다. 초기 퀘이커 교도는 Hayy의 이야기에서 신흥 교리의 씨앗을 보았다. 

Ibn Tufayl의 60페이지 책(그의 저작 중 유일하게 전해지는 것)이 어떻게 유럽 계몽주의의 DNA 중 하나가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픽션 중에서 가장 오래 가는 장르가 태어나게 했는지는 그 자체로 하나의 여정이다. Ibn Tufayl 자신의 여행과 알 안달루스, 모로코에서 르네상스 이태리의 궁정에 있던 중세 씽크탱크들, 옥스포드대학교, 케임브리지대학교, Defoe가 살았던 런던에 있는 커피숍들과 함께 떠나는 이 여정은 500년에 걸치는 것이다.

나의 여정은 작가 Avner Ben-Zaken에게 전화를 하면서 시작되었다. Reading Hayy Ibn-Yaqzan: A Cross-Cultural History of Autodidacticism을 쓴 그는 과학사의 권위자이다. 그는 Ibn Tufayl의 책을 인식론 혹은 자식 연구의 파격적인 작품으로 보았다. 

"이 우화적인 철학 소설에서 처음으로, 꾸준히 직접 경험한 것에 기초하여 증거, 사실을 뽑아내고 마침내 철학적 원리에 이르는 것을 본다. 이는 지식의 습득이 권위로부터 온다는 [인식론의] 기존 견해와 완전히 다른 것이다."라고 Ben-Zaken은 말했다. 그는 계속해서 말한다. "소설의 자가 계몽 주제는 현대성의 가장 중요한 원리이다."

물론, 열대의 섬에서 살아남으려는 고독한 친구의 어깨에는 어지간한 짐이 될 것이다. 그러나 Ibn Tufayl의 주인공은 과제를 완수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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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illustration by Lili Robins

Ibn Tufayl이 Hayy Ibn Yaqzan에서 그린 근본적 경험주의는 고전적 문헌과 무슬림 문헌 양쪽에 뿌리를 두었다. Narboni, della Mirandola, Pocockes, Defoe와 더불어 현재까지 그의 저작을 읽고 토론에서 생각을 이야기하며 현대성을 정의하는 사람들의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Ibn Tufayl이 말하는 대로, Hayy의 이야기는 "인도 해안에서 떨어진 적도의 어느 섬"에서 시작한다. 그곳의 햇빛, 열, 습기가 섞인 알맞은 기후는 "인류가 아버지나 어머니 없이 존재하도록 한다." 논리적으로는 스리랑카가 유력하기는 하지만, Ibn Tufayl은 이 가공의 무대를 전설적인 섬 와크와크(Waqwaq)로 지명한다. 이 섬은 학자들이 때때로 스리랑카와 같은 곳으로 생각하는 곳이다. 와크와크는 8세기 중국 문헌에 처음 등장하며, 몇몇 아랍 지리서와 페르시아 모험기에 나온다. 이 책들에서 모두 인간을 열매로 맺는 "와크와크 나무"를 볼 수 있다. 이때, 말하자면, 익어서 땅으로 떨어진 인간들은 소리지른다. "와크와크!" 

Ibn Tufayl는 지리보다 우화에 중점을 더 두었지만, 섬의 위치는 신화적으로나 실제로나 목표에 맞았다. 그러한 무대에서 "완전히 고립된 아이의 마음이 백지(tabula rasa) 상태에서 어른의 마음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따라갈 수 있었다고 가자대학교(University of Gaza)의 Mahmoud Baroud는 말한다. 그는 또한 2012년의 The Shipwrecked Sailor in Arabic and Western Literature: Ibn Tufayl and His Influence on European Writers의 저자이기도 하다. Baroud는 그러한 상황에서 설명한다. "Hayy는 감각적인 경험, 추론, 숙고를 통해 자유롭게 배웠다."

그러나 Ibn Tufayl에게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동시대인들은 신이 유일한 창조자라는 정통적인 전제를 놓고 갈등했다. 그래서 Ibn Tyfayl은 이를 대체할 Hayy의 뒷이야기를 만든다. 이웃 섬에서 왕의 누이가 왕의 허락을 받지 않고 결혼하여 아이를 낳아 "단단히 봉한 방주"에 숨긴다(아기 모세처럼). 강한 해류와 부드러운 조수가 바다에서 떠다니는 구유를 어느 섬에 밀어올린다. 어미 가젤이 아기 울음소리를 듣고 방주에서 꺼내 거두어 젖을 먹인다. 가젤은 Hayy의 양모이자 "아이를 돌보고 기르며 해로운 것들로부터 지키는 한결같은 유모"가 되었다.

Hayy는 자라면서 "놀랍도록 정확하게" 섬에 사는 것들의 목소리를 배웠다. 1894년 Kipling의 작품에 나오는 Mowgli 와 1912년 Edgar Rice Burroughs의 타잔은, Baroud와 다른 이들에 의하면, Hayy의 또 다른 두 문학적 후배들이다. Hayy는 동물들이 대부분 뿔, 부리, 발톱과 같이 몸을 방어하는 것을 갖고 있음을 보고 깃털로 몸을 덮었고, 막대기와 돌로 찌르고 베는 도구를 만들었다. 

Hayy가 일곱 살이 되었을 때 가젤이 죽었다. Hayy는 슬픔에 젖어, 가젤의 고통의 근원을 찾으려고 가젤의 몸을 해부했다. 가젤을 살리지는 못했지만 Hayy는 해부학의 기초를 배웠다. 폐, 순환계, 심장의 심실 등의 메카니즘을 알게 되었다. 심실 중 하나에는 피가 굳어 있었고 하나는 비어 있었다. Hayy는 자신이 찾던 것이 "거기 있었지만 사라졌음"을 알았다. 다른 동물들을 잡아 해부하면서 그는 모든 동물의 심장에는 그 하나하나의 혼, 다시 말해 영혼이 있다고 추론했다.

Ibn Tufayl은 Hayy의 자가 계몽 이야기를 Hayy가 49세가 될 때까지 각 7년의 7부분으로 나눈다. Ibn Tufayl은 주인공이 생명과학을 배운 후 왜 연기가 올라가는지, 물건이 왜 떨어지는지, 물이 어떻게 증기가 되는지 등의 질문을 탐구하며 물리학으로 옮겨 가는 모습을 그린다. 불빛이 밝은 별을 향해 올라가는 것을 보고 Hayy는 그것의 기원이 하늘에 있다고 결론짓는다. 나아가 몸을 떠난 영혼도 몸의 온기가 사체에서 올라가 흩어지면서 같은 길을 간다고 생각한다. 이로써 그는 별, 달, 행성에 주의를 돌리게 된다. 그는 섬을 걸어서 일주하여 천체의 운행을 흉내냈고, 그 궤도를 정확히 계산했다. 그러면서 수학과 천문학을 배웠다. 그는 우주가 "실제로 하나의 거대한 존재"라고 결론지었다. 그러자 영원한 질문에 다다랐다. "이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 또는 늘 존재하던 것에서 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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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m Verde
Ibn Tufayl의 고향 과딕스(Guadix)의 구릉지대는 시에라네바다 산맥을 배경으로, 적어도 8세기부터 동굴 거주지가 빼곡히 들어차 있다.

그는 동굴에 칩거하여 단식을 하며 명상한다. 그곳에서 "세상에는 비물질적인 인과가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즉, 물리적 세계를 초월하여 시간과 인간 상상력의 너머에 있는 인과적 존재가 있다는 것이다. Hayy는 그러한 힘이 "만물의 인과"임을 깨닫는다. 14세기 전의 아리스토텔레스와 한 세대 전의 토마스 아퀴나스가 "원동체"라 부른 유도하는 실체이다. 달리 말해, 그는 명상 여정을 통해 신의 존재를 깨달았다.

이웃 섬에 사는 Absal이 와서 Hayy를 발견하고 인간의 언어를 가르친다. 나중에 자신의 섬으로 데리고 돌아간다. Hayy는 그곳에서 사회와 접촉한다. 그는 관습을 가까이서 관찰하며, 특히 숭배 방법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이 편협하고 소심하며 "무지로 충만"함을 본다. 이것이 부패한 모습이라고 여긴 그는 Absal과 함께 자신의 섬으로 돌아간다. 두 사람은 그곳에서 죽을 때까지 지낸다.

교육받은 독자들은 Ibn Tufayl의 소설을 단순한 모험 이야기가 아닌, 경험적 철학과 종교 정통성의 긴장을 우화적으로 시험한 것으로 읽는다. Ibn Tufayl 자신이 서문에서 이 점을 분명히 했다. 이슬람 사상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가 영향을 끼쳤음을 인정하고 나서, 그 이전의 Al-Farabi, Ibn Bajjah (안달루시아 동포)와 같은 무슬림 철학자들이 절대적인 믿음으로 진리의 문제를 해결하려던 것을 비판한다. 그리고 의사 Ibn Sina의 덕을 입었음을 밝히며 그를 "철학의 왕자"로 치켜세운다. 그가 감사의 글에 올린 인물 중 최고는 단연 al-Ghazali, 그가 그저 "우리 선생님"이라 부른 사람이다.  

Hayy는 동굴에서 명상할 때 코란과 Plato에 나온 신이 예언자 마호메트에게 한 계시뿐만 아니라 Ibn Tufayl의 어린 시절까지 깨달았다.Al-Ghazali는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철학자 중 하나로, 이슬람 수니파가 내부적으로 여러 분파의 도전을 받았던 11세기 말에 살았다. 아리스토텔레스 논리와 비교(秘敎)적 형이상학에 지나치게 기대어(너무 지나치게 기대어서 비판을 받았다) 창조, 존재, 계시를 설명하여 기적이라는 여지를 거의 없앤 것이 철학(falsafa, 역주: 그리스어의 philosophia를 아랍어 발음으로 옮긴 것,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크게 받았음)였다. Ibn Sina와 같은 사람들은 이를 옹호했다. 그 반대편에는 수피 신비주의가 있었는데, 이는 신의 존재는 초월적이고 이성, 육신에 얽매인 이슬람의 일상 관습을 넘는 것이기에 명상을 통해 깨달을 수 없다고 한다.

Al-Ghazali는 중도를 제시했다. 그는 철학의 체계적인 접근법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그 결론은 몇 가지 논박했다. 명상을 통해 지식을 얻을 수 있음은 신비주의자들에게 동의했지만, 예언자 마호메트와 코란에 나오는 신의 계시가 중심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Ibn Tufayl은 al-Ghazali의 사고 체계를 크게 따랐다고 런던의 동양 아프리카 연구 학원(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의 시니어 강사 Stefan Sperl은 설명한다. "그는 미신적인 관습과 인간이 전적으로 아는 것이 없으며 지성의 전통이 없다고 하는, 인간이 순수하다는 생각을 부정했다."고 Sperl은 말했다. Ibn Tufayl의 표현에 나오는 "과학에 무지한" 사람들은 "궁극적 진리 경험"을 잘못 주장하는 것이다.

이 교리가 후일 진보적이고 지성적인 유럽에 있는 무슬림, 기독교도, 유대교도 중의 운동가, 선동가들의 마음을 움직여 Hayy ibn Yaqzan을 통해 영감을 얻도록 했다. 그 중 주된 인물 중 14세기의 카탈로니아 철학자이자 의사인 Moses Narboni로, 랍비 학자인 이 사람은 Ibn Rushd와 Maimonides 양쪽을 모두 논평했다. Giovanni Pico della Mirandola는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금발의 인물로, 그의 인문주의 선언 On the Dignity of Man은 로마 가톨릭 교회가 귀를 기울이게 했다. 그리고 옥스포드의 귀족 Edward Pococke는 "아랍" 연구의 초기 옹호자이며 1636년에 그 문제의 수석이 되었다.

Daniel Defoe와 그 "어린이 모험 고전"은 처음에는 이 지성적인 모임에 어울리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이는 The Life and Strange Surprizing Adventures of Robinson Crusoe가 보이는 그대로 모험 이야기라고만 인식되고 Defoe의 주인공이 자연 세계를 숙고하고, 기독교도에게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를 질문하며 신과의 관계를 살피는 철학적 과정은 주목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소수의 독자도 The Life and Strange Surprizing AdventuresThe Farther Adventures of Robinson CrusoeSerious Reflections of Robinson Crusoe와 함께 Crusoe의 삼부작 소설 중 하나로만 알고 있다. Defoe는 이 작품들에서 구조된 뒤의 Crusoe의 행운과 그의 영혼의 발달을을 그렸다. Serious Reflections의 마지막 장에서 Crusoe는 더 이상 뗏목을 엮고 식량을 얻기 위해 섬의 모래땅을 파는 데 관심이 없다. 그는 인간의 마음이 "가장 높고 먼 빛의 영역"으로 올라가는 것을 숙고한다. Hayy ibn Yaqzan과 아주 비슷하다. 

학자 Samar Attar가 2007년의 저작 The Vital Roots of European Enlightenment: Ibn Tufayl’s Influence on Modern Western Thought에서 지적했듯이, 두 사람 다 무인도를 떠돌면서 인간의 도움과 접촉이 없이 살아남는다. 둘 다 이성, 관찰과 실험이라는 과학적 수단, 실험과 오류를 통해 자연 환경에 대한 지식을 얻는다. 그로부터 그들은 "초자연적이고 신성한 문제로 발전한다." 둘 다 종교적 극단을 질문하고 이웃 섬에서 온 사람과 친구가 된다. Crusoe에게는 Friday, Hayy에게는 Absal이 있다. Absal은 Crusoe의 보호자가 된다.

Attar가 그러한 비교를 처음 했다고 하기는 힘들다. 이 주제에 관해 지난 반세기 동안 출판된 작품들의 참고문헌, 더 정확히는 Ibn Tufayl이 유럽의 사상에 끼친 영향은 수없이 많다. 이 현대 연구의 대부분은 그 뿌리가 1930년에 출판된 Antonio Pastor의 The Idea of Robinson Crusoe에 있다. 킹스칼리지런던(King’s College London)의 에스파냐어과 학과장 Pastor는 Hayy ibn Yaqzan에 관한 의견 요약에서 "예외 없이, 어떠한 동양의 픽션 작품도 현대 유럽 문학에 더 큰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고 평했다.

Defoe의 시대에도 문예에 일가견 있는 사람들은 Crusoe를 Hayy와 같은 인물로 보았다. Alexander Pope는 1719년 9월에 친구 Bathurst 경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 Defoe가 Robinson Crusoe를 발간한 지 5개월 뒤 - Bathurst가 Gloucestershire에 틀어박혀 있는 것을 비유해 농담조로 "Alexander Selkirk, 혹은 Self-taught Philosopher"라고 했다. Selkirk은 1704년부터 1709년까지 칠레 해안에서 떨어진 섬에 실제로 표류한 선원으로, 동시대의 Crusoe는 여기서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여겨지며, "Self-taught Philosopher"는 영국에서 1708년에 Hayy ibn Yaqzan을 번역한 책의 제목이다. Pope는 이 번역본을 소장하고 있었던 듯하다. 

"책이 아랍어로 쓰이기는 했지만 그 배경이 되는 지중해와 유럽 문화는 이질적이지 않다."고 Sperl은 말했다.

즉, Ibn Tufayl의 이야기는 기자들이 말하는 대로 "다리"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유를 찾으러 나섰다. 

"그런 여정을 시작한다면, 안달루시아 동부의 과딕스에서 출발하는 것이 좋다. Ibn Tufayl이 태어난 곳이다." Ben-Zaken이 내게 조언했다. "그곳에서 퍼즐의 아주 중요한 조각을 찾을 것이다."

유럽의 가장 높은 산 중에서, 눈덮인 시에라네바다 산맥은 과딕스 시를 끼고 있다. 차를 타고 그라나다 북동쪽으로 한 시간 달리면 어미 북극곰이 새끼를 품은 듯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나는 과딕스 토박이 Ana Carreño와 함께 차를 타고 갔다. 에스파냐와 지중해에 있는 무슬림 유산에 대한 글을 싣는 잡지인 El Legado Andalusi의 전 편집자였다.

"굴뚝이 보이나?" 만화 속의 유령들처럼 마을을 덮은 새하얀 총알 모양으로 튀어나온 것들을 가리키며 그녀가 물었다. 그녀는 이것들이 모두 동굴집이고 부드러운 황토를 깎아 만든 것이라고 했다. 과딕스 주민 25,000명 중 수백명이 이곳에서 여름에는 시원하게 편히 지내고 겨울에는 잘 단열이 되어 따뜻하게 살고 있었다. 과딕스는 에스파냐에서 가장 오래된 정착지이지만, 동굴의 연대는 겨우 8세기이다. 그녀는 이곳이 아랍 교역 도시였을 때의 이름인 Wadi ‘Ash, 에서 "wah-deeks"로 발음되는 현대의 에스파냐어 이름이 나왔다. 

바삭거리는 올리브 과자와 에스파냐의 황금 올리브유에 담근 구운 고추를 사이에 두고 Carreño는 이웃 마을에 있는 휴가철 임대 동굴의 주인이자 El Valle del Zalabi의 시장인("나는 에스파냐 유일의 동굴에서 사는 시장입니다." 그는 유쾌하게 말했다) Manuel Aranda에게 나를 소개했다. 그가 시장을 맡은 곳은 Exfiliana를 포함하는 지방지치구역으로, Exfiliana는 Ibn Tufayl의 실제 생가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이름은 에스파냐어로 "Abentofail"라고 한다.

"여기서는 확실히 "Abentofail"이라는 에스파냐 이름이 역사를 통해 이 경치에서 영감을 얻은 여러 작가, 시인,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Aranda는 말했다.

"이곳은 해발 1,000 m이다. 산맥에 둘러싸인 비옥한 평원과 황무지는 독특하고 극적인 자연 환경이다. 여기서는 햇빛도 달리 보인다." 그는 말했다.

Carreño는 이런 환경에서는 자연스럽게 명상을 하게 된다고 한다.

Tom Verde
"플라톤의 철학이 동굴의 어둠에서 떠올라 빛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Hayy도 이해, 실험과 명상의 여러 단계를 지나 신을 이해하기에 이른다." 

- Antonio Enrique

"이곳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언제나 산맥 저편에 무엇이 있을까 궁금하기 마련이지" 그녀는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 "명상하기에 너무 좋은 곳이라서 그토록 많은 시인과 철학자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어."

후에 우리는 과딕스에서 매월 열리는 Abentofail Poetry Workshop의 창시자인 현대 시인 Antonio Enrique를 찾았다. 그는 Hayy ibn Yaqzan이 동굴에서 깨달음을 얻은 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믿는다. 이곳은 Ibn Tufayl의 어린 시절 고향뿐만 아니라 예언자 마호메트가 계시를 받았다는 메카 근처의 Hira 산에 있는 동굴까지 생각나게 한다. 그리고 이상적인 철학자 플라톤이 현실의 진정한 성격을 찾았다는 우화적 동굴도 더듬을 수 있다.

"당시를 주도한 안달루시아의 사상은 플라톤 철학이었다." Enrique는 말했다. 오직 하나, "유일한 존재"에서 존재는 비롯하며, 이 존재에서 영혼이 지성을 통해 재통합될 수 있다. 

"플라톤의 철학이 동굴의 어둠에서 떠올라 빛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Hayy도 이해, 실험과 명상의 여러 단계를 지나 신을 이해하기에 이른다." Enrique는 말했다.

Ibn Tufayl이 어떻게 그렇게 고결한 관념을 알고 글을 썼는지는 과딕스만이 아니라 그의 가족적 배경, 교육, 그가 태어난 시대와 더불어 그가 누린 약간의 역사적 행운과 관련이 있다. Ibn Tufayl은 아라비아 반도를 다시 공격했던 강력한 Qais족의 자손으로 1116년에 태어났다. 무슨 교육을 받았는지는 거의 기록이 없다. 그에 대해 알려진 바는 상당 부분 13세기 모로코 역사가 Abdelwahid al-Marrakushi의 펜에서 나왔다. 그는 "Ibn Tufayl이 가장 크게 성취한 사람들 문하에서 공부했다"고 하며 그 사람들이란 al-Andalus의 "가장 다재다능한 학자들"이었다고 한다. 그는 또한 "철학적 지식[의 분야]을 [종교의] 법과 조화시키는 데" 관심이 있다. 

Ibn Tufayl의 첫 분기점은 30세가 된 지 얼마 안 되는 1147년에 왔다. 이때 그는 전 과딕스 총독 Ibn Milhan과 함께 Marrakesh를 여행했다. Ibn Milhan은 유능한 행정가이자 뛰어난 엔지니어로, 알모하드 왕조의 칼리프 ‘Abd al-Mu’min의 명을 받아 왕의 밭의 관개 시설 공사를 감독하러 간 것이다. Ibn Tufayl이 왜 그를 따라갔는지는 모르지만 궁정에서 칼리프에게 감명을 주었고, 그래서 칼리프의 아들 Abu Sa’id의 개인 비서가 되었다. 1163년에 al-Mu’min’이 죽자, Ibn Tufayl은 그를 이은 칼리프 Abu Ya’qub Yusuf의 주치의로 궁정에 돌아갔다. 1184년에 칼리프가 죽을 때까지 주치의로 있었다. 이때 과학, 수학, 의학에서 명성을 얻었다. 

Al-Marrakushi의 기록에 따르면 Ibn Tufayl은 말년에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영혼의 지식을 얻고자, 철학과 종교를 조화시키고자 했다." 그는 Hayy를 쓰기 시작했다. 알맞은 때, 알맞은 장소였지만 그렇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알모하드 왕조 치하에서 철학은 전반적으로 침체해 있었다. Ibn Tufayl은 운이 좋아서, Abu Ya’qub Yusuf는 두 선임자와 달랐다. "그는 끊임없이 에스파냐 전역과 북아프리카에서 책을 모으로 지식인을 찾았다. 특히 사상가를 찾은 그는 서양의 어느 왕보다도 많이 모으게 되었다." Al-Marrakushi는 이렇게 썼다. 이렇게 칼리프는 Ibn Tufayl에게 끌려서 "밤낮 궁전에 있으면서 곁에서 모셨다. 한 번 들어가 며칠씩 나오지 않는 때도 있었다."

처음 라틴어로 번역된 Hayy Ibn Yaqzan 이야기는 1493년에 Pico della Mirandola 혹은 그 스승 Yohanan Alemanno가 발간한 이 사본으로,
Tom Verde / University of genoa library
처음 라틴어로 번역된 Hayy Ibn Yaqzan이야기는 1493년에 Pico della Mirandola 혹은 그 스승 Yohanan Alemanno가 발간한 이 사본으로, "Dixit Abubacher" (Abubacer [Ibn Tufayl]가 말했다) 로 시작하는 이 책은 제노바대학교(University of Genoa) 도서관에 있다.

Abu Ya’qub Yusuf는 안달루시아의 도읍을 코르도바에서 세비야로 옮겼다. 시대를 초월하는 폭넓은 주제를 담은 Hayy ibn Yaqzan 이 필독서가 된 이곳의 세비야대학교에서 Rafael Valencia가 아랍과 이슬람 연구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Hayy ibn Yaqzan에서는 무슬림이나 아랍의 지식만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의 지식을 얻을 수 있다." Valencia는 말한다.

Hayy ibn Yaqzan의 우화적인 이야기를 넘어, Hayy의 여정 - Ibn Tufayl의 철학 - 의 또 다른 주요한 상징은 에스파냐에서 가장 소중한 역사적 자산인 동부 그라나다에 있는 알함브라 궁전을 들여다봄으로써 보게 된다.

알메리아(Almeria)에 있는 Fundación Ibn Tufayl de Estudios Árabes (Ibn Tufayl 아랍연구재단)의 회원이자 부회장이며 미술 역사가인 José Miguel Puerta Vilchez와 함께 걸으며 나는 직물이 걸린 건물 벽과 천장에 넣은 상징 체계에 눈을 떴다. Comares (즉위실)의 홀로 들어갔을 때 Vilchez는 천장을 보라고 했다.

"천장은 별의 세계이다. 우주의 질서를 떠올리게 한다." Vilchez는 레이스와 같은, 붉은색, 녹색, 흰색으로 칠한 목판의 다각형 8,017개의 기하학적인 문양을 가리키며 말했다. 목판은 동심원을 그리는 코벨 일곱 개에 배치되었는데, 중심의 순수한 백색의 팔각형이 다른 것들을 비추었다.

"Ibn Tufayl은 7년이 일곱 번 되풀이되는 동안 Hayy의 이야기를 풀어 간다. 7이라는 숫자는 그의 작품에서 아주 중요하다." Vilchez의 말이다. "즉위실의 천장에서 7개의 천국과 아울러 Hayy ibn Yaqzan에서 중심 사상이 되는 신플라톤주의의 유출 이론도 볼 수 있다." 

Ibn Tufayl은 전부터 인간의 지혜가 인간으로 하여금 그 신적인 근원에 이를 수 있게 한다고 생각했다. Hayy ibn Yaqzan이 출간되고 2세기가 지나서 나오기는 했지만, 알함브라의 심오한 상징적 건축 시학은 그 책의 주된 사상을 현실적으로 표현한다. 확고한 자기인식과 자기성찰을 통해 그 지혜의 신성한 근원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1492년에 아라곤의 페르디난도 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라 1세의 군대가 그라나다와 함께 알함브라를 함락시켰다. 무슬림이 지배하는 에스파냐, 알 안달루스는 이제 없어졌다.  그러나 이 기독교도 군대가 남으로 진군하는 중에도 Ibn Tufayl의 소설 너머의 사상은 중세 후기 서양 사상의 지적인 밭에 씨를 뿌렸다.

바르셀로나의 역사적인 "call" 또는 유대인 구역은 러시아 인형 세트처럼 빽빽히 차고 스스로를 옥죄는, 동심원을 이루는 중세의 석조 토끼장 같은 곳이었다. 도시의 유명한 보행자 도로 La Rambla의 떠들썩한 분위기를 벗어나 동쪽으로 몇 블록만 가서 좁은 거리의 우뚝 솟은 회색의 밋밋한 파사드 사이를 거니노라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그러나 14세기 중반에 이 거리는 전성기에도 조용하고 평화로울 따름이었다.

"많은 활동이 있었다. Call에는 많은 푸줏간, 빵집, 생선가게, 방직가게와 같은 여러 상점이 바르셀로나의 유대인 구역의 필요를 충족했다. 이곳은 아라곤에서 가장 큰 유대인 구역이었다." Call 자료 센터(Call Interpretive Center)의 교육자 Eulalia Vernet가 말했다. 

"그러나 의식(儀式) 생활의 중심, 지성적 토론의 장은 회당(synagogue)이었다." Vernet는 Call의 가장 작은, 잘 이름붙인 Sinagoga Poca ("작은 회당") 옆에서 쉴 때 말했다. 지금 이곳은 기독교 성당이다. 

14세기에 이곳과 다른 회당들을 뒤흔든 열띤 논쟁은 이른바 Controversia de Maimonides, 마이모니데스(Maimonides)의 논쟁이었다. 12세기 코르도바의 유대인 철학자이자 합리주의자인 모세 마이모니데스(Moses Maimonides)의 이름을 딴 논쟁은 Ibn Tufayl이 일으킨 논쟁과 놀랍도록 유사하다. 신을 이해하는 데 합리주의는 어디까지 도움이 되는가? 어디까지 나가면 이단이 되는가? 마이모니데스의 지지자들은 오늘날 프랑스 남부 페르피냥(Perpignan) 북쪽이 근거지였고 유대교와 아리스토텔레스 합리주의를 조화시키고자 했다. 다른 쪽에는 바르셀로나의 수석 랍비를 지지하는 정통파, 마이모니데스의 사상이 유대인들로 하여금 신앙에서 멀어지게 한다고 염려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페르피냥의 유대 철학자이자 의사인 Moses Narboni가 논쟁에 뛰어들었다. 1348년에 바르셀로나에 와서 동쪽 문으로 Call에 들어왔다고 한다. 나와 Vernet가 섰던 곳에서 100 m 정도 떨어진 위치이다. 라틴어, 카스티야어, 프랑스 프로방스 방언에 능통했으며 히브리어, 아랍어를 읽을 줄 알았던 Narboni는 13세에 마이모니데스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의학을 추구하고 경전 주석, 철학서 주석을 썼다. 그는 마이모니데스가 받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적 교리를 지지하는 신플라톤 철학을 거부했다. 그의 주장은 Ibn Tufayl의 선배 Ibn Bajjah와 계승자 Ibn Rushd의 노선과 비슷하다. Ibn Rushd를 향한 나중의 평에서, Narboni는 "신과의 대화"의 수단으로서 "고독의 방법"을 탐구하기 위해 Hayy ibn Yaqzan의 주석을 쓰겠다는 의도를 밝혔다. 

Hayy를 처음 히브리어로 번역한 사람이 Narboni라고 하는 학자들도 있으나, 다른 이들은 그가 그만큼 아랍어에 능숙하지 못했을 것이라 한다. 어느 쪽이었든지, 그는 그 도시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던 히브리 번역본으로 연구를 시작했다. 14세기 중반에 이 도시는 알모하드 왕조의 박해를 피해 안달루시아의 유대인들이 모였다. 그 전의 알모라비드 왕조 치하에서 누린 관용과 대조되는 일이었다.

"안달루시아에서 많은 유대인이 카탈로니아, 프로방스, 바르셀로나, 히로나(Girona)로 아랍 의사, 철학자, 천문학자의 저작을 히브리어로 번역하기 위해 왔다." A History of Jewish Catalonia의 공저자 Silvia Planas가 말했다. Planas는 Narboni가 자신이 Yehiel Ben-Uriel (신 만세, 깨어 있는 신)이라고 이름붙인 주석을 쓸 장소로 바르셀로나를 택한 것이 당연하다고 했다. 

거기서 Narboni는 신에게 "지복의 섬으로 인도"해 달라고 간청했다. Hayy의 섬을 일컬은 말이다. 그는 Hayy ibn Yaqzan이 "인간의 [세속적인] 지성이 능동적인[영원한, 신성의] 지성과 결합하여 다다른 이해의 성격에 대한 설명"을 제공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Ibn Tufayl이 그러한 "결합"이 그를 추구하는 인간이 추론과 방법론적인 노력을 통해 세상의 소란을 잠재울 수 있다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결론지었다. 

Yehiel Ben-Uriel은 Narboni의 생애와 후대에 베스트셀러라고 할 만한 것이 되었다. 그의 다른 저작 중 무엇보다도 이 작품의 사본이 많이 전해진다. 그중 하나가 콘스탄티노플의 이태리 유대인 인문주의자 Yohanan Alemanno에게 있던 잔뜩 교정을 한 판본이다. 그는 15세기에 플로랑스에 있었다. 먹고 살 길을 찾아야 했던 그는 같은 세대의 많은 교사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아주 부유한 플로랑스의 은행 가문에서 일자리를 구하고자 했다. Alemanno의 제자 중 하나가 Giovanni Pico della Mirandola로, 이 잘생긴 젊은 귀족은 도시의 통치자이자 예술 후원자인 로렌초 데 메디치의 총애를 받았다. 가장 초기의 르네상스 인문주의자이자 철학자인 Pico는 스승과 많은 것을 공유했는데 Alemanno가 그에게 소개한 책도 그 중 하나이다. Hayy ibn Yaqzan.

그리스, 로마, 유대, 이슬람 문헌으로 공부한 플로랑스의 인문주의자 Giovanni Pico della Mirandola는 Hayy Ibn Yaqzan에게서 자기훈련과 진실을 찾는 사유에 대한 면밀한 우화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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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로마, 유대, 이슬람 문헌으로 공부한 플로랑스의 인문주의자 Giovanni Pico della Mirandola는 Hayy Ibn Yaqzan에게서 자기훈련과 진실을 찾는 사유에 대한 면밀한 우화를 보았다.

내가 플로랑스를 대표하는 건물 Il Duomo 성당을 돌고 있을 때 비가 거리를 적셨다. 성당의 옥과 상아 대리석은 조화를 이루며 유명한 Brunelleschi의 돔의 테리코타 크레센도로 올라갔다. 나는 이웃의 시뇨리아 광장(Piazza della Signoria)을 건너며 본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을 알아본 뒤(원상은 1873년에 건물 내부로 옮겼다) 플로랑스의 또 다른 볼 거리인 우피지 궁전(Ufizzi Palace)과 화랑으로 갔다. 

나는 우피지에 있는 Pico의 초상을 찾는 중이었다. Pico의 초상은 박물관의 스타인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맞은편 천장 높이 거의 보이지 않는 곳에 걸려 있어서 사람들의 눈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버찌처럼 붉은 털모자 아래로 밤색 머리를 늘어뜨렸던 이 젊은이는 한때 교황들과 제왕들의 주의를 끌었다. 그 중 몇몇은 그를 영웅으로 생각했으며 다른 이들은 이단으로 여겼다.

이태리 북부 봉건 귀족의 아들인 Giovanni Pico della Mirandola 백작은 1463년에 태어났다. 10세 때부터 볼로냐에서 교회법을 공부하는 특권을 누렸다. 이어서 고전적인 학구적 교육을 받았다. 파두아, 로마, 파리의 가장 좋은 학교에서 라틴어, 그리스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배웠다. 인식의 지평을 넗히기 위해 그는 Ibn Rushd, 아랍과 히브리 학자들에 관해서도 공부했다. 

가장 유명한 저작 De Hominis Dignitate (인간 존엄에 관한 연설 Oration on the Dignity of Man)에서 인문주의적 헌신을 그리스 고전적 격언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와 자신의 이슬람 학문에 결합시켰다. "나는 아라비아 성직자들의 기록에서 사라센인 압달라가 세상의 어느 곳이 가장 경이로운가 하는 질문을 받고 '인간보다 더 경이로운 것은 없다'고 대답했다는 것을 읽었다."

Pico는 인문주의자로서의 명성 덕분에 후원자 로렌초의 총애를 받기는 했지만, 1486년에 연설(Oration)의 이슬람에서 이교 숭배 신앙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범위의 신앙에 대해 공감이 가는 서술로 바티칸의 심경을 건드렸다. Pico가 감옥에 가지 않은 것은 오직 로렌초의 힘 덕분이었다. 로렌초가 죽은 1년 뒤인 1493년에 Pico는 공식적으로 사면되었다. 그는(혹은 Alemanno를 시켜) 같은 해에 Hayy ibn Yaqzan을 처음 라틴어로 번역했다.

동시대에 이 원본을 난필로 필사한 것이 세월이 흐름에 따라 누렇게 변색되어 제노아대학교에 현재 남아 있다. 나는 다음날 이 학교를 찾았다. 부스러질 듯한 양피지 페이지를 조심스럽게 넘기던 나는 여러 문장의 서두에서 "Dixit Abubacher" (Abubacer [Ibn Tufayl]가 말했다)라는 라틴어 문구를 보았다. 

영국의 Hayy Ibn Yaqzan의 첫 번역본은 1671년에 발간되었다. 아들 Edward Pococke가 1630년대에 알레포에서 아버지가 입수한 아랍어판을 이용해 이 라틴어와 아랍어가 함께 실린 책을 냈다. 영문판은 Defoe의 Crusoe가 나오기 16년 전인 1703년에 나왔다.
Bodleian library / Tom Verde 
영국의 Hayy Ibn Yaqzan의 첫 번역본은 1671년에 발간되었다. 아들 Edward Pococke가 1630년대에 알레포에서 아버지가 입수한 아랍어판을 이용해 이 라틴어와 아랍어가 함께 실린 책을 냈다. 영문판은 Defoe의 Crusoe가 나오기 16년 전인 1703년에 나왔다.

후에 나는 중세 인문주의 라틴 문학 교수인 Stefano Pittaluga의 사무실에 들렀다. 그는 Pico가Hayy ibn Yaqzan 같은 책을 읽고 과학적이면서도 신비적인 신플라톤 철학에 결합시키고 싶었다고 한다. 인간의 지식, 창의력, 직관이 중심이었던 시대와 어울리는 일이다.

"15세기 후반에 인간과학(sapientistic) 문헌에 대한 강렬한 관심이 일어났다."고 Pittaluga는 말했다. "모든 인문주의자 중 Pico는 카발라 또는 신비주의와 기독교의 연결점을 찾는 데 가장 관심이 있었떤 사람이다."

Alemanno가 이곳에 들어갔다. 카발라의 권위자인 그는 또한 Hayy ibn Yaqzan의 Narboni의 판에 "초주석(supercommentary, 주석에 주석을 단 것)"을 달기도 했다. Pico는 이를 라틴어로 번역했다. Alemanno는 이처럼 Hayy에 도취되어 자신의 대작 Hai ha-Olamin (불멸 The Immortal)에서 그 주제와 제목을 차용했다. 이는 아랍과 유대의 과학, 철학을 통해 완벽의 성취 혹은 신과의 합일을 탐구한 작품이다. (책의 자서전 대목에서 그는 자신의 일대기를 7년 주기로 분리해 넣음으로써 Hayy에게 더 경의를 표했다). 

Alemanno의, 따라서 Ibn Tufayl의 영향은 Pico가 창세기에 단 주석 헵타플루스(Heptaplus)에서도 볼 수 있다. 맹렬한 과학적, 영적 성찰을 한 그는 여기에서 인간은 이 세상을 넘어 신성과 다시 만나는 기쁨을 누려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이것이 우리의 보상이다." 그는 천명했다. Ibn Tufayl은 "그 모든 불완전에서...... 우리는 그 자신 유일한 존재인 그분과의 깰 수 없는 합일로 돌아갔다."고 했는데, Alemanno는 그와 같은, 신플라톤 철학적 표현을 쓴 것이다.

Pico가 1494년에 신성과의 재결합을 향해 간 길이 그리 복되지는 못했지만(그를 시기하던 라이벌들이 독살했다는 소문이 있음), 그와 Ibn Tufayl의 영향은 곧 플로랑스와 이태리 반도를 넘어 퍼졌다.

영국의 철학자이자 정치가인 토마스 모어는 Pico가 Hayy에 심취한 것을 과 신, 자연, 사회와 인간의 관계에 대한 이론을 발전시킨 것으로 보았다. 모어의 1516년 작 유토피아에서 유사한 자기계몽적 주제를 발견한 사람들도 있다. 유토피아는 이상적인 문명에 대한 정치적이고 철학적인 이야기로, 모어는 여기서 외부 세계의 부패를 피할 수 있는 고립된 섬을 배경으로 한다. 경험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영국의 프란시스 베이컨도 유토피아 소설 신아틀란티스에서 신화적인 섬을 구상했다. 베이컨은 헵타플루스Hayy 모두에서 종교적으로 헌신적인 사람들이 동시에 순수한 과학적 지식을 추구하는 고립된 사회를 꿈꾸었다. "이 왕국의 바로 중심"은 "지혜의 집(Salomon’s House)"으로, 현대에 연구가 행해지는 대학의 모델이 된 기관으로, 1660년에 영국에서 자연과학 진흥을 위한 런던 왕립학회(Royal Society of London for Improving Natural Knowledge)가 설립되는 것을 촉진했다. 이 학회의 초기 회장이었던 아이작 뉴턴은 그 기조로 Pico가 가장 애독했던 자기계몽서로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의 advisos를 약술한 "Nullius in verba"를 골랐다. 이를 다소 거칠게 번역하면, "그것을 위해서는 그 누구의 말도 필요없다."가 된다.

프랑스에서 1596년에 태어난 합리주의의 아버지 르네 데카르트는 Ibn Tufayl의 사상을 이리저리 뒤적이는 와중에 다음과 같은 자신의 유명한 말을 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한 세대 후에 볼테르는 순진한 낙천주의자 캉디드의 출생지로 에덴을 연상케 하는 천국을 골랐다. 그의 소설 제목 자디그와 같은 이름의 주인공은 과학적 방법의 선구자로서, Hayy와도 닮았다. 이 소설의 구상이 차용한 것은 어느 페르시아 작품의 배경이 된 Serendib으로, 이곳은 스리랑카의 옛 이름이며 Hayy의 섬의 모델이 된 곳이기도 하다.

에스파냐 예수회 철학자 Balthasar Gracian의 우화적 소설 Criticon (비판)은 1650년대 중반에 출간되었다. 이 책의 주인공은 "야수"에게 양육되며 처음 반생을 인간 문명과 동떨어진 섬의 동굴에서 보낸다. 다음 반생에서는 인간 사회가 재미없음을 알고 대신 자연에 귀의해 신의 진리를 찾는다. 현대 비평가들이 Gracian이 어느 정도로 Hayy를 이용했는가를 토론한 데 반해, 1681년에 Criticon을 번역한 영국 역사가 Paul Rycaut은 "이 책의 작가는 그 상상을 Ebn Tophail이 아랍어로 쓴 Hai Ebn Yakdhan에서 끌어왔을 것이다"라고 했다. (19세기 독일 철학자 아르투르 쇼펜하우어는 Criticon의 영향력을 크게 평가하여, 프리디리히 니체와 알베르 카뮈에게 그 영향을 전했다).

"이 사상가들이 다소 다를지라도," Attar는 평했다. "이들이...... 기초적 공식을 이어받았음은 틀림없다." Ibn Tufayl에서 후일 유럽의 계몽의 시기라 불리는 때에까지 말이다. 임마누엘 칸트가 쓴 대로 인류가 Hayy와 같이 "스스로의 이해에 의지하는 용기와 결단"을 얻은 시대이다. 또 Daniel Defoe의 시대이기도 하다.

상업적으로, 사회적으로 야망이 있었던 Daniel Defoe에게 정말 Ibn Tufayl 소설의 사본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오프라 실렉션과 맞먹는 계몽의 시대의 책에 친숙하기는 했을 것이다.
Universal history archive / Bridgeman art library
상업적으로, 사회적으로 야망이 있었던 Daniel Defoe에게 정말 Ibn Tufayl 소설의 사본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오프라 실렉션과 맞먹는 계몽의 시대의 책에 친숙하기는 했을 것이다.

Defoe는 신사는 아니었지만 신사가 되고자 했다. 1660년경 런던 푸주한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분명치 않은 귀족 조상이 있다고 주장하며 후에 성에 "De"를 넣었다. Foe 가문은 "반대자"들이었다. 이들은 청교도 또는 "비국교도"인 프로테스탄트로 영국 국교회의 계급 질서와 교리를 거부했다. 이것으로 인해 Defoe는 더욱 외톨이가 되었다. 상인으로서 실패한 뒤(그의 책은 수지가 맞지 않았다), 기자로서도 신통치 못했지만(급진적인 기사 때문에 감옥에 갇혔다), (자유당, 보수당) 양쪽의 스파이로서는 성공한 그는 50대 후반에 소설을 썼다. 사회적으로 성공하고자 하는 야망이 있었던데다가 부양할 대가족까지 딸렸던 그는 런던 교외 Stoke Newington에 저택을 샀다. 이곳은 신앙 때문에 시내에 재산을 소유할 수 없는 부유한 비국교도들이 많이 찾는 곳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처녀작이자 가장 유명한 소설을 썼다. 구성은 이렇다. 열대 섬에 표착한 주인공이 고립과 직관을 통해 종교적 진리에 이른다.

내가 찾았을 때 그 집은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들어선 19세기 벽돌 주택과 High Street의 한켠의 가게들이 "Defoe 거리"로 통하고 있다. 그가 이곳에 남긴 유일한 다른 연결은 영국의 유산이 된 푸른 명판이다. 길 건너편에 있는 그의 이름을 딴 술집과 타이어가게는 상관이 없다.

1719년에 발간한 Robinson Crusoe를 썼을 때는 시골이었지만 Defoe는 가까운 런던 소식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반대자들과 보수 국교도들의 분쟁에 관한 소문이 주를 이루었다. 논쟁을 불러일으킨 1707년의 연방법에 이어 그때까지 분리되었던 영국 정부와 스코틀랜드가 통합되었다(Defoe가 기자일 때 기사로 다룬 이야기). 또다른 논쟁점은 남부와 동부 유럽을 정치, 경제적으로 잠식하던 오스만 제국을 향한 영국 군주와 상인들의 경계였다. 이들은 이스탄불과 외교, 무역 관계를 유지하기 바랐다. 이 라이벌 제국에서 온 커피숍이 그 근래 상업적으로 성공하는데 이곳에서 이런 문제에 대해 활발한 토론이 전개되었다.

"오늘날과 같이 가서 커피를 마시기는 했지만 주로 다른 이들과 이야기하고 신문을 보았다." The Coffee House의 저자인 Markan Ellis는 말했다. Queen Mary University of London의 영문과의 문화역사와 18세기 연구 교수이다. "커피숍은 또한 도시의 상업 기능에 아주 중요했다. 예를 들어 커피숍으로 시작한 Lloyd’s of London은 주인 Edward Lloyd가 해운, 해상보험에 관심이 있던 고객들을 위해 배가 입항하는 소식을 공시했다. 1683년에 비엔나를 포위한 것도 오스만 제국의 소식에 귀를 기울인 이유였다. 그랬던지라 사람들이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어디까지 확장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Ellis는 내게 제국이 어떻게 그렇게 부유해지고 강력해졌는지도 알고 싶어한 주제라고 했다.

그는 "지정학적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고 했다. "사람들은 이슬람, 이슬람의 지식과 더불어 오스만을 더 많이 알려고 했다."

1671년에 옥스포드에서 발간된 책이 그러한 지식 단편 중 하나이다. 라틴어와 아랍어의 대면 페이지로 된 이 책의 복잡한 제목을 밝히자면(일부분만) Philosophus autodidacticus, sive, Epistola Abi Jaafar ebn Tophail de Hai ebn Yokdhan (스스로 배운 철학자 또는 Abu Ja’afar Ibn Tufayl가 Hayy Ibn Yaqzan을 염려하는 책)이다. 부제가 모든 것을 말해 준다. "인간 이성이 의미하는 바에 의해 서술되는 것을 담고 있는 것은 열등한 명상에서 우월한 지식으로 올라갈 수 있다."

학자로서만큼이나 출판인으로서도 유능했던 아버지 Edward Pococke는 아들의 번역본을 교육받은 유럽 엘리트 모두가 이 책을 읽게 하여 베스트셀러로 만들었다.
Bodleian library
학자로서만큼이나 출판인으로서도 유능했던 아버지 Edward Pococke는 아들의 번역본을 교육받은 유럽 엘리트 모두가 이 책을 읽게 하여 베스트셀러로 만들었다.

Edward Pococke가 번역한 이 책을 존경받는 옥스포드의 아랍 전문가인 그 아버지가 감수했다. 아버지 Pococke는 알레포에서 Hayy의 14세기 아랍 사본을 입수했는데 그때가 40년 전이었었다. 이때 그는 엘리자베스 1세가 세운 영국의 무역 기지 Levant Company에서 목사로 일했다. Pococke는 아랍어로 funduq라고 한 회사의 현지 본부에 살았다. 그곳에는 "목사들이 연구, 탐사, 원고와 다른 골동품 수집에 헌신할 많은 시간을 가진 상당히 큰 도서관......이 있었다." 학자 Alastair Hamilton은 수필 "The English Interest in the Arabic-Speaking Christians"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실 Hamilton이 본 대로 "영국은 아랍, 시리아의 원고 중 알레포에서 집필된 것을 먼저 수집했다."

Pococke는 자신의 아랍 문학에 대한 입맛을 만족시키면서 Hayy와 다른 책들을 친구들과 후원자 William Laud, 후에 그를 옥스포드 아랍과 학장에 임명한 인물이자 켄터배리 대주교의 간청을 받고 입수했다. Laud는 1631년에 Pococke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리스어로 썼든지 동방 언어로 썼던지 그런 원고 중 자네 생각에 대학 도서관에 가장 맞는 것"을 달라고 했다.

Laud가 마음에 두었던 대학 도서관은 Oxford의 Bodleian으로, Pococke의 기증물이 오늘날의 도서관에도 중동과 이슬람 원고 자료를 풍성하게 하고 있다. 그곳의 큐레이터 Alasdair Watson은 친절히도 아들 Pococke의 첫 판과 함께 Hayy의 중세 판을 찾아서 보여주었다. 14세기 원본의 필체는 세심했으나 후대 독자들이 실수로 얼룩을 남기고 아버지 Pococke가 노트를 하여 여기저기가 지저분했다. 

Watson은 "아무렇게나 쓴 것이 아닌 훌륭하고 아름다운 원고"라고 평했다. Philosophus autodidacticus도 왼쪽 라틴어 페이지와 오른쪽 아랍어 페이지가 잘 짝을 맞추어 훌륭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그 언어들이 대표하는 중세 세계의 문화 지역이 그렇게 나타난 듯했다. 

아랍 문헌은 Pocockes와 같은 사람들이 동과 서를 연결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아랍 문헌은 Pocockes와 같은 사람들이 동과 서를 연결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Laud의 요청이 보여주는 대로 아랍의 문헌과 지식에 대한 요구는 이미 많아졌다. 학자 G. A. Russell은 The ‘Arabick’ Interest of the Natural Philosophers in Seventeenth-Century England에서 성경이 "교리의 근원"으로서 우선됨을 이야기하여 프로테스탄트 중에서 "신학적 해석에 있어 문헌의 정확성이 중요함"을 알렸다. 히브리어와 더불어 문법적, 어휘학적으로 가까운 아랍어까지 읽을 줄 알아야 함을 가리킨 것이다. 은둔한 학자들에게는 중세에 아랍어로 번역된 고대 그리스 의학, 과학, 기술 문헌도 중요했다. 마지막으로 알레포, 이스탄불, 카이로와 다른 중동 지역에 주재한 Levant Company가 증명한 대로, 아랍어에 능통하다는 것은 사업 하나만 보더라도 좋은 것이었다. 한 세대 후에 케임브리지의 아랍과의 다섯 번째 학장이자 아버지 Pococke의 제자였던 Simon Ockley는 일갈했다. "학식을 추구한다고 평판이 난 우리나라에 이런 연구에 종사하는 학자가 이토록 없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Hayy ibn Yaqzan가 영국에서 발간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학자로서만큼이나 출판인으로서도 유능했던 Pococke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아들의 책을 동료 동양학자들에게 돌렸다. 그리고 왕립학회 회원들과 해외의 과학자들에게도 보냈다.

Defoe는 1719년에 책을 발간하면서 Crusoe 자신이 저자라고 했다. Defoe는 그에 이어 아래 왼쪽의 책 두 권을 더 저술해 삼부작으로 만들었다. 
De Agostini picture library / Bridgeman art library
Defoe는 1719년에 책을 발간하면서 Crusoe 자신이 저자라고 했다. Defoe는 그에 이어 아래 왼쪽의 책 두 권을 더 저술해 삼부작으로 만들었다. 

작품은 히트했다. 파리 주재 영국 대사 비서관은 Pococke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사람들에게 더 나누어 줄 책이 없음을 한탄했다. 옥스포드에 오는 학자들은 Pococke에게 동료들과 해외에서 그 소문을 들은 문호들을 위해 책을 더 달라고 청했다. Pococke 문하에서 공부하던 스위스 학자는 "책 소문을 듣고...... 급하게 기대하는" 프랑스 주교에게 주려고 책을 부탁했다고 Pococke의 전기 작가 Leonard Twell가 말한다.  

1672년에 암스테르담에서 독일어 판이 나오는 것을 비롯해 1701년에는 두 번째 독일어 판이, 이어서 여러 국어로 여러 판본이 나왔다. 합리주의 철학자 바뤼흐 스피노자가 번역가이기도 했다고 추측하는 사람이 많다. 2년 뒤 스코틀랜드인 George Keith가 Pococke의 아랍어-라틴어 판을 이용해 첫 영어 번역본을 내놓았는데 하자가 있었다. Keith는 아랍어 zabya(암사슴)을 "염소 암컷"이라고 번역하는 중대한 실수를 했다. 그에 따라 삽화에서도 Hayy가 염소 젖을 먹는 것으로 나왔다. Attar와 Baroud는 Crusoe가 다른 짐승들 틈에서 염소떼에게 양육되었다는 점을 들어 Defoe가 이 판 중 하나를 이용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독실한 퀘이커 교도인 Keith는 Hayy의 이야기에서 "기독교 원리에 맞는 유익한 것들"을 많이 찾았다고 서문에 적었다. 이는 특히 Ibn Tufayl이 "영적으로 눈이 뜨인 사람의 지식이 풍문과 독서로만 지식을 얻는 사람들의 그것과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 훌륭히 보여준" 것을 가리킨 것이다. Pico부터 Narboni를 거쳐 Ibn Tufayl과 그 지성적 선배들에까지 거슬러올라가는 이 사고 노선은 내적인(혹은 내부적) 빛, 즉 "구원의 빛과 은혜", Keith의 동료 Robert Barclay가 적었듯이 모든 인간 안에서 빛나는 퀘이커 교리와 맥을 같이한다. 초기 퀘이커 강령인 Apology For The True Christian Divinity에서 Barclay는 "아랍어에서 번역된...... 섬에서 혼자 인간과 대화하지 않고 산 Hai Ebn Yokdan이 그렇게 심오한 신의 지식을 얻고 신에 대한 가장 확실한 최고의 지식은 전제한 전제나 연역한 결론이 아닌 인간의 마음이 최고의 지성과 결합할 때 얻는 기쁨에서 나온다는 것을 확인한" 이야기라고 격찬했다.

이야기가 비슷하다는 것을 넘어, Hayy에게서 크루소의 모습이 깊이 각인된 것을 볼 수 있다.Defoe는 퀘이커 교도는 아니었지만 Stoke Newington에서 조금 떨어진 Newington Green에서 퀘이커 학교에 다녔다. 그리고 친구와 이웃 중에 퀘이커 교도가 있었다. 그가 Keith의 Hayy 번역본을 읽지 않았다면, 가톨릭 교구목사 George Ashwell의 영문 번역본이나 Robinson Crusoe가 나오기 11년 전인 1708년에 발간된 Ockley의 작품에는 친숙했을 것이다. 아들 Pococke의 원작에서 중요한 부제를 말 그대로 끌어다 온 Ockley의 책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무슨 방법을 통하든지, 단지 자연의 빛으로든지, 인간 이성의 진보.....는 자연적이고도 초자연적인 것들, 자세히 말하면 신을 인지하는 것이다."

이는 퀘이커 교리일 뿐만 아니라 시대의 중요한 문제를 논한 계몽주의의 중요 원리이기도 했다. 존재의 성격과 사회에서의 종교의 역할에 관한 합리적 질문이었다. 아들 Pococke의 스승이자 시대의 가자 영향력 있는 철학자였던 존 로크가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을 Philosophus autodidacticus가 나온 같은 해에 쓰기 시작한 것도 놀랍지 않다고 수많은 학자들이 지적한다. 현대 경험주의 역사에서 중요한 자료인 로크의 "Essay"는 Hayy 자신과 같이 인간의 마음을 태어날 때 백지와 같으며 경험이 쌓이면서 점점 발달하는 것으로 보았다. David Hume과 George Berkeley와 같은 후대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철학 이론을 정립할 때 이 책을 참고했다. 

Defoe가 Philosophus autodidacticus를 통해 이러한 사상과 접촉하기는 했지만, 직접 이러한 책을 소장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Nawal Muhammad Hassan, Hayy Bin Yaqzan and Robinson Crusoe: A Study of an Early Arabic Impact on English Literature의 저자는 Rycaut의 Criticon과 다른 Ockley의 제목 A History of the Saracens가 Defoe의 서재에 있었다고 지적한다. 푸주한 아들이 사회에서 인정받고 문예가들과 어깨를 견주고자 열망했음을 생각하면 그가 분명히 오프라 실렉션에 필적하는 계몽주의 시대의 책인 Hayy ibn Yaqzan과 대화할 수 있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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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iam Reese company / abebooks.com
Defoe는 두 권을 더 저술해 삼부작을 만들었다.

말할 것도 없이 그는 생존을 서술한 인기 있는 동시대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었을 것이다. Selkirk의 이야기 외에, 1660년에 실론(스리랑카)에서 억류된 상인 Robert Knox, 17세기에 카리브해 섬으로 표류한 영국 의사 Henry Pitman이 Crusoe의 모델이 되었을 것이다. 이것들로부터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나왔고 실용주의자 Defoe는 그 상업적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Robinson Crusoe가 그렇게 오래 인기를 누리는 데에는 Defoe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무엇인가가 힘을 보탰을 것이다. 사무엘 테일러 콜리지는 Crusoe를 "전반적 인간성의 대표자"라고 했고 루소가 창조한 스스로 배운 에밀은 어릴 때 소설을 통해서만 성장했다. 루소는 Crusoe가 "먼 섬을 보고 인간 영혼의 고독을 생각하기를 권한다"고 했다. 꾸준한 일련의 학구적 업적 중, 명확히 결론을 내리지는 않지만, Defoe가 이용한 주요 참고자료가 있고 대표적인 것이 Ibn Tufayl일 것이다.

HayyRobinson Crusoe의 줄거리가 비슷한 점을 떠나 - 동굴에 살며 짐승 가죽옷을 걸친 Absal/Friday의 두 번째 인격 - Crusoe의 철학적 숙고는 Hayy의 그것을 깊이 반영한다. 자기 혼자 있는 섬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Crusoe는 Hayy와 그 전후의 모든 철학자가 한 질문을 한다.

내가 이렇게 많이 본 땅과 바다는 무엇인가? 어디에서 왔는가? 그리고 나, 야생이든 길들었든, 인간이든 짐승이든 모든 피조물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물론 어느 알 수 없는 힘이 우리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가 땅, 바다, 공기와 하늘을 만들었을 터인데, 그는 누구인가? 자연스럽게 이 모두를 창조한 것은 신이라는 답에 이른다.  

Tom verde Tom Verde는 Saudi Aramco World에 정기적으로 기고한다. 그가 2013년 1월/2월호에 실은 파스타의 역사는 잡지 폴리오 매거진으로부터 목록 내 최우수상을 받았다. 그는 이 기사를 쓰는 데 도움을 준 이태리 관광청, 스위스 관광청, 세비야 관광청, 제노아대학교와 보들리 도서관에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This article appeared on page 2 of the print edition of Saudi Aramco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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