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 65, No. 12014년 1월/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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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트로 델라 발레 호기심 많은 순례자 - 글: 캐롤라인 스톤
피에트로 델라 발레(Pietro della Valle)는 1614년부터 1626년까지 12년간 동양을 여행했다. 그가 여행 중에 고향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땅을 알리기 위해 자세히 쓴 편지는 1650년, 1658년, 1663년에 세 권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이탈리아인 장서가이자 언어학자이며 열혈특파원인 피에트로 델라 발레(Pietro della Valle)는 17세기에 중동을 여행한 사람 가운데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덜 알려진 사람 중 하나이다. 그는 서양에 이슬람 세계를 알리는 데 아주 활발히 이바지하고 낭만적인 개인사가 있는데도 비교적 알려지지 않았는데, 대체로 이탈리아어든 영어든 그의 방대한 편지의 표준판을 구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터키에서 이집트, 레반트, 페르시아, 인도 서부 해안에 이르는 여정을 기술하는 데에 백만 단어를 넘게 썼다.

델라 발레는 생생하고 자세한 설명과 끊임없는 호기심 면에서 그 가치가 높다. 그는 정말 다방면에 관심이 있었다. 가능한 경우에는 자신이 본 것을 이전 기록과 비교했는데, 고대 기록과 프랑스 박물학자 피에르 블롱(Pierre Belon)(1517–1564)과 같은 여행자의 기록뿐만 아니라 자신이 접근할 수 있던 터키, 페르시아 및 아랍 문헌에서 찾은 정보와도 비교했다.

자신이 찾은 사실을 기록하는 것 외에 전해 들어 안 정보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태도를 적절히 보였는데, “이렇게 들었지만, 사실인지 아닌지를 규명할 방법이 없다”거나 “이에 대해 더 알아보려고 했지만 믿을 만한 정보를 가진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고 기록했다.

델라 발레는 1615년에 기자 피라미드를 처음 보고 몹시 흥분했고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 대피라미드를 직접 답사했다. 이 판화는 델라 발레가 방문한 때로부터 60년 후인 1676년에 출판된 장 바티스트 타베르니에의 여섯 번의 여행(Les Six Voyages de Jean-Baptiste Tavernier)에 실려 있다.
델라 발레는 1615년에 기자 피라미드를 처음 보고 몹시 흥분했고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 대피라미드를 직접 답사했다. 이 판화는 델라 발레가 방문한 때로부터 60년 후인 1676년에 출판된 장 바티스트 타베르니에의 여섯 번의 여행(Les Six Voyages de Jean-Baptiste Tavernier)에 실려 있다.

델라 발레는 책, 식물, 온갖 정보를 수집했고 여행을 기록하기 위해 화가를 데려가기도 했다. 자신은 주로 많이 배우고 오는 데에 관심이 있었지만, 상업 및 외교적인 이유로 인해 고향 사람들에게 동양 국가에 대한 지식을 명확히 알려주고 싶었다. 불행히도 그가 언급하는 수많은 스케치와 그림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델라 발레는 1586년에 부유한 로마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20대 중반에 북아프리카 해적을 토벌하기 위한 스페인 해군 원정에 합류했다. 이후 사랑에 낙담하여 나폴리로 이주했고, 이곳에서 우울증이 심해 자살을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자, 가까운 친구인 물리학자 마리오 쉬파노(Mario Schipano)가 여행을 권유했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나기로 했다. 델라 발레는 여행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친구에게 자세한 편지를 보내기로 계획했다. 그는 “친구가 내 전체 순례를 명확하게 설명하는 명문을 뽑아낼 것”이라고 썼다. 실제로 쉬파노가 그렇게 하지는 못했지만 델라 발레는 약속한 자기 역할 이상을 완수했다. 그는 여행을 떠난 후 12년간 모험을 즐긴 다음 귀향했고 이 순례자(il Pellegrino)(종종 자신을 이렇게 불렀다)는 편지를 묶어 한 권의 책으로 냈다(다른 두 권은 사후에 나옴).

델라 발레는 사막 안내자에게 깊이 감동했다. 그들은 “모든 장소, 수원, 길고 짧은 다양한 길에 대한 이미지를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다.”.

델라 발레는 1614년 6월에 성지를 향해 출발하여 베니스에서 콘스탄티노플(오늘날의 이스탄불)까지 항해했다. 오스만 제국 수도에서는 건축물뿐만 아니라 라마단 기간의 끝을 기념하고 그네와 아잘라트(ajalaat)(초기 형태의 페리스휠) 등을 특징으로 하는 바이람(bayram) 축제, 술탄 아마드 1세와 그의 군대가 페르시아의 샤 압바스 1세와 싸우기 위해 행진하는 열병식 등의 행사도 짬을 내어 보았다. 그런 다음 여행에서 볼 광경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플에서 1년간 머물며 터키어, 아랍어, 페르시아어를 공부하고 학문적 목적으로 히브리어도 배웠다.

1615년 2월에 그는 “너무 짜증이 난다. 터키어 선생이 자기 일이 바쁘다며 두 달이 넘게 나를 방치했다. 하지만 이제 돌아와서 수업하고 있어서 기쁘다. 좋은 일을 목표로 미친 듯이 공부하고 있다.”라고 했다.

델라 발레는 윌리엄 블런트(William Blunt)의 피에트로의 순례: 인도로의 여정과 17세기 초로의 복귀(Pietro's Pilgrimage: A Journey to India and Back at the Beginning of the Seventeenth Century)에 나온 1953년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수천 킬로미터를 여행했다. 처음으로 잠시 머문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에서 1년을 지내며 터키어, 아랍어, 페르시아어, 히브리어를 배웠다.
델라 발레는 윌리엄 블런트(William Blunt)의 피에트로의 순례: 인도로의 여정과 17세기 초로의 복귀(Pietro's Pilgrimage: A Journey to India and Back at the Beginning of the Seventeenth Century)에 나온 1953년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수천 킬로미터를 여행했다. 처음으로 잠시 머문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에서 1년을 지내며 터키어, 아랍어, 페르시아어, 히브리어를 배웠다.

콘스탄티노플에서 델라 발레는 유능한 아랍어 학자인 쉬파노와 훌륭한 도서관의 핵심부를 짓겠다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 문헌을 확보하려는 시도를 시작했다.

1615년 9월에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항해했다. 카이로에서 1616년 1월 25일에 보낸 편지에서는 관광을 묘사하면서 맘무크 건축, 특히 알-아라파(al-‘Arafa)에 있는 무덤인 유명한 죽은 자들의 마을(City of the Dead)이 아름답다고 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피라미드를 방문하여 대피라미드의 내부 통로를 답사하느라 진을 뺐다.

델라 발레는 온전한 미라를 이탈리아로 가져가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러나 표본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미라는 차고 있는 보석을 빼앗긴 후 갈아져서 가루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렇게 얻은 가루인 무미아(mummia)가 약효 성분이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평상시에 델라 발레는 미라가 어떻게 발굴되었는지 정확히 보고 싶어 했고 직접 구덩이로 내려가기도 했다. 그가 이런 작업을 설명한 내용은 대단히 흥미로우며, 발굴물에 대한 설명도 마찬가지로 흥미롭다.

타베르니에의 판화에 나온 티그리스 강가의 17세기 바그다드. 피에트로 델라 발레가 1616년에 이 도시에 도착했을 때의 모습이 이와 같았을 것이다. 이곳에서 델라 발레는 “바빌로니아인 연인” 마니(Ma‘ani)를 만나 결혼했다.
타베르니에의 판화에 나온 티그리스 강가의 17세기 바그다드. 피에트로 델라 발레가 1616년에 이 도시에 도착했을 때의 모습이 이와 같았을 것이다. 이곳에서 델라 발레는 “바빌로니아인 연인” 마니(Ma‘ani)를 만나 결혼했다.

늘 그렇듯이 델라 발레는 대단한 관광지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는 몇몇 집의 경우 집주인이 메카 순례(하지(Hajj))를 다녀왔음을 나타내는 글과 그림이 벽에 새겨져 있다고 했다. 이탈리아인답게 옷에 관심이 많아서, 상류 계급의 의상뿐만 아니라 남녀 가리지 않고 소작농이 입은 파란색 젤라바(jellaba)(아주 길고 소매가 넓은 예복으로, 베들레헴 지역에 정착한 특정 베두인 집단이 지금도 입는 토브(thobe)인 것 같음)와 터번을 감는 다양한 방법도 설명했다.

델라 발레는 부활절 기간을 보낸 예루살렘 순례를 설명하면서 비록 독실하기는 했지만, 일부 축전에 대해 어느 정도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 후 북쪽의 다마스커스로 여행했고, 이곳에서 기쁘게도 희귀한 사마리아인의 필사본을 여럿 발견했는데, 그중 하나에는 아랍어 주석도 있었다. 알레포에서 쉬파노에게 편지를 써서 기쁜 소식을 전하고 주된 목표인 지식 전파를 위해 수집품을 보급하는 최선의 방법을 논의했다.

델라 발레는 시리아에서 바그다드를 통해 페르시아로 여행하기로 했다. 무역뿐만 아니라 오스만 제국 황제의 야망을 견제하기 위해 유럽 통치자들과의 외교 논의에 참여한 샤 압바스(Shah Abbas)를 무척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평소대로 활기가 넘쳐 주방 기구를 낙타로 쉽게 운송하고 떨어지더라도 내용물을 보호하기 위해 특수 상자를 제작한 방법을 설명했다. 또한, “물을 냄새와 맛이 아주 좋게 하고 시원하게 보존”하기 위해 특수 용기도 주문했다. 모든 것이 “최대한 격조 높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였다. 마지막으로 1616년 9월 16일에 머리를 깎고, 터번을 쓰고, 자신과 수행원이 “눈에 띄지 않도록 시리아식으로” 옷을 입고 출발했다.

델라 발레와 수행원은 도시를 여행하는 동안 이와 같은 칸(khan)에 머물렀다.
델라 발레와 수행원은 도시를 여행하는 동안 이와 같은 칸(khan)에 머물렀다.

이라크에서는 베두인족의 생활 양식을 길게 설명하면서, 여성이 얼굴을 덮지 않았다고 했다. 또한, 베두인족의 문신에도 관심이 많아서 직접 문신을 했다고 하는데, 당시 로마 신사로서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실제로 그는 편하기도 하고 다른 패션을 경험하기 위해 현지 옷을 입길 좋아했다. 그러나 자신의 질 좋은 이탈리아산 속옷을 도둑맞았을 때는 몹시 언짢아했다. 도둑이 책과 서류를 가져가지 않는 것에는 안도했지만 말이다.

델라 발레는 사막 안내자에게 깊이 감동하였다. 그들은 “모든 장소, 수원, 길고 짧은 다양한 길에 대한 이미지를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다.”라며 “밤에는 별을 관찰하지만, 낮에는 오르막인지 내리막인지를 나타내는 지형지물, 색, 자라는 식물종, 그리고 정말 경이롭게도 냄새로 길을 찾아서 어디든 원하는 길을 쉽게 찾는다.”라고 썼다. 더욱더 놀랍게도 안내자는 필요할 땐 언제든 카라반을 우물로 즉시 안내했는데, 난간이 없고 멀리서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델라 발레는 힘이 막강하고 유명한 아미르 파야드(Amir Fayyad)의 영토를 지나가게 되었는데, 카라반이 상당히 안전하게 사막을 건널 수 있도록 자신의 영토를 확실히 지배하는 왕이 놀랍고도 기뻤다. 아미르 파야드와 그의 땅을 묘사하면서 델라 발레는 “… 이 왕은 노아의 대를 잇는 혈통임을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믿기 어렵지만 그럴 경우 세상에 둘도 없는 고귀한 일일 것이다. 장구한 세월 동안 진실하고 아주 오래된 혈통의 고귀함을 유지하는 국가라면 자랑할 만하다는 점은 분명하니, 아랍인이 정말 그렇다. 그 이유는 그들이 사막에서 험난하게 살지만, 무엇보다 자유롭게 살기 때문이고(이 점은 매우 중요하며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아랍인은 도시의 삶에 종속되길 원치 않는다), 태초 이래로 아랍 국가는 다른 나라와 엮이지 않아서, 항상 자기들끼리 즉, 계급이 같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핏줄이 같은 사람하고만 결혼한다는 점 때문에도 그렇다.”

이스파한은 1617년에 델라 발레가 방문했을 당시 샤 압바스 1세의 감독 아래 대규모로 재건되어 있었다. 델라 발레는 오랫동안 이 도시를 보고 싶었지만, 그의 가장 큰 관심은 샤 압바스를 만나는 것이었다.
이스파한은 1617년에 델라 발레가 방문했을 당시 샤 압바스 1세의 감독 아래 대규모로 재건되어 있었다. 델라 발레는 오랫동안 이 도시를 보고 싶었지만, 그의 가장 큰 관심은 샤 압바스를 만나는 것이었다.

델라 발레는 여행 중 될 수 있으면 늘 고고학 유적지를 모두 방문했다. 예를 들어, 알레포에서 바그다드로 가는 사막에 있는 “Isrijeh” 및 “al-Taijbeh”(이즈리야(Isriyah) 및 알-타이바(al-Taybah))의 유적뿐만 아니라 바벨탑이라고 생각되는 유적도 묘사했다. 그는 장소를 쉬파노와 잠재 독자에게 익숙한 이탈리아의 장소와 비교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약간 편협한 지역주의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 로마의 “나보나 광장보다 크다”나 “나폴리에서 가장 높은 궁전보다 높은 유적”과 같은 비교는 더 이상 존재하는 않는 건축물의 크기를 가늠하는 데 유용하다.

그는 우르와 크테시폰에서 타일 조각, 벽돌, 역청 견본 등을 수집했는데 “이러한 진기한 물건에 대한 우리의 취향을 이해하지 못하는” 지역 사람의 웃음을 샀다고 적었다. 또한, 바그다드는 흔히 생각하는 대로 고대 바빌론이 확실히 아니라고 지적하고, “분명히 알 수 있듯이 … 건축, 수많은 장소에 새겨진 아랍어 글, 회벽의 조각이나 조형은 … 근대 건축 양식이며 의심의 여지 없이 이슬람의 것이다….”라며 아랍어가 곧 좋아져서 아랍 역사에 대해 들은 내용을 확인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덴마크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Tycho Brahe)의 태양 중심 우주론에 대한 델라 발레의 논문. 이탈리아어와 페르시아어로 썼고 브라헤의 태양계 모형이 포함되어 있다. 델라 발레는 고아에서 페르시아의 라르에서 만난 학자를 위해 논문을 썼다.
덴마크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의 태양 중심 우주론에 대한 델라 발레의 논문. 이탈리아어와 페르시아어로 썼고 브라헤의 태양계 모형이 포함되어 있다. 델라 발레는 고아에서 페르시아의 라르에서 만난 학자를 위해 논문을 썼다.

델라 발레가 바드다드에 도착했을 때 참사가 일어났다. 어리석은 우선권 다툼에서 한 이탈리아 하인이 다른 하인을 죽인 사고였는데, 델라 발레는 전체 식솔이 구속되지 않게 하는 데 필요한 묘책을 상세히 기술했다. 한편, 바그다드에서는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바빌로니아인 연인”과 결혼했다고 느닷없이 발표한 것이다. “‘중요성’ 또는 ‘지능’을 의미하는 아랍어인....” 마니(Ma‘ani)라는 이름의 여성이었다.

낭만적인 이야기였다. 그는 알레포에서 오는 여정에 마니에 대해 듣고 그녀를 만나야 한다고 결심했다. 이 둘을 모두 아는 지인이 이 만남을 주선한 것이다. 그녀의 부모는 그를 최고로 따뜻하게 환대했고 적당한 숙소를 마련하도록 도왔다. 마니는 보기도 전에 그에 대한 환상을 품었고 처음 만났을 때 모과를 건네주었다. 그리스 로마 시대 이후 그리스와 레반트 전역에서 청혼 의식이었다. 둘 다 첫눈에 반한 사랑이었다.

델라 발레는 “남편이 아내의 미모를 과장하는 건 좋게 보이지 않지만” 마니를 길게 묘사할 수밖에 없었고 그녀가 콜(kohl, 일종의 아이섀도)로 눈을 길쭉하게 보이게 하는 방법을 설명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가 터키의 마르딘에서 태어난 우수한 가문의 크리스천이고 어머니 아르메니안(Armenian)은 “아랍어가 모국어이지만 터키어도 해서 아랍어를 약간만 아는 나와는 대개 터키어로 말한다…”라고 설명했다. 계속해서 그녀의 지능, 열정, 용감함이 얼마나 대단한지 말했다. 노상강도가 공격해 왔을 때도 달아나지 않고 자리를 지키며 남자의 코트와 짐을 보호했다.

밤에 왕은 이스파한 곳곳을 거닐며 커피점과 이탈리아인 미술상의 상점을 비롯한 여러 상점에 들렀다.

델라 발레는 마니가 이탈리아 패션의 개념을 아주 좋아하긴 했지만, 시리아식으로 입었고 머리는 “베두인족 여성처럼 둘렀는데… 수녀나 스페인 미망인의 베일과 비슷…”하다고 썼다. 한편, 그녀에게는 약간 미개해 보이는 몇 가지가 있다고 인정했는데 예를 들어 코걸이를 한 경우 그녀를 설득해 떼게 했지만, 그녀 동생은 거부했다고 말했다.

델라 발레는 1616년 12월 16일과 23일에 이 긴 편지(편지 대부분은 여러 날과 주 동안 쓴 일기 형식이었다)를 일단락 지으며, 쉬파노가 편지 편집에 착수하길 바랐다. 이스파한을 방문한 직후 귀국할 계획이었으므로 머지않아 둘이 마주 않자 마지막 손질을 할 수 있기를 희망했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 이후 이 젊은 부부는 이란을 향해 떠났다. 델라 발레는 “옷을 시리아식에서 페르시아식으로 바꿔 입었다”고 썼다. 또한, 지역 이발사에게 지난 16개월간 기른 수염을 면도했다. “완전히 페르시아 사람처럼 보이게 해달라고 했다. 즉, 뺨과 턱의 수염을 말끔히 깎고 콧수염은 길게…”라고 적었다. 마니는 이런 그를 보고 “비탄”에 빠졌고 “다른 나라를 여행할 때는 다른 풍습에 적응해야” 한다는 그의 설명을 듣고서야 화를 가라앉혔다.

3개월 후 델라 발레가 그렇게 방문하고 싶었던 도시 이스파한에 도착했는데, 이때는 샤 압바스가 오늘날 볼 수 있는 위대한 모스크와 건축물로 이 도시를 리모델링하고 있었다. 델라 발레는 그곳과 주민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는데, 특히 다양한 사람과 그들이 입는 의복, 그중에서도 뉴줄파(New Julfa)의 인도인 공동체와 크리스천 구역에 감명받았다. 이 지역은 샤 압바스가 본국에서 강제로 추방당한 아르메니아 사람들을 위해 세웠는데, 대체로 이들이 제조와 무역을 통해 경제를 촉진할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델라 발레는 아르메니아인이 이 과정에 겪은 끔찍한 고통을 설명했지만 뉴줄파에 실제로 도착했을 때의 상황은 대체로 좋았다.

델라 발레는 1621년 해안을 따라 이스판에서 호르무즈로 가는 도중 페르페폴리스에 머물며 유럽에서 발견된 최초의 설형 문자 비문을 복사했고 나중에 출판했다. 그는 이 글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는다고 정확히 추정하긴 했지만 해독하지는 못했다.
델라 발레는 1621년 해안을 따라 이스판에서 호르무즈로 가는 도중 페르페폴리스에 머물며 유럽에서 발견된 최초의 설형 문자 비문을 복사했고 나중에 출판했다. 그는 이 글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는다고 정확히 추정하긴 했지만 해독하지는 못했다.

이스파한에서 델라 발레는 다양한 국적의 학자를 비롯해 흥미로운 사람을 여럿 만났다. 그들 중 무하마드 카심 이븐 하지 무하마드 카샤니(Muhammad Qasim ibn Hajji Muhammad Kashani)(수수리(Susuri)라고 함)는 나중의 자신의 백과사전 마즈마 알-푸르스 수수리(Majma’ al-Furs Susuri)의 사본을 1626년에 보내주었다. 이 사본을 완료한 해였다. 샤 압바스에게 헌정된 이 책은 17세기 대부분 동안 표준 참고서였다. 다시 델라 발레는 터키어 사전을 작업하고 있었으므로 이 책에 특히 관심이 많았을 것이 틀림없다. 이 사전은 그의 다른 많은 프로젝트와 달리 완성되어 출판할 준비도 되었지만 결국 출판되지는 않았다. 한편 종교에도 관심이 있었는데 “이스파한의 구족인 미르 무하마드 엘 베하비[알-와하비](Mir Muhammad el Vehabi[al-Wahhabi])”에서 받은 편지의 사본에서는 종교 주제인 생존에 대해 둘 사이의 이전 논의를 계속했다.

샤 압바스가 자기 왕국을 둘러볼 때 델라 발레가 동행했다. 이들의 만남과 대화는 이 군주가 제공한 접대에 대한 비공식적이지만 보기 드문 정보를 제공한다.

캐즈빈에서 1618년 겨울에 샤 압바스는 외국 대사들을 만났고 델라 발레는 정보를 최대한 많이 수집할 계획을 세웠다. 여기서 러시아인은 무례하다고 보았지만, 인도 대사가 선물로 가져온 야생 동물에는 무척 흥미를 보였다. 나이가 많은 스페인 대사 돈 가르시아 다 실바 이 피게로아(Don Garcia da Silva y Figueroa)도 참석했는데, 그의 일기는 델라 발레의 설명을 흥미롭게 보완한다.

이 모임이 끝나고 델라 발레는 아픈 몸으로 마니와 함께 이스파한으로 출발해서 12월에 도착했다. 거기서 부모를 비롯해 방문한 몇몇 가족을 만났다. 델라 발레는 그때 처음으로 마리우치아(Mariuccia)를 언급했다. 이 여덟 살난 그루지야 소녀는 페르시아가 그루지야를 점령할 때 고아가 되었고, 마니가 아직 아이가 없는 것을 어느 정도 위안받기 위해 입양했던 것 같다.

1619년 6월에 대사의 대규모 비밀회의가 또 한차례 있었고 델라 발레는 경축 행사를 생생하고, 종종 재미있게 설명했다. 여성을 위해 조직된 행사도 있었는데, 이 경우 마니가 자세히 보고했다. 이를 통해 밤에 왕이 도시 곳곳을 거닐며 커피점과 상점을 방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이탈리아 미술상의 상점이 그중 하나인데, 여기서는 주로 “나보나 광장에서 1크라운에 파는 종류의 초상화를 팔았는데..., 여기서는 10시퀸에 팔았고 그것도 아주 저렴한 것으로 여겨졌다”고 했다. 크라운(코로나토(coronato))은 나폴리 은화이고 시퀸(베니스 제키노(zechinno))은 무게가 약 3.5g인 금화였으니, 가격 인상이 상당했다.

이스파한에 예상보다 오래 머물면서 델라 발레는 현지 요리의 맛에 더욱 익숙해지다가 고국 음식에 다시 적응하는 방법, 얼음을 저장하는 여러 기술, 많은 수를 갖고 있던 페르시안 고양이를 이탈리아로 수출할 계획 등 사소한 것에서 진지한 것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주제를 다루었다. 그의 설명은 아랍어와 페르시아어 단어, 특히 쉬파노를 염두에 두고 기술 용어와 방언 표현을 드문드문 포함하고 있지만, 지금도 여전히 흥미롭다.

지금에서조차 놀라운 것 중 하나는 당시 이슬람 세계의 효율적인 우편 체계다. 델라 발레는 매일 편지를 쓰고 때론 절을 인사로 시작해서 인사로 끝내는 습관이 있어서 쉬파노에 보낸 편지의 정확한 수를 결정하기 어렵지만, 36개 이상은 되는 것 같다. 이 편지 중 하나만 사라졌는데, 쉬파노가 잃어버린 것이다. 반대로 델라 발레가 베니스, 시실리, 프랑스, 스페인, 콘스탄티노플, 바그다드, 인도에서 편지를 받고 친구가 보낸 편지는 없다고 불평했는데, 이것은 우편 제도의 잘못이 아니라 쉬파노가 2년 이상 편지를 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니의 가족은 바그다드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1232년 이래 가장 추웠던 1620~1621년의 혹독한 겨울 날씨로 인해 델라 발레의 건강이 나빠졌고 마찬가지 그의 생각도 고향 쪽으로 기울었다. 하지만 국제 정치가 계획에 영향을 미쳤다. 페르시아와 터키의 전쟁으로 알레포 노선이 차단되었으므로 결구 그와 많은 다른 유럽인은 갇힌 꼴이 되었다. 또한, 페르시아가 영국과 연합하여 포르투갈인을 페르시아 만 남쪽 끝의 호르무즈에서 몰아내어, 이 노선도 불안하고 위험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출발했다.

도중에 페르페폴리스에 들렀는데, 델라 발레는 이곳에서도 평소대로 자세히 묘사했지만, 항상 정확하지만은 않았는데 그답지 않기 서두르는 경향이 있었다.

페르페폴리스에서 시라즈로 가서 연안을 향해 출발했다. 마니가 드디어 임신해서 분위기가 좋을 때 인도를 통해 유럽으로 가는 배를 따려고 했던 호르무즈 근방에서 교전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이 왔다.

1621년 호르무즈 근방 미나브에서 23세에 죽은 마니 델라 발레를 위한 문장으로, 1626년 로마에서 열린 장례식을 위해 제작된 기념출판물의 첫 부분이다. 시리아어로 새겨진 글은 “하나님의/ 종 / 마니”라는 의미다.
1982년 바그다드에서 출간된 델라 발레의 여행에 대한 이 인쇄본에는 마니의 초상화가 실려 있다.
: 1621년 호르무즈 근방 미나브에서 23세에 죽은 마니 델라 발레를 위한 문장으로, 1626년 로마에서 열린 장례식을 위해 제작된 기념출판물의 첫 부분이다. 시리아어로 새겨진 글은 “하나님의/ 종 / 마니”라는 의미다. : 1982년 바그다드에서 출간된 델라 발레의 여행에 대한 이 인쇄본에는 마니의 초상화가 실려 있다.

미나브 근처에서 기다리면서 상황 전개를 지켜보기로 했다. 이곳에는 일군의 영국 상인이 있었는데, 그중 델라 발레의 오랜 친구가 하나 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건강에 좋지 않았다. 마리우치아가 먼저 병이 들었고, 차례대로 일행 모두가 뒤를 따랐고, 12월 30일에 사랑하는 마니가 죽었다. 그녀 나이 고작 23살이었다.

델라 발레는 이제 어떻게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마니를 이런 곳에 도저히 남겨둘 수 없어서 이탈리아의 장지로 가져 가기 위해 시체를 방부 처리하고(놀랍게도 현지 여성이 능숙하게 했다) 관 안에 밀봉했다. 그런 다음 자신도 건강이 아주 나빴지만, 그와 수행단은 여정을 계속했다. 그는 마니가 죽은 후 서쪽으로 약 300킬로미터(180마일) 떨어진 라르에 도착해서 쓰러질 때까지의 한 달간 여정은 기억나는 것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거기서 아주 유능한 의사의 보살핌과 박식한 친구의 우정에 힘입어 서서히 회복했다. 그는 “아시아 어디서도, 아니 세계 어디에서도 라르에서만큼 많은 학자와 걸출한 과학자를 보지 못했다”고 썼다.

몇 달 후 델라 발레는 다시 시라즈에 왔고 마침내 1623~1624년 겨울에 그와 12살이었던 마리우치아는 인도를 향해 출발했다. 델라 발레의 편지는 대부분 고아에서의 경험과 관련이 있지만 고아와 캘리컷 사이의 남쪽에 있는 작은 왕국에 대한 아주 흥미롭고 특별한 설명도 약간 있다. 거기서도 필사본을 찾아다녔고 야자나무 잎 책과 여기에 새기는 데 사용하는 바늘을 생산 과정에 대한 정확한 설명과 함께 소장품에 추가했다.

인도의 무갈 지역을 여행할 기회는 많지 않았고 여기서 그가 한 일은 다른 여행자의 더욱 자세한 설명에 모두 나와 있다. 그러나 고아에서는 라르의 학자 친구와 계속 서신을 주고받았고 다양한 문학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마니 델라 발레의 인장으로, 다국어 기념출판물에 나오며 문장에 있는 시리아 표현이 반복된다.
마니 델라 발레의 인장으로, 다국어 기념출판물에 나오며 문장에 있는 시리아 표현이 반복된다.

1624년 11월 4일에 델라 발레는 인도에서 쉬파노에게 마지막 편지를 쓴 12월 17일에 무스카트를 통해 바스라로 출발했다. 나폴리에 잠시 들러 쉬파노와 머문 후 마침내 1626년 4월 4일에 로마에 다시 도착했다. 그다운 극적 감각으로 “홀아비에게 어울리게” 집에 뒷문으로 들어갔다고 썼다

델라 발레는 남은 생을 로마에서 살면서 지적이고 음악적인 활동에 다양하게 참여했고 동서양의 주요 동양학 학자와 계속 서신을 교환했다. 부인 마니는 아라 코엘리 교회(Church of the Ara Coeli)에 묻었고 마니가 임종 때 자신에게 맡긴 마리우치아가 성장하자 그녀와 결혼했다. 그리고 14명의 자녀를 두었다.

델라 발레 편지의 첫째 권은 1650년에 출간되었고 1652년 그가 죽은 후 네 명의 아들이 나머지 두 권을 1658년과 1663년에 내놨다. 이 책들은 빠르게 프랑스어, 독일어, 덴마크어로 번역되었고, 영어로 일부 번역되었으며, 순례자(il Pellegrino)의 바람대로 이슬람 세계에 대한 주된 정보 원천으로 여겨졌다.

캐롤라인 스톤(Caroline Stone) 캐롤라인 스톤(Caroline Stone)은 케임브리지와 세비야에서 활동한다. 최근작 마리아 테르 미텔렌의 신기하고 놀라운 모험: 12년간의 노예생활(1731-43)(The Curious and Amazing Adventures of Maria ter Meetelen: Twelve Years a Slave (1731~43))는 카렌 존슨(Karen Johnson)이 번역하여 하딩 심폴(Hardinge Simpole)에서 2011년에 출간되었다.

 

This article appeared on page 20 of the print edition of Saudi Aramco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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