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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가 거의 2백만 명에 달하는 말레이시아 최대 도시이자 수도인 쿠알라룸푸르의 부킷빈탕(Bukit Bintang) 스타워크(“Star” Walk)에 늘어선 쇼핑몰, 음식점, 갤러리 사이로 이 도시의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그 중 상당수는 지난 10년 동안 새로 생긴 것이다. 작가 겸 사진가이자 배우인 Bernice Chauly(43세)는 "지금이 바로 말레이시아의 예술가에겐 최고의 시기"라고 말한다. |
말레이시아는 현재 흥겨운 힙합 리듬에 빠져 있다. 말레이시아 수도 쿠알라룸푸르에서 촬영한 한 힙합 뮤직 비디오에서는 찻집의 중국인과 말레이인, 모스크의 말레이인, 보석 가계의 타밀(Tamil)인 및 시장, 학교, 고층건물, 공원 등에서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Undilah(말레이시아어로 "투표")를 촉구한다. 말레이시아 헌법에 따라 2013년 6월 27일까지 치러야 하는 총선에 앞서 투표율을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된, 세련되고 귀에 잘 들어오는 비당파적인 이 뮤직 비디오는 인종적 다양성과 낙관론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뮤직 비디오의 등장인물 중 한 명인 Nurul Izzah Anwar(32세)는 국회의원으로 아마추어 기타리스트이자 라디오헤드(Radiohead)의 팬이다. 그녀는 전직 부총리인 Anwar Ibrahim의 딸로서 가족의 인맥을 이용해 관용과 공평한 기회라는 공약을 내걸었다. 쿠알라룸푸르의 녹음이 우거진 Mont Kiara 지역에 있는 그녀의 자택을 방문하여 정치 관련 이야기는 하지 않고 현대 예술과 문화계에 관한 대화를 나눴다.
그녀는 2008년 선거로 "표현의 자유가 크게 신장"된 이후 예술 분야가 급성장했다고 설명하면서 이로써 "예술이 해방"되었다고 덧붙였다. "Undilah" 뮤직 비디오는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 프로듀서인 Pete Teo의 작품으로 말레이시아 예술인들이 정치를 다룬 주요한 사례이다. Nurul Izzah은 이 뮤직 비디오가 "유례없이 높은 수준으로 국민을 통합하고 있다"며 놀라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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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에 개관한 말레이시아의 이슬람 예술 박물관(Islamic Arts Museum)은 아시아 최고의 전시관 중 하나이며, 대부분 말레이시아 예술 기관과 마찬가지로 개인 자금으로 운영된다. |
말레이시아 전역, 특히 KL이라고 부르는 쿠알라룸푸르에서 젊은 세대의 미술가, 뮤지션, 작곡가, 배우, 디자이너, 영화인 등이 문화를 새롭게 정의하며 매우 다양한 상상력 넘치는 열정으로 예술계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그 열기는 쉽게 느낄 수 있다. 최근 쿠알라룸푸르 방문에서 난 13일간 영화 촬영 현장 및 패션쇼에 참석하고 예술 작품 전시회, 교향악 콘서트 및 강물 오염에 관한 실험극을 감상하고 밤늦게까지 재즈 클럽에서 공연을 즐긴 다음 100명이 넘는 KL의 예술 및 재정 관련 단체 회원들을 위한 색소폰 연주와 노래가 울려 퍼진 인상적인 파티를 만끽했다.
작가 겸 사진가이자 배우인 Bernice Chauly(43세)는 "지금이 바로 말레이시아의 예술가에겐 최고의 시기"라며 "사람들은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고 자비를 들여서라도 자기 목소리를 내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유명한 말레이시아 배우이자 코미디언인 Jit Murad가 쓴 희곡을 영화화한 "Spilt Gravy on Rice" 촬영 중 점심시간에 Chauly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줄거리는 한 가장을 중심으로 그의 자녀들이 가장이 죽은 뒤에 유산을 관리할 계획을 세우는 내용이다. 형제들 간의 재치 있는 대화가 웃음을 이끌어내지만, 중산층을 지향하는 54년 역사의 의회 민주주의가 부와 권력을 공유하고 민족 다양성을 강점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도 빼놓지 않은 세대 간 갈등에 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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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rul Izzah Anwar(32세)는 인종에 관계없는 균등한 기회와 관용에 관한 공약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2008년의 국가 개혁으로 말레이시아 "예술이 해방"되었고 "유례없이 높은 수준으로 국민을 통합하고 있다"고 말한다. |
국민 대다수가 이슬람교도로 1957년 영국의 식민 지배에서 독립한 말레이시아는 짧은 시간에 놀라운 경제 성장을 이뤘다. 40년 전 말레이시아 국민 절반이 빈곤층이었으며 연간 1인당 국민소득은 미화 260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오늘날 2,800만 명의 거주민 중 4퍼센트만이 빈곤층이며 국제통화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에 따르면 1인당 국민소득은 8,400달러이다. 풍부한 석유 매장량 및 활황세의 제조업 분야와 더불어 논란의 여지가 있는 팜유 농장 개발과 벌목 산업(열대 우림 포함)으로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하지만 첨단 기술 또한 급속히 발전하고 있다. 예를 들어 Intel사의 컴퓨터 전 세계 칩 생산량의 상당 부분이 KL에서 400킬로미터(240mi) 북쪽에 있는 믈라카 해협(Strait of Melaka)의 페낭(Penang)에서 생산되고 있다. 페낭에서 상가 주택에 있는 모스크와 식민 시대의 건축물이 잘 보존된 조지 타운은 2008년 수도에서 남쪽으로 13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항구도시인 멜라카(Melaka)와 함께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최근 몇십 년간 경제가 아무리 성장했다고 하더라도 예술계는 대개 스스로 노력하고 있다. 주로 은행과 소수의 기업 스폰서, 얼마 안 되는 정부 보조금, 50여 명 정도의 주요 개인 예술품 수집가 및 그 무엇보다도 예술계 자체의 아주 고집스러운 열정으로 버텨왔다.
하지만 두드러지게 풍부한 자금 지원을 받는 몇 가지 예외 사례가 있다. 아시아에서 가장 인상적인 컬렉션 중 하나를 보유한 이슬람 예술 박물관(Islamic Arts Museum)은 발전소, 항구, 광산 회사의 재정지원을 받는 Albukhary Foundation이 개인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예술, 도시재정비사업, 환경 및 문화 기업을 장려하는 페낭의 ThinkCity는 말레이시아 정부의 투자 기구인 Khazanah Nasional이 인수했다. 이러한 사례 및 극소수 몇 가지 예를 제외하고 오늘날 예술과 디자인 업계에서 어려움을 이겨낸 대다수 성공 사례는 대개가 얼마 안 되는 개인 지원금과 많은 개인적인 헌신 속에서 일궈진 것이다.
10년 전, 이제 63세가 된 Raman Krishna의 서점, Silverfish Books에 한 일본 대학의 미국인 교수 친구가 방문했다. "그가 말레이시아 작가가 쓴 책들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는데, 10여 권 정도밖에 찾을 수 없다는 사실에 너무 부끄러워 출판업자가 됐습니다"라고 Raman이 KL에서 부유한 지역인 Bangsar에 있는 작은 서점에서 말해주었다.
Raman이 꼭 해보고 싶던 것을 실행하기 위해 마음속에 간직했던 이상을 실현했던 일은 그전에도 있었다. 그는 25년 동안 건설 기술자로 일한 후에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결론 내렸다"며 "혼자 간직해왔던 꿈인 서점을 차리는 일을 추진해야겠다고 다짐했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모아둔 돈 중에서 250,000링깃(약 8만 달러)을 투자해 1999년 Silverfish에 서점을 열었다.
출판 사업 역시 직감에 의존한 모험이었다. 그는 신문과 인터넷, 친구들과 고객들을 통해 단편 소설집 출판 계획을 알렸다. 한 달 만에 250여 개나 되는 작품이 들어와 첫 단편집 출간 후에 두 번째 단편집에 넣을 작품도 요청했다. 500개가 넘는 작품이 들어왔다.
"자신을 표현하길 원하는 작가들의 억눌린 욕구가 엄청나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성장 배경에 상관없이 말레이시아 지식인들 사이에선 오랫동안 영어가 공용어로 사용돼왔기 때문에 Raman의 작가들은 영어로 글을 쓰지만, 실제 영어는 말레이시아에서 말레이어와 중국어 다음 세 번째로 많이 사용하는 언어라고 Raman은 말했다.
지금까지 그의 베스트셀러는 Dina Zaman이 쓴 말레이시아 이슬람교도를 재미있고 자세히 탐구한 내용의 I Am Muslim이다. 12,000부는 미국 기준으로는 보잘것없는 성과이지만 "이곳에서 영어로 쓰인 책으로서는 대단한 일"이라고 Raman은 자랑한다. 그리고 그 책이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캠퍼스(University of California at Berkeley)와 시카고 대학교(University of Chicago)에서 수업 교재로 채택되었다며 매우 만족스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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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알라룸푸르의 Bangsar 지역에 있는 Silverfish Books 주인 Raman Krishna는 10년 전 말레이시아 작가의 책을 "10여 권 밖에 찾을 수 없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낀" 후 출판업도 하기로 했다. 그 이후 40여 권에 달하는 말레이시아 작가의 책을 출간하는 데 일조했다. |
10년간 출판 일을 하며 40여 권의 단편집, 소설, 논픽션 등을 내놓은 Raman은 말레이시아 작가들이 더욱 인종에 구애받지 않게 되었다고 믿는다. 그는 인도인, 중국인, 말레이인 작가들이 예전엔 본인의 민족성과 같은 등장인물에 중점을 두었지만, 지금은 민족, 인종, 종교적 장벽을 자연스럽게 넘나든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말레이인 작가 Rumaizah Abu Bakar는 중국인 요리사의 포부와 실패하는 과정을 정확하고 설득력 있게 묘사했다. 이와 비슷한 예로 전직 경찰인 범죄 소설가 Rozlan Mohammad Noor는 자신의 뒤얽힌 이야기들에서 KL 사회의 전 계층을 다뤘다.
Raman은 "나라 전체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인종이나 민족에 따라 구별되길 원치 않습니다. 이젠 단순히 다름을 인정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문학계의 전성기에 발맞춰 영화와 시각 예술계 역시 발전하고 있다. 1990년 무렵 처음으로 영화 감독 일을 시도한 Zarul Albakri는 첫 시도 후에 중단했다. 그는 "전적으로 인재가 부족했습니다"라고 당시를 회상한다. "하지만 지금은 세대가 바뀌고 배우, 카메라맨, 세트 디자이너, 기술 담당자 등 인재도 많이 있다"고 이 52세의 영화화 제작자는 기쁘게 말한다. 그는 현재 자신의 동생 Zahim(48세)이 감독을 맡은 영화 "Spilt Gravy on Rice"를 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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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품 수집가이자 전직 외교관인 말레이시아 국립 미술관(Malaysian National Gallery) 관장인 Yusof Ahmad는 처음 방문하는 관람객들을 위한 행사와 전문적인 쇼 모두를 제공하는 미술관의 이중 전시 전략을 감독한다. |
"Zarul"을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이 매우 칭찬하는 "인재"들과 함께 있었다. 불도저가 들어와 아파트를 짓기 위한 작업을 하기 전에 영화의 출연 배우들과 제작진은 Zarul의 집에 모여 이별 파티를 했다. 키가 큰 나무들과 푸르게 우거진 정원으로 둘러싸인 그 집은 KL 중심부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단독주택 중 하나였다. Zahim은 "집의 모습을 기록해 후대에 전하기 위해 영화 일부를 집의 안과 밖에서 촬영했다"며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어머니와 다른 형제들과 상의해 집을 팔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슬픈 일이지만 파티는 가족의 추억을 기념하고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일종의 뉴올리언스 방식의 전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레이시아 국립 시각 예술 갤러리(National Visual Arts Gallery )에서 또 다른 영화감독 U-Wei Bin Haji Sarri를 우연히 만났다. 그곳에선 이 감독의 8개 영화와 관련한 무대 디자인, 소품, 포스터, 스토리보드, 발췌 동영상, 기타 자료 등이 전시 중이었다. 뉴욕의 New School에서 영화를 공부한 U-Wei(57세)의 작품은 뉴욕 영화제(New York Film Festival)와 칸 영화제(Cannes Film Festival)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2011년 7월에 만났을 때, 그는 조셉 콘라드(Joseph Conrad)가 1895년 발표한 데뷔 소설로 1830년대 말레이시아에서 보물을 찾던 네덜란드인에 관한 내용인 Almayer's Folly를 영화화한 그의 최신 작품을 거의 마무리한 상태였다. 우리는 함께 10분짜리 예고편을 봤다. 아름다운 분위기의 영화로 말레이시아에서 촬영했던 다른 영화인 까뜨린느 드뇌브(Catherine Deneuve)가 출연한 "인도차이나(Indochine)"의 장면들이 생각났다.
U-Wei의 영화에 아랍 상인들과 말레이인들이 잔잔히 흘러가는 정글의 강에 있는 범선에서 영국의 해군들과 충돌하는 장면이 있다. "정말 어려웠던 장면이었다"라고 웃으며 당시를 회상했다. "배를 완벽히 새로 만들었는데, 믿을지 모르겠지만 강가로 옮길 땐 제가 직접 밧줄을 잡아끌었습니다."
그 후엔 국립 갤러리 관장인 Yusof Ahmad를 인터뷰했다. 예술작품 수집가이자 전직 외교관인 Ahmad는 갤러리에 처음 오는 사람들을 위한 혁신적인 전시회를 계속해서 소개했다. "국립 갤러리는 1958년에 세워져 이 나라 만큼이나 오래됐지만, 1년 전 제가 임명되었을 땐 제 친구 중에 갤러리가 어디 있는지조차 모르는 친구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변화가 필요했습니다"라고 Yusof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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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Bayu Utomo Radjikin이 "순수하게 우리 작품을 홍보할 목적"으로 1989년에 설립했다고 말하는 Matahati 갤러리는 현재 국외의 말레이시아 작가와 말레이시아에 있는 동남아 작가들을 위한 작가 거주(artist-in-residence) 프로그램의 자금 지원에 도움을 줄 수 있을 정도로 번창하고 있다. |
박물관 관장은 이중 전략을 취했다. 학부모와 아이들, 라마단과 신앙심 같은 포괄적이고 대중적인 주제를 기반으로 한 대중이 좋아하는 행사와 U-Wei 감독의 영화 전시회 등 예술 전문가들을 위한 다소 전문적인 전시회도 개최했다. 지금까지 이중 전략은 성공적인 듯하다.
"엄마와 아이를 위한 쇼에 갤러리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매우 많이 왔습니다. 갤러리 역사상 가장 많은 관람객이 왔던 전시회였습니다"라고 Yusof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국립 갤러리가 기대와 노력만큼 잘 알려지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인재가 부족한 이유로 그런 것은 아니다. 말레이시아엔 예술가와 개인 갤러리가 넘쳐나고 있다.
Valentine Willie는 말레이시아는 물론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선구적인 미술품 딜러 중 한 명으로, 쿠알라룸푸르, 싱가포르, 인도네시아의 요그야카르타(Yogyakarta), 필리핀의 마닐라에 있는 갤러리에서 큐레이터를 맡고 있다. 그는 보르네오 섬(Borneo) 인간 사냥꾼의 증손자로 그의 삶은 과장하지 않더라도 예기치 않은 일의 연속이었다. Willie는 런던에서 교육을 받고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16년 전에 말레이시아로 돌아와 그의 첫 갤러리를 열었다.
"제가 처음 시작했을 땐 KL에 갤러리가 4개 정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단순히 벽을 장식하는 것이 아닌 주요 작품을 판매하는 갤러리만 20개가 넘습니다. 이런 성장은 단지 구매자들의 재산이 몇 배로 증가했다는 것이 아니라 소양이 깊어졌다는 것을 나타냅니다"라고 Willie는 말한다.
Willie는 말레이시아가 수백 년간 유지해 온 무역 허브의 지위를 미적인 혜택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형이 동남아시아를 규정합니다"라고 Bangsar 갤러리 옆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Willie가 말했다. "바다 가운데 있는 작은 섬 국가는 사람들이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어차피 지킬 수 없다면 노력해도 소용없습니다. 차라리 반갑게 맞이해 원하는 것은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버리는 것이 낫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오랜 정서였습니다. 모두를 환영하고 외국의 영향을 받아들여 우리만의 예술과 문화를 만들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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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가 바뀌었고 인재도 많아졌다"고 영화 제작자인 Zarul Albakri(왼쪽)은 말한다. 그의 최근 작품인 "Spilt Gravy on Rice"는 가족에 관한 영화로 세대 간 갈등은 말레이시아 문화를 상징한다. 그의 스튜디오에서 동료 제작자 A. Samad Hassan과 이야기하고 있다. |
Willie는 별 어려움 없이 군침을 돌게 하는 다양하면서도 세 부분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만들어낸 말레이시아의 맛있는 요리가 자신이 주장하는 핵심에 대한 완벽한 예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김이 나면서 깔끔한 맛의 중국 남부 요리와 말레이 음식인 기름진 코코넛 요리에 인도 향신료를 추가한 것을 맛볼 수 있다"고 말해 우리는 배고파졌다.
차로 몇 분 거리의 교외 지역 Petaling Jaya에 있는 또 다른 갤러리 소유주는 이런 수용적인 접근 방식을 한 단계 더 끌고 나간다. 마찬가지로 영국에서 교육받은 변호사 출신 미술품 중개인인 Shalini Ganendra는 미술, 도자기, 사진, 직물, 디자인계의 국제적 권위자들이 현지 예술가, 큐레이터, 수집가, 학생 등과 의견과 전문 지식을 공유하는 강의 시리즈를 시작했다. 동양과 서양의 문화적 다리를 육성한다는 매우 긍정적인 효과에도, Ganendra는 어느 정도의 위험은 있다고 인정한다.
"말레이시아 예술가들이 극복해야 할 문제는 과도하게 서양의 것을 받아들이거나 서양 스타일을 모방하지 않는 것"이라고 그녀는 경고한다. Willie도 그녀가 걱정하는 것에 공감한다. "말레이시아 예술가들은 자신감이 부족합니다. 누가 훌륭하고 누가 훌륭하지 않은가는 본인들의 기준이 아닌 서양 사회가 결정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그녀는 말한다.
실제 수십 명의 신인 예술가와 자신들의 행운을 공유할 만큼 자신감 있어 보이는 예술가들 단체에 신호를 준다. 1989년에 말레이시아의 가장 큰 대학인 Universiti Teknologi mara 졸업생 5명이 모여 말레이어로 "영혼의 눈(eyes of the soul)"이라는 뜻의 Matahati를 결성했다.
"우리는 순수하게 작품을 알리는 것을 목적으로 모였습니다"라고 Bayu Utomo Radjikin(42세)이 말한다. 쿠알라룸푸르 Ampang 지역의 혼잡한 거리에 있는 인쇄소 위의 2개 층을 사용한 House of Matahati 갤러리 개장을 앞두고 미술 전공 학생 자원봉사자들이 작품을 진열하고 있다. 10년 동안 연극, 영화, TV 프로그램 세트장을 그리며 추가로 소득을 올린 끝에 충분히 기반을 잡게 되자, 그들은 젊은 세대에게 무언가를 돌려주고 진행 중인 범아시아 예술 네트워크를 만들기로 했다.
Matahati는 말레이시아의 신인 예술가들이 인도네시아 Yogyakarta와 필리핀 마닐라 등에 가는 경비를 지급하는 것 말고도, 갤러리 수입 일부를 다른 도시의 신인 예술가들이 KL에서 한 달간 머물 수 있게 하는 데 사용한다. 또한 이 단체는 말레이시아 예술인들에게 스튜디오를 제공하고, 이들에게 갤러리 소유주와 수집가를 소개해주고, 작품을 전시해주기도 한다. 멀리는 브라질과 일본의 예술가들도 거주 프로그램에 초대해 이들이 현지 화가와 조각가들과 교류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말레이시아 예술가들을 학교로 파견해 학생들과의 공동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현대 예술을 학생들에게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후원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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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는 모두 녹아 용해된 냄비 요리보단 샐러드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라고 Universiti Sains Malaysia 교수이자 작곡가인 Johan Othman은 말한다. "상추, 토마토, 그 밖에 다양한 재료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재료가 혼합되지 않고 따로 떨어집니다." |
Matahati의 점진적 성공과 비교해 20대의 젊은 디자이너들로 구성된 Ultra는 급부상하고 있는 사업인 재생 재료를 사용하는 "윤리적 패션"에 파문을 일으키며 순식간에 돌풍을 몰고 왔다. 2009년에 상표를 출시하고 불과 3년 만에 Ultra는 2011년 런던의 윤리적 패션 포럼(Ethical Fashion Forum)에서 혁신상을 받고 파리 패션계를 놀라게 했다. 유럽에서 찬사를 받았지만, 우아한 미니멀리즘 스타일은 완전히 말레이시아적이다.
이 회사의 수석 디자이너 Tengku Syahmi(22세)를 Publika의 전시와 행사 전용의 새로운 공간인 MAP에서 열린 떠오르는 패션 디자이너들의 패션쇼에서 만났다. Publika는 KL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진 Hartamas지역에 위치한 다용도 복합건물로 아파트, 갤러리, 음식점, 상점, 사무실 등이 들어서 있다. 모델들이 무대에 등장하면서 들리는 테크노 음악 소리 때문에 Syahmi의 말을 놓치지 않으려고 긴장하고 있던 나는 다음 날 디자인 스튜디오에 오라는 초대를 받고 바로 수락했다.
Ultra의 작업장은 MAP 아래층에 있었다. Ultra의 공동 창업자 Anita Hawkins는 내가 벽에 붙여진 스케치들을 둘러보자 "다음 컬렉션 디자인은 너무 자세히 보지 말아주세요"라며 농담 삼아 말했다. "그 디자인들은 회사 기밀이에요." 그러나 전혀 화려하지 않은 작업장은 4-5명의 디자이너들이 초등학교 교실 크기만 한 공간에서 테이블 위로 허리를 구부리고 작업하고 있었으며 매우 비좁아 그 스케치들을 확실하게 피할 순 없었다. 그림은 말 그대로 벽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Hawkins(26세)가 "이것 만져보세요"라고 말하며 드레스, 코트, 외투 등이 걸린 행거에 있는 모자 달린 흰색 드레스를 만져보게 해주었다. 벨벳 느낌이 났다. 그녀는 "목재 펄프로 만든 원단이라고 전혀 생각 못했지요?"라고 씩 웃으며 말했다. 정확히 맞췄다. 목재 펄프라고는 전혀 생각 못했다.
그녀는 세련된 검정 옷을 들어 올리며 그 옷의 원단 재료는 무엇 같으냐고 물었다. 내가 놀라워하는 모습을 즐기며 "재생 페트병 뚜껑"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런데 어떻게 모직 느낌이 나는지 물었다. "그것도 우리 기밀입니다"라고 그녀가 대답했다.
Ultra와 다른 윤리적 패션 상표의 목적은 낭비하는 소비문화에 반격하고, 재생된 지속 가능한 재료를 사용해서도 멋진 스타일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자신의 소비 내용을 좀 더 자세히 파악하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만 구매하길 바랍니다"라고 Hawkins은 단호하게 말한다. 마치 마케팅 이론 같기도 하다. 고객이 덜 구매하지 않을까 걱정되지 않느냐고 내가 물었다. "어쩌면요, 하지만 고객이 좋은 품질의 제품을 적은 수량이라도 더 높은 가격에 구매할 의향이 있으면 그래도 수익을 낼 수 있습니다"라고 그녀가 대답했다. 그리고 실제로 Hawkins와 이야기를 나눈 지 몇 개월 후에 Ultra는 제작을 모두 멈추고(적어도 당분간은), 대신 다운로드 해서 손수 만드는 옷에 집중했다. Hawkins와 다른 디자이너들은 영국과 다른 나라의 학교들을 돌며 재생 가능한 패션과 지속 가능한 디자인에 대한 지지를 구했다.
런던, 파리, 상하이 등 세계 패션 중심지를 돌며 직접 본인의 창작물을 홍보하는 Ultra의 디자이너처럼 신세대 미술가, 작가, 뮤지션, 작곡가, 댄서들은 해외로 이주한 다음 말레이시아로 돌아와 자국의 문화 지평을 넓히는 지속적인 패턴을 따르고 있다.
"역사적으로 말레이시아는 국제 무역이든 향신료의 이동 경로든 항상 일종의 교차로 역할을 했습니다"라고 작곡가이자 인터넷 동영상 프로그램 제작자인 Hardesh Singh(35세)는 말한다. "사람들은 교환할 물건을 찾아 떠나고 새로운 지식과 문화를 갖고 돌아옵니다. 그것은 잠시 외국에 나갔다가 방랑벽이 누그러지면 돌아오는 우리의 문화적 DNA에 새겨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얻은 씨를 종류와 상관없이 가져와 고국에 뿌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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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의 변호사 출신으로 선구적인 예술품 중개인이자 보르네오 섬 인간 사냥꾼의 증손자인 Valentine Willie는 현재 4개 나라에서 갤러리를 운영 중이다. 그의 갤러리와 다른 20여 개 갤러리들의 성장은 "깊어진 소양"을 나타낸다고 그는 말한다. |
공교롭게도 Singh와 난 스타벅스에서 프라푸치노와 저지방 녹차 라테를 마시며 문화간 교류를 논하고 있다. (스타벅스 역시 말레이시아에서 기꺼이 받아들인 외부의 것 중 하나이다.) 그는 음악에 대한 열정이 대단해, 통신 공학 학위를 받고 대학을 졸업한 후 1990년대 후반에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해 인도 음악 라가(raga)를 공부했다. 2001년에 KL로 돌아온 Singh는 영화 음악 작곡을 시작했고, 지금은 레코딩 스튜디오와 영화 촬영용 방음 스튜디오, 광고음악부터 전위적 콘서트 음악까지 모든 종류의 음악을 뽑아내는 디지털 제작팀을 관리한다. 그의 모험 중 하나인 웹 동영상 채널 네트워크의 목적은 정부의 통제를 받는 텔레비전 방송을 뛰어넘어 더욱 독립적인 매체가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언더그라운드 밴드와 함께 인터넷 방송 중에서 미국의 "존 스튜어트의 데일리 쇼(The Daily Show with Jon Stewart)"와 비슷한 정치적 풍자 프로그램으로 자유로운 인터뷰 내용이 들어가고, 31세의 배우 겸 정치 평론가 Fahmi Fadzil이 공동진행하는 이 프로그램은 얼마 안 되는 신선한 방송 시간을 선사한다.
Singh는 말레이시아 음악이 국외에선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안타까워한다. "이렇게 다양성이 잘 녹아있는 문화에서 기대할만한 말레이시아 특유의 소리가 없습니다. 뚜렷한 소리를 개발하는 데 태국이나 필리핀만큼 성공적이지 못했고, 아프리카와 브라질과 비교해서도 확실히 많이 뒤처져 있습니다."
그는 두드러지는 예외 사례가 현대 클래식 음악 작곡이라고 덧붙이며 표정이 밝아진다. "독일, 영국, 오스트리아 등 여러 나라의 오케스트라에서 의뢰를 받으며 빠르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Singh는 대부분 말레이시아인들이 날로 더해가는 명성에 대해 전혀 몰라 실망스럽기도 하지만, 말레이시아 작곡가 집단은 최근에 본인들의 곡을 널리 알리기 위해 10명의 회원이 작곡한 곡을 CD로 제작했다.
회원 중 한 명인 Johan Othman(42세)은 예일 대학에서 공부했으며, 지금은 Penang에 있는 Universiti Sains Malaysia에서 음악과 작곡을 가르친다. 이슬람교도 말레이인인 Othman은 Penang의 문화적 잡동사니를 본인 작품에서 이용한다. 그는 시인 Attar의 12세기 페르시아 고전 문학 작품 "The Conference of the Birds"를 바탕으로 한 인도인과 중국인 배우가 영어로 노래하는 오페라의 초연 무대를 가졌다. 다른 작곡가들은 중국의 경극과 힌두의 신화에서 영감을 얻는다. Othman의 다음 오페라는 아직 제목을 정하지 않았지만 힌두 서사시 "The Ramayana"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세계에서 가장 붐비는 항로인 믈라카 해협을 따라 배들이 멀리서 이동하고, Othman은 페낭에서 유서깊은 E&O 호텔에서 차를 마시며 정부가 민족 간의 차이를 받아들이기보다 지우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고 그것이 작곡가인 자신의 역할에 영향을 준다고 이야기한다. "음악이나 다른 분야에서 전체적인 말레이시아 정체성이라는 것은 없다"고 그는 주장한다. "몇 가지 정체성이 있고, 각각 고유의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말레이시아는 모두 녹아 용해된 냄비 요리보단 샐러드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며 이미지를 떠올리고는 웃는다. "상추, 토마토, 그 밖에 다양한 재료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재료가 혼합되지 않고 따로 떨어집니다."
페낭은 민족과 종교적 다양성을 휘장처럼 감고 있다. 거주민들은 역사 지구 중심에 있는 약 800미터 정도의 도로인 Jalan Masjid Kapitan Keling 근처에 2개의 모스크 사원, 힌두 사원, 몇 개의 중국 사원, 전통 가옥들, 영국 성공회 교회, 성당이 화합의 거리(Street of Harmony )라고 알려진 것을 기쁘게 여긴다.
해마다 열리는 7월 예술 축제를 조직하는 Joe Sidek은 "우리는 단순히 말레이인, 중국인, 인도인이 아닌 그 이상입니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버마인, 아르메니아인, 타이인, 구자라트인, 유럽인이기도 합니다. 페낭은 17세기부터 국제도시였으며 어떤 인종차별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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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반도의 서쪽 해안에 있는 페낭 섬은 "17세기부터 국제도시였다"고 현지 사업가이자 예술 축제 개최 자원봉사자인 Joe Sidek이 말한다. |
지난 6년 동안 Janet Pillai라는 이름의 미술 교육가는 10-16세 아이들에게 서로 의존하고 있는 공동체를 살펴보고, 전통, 구전 기록, 건축물, 음악, 전설, 공예품 등을 바탕으로 한 공연을 하게 하는 놀랄 만한 시도를 해왔다. 6-8개월에 걸친 기간에 30여 명의 학생은 사람들과 페낭 지역의 역사를 조사한다. Pillai는 나무의 성장에 비유하며 인류학과 공연 예술이 섞인 모험이 "뿌리를 내리고 공동체에서 수분을 빨아들이는 것"과 같다고 요약한다. 난 Pillai와 함께 위로 굽은 사원 지붕, 밝게 채색된 도자기 용, 금을 입힌 조각한 장식물, 안뜰을 지키는 사자상 등이 있는 1906년 지어진 중국식 전통 가옥인 화려한 Khoo Kongsi의 별채에 세운 아주 작은 문화 센터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Pillai 프로젝트의 첫 4개월 동안 아이들은 역사학자와는 말레이어, 영어, 중국어로 된 구전을 기록하고, 사운드 엔지니어와는 노래, 음악, 환경의 주변음 등을 모으고, 건축가와는 지역 고유의 건축물을 조사하고, 전통 인형술사와 인형을 만들고, 전문 공예가와 나무 조각 등을 하며 조사를 한다. 조사 단계가 끝나면 글을 쓰고, 구전 기록을 바탕으로 멜로디를 작곡하고 가사를 쓰고, 세트를 만들고, 의상을 디자인하며 공연을 만들어나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이들 자신의 문화를 공동체에 반영하고, 본인의 배경과의 관계를 다지며 공동체에 관한 몇 가지 공연을 실행한다.
Pillai는 "학생들이 전통을 현대화하는 것이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고대 전설을 만화책이나 비디오 게임으로 전환하거나, 가짜 500,000링깃 지폐나 종이 iPad 또는 헝가리 유령 축제(Hungry Ghost festival) 기간에 영혼을 달래기 위해 태우는 의식에 사용할 선물을 제공한다. Pillai는 해당 지역에서 어린이 극장에 관한 관심을 높이는 데 도움을 주었고, 이와 유사한 프로그램이 태국,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필리핀에서도 진행 중이다.
Cannon Street에 있는 Pillai의 사무실 건너편에서 Narelle McMurtrie의 카페/공예품점/미술 갤러리에 들러 Narelle와 음료수를 마셨다. 26년 전 시드니에서 말레이시아로 이주한 이후, 이 열정적인 호주인은 페낭에서 비행기로 30분 거리에 있는 Langkawi Island에서 상가 주택 몇 개를 여행자 아파트로 개조해 고급 호텔 2개를 개업했다. 호텔 수익 대부분은 2004년 섬에 설립한 동물 보호소인 McMurtrie 자금으로 사용하고, 페낭의 건물에서 나는 수익으로 예술인들 거주 자금을 지원한다.
KL과는 달리 페낭은 산책하기에 좋아 바로 이 점이 갤러리, 상점, 건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상당한 이점이라고 McMurtrie는 말한다. “어는 정도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덕분에 페낭이 정말 예술로 활기를 띠기 시작했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자신의 창작 욕구를 배출할 온갖 종류의 분출구를 찾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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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페낭의 조지 타운은 빠른 속도로 현대 예술과 말레이시아 전통문화가 혼합된 활기찬 중심지가 되고 있다. |
같은 날 저녁, 오염으로 악명 높은 Prangin 운하를 따라 공연하는 7월 예술 축제의 일부인 “River Project” 야외 공연 리허설에서 그 창작 욕구는 환영과도 같은 유람을 나선다. 페낭의 문화생활에서 내게 꼭 필요한 안내자인 변호사 겸 예술 활동가 Lee Khai와 함께 난 플라스틱병에 담긴 달걀 모양의 물체가 색동의 불빛을 발하며 땅 위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에 놀라 입을 벌린 채 서 있다. 한 여성이 스스로 빛을 받은 외피에서 벗어나 그 플라스틱병을 자신 뒤로 끌어 옮기고 노래하는 사람들은 운하가 막혀버리는 것을 슬퍼하는 노래를 부른다. 다른 배우들은 주위에서 체조 묘기를 선보이고 덮개가 덮인 창고로 들어간다. Lee는 그 창고가 10년 전엔 해산물과 채소를 파는 시장이었다고 말한다. “시에서 어떻게 사용할지 아직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고 투덜대며 짜증스럽게 머리를 흔들었다. 한편 체조 묘기를 선보인 사람들은 시장의 상인이 되어 노래를 부르듯 가격을 외치며 지나간 시절을 재현한다. 한때 삶과 상업이 한창이던 곳이 지금은 텅 빈 폐허가 되었다고 누군가가 읊조린다.
배우들은 관객을 다시 밖으로 이끌어 관객은 한 배우가 냄새 나는 배설물에서 30센티미터 위의 운하 벽을 잡고 마치 등산가처럼 좁은 돌출부를 따라 힘들게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본다. 차마 못 보겠어... 그래도 볼 거야. 벽을 타는 이상한 사람 위로 한 여배우가 몹시 분개하며 열변을 토한다. “수로 동맥이 얼마나 오래 막혀 있어야 섬의 심장이 살 수 있습니까?" 마지막으로 한 뮤지션이 PVC 파이프로 만든 긴 디저리두(대나무로 만든 호주 원주민 전통 악기)를 본인의 입술에 갖다 대고 잊을 수 없는 슬픈 곡을 불어 극을 마친다.
Lee가 내 마음을 읽는다. “이건 셰익스피어가 아닌 아지프로(문학, 연극, 음악 등을 이용한 선전 활동)지만, 작품을 보고 받은 자극이 매우 중요합니다"라고 공연이 끝난 후에 흥분하며 말했다. “지금의 오염 상태에 관심을 둬야 합니다. 상황이 정말 심각해요. 예술은 변화를 위해서 정치적이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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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udi Aramco World에 정기적으로 기고하는 것 외에 Richard Covington(richardpeacecovington@gmail.com)은 파리에 거주하면서 Smithsonian, The International Herald Tribune, U.S. News & World Report와 런던 The Sunday Times에 문화, 역사, 과학, 예술 관련 글을 기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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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min Lai(www.jiminlai.com)는 20여 년간 사진 기자로 활동하면서 대부분은 아시아 전역을 돌며 Reuters와 Agence France-Presse의 분쟁, 정치, 스포츠, 일상 생활 관련 기사를 다루었다. 현재 쿠알라룸푸르에 거주하며 편집부, 기업, 개인 의뢰인을 위한 사진을 찍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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