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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64, No. 42013년 7월/8월

In This Issue


3월 2일에 버클리 대학에서 공연 중인 아프가니스탄의 목소리, 왼쪽부터 아보스 코시모브, 페르베즈 사키, 호마윤 사키, 우스타드 파리다 마와쉬, 칼릴 라게브, 이즈마라이 아레프

1980년부터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은 미국 내 아프간 출신 거주자의 가장 큰 공동체의 거점이 되었다. 12만여 명 규모인 공동체 구성원 대부분은 이스트 베이의 프리몬트에 살고 있다. 빽빽한 이민자 거주 지역엔 전쟁으로 상처받은 아프가니스탄 예술과 음악의 전통을 간직한 훌륭한 음악가들도 있다. 그중에서 전설적인 가수 우스타드 파리다 마와쉬와 이중 챔버형 루밥 류트의 젊은 거장인 호마윤 사키는 아프간인들 사이에서 우상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그러므로 베이 지역의 많은 아프간인이 콘서트에 참석하기 위해 미로와도 같은 낯선 버클리 대학 캠퍼스를 찾은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관객 중 아프간인을 제외한 나머지는 대부분 이 음악인들을 잘 모르지만 문화적 호기심 때문에 찾은 사람들이다. 아프간인들은 그들 지역 내 공연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스타 파워의 정점을 확인하고, 처음 보는 사람들은 아프간 음악의 열정과 기교로 인한 매력에 압도당한다. 이런 매력과 아프간 공동체들의 모임은 이 그룹 사명의 핵심과 연관이 있다. 바로 버클리 콘서트의 문구를 빌리자면 전쟁이 아닌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아프가니스탄의 비전을 미국인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야성적인 기교”가 가능한 타악기 연주자 코시모브는 아프간과 우즈베크의 소리를 인도, 서아프리카, 재즈 소리와 혼합한다. 그의 주 악기는 도이라이다.

마와쉬는 자신이 "사랑의 메신저"라며 “일반적으로 예술, 그중에서도 특히 노래는 모두 사랑에 관한 것"이라고 간단명료하게 말한다. 낭만적인 고전 음악인 가잘이 마와쉬의 전문이며, 가잘은 사랑에 빠진 이들의 기쁨, 좌절, 아픔을 열정적으로 표현한다. 그녀의 맑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구슬픈 선율을 따라 흐르는 소리를 듣고, 그녀의 솔직하고 시름에 빠진 듯한 표정의 얼굴에 스치는 감정의 그림자를 보면 대부분 다리어와 파슈트어인 가사를 굳이 번역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66세의 나이로 우아한 옷차림과 코 옆에 보석이 박힌 하트 모양의 금 액세서리를 하고, 검은 머리는 모두 위로 올린 모습의 그녀는 수수하고 품위 있어 보인다. 그러나 고전적인 기교와 거친 음색이 간간이 섞인 맑은 목소리는 여전히 사랑을 실현하기 위한 여행을 떠나는 어린 소녀의 급박한 마음을 표현하기에 손색이 없다.

무대 위에서 마와쉬의 옆에 5명의 연주자가 있다. 그녀의 오른쪽엔 형제인 호마윤과 페르베즈 사키가 각각 루밥과 툴라(피리)를 연주하며 책상다리를 한 채 나란히 앉아있다. 마와쉬의 아들뻘 되는 나이인 호마윤 사키가 그룹의 음악 감독이다. 음악 대가인 아버지 우스타드 굴람 사키에게 클래식과 민속 음악을 모두 배운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였다. 2000년 된 악기의 한계에 만족하지 못했던 그는 멜로디 줄을 더해 루밥의 음역을 확장하고, 밴조의 격렬한 퍼커시브 스타카토부터 산투르(해머드 덜시머)의 땡그랑거리는 울림까지 다양한 소리를 내는 주법을 개발했다. 또한 사키는 타블라(핸드드럼)와 하모늄도 연주하며 아름답게 노래도 부른다. 가끔 마와쉬의 사랑에 고민하는 알토 음에 부드러운 테너 음색을 더하기도 한다.

마와쉬의 왼쪽엔 칼릴 라게브가 하모늄을 연주하고 있다. 마치 중년의 폴 매카트니 모습이 생각나게 하는 그의 잘생긴 외모는 이란에서 16년간 텔레비전 프로그램 진행자로 일한 경력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베이 지역에서 23년 동안 거주하면서 비슷한 일을 다시 시작했다. 라게브는 또 다른 아프간 출신 우상이었던 가수 아흐마드 자히르와 같이 공연하던 1977년에 처음 마와쉬와 같이 연주했다. 자히르는 아프가니스탄이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던 1979년 6월에 전성기를 누리던 중에 사망했다. 그 일을 계기로 라게브는 망명을 하게 되고, 10년도 더 지난 후에 마와쉬도 그의 뒤를 따랐다. 따라서 이 그룹에 속한 그들의 재회에서는 예의 바른 교류에서 느껴지는 깊은 향수를 느낄 수 있다.

양쪽 끝에는 두 명의 타악기 연주자가 있다. 타블라를 연주하는 이즈마라이 아레프와 도이라, 다프, 데르부카의 대가인 아보스 코시모브이다. 코시모브는 우즈베크인으로 유일하게 아프간 출신이 아니지만, 중앙아시아 음악에 대한 풍부한 지식은 이 그룹의 구성원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 역시 호마윤 사키와 마찬가지로 대단한 연주자이자 놀라운 혁신가이다.

코시모브의 주 악기인 도이라는 64개의 금속 링이 선을 따라 달린 작은 크기의 북으로 금속 링은 서로 충돌해 울리거나 악기의 표면 안쪽 벽에 부딪혀 소리를 낸다. 하지만 그는 인도의 타블라, 서아프리카의 젬베 심지어는 재즈 드럼 연주자들의 기술, 주법, 리듬 등을 빌려 와 도이라의 가능성을 넓혔다. 그는 요즘 전 세계에 제자를 두고, 인도의 타악기 대가인 자키르 후세인을 포함한 여러 세계적 음악인들과 함께 공연한다.

아프가니스탄의 목소리 프로그램 중에 낭만적인 가잘과 아프간 민요에서 벗어나 호마윤 사키가 두 명의 타악기 연주자들과 함께 까다로운 고전음악인 라가를 연주하기도 한다. 라가를 연주하기 위해서는 연주자가 멜로디와 리듬 구성에 대해 잘 알고 즉흥 연주 기술도 있어야 한다. 천천히 혼자서 시작하여 능숙하게 미끄러지고 선율을 울리며 악기의 소리를 탐험한다. 루밥은 인도 북부의 고전 음악에서 가장 유명한 악기 중 하나인 사로드의 시조이다. 하지만 이 긴 곡이 진행되면서 사키는 루밥의 진동 또는 공명하는 15개의 현을 손톱으로 튕겨 반복되는 멜로디의 흐름을 만드는 것과 같은 그만의 독특한 기법을 선보인다.

버클리 콘서트에서 호마윤은 타악기 연주자들, 특히 코시모브와 텔레파시라도 통하는 듯이 완벽하게 서로의 까다로운 즉흥적인 리듬을 맞춰준다. 라가가 끝날 즈음에 코시모브는 야성적인 기교를 선보이며 자유롭게 연주한다. 이를 악물고 눈을 반짝이면서 손가락이 마치 기계식 해머처럼 날리며, 폭발적인 비트 중에 몇 개의 손가락은 소총탄 처럼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그는 동시에 두 개의 도이라를 연주하면서 하나를 공중으로 던지고는 해당 구절이 끝나기 전에 다시 잡아 축제의 묘기처럼 손가락으로 접시인 양 도이라를 돌린다. 관객은 일어나 다 같이 함성을 지르며 환호한다. 그 후에 코시모브, 하마윤, 아레프가 다시 함께 긴장을 풀고 편안하게 흔들면서 마치 형제처럼 서로에게 미소 지으며 라가의 주 멜로디를 경쾌하게 되풀이한다.

라게브가 아프가니스탄의 목소리에서 연주하는 하모늄이라고 알려진 수동 펌프식 오르간은 본래 유럽에서 개발된 악기이며, 19세기 말부터 인도와 일부 중앙아시아 지역의 고전 합주단에서 사용되었다.

그다음엔 마와쉬의 가장 느리고 낮은 음의 가잘 중 하나인 “Ishq Mami Biya”(당신은 나의 사랑이자 영혼)를 시작한다. 마와쉬의 목소리는 잠시 사라졌다가 시원한 바람처럼 돌아오고, 때때로 나타나는 멈춤은 마치 다이아몬드의 흠과도 같다. 공연은 한결같이 기립박수, 앙코르, 또 한 번의 기립박수로 끝난다. 아프가니스탄의 목소리 공연은 상반된 세계가 만나 이 그룹의 사명이 훌륭하게 달성되었다.

물론 이런 결과가 쉽게 나온 것은 아니다. 마와쉬, 호마윤과 함께 이 그룹을 만든 다운 엘더는 세계 각지의 음악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일을 전문적으로 해왔다. 그녀는 이 프로젝트에 열정을 쏟은 지 2년 후에 “음악을 공유하는 것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선물”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의 목소리는 제게 영감을 줍니다. 놀라운 재능과 자연스러움 그리고 고국과 문화에 대한 깊은 사랑을 한데 모아줍니다. 세상은 이 음악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이 음악인들은 보수적이고 정치적으로 불안한 사회에서 과감하게 예술을 추구하기로 선택했던 수년 전부터 어려움을 겪었다. 아프가니스탄의 목소리에 속한 아프간 출신 단원 모두 각자 카불에서 시작해 1979년 러시아의 아프간 침공 이후 잦은 전쟁 때문에 수도를 떠난 아프간 음악인들이 향했던 파키스탄의 페샤와르를 거쳐 현재 이들이 사는 캘리포니아로 오게 되었다. 그러나 2012년에서야 엘더의 재촉에 정식 그룹으로 뭉쳤다.

이들 중에서 마와쉬 만큼 잘 알려진 혹은 참혹한 여정을 경험한 이는 없다. 현재 그녀는 프리몬트 대로 근처의 작은 집에서 남편 파로크 나크쉬반디와 함께 살고 있다. 버클리 콘서트 며칠 전에 부부는 엘더와 나를 집으로 초대했다. 집안엔 각종 상과 포스터 그리고 마와쉬의 음악 선생님,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음악인, 고인이 된 남아프리카 가수 미리암 마케바를 포함한 유명인들과 찍은 사진들이 가득했다.

타블라라고 부르는 핸드드럼과 현이 있는 루밥은 역사가 훨씬 길다. 호마윤 사키는 음악 거장이었던 아버지에게 연주하는 법을 배웠다.

꽃, 회전 춤을 추는 수도승, 노래하는 여성, 기발한 모양의 조각상으로 가득한 상자들이 있었다. 마와쉬의 응접실과 식당을 둘러보면서 40년 동안 5개 대륙에서 펼쳐진 그녀의 활동을 되짚어볼 수 있었다. 녹차와 아몬드 등의 간식을 즐기며 그녀는 어린 시절 카불의 집에서 어머니가 쿠란을 암송하는 소리를 듣고, 아름다운 멜로디가 들릴 때마다 본능적으로 따라부르며 자랐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마와쉬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좋았다"며 자신의 목소리도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못지않게 마와쉬의 성공에 영향을 준 사람은 그녀의 남편으로 한결같이 과감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 점은 이 부부의 시작을 생각하면 다소 의외이다. “저희는 사랑해서 결혼한 사이가 아닙니다. 미리 결정된 결혼이었습니다. 직접 만난 적도 없고, 서로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만 했습니다”라고 파로크가 말했다.

마와쉬가 중간에 끼어들며 서툰 영어로 “한 달 후에 파로크의 약혼자가 되었습니다. 3개월, 끝났습니다. 우리는 결혼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48년이 지나고, 햇빛이 비치는 프리몬트의 응접실에 앉아 있는 마와쉬와 파로크는 더없이 행복한 부부이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정중하고 다정했으며, 마와쉬가 노래를 시작할 때마다 파로크는 황홀해하며 다시 사랑에 빠지고 있다고 탄성을 지르기도 했다.

마와쉬는 노래를 전문적으로 시작하게 된 계기를 설명하며 "노래를 처음 들은 사람은 우스타드 카얄이었다"고 말했다. (우스타드는 "명인"을 뜻하는 존칭) 우스타드 하피즈 울라 카얄은 마와쉬가 비서로 일하던 사무실의 관리자였지만, 라디오 카불 방송국에서 음악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는 비서의 노래를 듣고 방송에 출연시켜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마와쉬는 “남편이 절 죽일 거에요”라고 말하며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알고 보니 그렇진 않았다. 파로크는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전 승낙한다고 했습니다. 물론 쉬운 결정은 아니었습니다. 제 가족과도 싸워야 하고 처가집 식구들과도 싸워야 했지만 책임을 지고 동의해 주었습니다." 곧 우스타드 카얄은 파리다 구알리리 아유비 나크쉬반디에게 "달과 같은"이라는 뜻의 마와쉬라는 이름을 지어주었고 그녀는 이 이름으로 알려지게 됐다.

두려우면서도 설레었던 마와쉬는 1967년에 라디오에 처음 출연하고 얼마 안 있어 정식으로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아프간의 유명 가수인 우스타드 후세인 칸 사라항은 라디오에서 그녀의 노래를 듣고 자신과 함께 공부하자고 권유했다. 그리고 2년간 공부했다. 사라항은 아버지에게 음악을 배우고 인도로 가서 고전 라가를 공부했다. 그는 우스타드가 되어 돌아왔지만, 마와쉬와 파로크가 기억하듯이 카불의 음악 마을 카라바트에선 좀 더 세속적인 이름인 “음악의 산, 음악의 제왕, 음악의 아들, 음악의 사자, 음악의 아버지" 등으로 알려졌다.

프리몬트에서 마와쉬는 1975년에 카불에서 찍은 흑백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비공식적으로 모인 자리에서 가운데 앉아 있으며, 검은 머리는 빵 모양으로 쌓아 올리고 돌돌 말린 머리가 얼굴 옆으로 내려와 있다. 그녀는 즐거워 보인다. 모두가 미소 짓고 있다. 그녀 옆엔 사진 찍히기 얼마 전에 마와쉬를 학생으로 받아들인 당시 유명했던 타블라 연주자인 하심 치시티가 있다. “우리 음악 문화에서는 전문적으로 누군가에게 음악을 배우기 시작할 때 일종의 공식 발표 차원에서 이런 식으로 축하해 주었다"고 마와쉬가 말했다. 이 사진에서 남성 음악인과 여성 음악인들 사이의 격의 없는 우정을 느낄 수 있다.

마와쉬는 "이때가 모든 아프간인의 황금기"였다고 애석한 듯 말하며 덧붙였다. “여성과 남성 모두가 나란히 함께 일했습니다. 지금은 TV에서 아프가니스탄이 나올 때마다 어깨에 총을 차고 터번이나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아프가니스탄 상황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의 목소리 멤버들은 각기 다른 시기에 아프가니스탄에서 파키스탄의 페샤와르를 거쳐 캘리포니아의 프리몬트에 정착했다. 위 왼쪽: 피리 연주자 페르베즈 사키와 비디오 예술가 사이드 안사리. 위 오른쪽: 루밥의 대가이자 공동 창설자 호마윤 사키.
De Management 제공
1970년에 파리다 마와쉬(왼쪽 아래)는 아프가니스탄의 음악 거장들이 그들과 같은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의식인 구르마니를 통해 카불에서 거장 음악인들의 인정을 받았다. 그 후 다섯 명의 딸을 낳았고, 1989년에 남편 파로크와 파키스탄으로 떠난 후 프리몬트로 왔다.

1977년에 마와쉬는 아프간 사람들의 생활에 미치는 서구의 영향을 재미있게 꼬집은 “O’Bacha”(헤이, 보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노래 중의 일부 구절은 "이봐요, 당신과 서양 춤을 추고 싶지 않아요. 당신과 차차차를 추고 싶지 않아요. 난 아프간 춤을 추고 싶어요. 난 발흐로가를 추고 싶어요"라는 가사가 있다.

이 노래는 마와쉬도 "한 곡에 7개의 노래가 있는 것 같다"고 했을 정도로 라가와 리듬이 많이 바뀌고 복잡하다. 다른 가수는 3개월 연습하고도 제대로 익히지 못했지만, 마와쉬는 하루 만에 배웠다. 아프간의 새 대통령 모하메드 다우드 칸은 이 공연을 주의 깊게 보고 나라의 영향력 있는 문화 인사들을 불러 의논했다. 마와쉬는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더니 제가 우스타드 타이틀을 받아야 한다는 데 동의했습니다"라고 당시를 회상하며 말했다. 그녀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최초로 그리고 지금까지 유일하게 우스타드 칭호를 받은 여성이다.

전국을 돌며 콘서트를 열고 예술 면에서 개방적이었던 마와쉬의 황금기는 1979년 말에 러시아가 탱크를 밀고 들어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 갑작스럽게 끝났다. 그녀는 아프가니스탄 중앙 은행에서 타이피스트로 일해야 했다. 하지만 2년 후에 국영 라디오 방송국의 새 경영진이 다시 조직 내 권력을 이동시키면서 마와쉬는 다시 초대되었다. 그 후, 8년 동안 국가 공식 가수로서 귀빈 방문객들을 위한 공연을 하고, 아프가니스탄 음악인들로 구성된 밴드와 함께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불가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동독 등 동유럽 국가를 돌며 공연했다.

마와쉬는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물론 아프간 사람들, 특히 외진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문제를 생각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정치, 전쟁, 공산주의,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러시아권 국가들에서 콘서트를 할 때면 오로지 문화, 제 음악과 노래에만 집중했습니다." 하지만 1989년에 무자헤딘의 저항운동이 러시아 관리 체제에서 힘을 얻으면서 카불에서의 싸움으로 이어졌다.

마와쉬는 이렇게 말했다. "무자헤딘이 도시에 로켓을 발사했습니다. 한 번은 우리 집과 딸이 다니던 학교 근처가 로켓 공격을 받았습니다. 전 깊은 상실감에 빠졌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습니다. 남편이 아프가니스탄을 떠나 파키스탄으로 갈 계획을 세웠습니다."

전쟁 중에 육로를 통해 아내와 5명의 딸과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파로크에게도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카불에서는 더는 살 수 없었다. 파로크는 "그래서 이렇게 무서운 여행을 하기로 받아들인 것"이라고 말하며 "살기 아니면 죽기였으므로 살려면 움직여야 했다"고 회상했다. 이들은 페샤와르에 비교적 짧게 18개월 동안 머물렀다. 이 시기에 딸 중 한 명이 이미 캘리포니아에 자리를 잡아 프리몬트에서의 긴 체류가 시작됐다.

호마윤 사키와 그의 동생 페르베즈는 어릴 때부터 음악과 함께 자랐다. 마와쉬가 이미 스타였던 1976년에 태어난 호마윤이 아기였을 때 깡통으로 리듬을 만들자 음악 거장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단숨에 아들에게 재주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굴람 사키는 당시 저명한 루밥 연주자였던 우스타드 모하마드 우마르(1980년 사망)에게 배운 적이 있다. 모하마드 우마르의 음악적 혈통은 카불의 지도자 아미르 셰르 알리 칸이 전통 방식으로 교육을 받은 음악가들을 인도에서 데려와 궁에서 연주하게 했던 18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은 예술 마을 카라바트를 설립했으며, 사키 가족과 그 밖의 많은 아프간 거장들이 이곳에서 지식과 기술을 연마했다. 카라바트가 페르시아, 인도, 아프간의 음악적 아이디어를 촉진하여 가잘에 대한 독특한 접근방식이 탄생해 가잘이 전국적으로 인기를 얻었으며, 카라바트의 타악기 연주자, 가수, 루밥 연주자들은 모두 전설적인 사람들이었다.

루밥도 예부터 전해진 고전 악기이다. 중앙아시아에서 유래했으며, 이란의 타르, 티베트의 단엔, 파미르의 루밥 등과 함께 이중 챔버형 류트에 속한다. 이슬람교 탄생 후에 카나카라고 불린 전통 아프간 음악의 경건한 스타일을 표현하는 데 루밥을 사용했다. 당시엔 창자로 만든 멜로디 현이 4개 있었으며, 공명현은 없었다. 오늘날엔 나일론으로 만든 멜로디 현이 3개, 금속 공명현은 14 또는 15개 있다.

루밥의 무거운 목제 몸통은 조각된 몸체, 페이스보드, 헤드스톡 이렇게 3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염소 가죽이 몸통의 개방된 앞면에 밴조처럼 팽팽하게 씌워져 있으며, 멜로디 현이 양의 뿔로 만든 다리를 지난다. 인도와 페르시아 음악의 영향을 받아 발전한 고전 루밥 연주 기술은 클로해머 밴조 주법과 거의 비슷하여 동시에 낮은 음과 높은 음이 단조롭게 선율에 스며들게 된다.

66세인 마와쉬는 자신이 "사랑의 메신저"라며 “일반적으로 예술, 그중에서도 특히 노래는 모두 사랑에 관한 것"이라고 말한다.

사키는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한다. "10살 때 매일 8시간, 10시간, 12시간씩 루밥을 연습했습니다. 모든 종류의 음악을 좋아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배웠습니다. 특히 파슈툰족의 음악과 스타르 연주를 좋아했습니다. 음악을 듣고 아버지에게 '이런 스타일로 연주하고 싶어요'라고 말하면, "그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 후, 이 어린이는 현지 민속 예술, 페르시아의 고전 방식, 심지어는 기타 음악에서까지 아이디어를 얻어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고난도의 기법으로 연주하는 놀라운 기술을 개발했다.

그는 마치 전도사처럼 “이 악기로 모든 것을 연주할 수 있다”고 말하며 “아프가니스탄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이 말은 사실이다. 사키는 지금까지 크로노스 현악사중주단, 베를린 필하모닉, 필라델피아 실내관현악단, 재즈 및 팝 음악가, 그리고 당연히 수많은 인도 및 아프간 가수들과 함께 공연했다.

“왜 안 되나요?" 자신의 민족 정체성과 관련해서도 구분 짓기를 거부하는 그가 물었다. 사키 가족은 다리어를 사용하지만 그는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 그는 "전 아프간 사람입니다. 파슈툰, 다리, 타지크와 상관없이 아프간 사람입니다”라고 주장한다.

2012년 9월에 아프가니스탄의 목소리 팀은 미국 최초로 민족 음악학 박사 과정을 개설한 코네티컷주 미들타운의 웨슬리언 대학교에서 4일간 머물렀다. 1971년부터 이 대학에서 강의한 마크 슬로빈 교수는 아프가니스탄이 전쟁에 휘말리기 전에 아프간 음악을 깊이 있게 연구한 3명의 학자 중 한 명이다.

슬로빈 교수는 이 팀의 어린 연주자들이 태어나기 전의 사진, 동영상, 음반, 악기를 보여주어 이 아프간 음악인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사키를 온도 제어 기능이 있는 웨슬리언 대학 악기 박물관으로 데려가 학교에 기증된 루밥을 꺼내 보여주었다. 사키는 이 악기에 감탄하며 슬로빈 교수에게 이 루밥이 거친 다양한 수리 및 장식 과정 등 전문가의 눈에만 보이는 역사를 상세히 알려주었다. 사키는 이 악기가 슬로빈 교수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이른 19세기 말에 제작되었다고 말했다.

버클리 콘서트 전날 밤에 아프가니스탄의 목소리 팀은 호마윤과 페르베즈 사키가 사는 프리몬트의 작고 현대적인 집에 모였다. 호마윤은 인도에서 출발해 두바이와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막 도착해 매우 지쳐있었다. 그럼에도 리허설을 제대로 진행하고, 합주 부분을 가다듬고, 칼릴 라게브의 하모늄 반주를 수정하고, 자신의 루밥으로 타악기 연주자를 위해 리듬을 두드리고, 가끔 부드럽게 마와쉬에게 지시를 하기도 한다. 이 음악인들은 서로 스스럼없이 지내며 매우 프로다웠으며 캘리포니아 환경에 만족했다.

파로크는 "이곳에 모스크, 결혼식장, 이민 수속, 신분증, 시민권 등의 업무를 돕는 사무실, 아프간 음식을 파는 시장 등 우리 공동체가 있다"고 말했다. 심지어 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언덕도 아프간 기준에서는 매우 작고 항상 푸른색을 유지하지만, 카불 근처의 장엄한 산봉우리들을 생각나게 한다. 엘더와 나는 마와쉬, 파로크, 호마윤, 아레프가 리틀 카불 주변을 안내해 주어서 이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우리는 작은 길가 상점의 전시실에서 아프간 카펫을 살펴보았다. 상점 주인은 우리의 방문에 기뻐하며 버클리 콘서트 무대를 장식할 카펫 5개를 대여하는 데 동의해주었다. 우리는 잠잠(Zam Zam)과 리틀 카불 시장을 둘러보았다. 이들 시장은 헤라트에서 수입한 쌀, 소스, 사프란과 연, 전통 의상, 장신구, 그리고 당연히 아프간 음악과 영화를 담은 CD와 DVD 등을 판매한다.

캘리포니아에는 5개의 아프간 TV 방송국이 있으며, 위성 중계를 통한 다양한 중앙아시아 매체도 있다. 우리가 마이완드 케밥 하우스 & 베이커리에서 속에 채소나 감자를 넣고 튀긴 납작한 빵인 불로니, 양고기, 밥, 코프타, 녹차로 만찬을 즐기는 동안 한 방송국에서는 아프간 드라마가 낮은 소리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음식은 모두 맛있었다.

De Management 제공
전 세계를 돌며 클래식, 재즈, 팝 음악 연주자들과 공연을 하는 호마윤과 팀의 다른 멤버들은 미국과 아프가니스탄의 학교도 방문한다, 위.

식사하는 동안 엘더는 마와쉬에게 아프가니스탄 방문에 관해 질문했다. 마와쉬는 2007년 이래 아프간에서 5번 공연했다. 자신이 가수가 되길 바라는 어린 아프간 여성들의 롤모델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마와쉬는 질문을 듣고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했다. "상황이 변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가수로 활동하던 시절의 저는 매우 소박했습니다."

마와쉬는 대부분 다른 나라에 흩어져 있는 오늘날 아프간 음악계의 젊은 여성들이 전통에 관한 정식 교육이나 지식이 부족한 점을 안타까워했다. “딸들은 어떻습니까?” 엘더가 계속 물었다. “딸 중 한 명이 음악가나 가수가 되길 원한다면 도와주시겠어요?”

“아니오,” 마와쉬가 영어로 대답했다. “음악은 안 됩니다. 인생이 매우 고달파집니다. 여성들은 자기 일로 존경받지 못해요.” 마와쉬는 자신이 젊은 여성이던 시절에 음악을 하기로 선택했다. 그녀의 목표는 사회적 질서를 뒤집는 것이 아니었다. 아프간의 상황 때문에 그녀의 선택이 혁명적인 것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삶을 권하길 주저하면서도 마와쉬에겐 아프간 소녀들이 유명인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음악을 배울 수 있는 학교를 세우는 꿈이 있다.

요즘 파로크와 마와쉬가 카불에 돌아가 머무는 동안 느끼는 가장 큰 감정은 프리몬트에 대한 그리움이다. 마와쉬가 아프가니스탄의 목소리에서 활동하는 이유는 대단한 상업적 성공에 대한 환상 때문이 아니다. 아프간인들을 위한 부유층 행사에서도 많은 돈을 벌 수 있다. 진짜 이유는 관대하게 그녀의 가족과 아프간 공동체를 받아준 미국에 어떤 식으로든 보답하고, 심각한 문제를 겪고 있는 고국을 돕기 위해서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난 일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특히 삶과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사람들이 안 됐습니다. 신은 이슬람교도만이 아닌 모든 인간의 신입니다. 그래서 전 모두를 위해 기도합니다"라고 마와쉬는 말했다.

첫 번째 음반인 인간을 위한 사랑 노래(2013년 출시 예정)의 마무리 작업을 위해 엘더와 스튜디오로 돌아오면서 아프가니스탄의 목소리(Voices for Afghanistan) 음악인들 모두 각자 고국에 대해 마와쉬와 비슷한 생각을 말해주었다. 음악을 통해 과거 조상의 문화와 깊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또한 운명을 통해 이웃이 된 많은 이방인과 교류하는 강력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배닝 에어는 작가, 기타리스트, 라디오 프로듀서, 저널리스트, Afropop.org의 선임 편집자이다. PRI(Public Radio International)의 Afropop Worldwide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12개국 이상의 아프리카 국가에서 현지 음악을 연구했다. 그는 NPR의 All Things Considered라는 프로그램에서 세계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으며, 최근에는 Afropop Worldwide에서 이집트의 음악과 역사에 대한 시리즈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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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article appeared on page 32 of the print edition of Saudi Aramco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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