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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Caroline Sto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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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ridgman Art Library |
| 1693년에 프랑스에서 발표된 이 삽화는 그릇으로 커피를 마시는 모습과 커피를 끓일 때 사용하는 ibrik, 커피나뭇가지, 커피콩, 원통형의 '커피 로스팅 기구'를 보여준다. |
에티오피아가 원산지인 커피는 문헌 기록보다 오래전부터 마셨을 가능성이 높다. 커피콩의 껍질로 만든 일종의 차인 al-qahwa al-qishriya 또는 al-qahwa al-bunniya라고 불렀던 커피콩을 추출해 마셨다. 단순히 커피콩을 씹기도 했다. 하지만 16세기 법학자인 al-Jaziri는 에티오피아와 홍해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예멘에서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이 밤 기도 시간에 졸지 않기 위해 처음으로 커피를 사용했다고 말했다. 커피는 확실히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중요한 것이었으며, 커피의 사용은 아라비아 반도로 퍼져 나갔다.
커피가 널리 퍼지자 종교적 관점에서 허용되는지, 커피를 "향정신성"으로 볼 것인지, 건강에 이로운지 아니면 해가 되는지에 관한 논의가 많이 있었다. 1511년에 메카(Makkah)에서 커피를 금지하려는 본격적인 움직임이 시작되었으며 16세기 동안 계속 등장했다. 이에 맞서 종교 및 의학 관련 학자들이 커피 금지를 막기 위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러한 논쟁으로 인해 탄생한 문헌엔 당시 어느 지역에서 커피를 마셨는지에 관한 정보는 거의 없지만, 이런 문헌과 다른 자료를 통해 일찍부터 커피숍이 매우 많았다는 점은 확실히 알 수 있다. 흥미롭게도 커피와 커피숍과 관련하여 아라비아에서 일어났던 논쟁 중 상당수는 1세기 후에 서양에서도 거의 똑같이 재연되었다. 그리고 커피에 관한 의학적 논쟁은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에서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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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스터 비티 도서관 / 브릿지만 미술 도서관 |
| 16세기 또는 17세기 터기의 세밀화 및 캘리그래피 앨범에 있는 연회 그림에서 남자들이 커피를 마시며 주사위 놀이를 하고 있다. |
커피의 맛은 뒤로하고 커피숍이 빠르게 확산된 이유 중 하나는 커피콩을 로스팅하고 분쇄하는 준비 과정이 복잡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커피숍에선 전문가가 준비해 놓은 제품을 살 수 있었다.
1530년경에 Ibn ‘Abd al-Ghaffar는 1500년대 초반부터 여러 도시에 커피숍이 많이 생겼으며, 특히 메카의 대 모스크(Great Mosque)와 카이로의 아즈하르(al-Azhar) 모스크 근처에 많다는 글을 남겼다. 그 이전에 법으로 커피를 금지한 것을 통해서도 커피숍의 존재를 알 수 있지만, 이 글에선 거의 최초로 커피숍을 직접 언급했다. 50년 후에 al-Jaziri는 Umdat al-Safwa fi Hill al-Qahwa(커피 합법성을 위한 방어)라는 책에서 메디나(Madinah) 사람들이 집에서 커피를 마시길 선호한다는 것을 특이한 일인 양 다루었다. 그는 커피가 예멘에서 다른 곳으로 확산된 후, 처음엔 fuqaha(학자), 교사, 학생들이 공공연하게 마셨지만, 곧 일반 대중에게 빠르게 퍼졌다고 설명했다. 또한 커피는 점토로 구운 도기에 마시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홍해 연안의 지다(Jiddah)에선 중국의 자기를 사용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안타깝게도 두 명 모두 커피숍이나 커피숍의 주인에 관해선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지만, 메카에서 커피숍을 운영하던 한 여성이 가게 문을 닫으라는 명령을 받은 후에 가난을 이유로 들며 간청하자 베일로 얼굴을 가리면 계속 운영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얼굴을 가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지나치게 호화롭다거나 사치스럽다는 등의 이유로 커피숍을 비난하는 내용은 없는 것으로 보아 초기의 커피숍들은 오늘날 중동에서 볼 수 있는 소박한 모습의 커피숍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커피가 아라비아 반도 서쪽의 히자즈(Hijaz)에서 북쪽의 시리아로 퍼지면서 이러한 소박한 모습은 변했다. 고급 커피숍들은 자신의 부와 권력을 과시하길 원하는 시장들에게 도시 계획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곧 모든 mahallah(도시의 구)에 한 개 이상의 커피숍이 생겼고, 새로운 시장을 건설할 때 핵심 요소였다. 17세기 카이로에선 나일 강 주변의 새로운 고급 주택 개발지역마다 가장 먼저 완공되는 건물은 커피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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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에 대한 관심과 커피숍이 서구로 확산됐지만, 그 경로는 일반적인 예상과는 달랐다. 커피 맛에 길들여진 레반트의 영국 상인들 덕분에 1650년 이후 기록상 최초의 커피숍이 탄생했으며 옥스퍼드의 커피숍은 아직도 남아있다. 이슬람 세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서양에서도 커피숍은 중요한 사회적 영향을 갖게 되었다. 긴 탁자 한쪽에 벤치나 의자를 여러 개 놓는 방식이 많았으며, 사람 옆 빈자리에 앉는 것이 관례였으므로 사회적 계층에 상관없이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술집에선 계층 구별 없이 어울리거나 조용하게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커피숍은 초기에 1페니만 내면 들어와서 신문을 읽고 다른 사람들의 대화를 듣거나 대부분은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하는 강의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페니 대학”이라고 알려지기도 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정보를 얻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교육의 기회도 제공했다. 사무엘 피프스(Samuel Pepys)는 자신의 일기에서 해군성(Admiralty)에 근무하는 자신에게 유익한 소식을 듣고 당시의 저명한 사람들, 특히 과학자나 학자 등을 만나기 위해 커피숍에 수백 번을 갔다고 언급했다.
런던의 Change Alley(환전 골목)에 있던 커피숍인 Jonathan’s 등은 비즈니스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런던 증권 거래소의 탄생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이와 비슷하게 런던의 보험조합인 로이드(Lloyd’s) 역시 1668년에 커피숍으로 시작하여 해상 무역을 하는 상인들이 특히 많이 찾았다.
유럽 전역에서 커피숍은 거의 모두 레반트 지역의 아르메니아 또는 시리아 출신의 기업가들이 세웠다. 베니스처럼 중동과 활발히 교역했던 도시에 커피숍이 먼저 생기는 것이 당연한 듯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커피숍은 1669년에 브레멘(Bremen) 같은 영국의 상업 식민지가 있는 항구 등을 중심으로 유럽 북부에서 먼저 퍼졌다. 1670년에 미국 최초의 커피숍이 보스턴에 생겼다. 보스턴은 런던과 같이 상업 중심지와 가까웠으며 상인들과 은행가들이 주로 커피숍을 찾았다. 뉴욕도 마찬가지였으며, 나중에 뉴욕의 Merchants’ Coffee House(상인들의 커피숍)엔 월스트리트를 중심으로 비즈니스계 사람들이 자주 모였다.
영국과 미국의 커피숍은 중동 주요 도시에 있는 호화로운 대규모 커피숍과는 달리 실용적이었다. 하지만 유럽 대륙에서의 발전 양상은 조금 달랐다. 아르메니아인들이 처음 세운 파리의 커피숍들은 "신사들과 패션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들어가기에 부끄러운 곳"이었지만, 한 이탈리아 인이 "태피스트리, 대형 유리(거울), 사진, 대리석 탁자, 양초를 꽃은 나뭇가지" 등으로 터키인이나 시리아인의 커피숍 분위기와 비슷하게 꾸민 커피숍을 열자 이러한 인식은 변했다. 이 커피숍은 카페 프로코프(Café Procope)이며 현재는 레스토랑으로 지금도 남아있다. 이 커피숍의 성공으로 유럽 대륙의 많은 카페 주인들이 이 모델을 따라 했다.
중동과 유럽 및 미국의 커피숍엔 또 다른 점이 있었다. 중동의 커피숍은 철저히 남성만 드나들 수 있었으며 거의 커피와 차만 제공했다. 음료만 판매하는 곳은 차와 커피뿐이라도 음식을 판매하는 곳보다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했기 때문에 유럽 서부의 커피숍들은 음식도 판매했다. 만나고 교환하는 장소로서 커피숍과 똑같이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전통적인 커피숍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베니스에서 최초로 알려진 커피숍은 1683년에 산 마르코 광장(Piazza San Marco)에서 개장했지만, 일찍이는 1575년에 베니스에서 살해당한 이슬람 상인의 소유물 중에 커피 제조 도구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베니스인들도 커피숍에 관해 이집트, 오스만 제국 그리고 영국의 지도자들과 같은 의심을 했다. 베니스 정부를 묘사한 내용에서 확실히 알 수 있다.
다음 조언에 따라 베니스인들은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커피숍을 도시 내에 허용하지 않는다. 커피숍은 일반적으로 작은 규모이고, 5~6명이 넘는 사람을 수용할 수 없으며, 앉는 자리는 2~3개를 넘지 않는다. 따라서 앉을 자리가 없는 손님은 커피를 다 마신 후에 바로 커피숍을 떠나야 한다.
그렇지만,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베니스에서의 금지사항도 잘 지켜지지 않았다. 산 마르코 광장의 Florian’s는 아직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카페 중 하나로 몇 년 뒤인 1720년에 문을 열었다. 유럽에서 최초로 여성의 출입을 허용한 곳이며, 바로 그 점 때문에 당국은 선동적인 정치적 논쟁의 장소가 될 가능성이 낮다고 안심했다.
빈의 최초 커피숍은 1683년에 오스만 제국의 공격이 있은 후 얼마 안 있어 생겼다. 오스만 제국의 병사들이 남기고 간 커피콩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있지만(그리고 오스만 제국의 신월기 모양을 따라 크루아상이 발명되었다), 확증되지 않았다. 커피숍 주인은 그리스인 아니면 아르메니아인이었으며, 특히 빈은 오스만의 영향을 받은 유럽 중부의 대부분 지역과 마찬가지로 커피숍이 문화적으로 매우 중요한 장소가 된 도시 중 하나였다. |
이것은 모두 다음과 같은 결과로 나타났다. 커피콩은 물론 중요한 거래 품목이 되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점으로 커피숍의 확산은 처음엔 이슬람 세계에서 그다음은 서양에서 사회적 교류에 혁명을 가져왔다.
커피숍이 등장하기 전엔 친구들과 만나 이야기할 공개적인 장소를 찾기 어려웠다. 바깥은 1년 중 대부분이 너무 덥거나 추웠다. 이슬람 관습은 가정의 사생활을 강조하고, 부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은 집안의 여성을 다른 방에 격리시키지 않고서는 손님을 대접하기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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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edeo Preziosi / Stapleton Collection / Bridgeman Art Library |
| 이스탄불의 커피숍을 그린 이 수채화 작품(1854)은 격식 없는 자리 배치로 다양한 직업과 계층의 사람들이 어울리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작품을 그린 Amede Preziosi는 몰타(Malta)에서 태어나 40년 동안 이스탄불에서 살았다. |
그리고 여행할 때를 제외하고 집 밖에서 식사하는 풍습이 없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평범하게 만날 장소를 제공하는 식당도 없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장소는 물론 모스크였지만 특정 제약 사항이 있었다. 예를 들어 젊은 남성들이 휴식을 취하며 편하게 저녁 시간을 보내거나 종교가 다른 사람들이 사업을 논의하기엔 적합하지 않은 장소였다. 또 다른 장소로는 hammam(목욕탕)이 있었지만, 확실히 심각한 내용을 논하거나 토론하기에 어울리는 곳은 아니었다.
커피숍은 이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커피숍은 집이나 직장이 아닌 곳에서 사람들이 만나 자유롭게 이야기하며, 사회적 인맥을 넓히고, 새로운 사람들을 사귀고, 자신과는 다른 관점에서 세상 돌아가는 일을 배울 수 있는 장소를 제공했다. 초기에 여행자들을 매료시켰던 커피숍에 대한 서양의 수많은 이야기를 통해 정확히 어떤 사람들이 자주 찾았는지 확실히 알기 어렵지만, 장소와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을 것이다. 동네에 있는 작은 규모의 커피숍들은 상대적으로 비슷한 계층의 지역 사람들이나 특정 조합, 민족 또는 직업군의 사람들이 주로 찾았으며, 이스탄불의 해안가에 있는 대규모 커피숍들은 더욱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왔다. 17세기 중반에 프랑스이 여행가 Jean de Thévenot이 특히 주요 도시에서 "종교나 사회적 지위의 구분 없이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커피숍을 찾으며, 누구도 이런 장소에 오는 것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단순히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커피숍에 간다"고 쓴 글은 과장되었을 수도 있지만, 상당 부분은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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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nonymous / Erich Lessing / Art Resource |
| 1856년 작인 이 그림은 터키 안탈리아(Antalya)의 물가에 있는 커피숍을 그린 것으로 오늘날의 야외 카페와 비슷하다. |
자극적이고 향이 좋은 커피와 기분 좋은 분위기, 사람들과의 만남 말고도 커피숍의 매력은 더 있었다. 커피숍에선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손님들이 당시의 엄격한 관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가장 일반적인 커피숍의 배치는 하나의 커다란 방에 벽을 따라 푹신한 벤치가 놓여있는 모습이었으며(개별 테이블과 의자는 서양에서 훨씬 나중에 등장했다), 대형 커피숍엔 중앙에 분수가 있었다. 그런 환경에서 사적인 대화는 불가능했으며, 쉽게 모든 사람이 대화에 참여하고 때로는 폭넓은 관심사의 주제에 관한 논쟁으로 변하기도 했다. 문헌 자료에 커피숍에서 열린 비공식 세미나, 심지어 떠도는 설교자의 설교에 관해 언급한 내용이 있다. 이것 말고도 중요한 방문객만을 위한 위엄 있는 장소의 좌석과는 달리 커피숍의 손님들은 지위나 부와 상관없이 오는 순서대로 앉는 것이 관례였다. 이점은 사회적 속박에 얽매이지 않는 매우 흥미로운 감정을 이끌어냈으며, 오늘날 "소셜 네트워킹"이라고 부르는 매우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선사했다.
그리고 오락의 기능도 있었다. 많은 저자가 언급한 커피숍의 매력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이야기꾼으로 특히 라마단 기간의 밤에 인기가 있었다. (오늘날엔 텔레비전으로 대체되어 보기 어렵다.) 카이로와 시리아를 방문했던 유럽 여행객들은 그곳의 그림자 인형극을 그리 좋게 평가하진 않았지만, 초기 문헌들은 커피숍의 즐거움 중 하나로 음악도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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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사람들만 커피를 마신 것이 아니었다. 소규모 커피숍은 마을에서도 볼 수 있었으며, 지나는 사람이 많은 곳이면 어디든 커피숍이 있었다. 수학자 카르스텐 니부어(Carsten Niebuhr)는 1760년대에 아라비아 반도를 여행하며 지금은 예멘에 있는 Bayt al-Faqih로 가는 길에 들른 커피숍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우리는 마을 근처의 커피숍에서 쉬었다. 아랍인들은 여관처럼 여행자들에게 숙박을 제공하는 트인 공간에 있는 이러한 커피숍을 Mokeya라고 불렀다. 여관은 오두막에 불과했고, 가구라고는 새끼줄로 만든 기다란 좌석(Serir) 밖에 없었으며, 간식은 커피콩을 우려낸 뜨거운 음료(Kischer)가 다였다. 이 음료는 거친 도기 컵에 담겨 나왔다. 하지만 신분이 높은 사람은 항상 짐에 자기로 된 컵을 들고 다닌다. 깨끗한 물은 무료로 제공했다. 커피숍 주인은 근처 마을에 살면서 매일 이곳에 와서 손님을 기다린다.
이런 종류의 소규모 커피숍은 북아프리카에서 아프가니스탄까지 가는 길에서(최근까지도) 찾아볼 수 있으며, 이란에선 대부분 커피가 차로 바뀌었다. 시골에서 이렇게 커피나 차를 파는 가게는 마을 사람들이 아닌 지나가는 여행객을 대상으로 장사했다. 20세기 후반까지 그림으로 가게를 장식하곤 했다. 대부분 차 또는 커피 주전자, 잘린 멜론, 물담배, 꽃다발 등 접대의 상징을 나타내는 그림이었다. 이야기꾼이 공연하는 커피숍엔 이야기에 등장하는 영웅과 관련된 검이나 총, 말 또는 모험담에 등장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 걸렸다. 때로는 나라의 기념물을 보여주는 경관이나 상상적인 주제를 나타내는 그림도 있었다.
많은 여행객들은 물가의 커피숍에 앉아 있을 때의 기쁨을 얘기한다.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표현하는 Thévenot은 ‘여러 개의 분수, 근처의 강, 나무 모양의 자리, 장미를 비롯한 꽃 등 다마스쿠스의 카페는 모두 아름답다. 시원하고 상쾌한 즐거운 곳이다'라고 했다.
포르투갈 여행객인 Pedro Texeira는 1604년에 바그다드에서 중국 자기로 커피를 마신 경험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런 장소는 사람들이 여름엔 밤에 그리고 겨울엔 낮에 주로 찾는다. 이 집은 강 근처에 있으며 강이 내려다보이는 창문이 많고 두 개의 갤러리가 있어 매우 호감이 간다. 도시에도 이런 곳이 있으며 터키와 페르시아 전역에도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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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roline Stone 제공 |
| 19세기 말의 프랑스 엽서 세트 중 하나인 이 사진은 모로코의 시골 마을에 있는 커피숍의 모습이다. |
이런 점은 시골의 커피숍도 마찬가지였다. 스웨덴의 역사가이자 외교관인 Abraham d’Ohsson은 18세기 후반에 "시골에 있는 커피숍은 큰 나무들과 덩굴나무의 격자 구조물로 그늘이 지고, 바깥엔 커다란 벤치가 있다"라고 썼다.
특히 커피숍이 세속적인 생활의 중심이었던 오스만 제국 전역에서 샘 근처에 커피숍을 차리는 일이 인기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오래된 커다란 나무(대부분 플라타너스)의 그늘에 작은 정자가 있었으며, 나무는 신중하게 가지치기하고 나뭇가지들은 솜씨 좋게 접목하여 훌륭한 차양이 되었다. 알바니아의 세계유산(World Heritage Site) 지로카스터(Gjirokastër) 근처의 작은 마을 Libohovë에 있는 작은 강 옆의 커다란 나무는 400년 가까이 커피숍에 그늘을 제공해주고 있다는 기록이 있으며, 나무의 나이는 발칸 반도만큼이나 많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
사업적으로도 많은 경우 커피숍은 훌륭한 투자처였다. 특히 이스탄불에서 가장 정교하고 아름다운 커피숍 중 일부는 예니체리(Janissaries)가 유명한 건축가들을 고용하여 지었으며, 그 중 한 예는 Çardak Iskelesi의 해변에 있는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건물이다. 이들 건물은 특정 orta(집단)의 모임 장소가 되기도 했으며, 나중에 예니체리의 공식 기금이 줄었을 때 수입원이 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역사가 Ibrahim-i Peçevi는 1635년경에 특히 이스탄불을 강조하며 16세기 중반부터 오스만 제국 전체로 확산되던 커피숍에 관한 글을 썼다. 다른 작가들처럼 그도 커피숍의 장단점을 표현했지만, 그런 표현은 주제인 커피숍보다는 작가 자신 또는 작가 개인의 경험에 관한 내용이 더 많다. Thévenot은 “프랑스 상인들은 작성할 편지가 많거나 밤새워 일해야 할 때면 저녁에 커피를 한 두 잔 마신다”고 말하며 커피와 커피숍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반면, 베니스의 bailo(이스탄불 주재 대사)인 Gianfrancesco Morosini가 1585년에 쓴 글은 다소 삐딱한 시선으로 보고 있다.
사람들이 모두 상당히 상스럽고 차림새가 남루하며 근면성은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그저 앉아서 놀며 공공장소나 가게 또는 길거리에서 검은색 액체를 자주 마신다 ...Caveé라는 씨에서 추출한 액체로 견딜 수 있을 만큼 최대한 뜨겁게 해서 마신다.... 그 액체는 사람을 잠들지 않게 해주는 성질이 있다고들 말한다.
그리고 오스만 제국의 작가 Evliya Çelebi의 의견은 대개 호의적이었지만, 1599년에 역사가 Mustafa ‘Ali Çelebi의 카이로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이 가혹했다. “완벽한 정신병원이 있음에도 일부 커피숍은 미친 사람들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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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USEO DI MILANO / SCALA / ART RESOURCE |
| 밀라노에 있는 대형 커피숍인 Caffé degli Specchi의 자리 배치는 터키의 커피숍과 비슷하지만, 이곳엔 테이블과 의자가 더 많다. |
시간이 지나면서 동양의 학자(fuqaha)들과 서양 천주교회의 커피를 종교적으로 허용할 수 있는지에 관한 논의는 사회 및 정치적 문제로 바뀌었으며, 이 문제 역시 동양과 서양에서 거의 비슷하게 표출되었다. 커피숍은 남성, 특히 젊은 남자들이 일할 시간을 낭비하도록 부추기고, 커피숍에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어울리는 것과 자유로운 토론이 사회 질서에 대한 불만과 분열을 야기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런 걱정은 불만을 품은 예니체리 병사들의 폭동이 반복되던 오스만 제국에서 특히 심했다. 영국인 대사였던 Sir Thomas Roe는 1623년에 쓴 글에서 일반적인 인식은 완전히 잘못됐으며, 예니체리가 단순히 "커피숍에서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한 걱정할 것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며, 그들이 조용해질 때 위험을 걱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은 꽤 정확했지만 당국은 상황을 이런 식으로 보지 않았다. 이슬람 세계에서 커피숍을 폐쇄하려는 움직임이 여러 번 있었으며, 1630년대에 무라드 4세는 폐쇄뿐 아니라 건물을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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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는 동양으로도 퍼졌다. 특히 이란에선 다른 지역보다 빠르게 커피에 대한 논란이 사그라졌다.
이란에서 커피를 최초로 언급한 기록은 16세기 중반 Imad al-Din Mahmud al-Shirazi라는 의사의 글이며, 그는 주로 의학적 목적으로 커피에 관심을 두었다. 하지만 일찍이는 1602년에 오스트리아 사절이 커피와 비슷한 무언가를 언급했으며, 커피는 곧 사파비(Safavid) 궁정에서 대접하는 것 중 일부가 되었다. 스페인 사절인 Don Garcia de Silva y Figueroa가 1619년에 쓴 글에 샤 압바스(Shah Abbas)가 이스파한(Isfahan)의 커피숍을 방문한다는 내용이 있으며, Pietro della Valle와 러시아인 여행객 Fedot Kotov도 같은 사실을 언급했다. 이는 커피숍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장소였다는 증거이다.
이란이 네덜란드인을 통해 대량으로 커피를 수입했음을 보여주는 기록과, 이란에서 판매할 목적으로 중국의 소형 커피 컵 5천 상자를 들여왔다는 1634년의 기록에 관한 언급을 통해 커피가 일찍부터 이란에서 인기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Jean Chardin은 1686년에 쓴 자신의 이란과 "동양의 다른 지역" 여행기에서 이란의 커피숍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들 커피숍은 지면보다 높은 다양한 모양의 넓은 홀이 있으며, 지역 사람들이 만나 오락을 즐기는 장소로서 일반적으로 도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중에서 특히 대도시에 있는 일부 커피숍엔 중앙에 물이 담긴 장식이 있었다. 방 주위엔 90센티미터 정도 높이에 0.9~1.2미터 폭의 단이 있었으며 크기는 커피숍 규모에 따라 다양했다. 이 단은 사람이 가장 붐비는 시간인 이른 아침과 저녁에 개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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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선 찰스 2세가 1675년에 "커피숍 금지 선언"에서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커피숍에 대한 같은 견해를 표출했다. 커피숍은 "게으르고 불만이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에 좋은 장소이며...매우 사악하고 위험한 효과를 가져오고...여러 거짓 소문의 근원지이다. 나라의 평화와 안정을 해칠 목적으로 악의적인 비방을 담은 전단이 제작되어 퍼지고 있다."
두 왕 모두 커피숍 금지 조치로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 qadis(재판관), 변호사, 학자, 학생, 상인, 성직자 등 많은 수의 존경받는 사람들은 단순히 한 잔의 커피(유럽인들은 최소한 커피를 두 번째로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가 아니라 사람들과 만나서 이야기할 장소, 비좁은 집이 아닌 넓은 공간, 친구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대접할 기회, 공적이고 친숙한 장소에서의 휴식을 원했다. 찰스 2세의 금지령은 아무런 효과가 없었으며, 무라드 4세의 계획 역시 9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부르사(Bursa)로 커피숍 문화가 이동하는 결과를 낳았다. 군인이자 학자인 Kâtip Çelebi는 1640년경에 그 과정을 설명하는 글을 썼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커피를 마시던 중에 갑자기 평온하게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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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edeo Preziosi / Stapleton Collection / Bridgeman Art Library |
| 커피숍은 1650년경에 영국에서 인기를 끌었다. 위의 런던 커피숍은
1600년대 후반에 익명의 화가가 그린 작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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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useum of London / Art Archive / Art Resource |
| 작은 동전은 귀했기 때문에 많은 커피숍에서 사진과 같은 토큰을 주었다. |
많은 여행객들은 반복해서 수백 개의 커피숍(카이로 같은 대도시엔 수천 개가 있다고 주장)을 언급했으며, 시골의 작은 마을에서도 커피를 쉽게 구할 수 있었다. Evliya Çelebi는 1670년에 기행문 Seyahatname에서 항상 커피숍과 다른 중요한 건물을 일일이 열거했다. A Journey to Berat and Elbasan에서는 예를 들어 Berat(현재 알바니아)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이 시장 주위엔 6개의 커피숍이 있는데 모두 중국 우상의 신전처럼 칠하고 장식했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둑에도 몇 개의 커피숍이 있다. 수영을 즐기는 사람, 낚시하는 사람, 친구들과 종교 및 세속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도 있다. 방대한 지식을 갖춘 시인, 학자, 작가들이 이곳에 많이 있다. 이들은 정중하고, 고상하고, 똑똑하고, 성숙하고, 신앙 보다는 흥겨운 분위기를 좋아한다.
그의 미학적 평가는 대규모 커피숍의 또 다른 흥미로운 측면이다. 이스탄불, 다마스쿠스, 카이로의 특정 커피숍들은 다른 도시에서와 마찬가지로 특별한 “풍미”가 있었다. 노벨상 수상자 나기브 마푸즈(Naguib Mahfouz)가 자주 찾던 카페이자 시인과 작가들에게 소중한 만남의 장소였다고 알려진 Fishawy’s는 예전의 가구와 아라비아풍 장식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지금은 지식인보다는 여행객들에게 인기가 더 많은 Zahret al-Bustan도 마찬가지이다.
반대로 튀니스(Tunis)의 메디나에 있는 M’Rabet은 앞에서 언급한 웅장한 실내장식과는 정반대이다. 매우 단순한 회반죽 처리에, 기둥은 빨간색과 초록색으로 칠해져 있고, 벽을 따라 있는 돌로 된 의자엔 방석이 있으며, 평온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리고 아라비아 반도에서 아주 먼 옛날 커피를 마시던 문화와 커피숍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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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oline Stone(stonelunde@hotmail.com)은 케임브리지와 세비야에서 활동한다. 러시아 지역을 탐험한 중세 아랍인들의 이야기를 Paul Lunde와 함께 번역한 그녀의 최근작 Ibn Fadlan and the Land of Darkness는 Penguin Classics에서 2011년에 출간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