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리아 남부의 외지고 경제적으로 낙후됐지만, 경관이 수려한 피린과 로도페 산맥에 자리 잡은 마을들에 사는 불가리아의 이슬람교도인 포막인이 자신들의 명예 회복에 나섰다. 포막 최고 전문가인 메흐메드 보유클리는 이 사람들이 45년간 공산주의 체제에서 소외되어 포막이 "수치스러운 단어"가 되는 과정을 지켜봤다며, 요즘은 “인터넷 덕분에 이 단어의 의미가 긍정적으로 바뀌고, 우리가 간직한 모든 문화유산의 상징이 되었다"고 덧붙였다. 몇 개의 발칸 반도 이슬람 공동체 중 가장 크지만, 포막이 유일하게 개방된 국경을 사용하고, 최근엔 소셜 미디어를 통해 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만 제국에서 발전한 발칸 국가들의 공통 문화를 재발견하는 공동체는 아니다.
1980년대 말에 국경이 개방되고 소셜 미디어가 등장하면서 불가리아 브레즈니트사에 사는 22살의 살레이카 그로샤르와 같이 공산당 집권에 대해 전혀 모르는 젊은 사람들이 발칸 반도 전체의 이슬람교도 정체성을 새롭게 형성하고 있다. 그녀는 전통 민속 음악을 좋아하며, "포막, 토르베시, 고라니: 세 가지 이름, 한 민족"이라는 페이스북 그룹도 운영하고 있다. 그녀는 코소보 남부와 알바니아 북부에 사는 이슬람교도 집단인 고라니인 친구들도 사귀었다. “그 친구들은 불가리아어를 배우고, 저는 고라니어를 배웁니다"라고 살레이카는 말한다.
이런 주장을 하기엔 이른 감이 있지만, 이러한 문화적 변화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오스만 제국 서쪽이 불가리아, 알바니아, 유고슬라비아라는 국민국가로 바뀌면서 단절된 고리를 다시 엮어주는 듯하다. 이 전에 오스만 제국의 통치는 이슬람교, 유대교, 기독교에 따라 분류한 공동체인 밀레트가 바탕이 되었으며, 각자 법에 따른 자치를 허용했다. 각 밀레트는 오스만 제국 국민에게 정체성의 주요 원천을 제공했지만, 19세기엔 국민이 국가적 정체성을 갖기 시작했다. 오스만 제국의 모든 이슬람교도는 터키인, 알바니아인, 아랍인, 슬라브인 할 것 없이 모두 이슬람교 밀레트에 속했으며, 언어, 지리적 기원, 민족성은 부차적이었다.
1800년대에 발칸 지역에 기독교 국가가 세워지자 이 지역의 이슬람교도들은 고립되었으며, 새 정부는 이들을 체제 전복 가능성이 있는 소수 민족으로 취급했다. 20세기에 공산주의 체제에서 불가리아에서만 최소 4번의 강제 융합 활동이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강요에 의해 수백 년 전에 이슬람교로 개종했다고 추정되는 사람들의 기독교 정체성을 "회복"한다는 핑계로 첫 번째는 1912년, 마지막은 1989년에 일어났다. 그러나 동유럽의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유럽연합의 확대로 국경이 개방되면서 지금은 온라인 소셜 미디어가 발칸 지역 이슬람교도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서로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변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도구이다.
“갑자기 주변의 국경이 모두 개방된 후에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과 우리와 같은 문화를 가진 고립된 지역이 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라고 전통적인 포막 문화와 온라인 포막 확동이 모두 활발한 것으로 알려진 지역인 브레즈니트사에 사는 보유클리는 말한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보유클리는 발칸 지역의 이슬람교도들이 서로 알게 될수록, 이슬람교도 집단의 이름이 더욱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것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포막족은 불가리아뿐만 아니라 그리스 북부와 터키 서부에도 있으며 이 지역의 포막족은 대부분 해당 국가에 동화되었다. 불가리아의 포막족은 불가리아어를 사용하고, 그 밖에 다른 나라로 이주한 포막족은 새로운 거주 지역의 언어를 사용한다.
코소보와 알바니아에 사는 토르베시족과 고라니족은 모두 불가리아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일부 알아들을 수 있는 남슬라브어인 나센스키를 사용한다. 토르베시족은 코소보와 마케도니아에, 고라니족은 알바니아, 코소보, 마케도니아에 산다. 보스니아에도 이슬람교 "보스니아크"가 있다. 이들은 언어와 문화 면에서 먼 친척뻘이며, 자신을 소개할 때 이슬람교도가 아닌 보스니아인이라고 우선 밝힌다.
외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이런 차이를 잘 알지 못한다. 공식적으로 고라니는 1928년에 알바니아와 유고슬라비아로 분할된 고라 지방에 사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토르베시인과 고라니인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외부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경우에만 토르베시와 오라니를 구분하며 스스로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의 언어인 나센스키(Nashenski)는 "우리(our)"라는 뜻의 nash에서 유래한 것으로 말 그대로 "우리와 비슷한(ours-ish)"이라는 뜻이다. 이들은 두 민족의 개인을 “우리 중 하나(one of ours)”라는 뜻의 나세네트(nashenets)라고 부른다. 불가리아의 민속학자 베셀카 토체바는 이들에 대한 소외화가 명백하다고 말한다. 우리를 “우리”라고 정의한다는 것은 다른 나머지를 "그들"로 본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이런 구분이 변하고 있다.
피린 산맥에 있는 브레즈니트사는 포막 문화의 적극적인 보존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노래, 직조, 드레스, 이슬람 전통으로도 유명하다. 3,500명 정도의 인구 중 약 90%가 이슬람교도이다. 구식의 목재 및 진흙 벽돌 건물이 콘크리트로 지은 현대식 주택과 함께 있다. 알루미늄 판잣집의 “이지 크레딧” 상점에선 즉각적인 가계 대출을 제공한다. 인터넷 카페는 이제 거의 모든 집에서 온라인 사용이 가능해 문을 닫았다.
경제적으로 브레즈니트사 사람들은 공산 정권 이후에 건설 산업에서의 기회가 열리면서 전통적인 담배 농장에서 벗어나 남성들은 불가리아의 도시와 외국으로 떠나고 있다. 여성들은 대부분 마을의 두 직물 공장 중 한 곳에서 일한다. 생산물은 독일로 수출하며 한 곳은 유명 디자이너의 남성용 정장을 만들고, 다른 한 곳은 바바리아 여성의 민속의상인 던들을 만든다.
공산주의 시절에 터키인과 로마(집시)를 포함한 이슬람교도를 대상으로 한 불가리아의 강제 융합 활동으로 인해 이슬람교 의상, 음악, 문화, 심지어 이슬람식 이름까지 금지됐다. 모두가 불가리아식 이름을 가져야 했다. 꽃이나 새의 이름을 많이 사용했다.
브레즈니트사에서 태어나고 성장해 석고 기술자로 일하는 보유클리는 "우리는 문화가 없으므로 생활방식과 이름, 심지어 노래까지 모든 것을 바꿔야 했다"고 말한다. 공산주의의 어두운 시절에 고라니족 음악이 담긴 유고슬라비아의 비닐 레코드판을 마을로 몰래 들여왔을 때 현지 음악과 똑같아 매우 기뻐했던 일을 회상하며, “어딘가에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우리 문화의 정당성이 높아졌다"라고 말한다.
공산주의가 끝나자 불가리아의 이슬람교도들은 열광적으로 이슬람 정체성을 표출하려는 가운데 예전 이름을 되찾았다. 20년이 지난 지금은 그때의 흥분이 가라앉고, 전통문화와 현대문화를 결합한 새로운 하이브리드 형태가 자리 잡고 있다.
발칸지역의 이슬람교도인들이 오스만 제국 시절의 풍부한 전통을 유지해온 결혼식에서 이런 현상은 더욱 확실하게 나타난다. 불가리아, 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를 적대적인 국경지역을 사이에 두고 분열시킨 45년의 냉전 기간에도 불구하고 여러 나라의 이슬람교 집단에서 행하는 관습은 대부분 같다.
무사 다라크치는 내일 결혼한다. 27세인 그는 개방된 국경을 통해 5년간 독일 뒤셀도르프 외곽에 있는 꽃 농장에서 일한 돈으로 브레즈니트사에 집을 구하고, 500명이 넘는 손님을 초대해 결혼식을 올리게 됐다.
그는 "전통이 미래 세대에도 지속되는 것이 중요하다"며 “아버지와 할아버지와 비교해 전통에 대해 아는 것은 적지만, 무언가는 전해주고 싶다"고 말한다.
다음 날 아침 8시 30분, 카주의 음색과 알토 색소폰의 힘을 가진 오스만 제국의 뭉툭한 클라리넷인 주르나의 울림으로 광장에서 결혼식이 발표되었다. 4개의 주르나와 3개의 투판(드럼)이 울리기 시작하자 더는 알림이 필요 없었다.
신랑의 동생이자 화려한 은빛 정장을 입은 호리호리한 젊은 남성이 빨간색 결혼식 깃발이 달린 장대를 흔들며 행렬을 이끈다. 깃발의 한구석엔 한 때 이슬람 밀레트를 상징했던 초승달과 별이 있었지만, 지금은 스팽글로 장식한 하트가 있다. “공산주의자들이 초승달과 별은 싫어했지만, 빨간색이라는 이유로 깃발은 유지하게 해줬다"고 보유클리가 말한다.
융합 활동 중엔 심지어 악기가 "너무 터키적"이라는 이유로 음악인들은 주루나도 포기해야 했다. 아코디언이나 색소폰을 연주해야 했고, 불가리아나 러시아 음악만 연주할 수 있었다.
신랑이 집에서 나오자 옷깃에 흰 장미와 함께 빳빳한 €50 지폐가 꽂혀있다. 그는 천천히 행렬을 이끌며 가끔 멈추고 춤을 추기도 한다. 신부 집에 도착할 즘엔 많은 사람이 그의 뒤를 따르고 있다. 정문은 안에서 사람들이 손으로 잡고 있다. 지폐가 통과하고 실랑이가 뒤따른다. 악대의 연주 소리가 너무 커 군중은 협상 내용을 들을 수 없다.
마침내 문이 열리고 하객들이 안으로 들어간다. 신랑신부는 신부의 가족이 마련한 혼수인 체이즈 앞에서 포즈를 취한다. 카펫과 이불 더미가 커플만큼이나 높이 쌓여 있고, 주위엔 식기 거치대와 그릇 같은 주방용품과 폭신한 베개와 곰 인형 등이 있다. 이것은 새 가정의 부를 있는 그대로 그리고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구경꾼이 줄면 체이즈를 3층 발코니에서 길에 세워진 트럭으로 하나씩 옮긴다. 트럭 뒤엔 진열한 체이즈 위에 개방된 금속 틀이 있으며, 이것이 축하의 민속춤을 추기 위해 광장으로 천천히 들어오는 행렬의 중앙 장식품 역할을 한다.
36세의 살리흐 부코브얀은 브레즈니트사의 비공식 민속학자이며 마을의 재정 담당자이기도 하다. 그는 포막 문화가 직면한 중요한 질문들에 관해 생각해보길 좋아한다. 또한 그는 대단한 규모의 전통 의상과 지역 음악을 소장하고 있다.
부코브얀은 "우리를 차별화해주는 옷을 여성들이 입지 않는다면 융화 정책은 성공하는 것"이라며, “우리의 정체성을 전하고 보존하는 것은 여성이므로 이들이 정체성을 잃으면 우리 모두 많은 것을 잃게 된다”고 말한다.
부코부얀은 어린 시절에 자신의 할머니에 의해 전통문화에 빠져들었다. 그는 할머니가 부르는 노래에서 할머니가 찾던 하모니를 느꼈으며, 이것은 바로 딸의 체이즈에 밝은색과 기하학적인 모양으로 직물을 짜던 하모니와 같은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할머니는 아름다운 것을 좋아했다"고 부코부얀이 말하며 “돌아가실 때도 노래를 불렀다”고 덧붙였다.
브레즈니트사의 여성들은 지금도 직물을 짜고 뜨개질을 하지만 기술 일부는 사라졌다. 그래서 부코얀은 엑셀 스프레드시트를 사용해 기법과 디자인을 문서화하고, 색상과 모티브도 정리한다. 또한 전통 노래와 시 1만여 줄을 적어놓았다. 그는 소규모 온라인 민속학 박물관이 있는 블로그도 운영하며, 언젠가는 불가리아 최초의 오프라인 포막 민속 박물관을 건설하길 원한다.
궁금한 것이 많은 발칸 지역의 다른 여러 이슬람교도들과 마찬가지로 부코부얀도 불가리아, 마케도니아, 코소보, 터키의 친구들과 온라인에서 여가 시간 대부분을 보낸다. 발칸 지역 이슬람교도들의 친분은 아직 초기 단계에 있다고 그는 지적한다.
부코브얀은 "불가리아의 포막족을 단일 문화 그룹으로 통합하는 데 성공할 경우, 토르베시족과 고라니족도 다른 국가에 있는 같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 후엔 불가리아의 포막족 또는 마케도니아의 토르베시족이라는 말은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새로운 이름을 만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은 고라니족과 토르베시족이 자신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했던 "우리"라는 뜻의 나센트스키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브레즈니트사의 케이블 TV 회사는 지역의 뉴스 통신사 역할도 한다. 마을 사람 대부분이 케이블 TV를 시청하며 주요 공적 게시판이 되고 있다. 생일, 출산, 부고, 기념일, 예정 결혼식 등과 관련해 시청자들이 노래를 신청하고 사연을 보내면 화면에 문자가 나타난다.
회사 소유주인 이스마일 그로샤르는 최근 몇 년간 불가리아 주류 음악이 전통 민속음악에 밀려 인기가 떨어지고 있으며, 요즘 신청곡의 2/3가 전통 민속음악이라고 말한다. 또한 코소보의 고라니족 민속 그룹인 부라카 무스카(“무스카 형제들”)는 메흐메드 보유클리가 이 그룹의 MP3 파일을 방송국에 가져온 이후에 브레즈니트사에서 인기가 올라갔다. 그로샤르는 요즘 지역 음악인들이 축제에서 자신들의 노래를 연주한다고 말한다. “Vo Kafana”(카페에서), “Cerno Oko Sareno”(반짝이는 검은 눈), “Tudzina je Mlogo Teska”(외국이라 매우 슬픈) 등이 이러한 곡에 속한다.
19살인 제이네프 사칼리는 브라카 무스카의 팬이며 브레즈니트사에 있는 두 개의 앙상블 중 하나인 가이타니 민속음악 그룹에서 노래한다. 그녀는 마을의 젊은 사람 중 절반 정도가 전통 음악에 관심이 있다고 말한다. 스트레스받을 때에도 "영화보다 전통 음악을 들으며 직물 짜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한다.
그녀의 친구이자 가이타니 멤버이기도 한 살레이카 그로샤르는 최초로 코소보를 방문한 포막족 중 한 명이 되어 스스로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가이타니는 작년에 코소보에서 공연했다. 그로샤르는 "사람들이 사진을 그렇게 많이 찍을 줄 몰랐다"며 "우리가 입은 노시[전통 의상]를 매우 좋아했다"고 말한다. 돌아오면서 그녀는 브라카 무스카를 브레즈니트사로 초청했다. “그들이 오는 것이 우리의 소원”이라고 그녀가 말한다.
코소보에서 차로 6시간 걸리는 프리즈렌에 사는 라이프 카시는 코소보 라디오 & TV에서 보스니아어 서비스를 맡은 토르베시 저널리스트이다. 나센트시 사이에서 주요 온라인 활동가 중 한 명인 그는 인터넷을 통해 발칸 지역의 이슬람교도들과 교류하고, 연구 활동 및 국경 간 연결을 계획하는 일을 돕는다. 또한 발칸 지역 이슬람교도 문제에 관한 지역 회의와 컨퍼런스에도 참여한다.
그의 고향인 프리즈렌은 코소보 남부에 있으며, 건축물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것 등 발칸 지역에서 가장 오스만 제국의 분위기와 비슷한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이 도시엔 다수를 차지하는 민족이 없어 세르비아어, 알바니아어, 터키어, 영어, 나센스키 등 어느 언어나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구유고슬라비아와 마찬가지로 프리즈렌에도 남부 유럽 특유의 카페 문화가 있다. 마키아토는 부드럽고 훌륭하다.
카시는 야외 카페에 앉아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비슷한 문화와 종교를 갖고 있지만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비슷한 점이 많은 민족입니다. 백 년 전엔 모두 같은 언어[나센스키]를 사용했지만, 그 이후에 바뀌었습니다."
코소보 남부의 고라 지방에 살면서 나센스키를 사용하는 이슬람교도인 고라니족은 코소보에 있는 6개 공식 소수민족 중 하나이다. 그러나 토르베시는 공식 소수민족이 아니며, 항상 공식적으로는 보스니아어(예전에 세르보크로아티아어로 알려짐)를 사용하는 훨씬 큰 집단인 보스니아인이라고 밝혀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고, 토르베시족 내에서 정치적 포용이 강했다. 오늘날 토르베시족은 공식적인 비즈니스와 교육에서 보스니아어를 사용하며 나센스키는 집에서만 사용한다.
미프타르 아데미는 이런 상황을 바꾸길 원한다. 그는 자신이 쓰고 출판한 나센스키 문법책을 카페에 가져왔다. 또한 라틴어 글자를 바탕으로 나센스키어 고유의 소리를 표현하기 위한 기호를 사용해 나세니트사라는 문자 체계도 만들었다. 의대생인 그의 아들 아난도가 문자 글꼴을 디자인했다. “Windows에 설치하기 쉽다”고 아난도는 말한다. 목표는 나센스키어 쓰기를 더욱 "자연스럽고 확실하게" 만드는 것이다.
아데미는 마치 희귀언어 전문가처럼 나센스키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 “고대의 언어로 매우 오래됐지만 아직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세르비아어와 불가리아어 같은 남슬라브어의 바탕이 된 언어이기도 하다. 그는 “우리 언어가 나무 줄기고 주변 지역의 다른 언어들이 나뭇가지"라면서도 “문학적인 언어는 아니었다”라고 덤덤하게 부끄러움이나 자랑 없이 말한다. 그는 나센스키어로 출판된 책은 15권밖에 없지만 앞으로 늘어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알바니아 북동쪽의 국경에 걸쳐 9개의 고라니족 마을에서 약 15,000명이 살고 있다. 이들은 공산주의 시절에 완전히 고립된 채로 살았다. 나센스키어와 문화에 관한 저명한 학자인 나지프 도클을 만나기 위해 알바니아의 쿠커스로 가는 차에서 카시는 2000년에 처음 국경을 넘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보르야라는 마을은 처음으로 문화 축제를 개최하고 있었다. 카시는 코소보에서 최초로 방문한 나센트시 중 한 명이었다. “전 이 국경에서 3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자랐고, 유고슬라비아인은 아무도 건널 수 없었습니다. 이곳은 완전히 밀폐되어 제겐 항상 흥미로웠습니다.”
우리는 그가 방문하기 1년 전인 1999년에 코소보 전쟁으로 인한 난민으로 가득했던 진흙밭을 지났다. 오늘은 비가 많이 내린다. 회색빛 하늘이 젖은 아스팔트와 무채색 산맥으로 녹아들어 발칸 지역에 여러 정체성이 복잡하게 섞여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이 흐릿하게 보인다.
나센스키어, 문학, 역사, 문화 등과 관련해 20권이 넘는 책을 집필한 도클은 우리가 도착했을 때 집에 있었다. 공산주의 시기에 장학사였던 그는 지역을 광범위하게 돌아다니며 은밀하게 사업과 연구를 병행했다. “고라니족 마을 곳곳에서 사람들에게 단어를 물어봤습니다. 제 목표는 사전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알바니아어-나센스키어 사전은 나센스키어 최초의 사전이다. 도클은 선반에서 노란색 공책을 가져와 고라니족 또는 소수 민족 문화에 대한 관심이 위험했던 시절부터 현장에서 수십 년 간 기록한 내용을 보여주었다. “전 몰래 작업했습니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습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도클은 나센스키어로 글을 쓰는 목적은 읽히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이유로 언어를 보존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많은 과학자가 고라니족과 토르베시족은 음악적 문화를 가진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이 말은 맞습니다. 결혼식에서 목소리가 좋거나 재능이 있거나 상관없이 모두가 모래를 부릅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구술적 전통이 매우 강해 그는 "시"와 "노래"라는 말을 번갈아가며 사용한다.
우리는 소셜 미디어, 디지털 오디오, 웹사이트 덕분에 브레즈니트사와 발칸 지역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전통 고라니 음악 그룹인 브라카 무스카를 만나기 위해 코소보로 돌아왔다. 고라의 남쪽 끝에 있는 레스텔리카라는 마을로 가는 길은 가파르고 들쭉날쭉한 사르 산맥의 서쪽 경사면을 지난다. 그곳의 많은 사람들은 그 산이 물리적으로 그들의 정신을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카시는 다양한 각도와 각기 다른 계절의 수많은 사르 산맥 사진을 마치 가족이라도 되는 듯이 페이스북에 올려놓았다.
카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문화와 노래, 전통을 더욱 잘 개발할 수 있도록 포막족, 고라니족, 토르베시족이 문화의 중심을 구축하길 바랍니다. 전엔 정보가 거의 없었습니다. 저널리스트였던 저도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또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레스텔리카의 거리는 깨끗하고 가팔랐다. 주택의 외관은 완벽했다. 고라니족은 수십 년 동안 구 유고슬라비아 연방, 이탈리아, 스위스 등에서 일하며 돈을 벌었다. 건설업이 전통적인 직업인 양 떼 몰이를 대체했다. 거리의 여성들은 내일인 쿠르반 바이람(희생제) 또는 아랍 세계에 알려진 대로 이드 알라드하 전에 친구들을 방문하며 정장의 긴 검은색 공단 코트를 입고 있다.
무스카 3형제 중 한 명인 무라트 무스카의 집에서 그가 그들의 음악이 슬픈 이유는 현실적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전 레스텔리카에 살지만 이곳에는 일거리가 없습니다. 우리 노래는 정확히 우리가 사는 삶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양치기였던 시절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을 바탕으로 한 노래도 있지만, 새로운 노래는 이탈리아나 스위스에서의 이민자 생활 또는 비자 같은 현대의 주제를 다룹니다."
레스텔리카엔 마을 방송국인 라디오 밤부스도 있다. FM 신호는 15킬로미터 정도밖에 도달하지 못하지만, 2009년부터 인터넷에서 스트리밍되고 있다. 경영자 네심 호자는 항상 500~600명의 청취자가 있으며, 대부분은 서유럽과 다른 발칸 국가에 사는 이민자라고 말한다.
호자는 이 방송국의 사명이 나센트시들이 서로를 잘 알게 도와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터넷을 통해 국경과 먼 거리 때문에 떨어져 있던 발칸의 이슬람교도들이 쉽게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호자는 휴대전화를 꺼내 녹음된 내용을 들려준다. 불가리아의 한 포막인이 방송에 전화를 걸어 노래를 신청하는 내용이었다. 호자는 "현재 매우 다양한 나센스키 음악을 보유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브레즈니트사에 사는 사람이 브라스카 무스카 노래를 신청하듯이, 이곳 레스텔리카 주민들도 작년에 브레즈니트사에서 온 가이타니의 노래를 꾸준히 요청한다고 덧붙였다.
오전 6시 30분에 루빈제에 있는 카시의 집에 도착하자 진한 파란색 하늘이 사르 산맥의 봉우리 뒤에서 밝아오고 있다. 그는 근처 모스크로 출발하면서 "좋은 자리를 맡으려면 일찍 가야한다"고 말한다.
거리는 같은 방향으로 단호하게 걷는 남성들로 붐볐다. 모스크는 1979년에 유고슬라비아의 초현대적인 스타일로 지어진 건물로 미래에 대해 은근히 자신이 있었던 사람들이 세운 듯 보였다. 주 기도실에선 넘치는 예배자들을 근처의 복도, 위층 발코니, 교실로 보냈다. 교실 칠판엔 아랍어, 터키어, 나센스키어로 "행복한 명절"이라고 적혀있었다.
기도 후에 남자들은 묘지로 걸어갔다. 이곳에서 이슬람 전통은 삶의 기본적인 부분이며 본능적으로 실천하는 듯 보인다. 카시는 간단한 직사각형 모양의 콘크리트 위에 잔디가 있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무덤가에서 무릎을 꿇고 조용히 기도 한다. 그러고 나서 장모님 무덤으로 걸어간다. 그는 "바이람 때마다 이렇게 해왔다"고 말한다.
성대한 바이람 점심을 먹은 후에 어린 신부인 셀마 샤이피의 집을 방문한다. 샤이피는 자신의 결혼식 비디오를 보여주면서 "전통을 유지한다는 것은 매우 기쁜 일"이라며 “동시에 매해 새로운 것을 배우고 있다"고 말한다.
그녀의 결혼식에도 사람들에게 보이도록 카펫, 직조물, 직물 등의 체이즈를 높이 쌓은 것, 결혼식을 알리는 주르나와 드럼, 모든 행사에서 대량으로 제공하는 것과 같은 손수 뜬 양말인 초라피, 새집에서의 청결을 상징하는 수건을 결혼식 참가자 중 남성의 어깨에 올린 것 등 불가리아의 포막족 결혼식에서 봤던 요소들이 많이 있었다.
샤이피는 어머니 결혼식과 자기 결혼식에 "많은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그녀의 어머니는 말을 타고, 모두가 같은 접시로 음식을 먹었다. 샤이피는 식전 의식에서 밝고 다채로운 전통 의복을 입었고, 서양 스타일의 흰색 드레스를 입고 결혼했다. 반면 어머니는 전통 의복인 노시를 입고 결혼식을 올렸다. “행복한 날에 이렇게 아름다운 옷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녀의 어머니는 말 그대로 페인팅한 상태로 결혼했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다.
신부의 얼굴과 손을 하얗게 칠하고 밝은색의 스팽글과 헤나로 정교하게 장식하는 의식은 발칸 지역의 이슬람교도들 사이에서 흔한 일이었다. 이 전통은 오스만 제국 시대 또는 그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기원은 확실하지 않다. 코소보에서는 근처 마을에 사는 나이 많은 여성 혼자만 이 작업을 하고, 불가리아에서는 3개 마을에서만 신부들이 가끔 페인팅을 한다.
이 비디오에서 여성 친구들이 샤이피를 둘러싸고 샤이피에게 노래를 불러준다. 기혼 여성은 밝은 빨간색과 노란색의 전통 의상을 입고 미혼 여성은 흰색 옷을 입는다. 샤이피는 큰 소리로 운다. 곧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남편과 그 가족이 사는 새집이 그녀 부모님 집과 걸어서 2분 거리라는 사실에도 슬픔이 가시지 않는 듯하다.
그녀의 친구들이 노래한다. "지금까지는 어머니 말씀을 들었다. 이제는 시어머니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녀가 말을 잘 듣나요?” 난 거실에서 샤이피 맞은편에 앉아 있는 시어머니에게 물었다. “네, 잘 듣습니다”라고 시어머니가 진지함과 자랑스러움을 담아 말한다.
“잘 들어요, 저도 귀가 있어요.” 샤이피가 장난삼아 이렇게 대답한다.
쿠르반 바이람 행사(희생제)의 또 다른 중요한 부분이 네브레고스테라는 근처 마을에서 준비 중이다. 이 마을은 사르 산맥이 뒤에 우뚝 서 있고 가파른 길에 집들이 쏟아져 있는 듯한 모습이다. 중앙 광장에서 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변장한 30여 명의 남성들이 노란색 비옷을 입고 칼과 밧줄, 비닐봉지 등으로 준비하고 있다. 스위스의 나센트시 이주자가 기부한 7마리의 황소 고기를 요리하기 위해 버스 정류장에 대형 그릴을 설치하고 있다.
도축은 이슬람 원칙에 따라 순조롭게 진행된다. 고기 무게를 잴 저울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때 필요한 비닐봉지가 있다. 곧 한 남자가 도마 위에 갓 구운 콩팥을 들고 다니며 나누어준다.
이스마일리 줄리는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취리히에 있는 가족에게 실시간으로 동영상을 전송한다. 건설업자인 그는 은퇴를 앞두고 있으며, 일 년에 몇 번씩 차를 몰고 이곳 마을에 온다. 그리고 중앙 광장 수리나 바이람 행사용 소 구매 프로젝트를 위한 자금 모음에 도움을 준다.
취리히의 나센트시 공동체도 협동과 조직화가 잘 되어 스포츠 클럽 사르라는 장소에서 하는 행사에 보통 1,500명이 모인다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도 우리 문화와 뿌리를 가능한 한 많이 알아야 한다"고 덧붙인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체제 기간에 시작되어 발칸 지역에 흩어진 공동체는 수도 없이 많다.
줄리의 할아버지들은 여름마다 사르 산맥에서 양 떼를 몰고, 겨울엔 테살로니키 저지대로 내려왔지만, 그의 손자들은 교육을 받고 전통적인 일자리도 사라졌다. 그는 소셜 미디어가 개인적으로 그리고 공동체로서도 발전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아들은 인터넷을 통해 불가리아의 포막족에 관한 이야기를 읽는다"고 그는 말한다.
인터넷이 공동체 간 유대 강화에 도움이 됐다. “중단 없이 의사소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터넷에서 만난 고라 지방의 고라니인과 스위스의 고라니인이 결혼하는 일도 있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연락이 매우 잦아 마치 이곳에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