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 65, No. 12014년 1월/2월

In This Issue

알제의 카스바: 위험에 처한 노아의 방주 - 글: 루이스 워너(Louis Werner), 사진: 케빈 버브리스키(Kevin Bubriski)
항구를 굽어보는 알-카스바(al-qasbah)(요새)라는 이름에서 유래한 오늘날의 카스바는 알제리의 수도인 알제 전역에 거주하고 있는 350만 명의 주민 중 약 8만 명의 거주지이다.
항구를 굽어보는 알-카스바(al-qasbah)(요새)라는 이름에서 유래한 오늘날의 카스바는 알제리의 수도인 알제 전역에 거주하고 있는 350만 명의 주민 중 약 8만 명의 거주지이다.

지중해 해안의 비탈을 따라 펼쳐져 있는 알제의 카스바는 풍부한 생명체와 촘촘히 에워싼 솔방울 씨앗으로 노아의 방주에 비교되었다. 300년 전 회반죽이 발린 구역의 벽 안에 감금되었던 향수에 젖은 한 영국 선원이 “바다에서 보면 마치 배의 중간 돛대의 돛처럼 보인다”고 회상했다. 16세기 여행자인 레오 아프리카누스(Leo Africanus)는 다양한 베이커리에 대해 언급했는데, 600년 전 지리학자인 이븐 하우칼(Ibn Hawkal)은 많은 분수에서 샘솟는 맑은 물을 칭송했다.

이 지역은 일찍이 기원전 16세기에 페니키아의 무역상들이 거주했으며 이어서 연안의 섬에서 무역을 했던 카르타고인이 거주했다. 당시 “다양한 베르베르 종족, 로마인, 비잔틴인 및 아랍인들(기원후 17세기에 시작)이 이곳을 노리기 시작했고 결국 도시를 차지했다.”라고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유네스코)에서 기록하고 있다. 스페인 사람들과 터키 사람들의 거주가 이어졌고 1830년에 시작된 130년간의 프랑스 통치로 마감되었다.

1880년경, 맨위, 프랑스인들은 카스바 남단으로 알려진 곳에 대로를 설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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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위: dea / a. dagli orti / getty images;
위: roger viollet / getty images
위: 1682년에 알제리와 영국 간의 마지막 전쟁이 끝나고 4년 후 바다에서 본 모습, 카스바가 정말 배의 중간 돛대에 있는 돛처럼 보이도록 한 듯한 밀집된 사다리꼴의 비탈. 1880년경, 맨위, 프랑스인들은 카스바 남단으로 알려진 곳에 대로를 설계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구역을 내려다보는 요새인 알-카사바(al-qasaba)는 한 때는 정원과 성이 있던 자리였으나 지금은 대부분 일반 시민들의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집들로 가득하다. 프랑스인들은 이 지역에 도착한 후 카스바의 남단을 관통하는 대로를 설계했으며 샤를마뉴, 샤르트르 등과 같이 자국민의 이름과 장소의 이름을 따 거리 이름을 붙였다. 그동안 알제는 만을 확장했고 새로운 유럽풍 구역이 구시가지 옆의 영토를 채웠다.

카스바는 활기찬 도시 심장부의 우심실 역할을 하여 국가의 혈통이 흐르도록 했고 이곳에서 알제리 독립 전쟁 중 많은 사람이 피를 흘렸다. 항상 알제리 역사의 중심에서 경쟁으로 치열했던 약 60 헥타르(150 에이커) 규모의 이 작은 지역에는 빼곡하게 지어진 집들이 350개의 구불구불한 rues(거리), ruelles(골목길) 그리고 impasses(막다른 길)을 수놓고 있으며 끝에서 끝까지 잇는다면 15킬로미터(9.3마일)나 되어 길을 잃는 일이 다반사이다.  

카스바의 인구는 350만 명 이상의 거주자 가운데 8만 명 정도가 빼곡히 채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카스바의 가장 과장된 평가는 17세기 초 전 세계를 여행하며 여행 관련 글을 출판했던 영국인 새뮤얼 퍼카스(Samuel Purchas)의 말일 것이다. 그는 이곳을 “이 바다들의 소용돌이, 해적의 옥좌, 무역의 본거지, 노예의 악취, 배교자와 반역자의 영지(a Whirlepoole of these Seas, the Throne of Pyracie, the Sinke of Trade and the Stinke of Slavery … the Receptacle of Renegadoes of God and Traytors to their Country)”라고 불렀다.  

78세의 주비르 마무(Zubir Mamou)는 “지금은 너무 많은 사람이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한 채 이곳에 살고 있고 문화와 역사조차 모르고 있다.”라고 말한다. 평생을 이곳에서 산 한 카스바 주민은 이곳을 방문하는 학생들과 자주 대화를 하곤 한다.
78세의 주비르 마무(Zubir Mamou)는 “지금은 너무 많은 사람이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한 채 이곳에 살고 있고 문화와 역사조차 모르고 있다.”라고 말한다. 평생을 이곳에서 산 한 카스바 주민은 이곳을 방문하는 학생들과 자주 대화를 하곤 한다.

간단히 말해서 사나운 바다의 연안에 한 안전한 항구가 있었다. 이곳은 해적선의 항구로, 노아의 방주에 대해 언급했던 미겔 데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를 포함한 유럽인들이 팔려나가기 위해 감금되고 억류되었지만 좀처럼 노예가 되거나 팔리지 않았다. 이 곳에서 일부 기독교인들은 셰익스피어가 오델로에서 표현했듯이 “이슬람교도가 되었고(turned Turks)”, 많은 사람들은 고국의 사람들과 대항해 싸웠다.  

더 이상한 감금 이야기 중 하나는 15세기 피렌체의 화가인 프라 필리포 리피(Fra Filippo Lippi)의 이야기로, 그는 억류자의 초상화를 그려주고 자유를 얻었다. 이탈리아 예술가들의 전기 작가인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는 “어느 날 그는 그의 주인과 자주 접촉하는 것을 보고 기회가 왔을 때 그의 초상화를 그려줄 생각을 하고 화로 속에서 다 탄 석탄 조각을 꺼내 이것으로 무어식 복장을 하고 흰색 벽 전체에 그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것이 주인에게 보고되었고(이곳에는 그림과 미술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 모두에게 이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음), 오랫동안 그를 구속하고 있던 족쇄로부터 그를 해방시켜 주었다”고 기록했다.

1622년 제노바의 선장인 피치니니(Piccinini)는 이슬람으로 개종했고 이름을 알리 비치닌(Ali Bitchnine)으로 바꾸었으며 베르베르 술탄의 딸과 결혼하여 사원 건설을 지원했고 알제리의 악명 높은 해적 함대 사령관이 되었다.17세기 동안 수백 명의 유럽인들이 알제리에 억류되었는데, 이들 중 다수가 해적들에 의해 해안에서 납치된 사람들이었다. 역사학자 린다 콜리(Linda Colley)는 1642년의 영국 내전은 부분적으로는 영국의 해안을 보호하지 못한 스튜어트 왕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으로 인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알제리의 태수는 1672년에 스페인 왕이 자국민의 몸값을 지불했을 때 영국인들의 자유를 위해 돈을 지불하지 않은 찰스 ii세를 비난했다. 1677년과 1682년 사이에 벌어진 영국과 알제리 사이의 마지막 전쟁은 500대의 영국 선박에서 3천 명의 인질을 포획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피치니니(Piccinini)라는 이름의 제노바의 선장은 1622년에 이슬람으로 개종했고 알리 비치닌(Ali Bitchnine)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베르베르 술탄의 딸과 결혼했고 해적 함대의 사령관이 되었으며 사원 건설을 지원했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소용돌이”라 칭하는 것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소년들은 그림으로 그린 골네트를 이용하여 작은 광장에서 모여 놀고 여성들은 북단 카스바의 돌이 깔린 거리 중 하나를 내려가고 있다. 가장 가파른 거리에는 472개의 계단이 있다.
소년들은 그림으로 그린 골네트를 이용하여 작은 광장에서 모여 놀고 여성들은 북단 카스바의 돌이 깔린 거리 중 하나를 내려가고 있다. 가장 가파른 거리에는 472개의 계단이 있다.
지도

해적선을 이용한 약탈로 인해 알제리와 유럽 강대국(미국 포함) 간의 문제는 1800년대 초까지 지속되었다. 1816년에 앵글로–네덜란드 함대는 도시를 포격했고 태수로부터 해적 행위를 자제한다는 서약을 받아냈다. 

서부의 바브 알-웨드(Bab al-Oued)와 동부의 바브 아준(Bab Azzoun)을 포함한 카스바 곳곳의 벽과 게이트의 건설은 16세기 초 스페인 출신의 점령군을 쫓아내기 위해 알제리의 왕이 알제리 레스보스 섬의 터키 출신 해적인 바바 아루즈(Baba Aruj)(“올드맨 아루즈(old man Aruj)”)와 그의 형을 초대했을 때 시작되었다. 외팔이었던 바바 아루즈는 1518년 전투에서 사망했고 카이르 알-딘(Khayr al-Din)이 권력을 잡아 오스만 시대에 적어도 명목상으로 도시와 해적 함대를 모두 통치했다.

카이르 알-딘은 후에 영국 뱃사람들의 골칫거리인 오스만 해군의 총사령관이 되었고 영국 뱃사람들은 그를 바바 아루즈로 오인했으며 그와 그의 형은 프랑스어로 “Barbarousse”, 이탈리아어로 “Barbarossa”, 영어로 “Red Beard”로 불리었다. 그의 이름을 딴 악명 높은 프랑스 감옥 근처 카스바 성벽 밖에 서 있는 카이르 알-딘의 동상은 이제 잘못된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이 동상에는 두 팔이 있지만, 프랑스인과 마찬가지로 카스바 주민에게는 한 명의 Barbarousse가 다른 한 명과 무척 닮았으므로 사람들은 한쪽 팔이 더 달려 있다고 말한다.

이름 그대로 자유를 의미하고 가족이 1954년부터 1962년까지 알제리 독립 전쟁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건축가 우리아 부히레드(Houria Bouhired)에게 카스바 자체는 “자유, 테라스에서 놀 수도 있고 골목길에서 숨바꼭질할 수도 있으며 자기 자신다워지는 법을 가르쳐준 곳을 상징했다. 그리고 도시 계획이 내게 이런 느낌을 줄 수 있다면 나는 물론 도시 계획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집 내부에는 가짜 벽과 환기구가 있어 해방 운동의 수장인 알리 라 푸앙(Ali la Pointe)이 이용한 은신처로 연결된다.
왼쪽: 이름 그대로 자유를 의미하고 가족이 1954년부터 1962년까지 알제리 독립 전쟁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건축가 우리아 부히레드(Houria Bouhired)에게 카스바 자체는 “자유, 테라스에서 놀 수도 있고 골목길에서 숨바꼭질할 수도 있으며 자기 자신다워지는 법을 가르쳐준 곳을 상징했다. 그리고 도시 계획이 내게 이런 느낌을 줄 수 있다면 나는 물론 도시 계획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오른쪽: 그녀의 집 내부에는 가짜 벽과 환기구가 있어 해방 운동의 수장인 알리 라 푸앙(Ali la Pointe)이 이용한 은신처로 연결된다.

오늘날 건축가 우리아 부히레드(Houria Bouhired)는 그녀가 성장한 거리를 관광하는 사람들을 안내할 때 종종 오뜨 카스바(Haute Casbah)에서 시작하여 위에서 아래까지 직선으로 이어진 루 드 라 카스바( Rue de la Casbah)의 472개 계단을 내려온다. 우리아(Houria)란 아랍어로 “자유”를 의미하며 그녀의 이름은 임의로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독립 전쟁(1954~1962) 초기에 프랑스에 저항한 위대한 카스바 해적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

프랑스 군인들은 그녀의 아버지인 무스타파(Mustafa)를 죽였고 그의 시체를 그녀가 놀았던 골목길에 버렸다. 공격적 성향이 짙었던 20세의 그녀의 사촌인 제밀라(Djemila)는 체포되었고 전세계의 뉴스가 되었던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결국 석방되었다. 1958년에 제밀라가 여전히 감옥에 있을 당시, 이집트인 영화감독인 유세프 샤힌(Youssef Chahine)은 그녀를 모델로 한 전기 영화 알제리인 자밀라(Jamila the Algerian)를 제작했고 이는 반식민주의를 위한 슬로건이 되었다.  

이 가족에게는 자유를 위한 열망이 고요히 흐르고 있다. 매질을 당하고 감옥살이한 후 Houria의 어머니인 파티하(Fatiha)는 차분하게 말과 행동을 달리하여 적을 따돌리는 명성을 얻었다. 그녀는 fln (민족 해방 전선)의 알제리군 리더인 사디 야세프(Saadi Yacef)와 야세프의 주 카스바 정보원인 알리 라 푸앙(Ali la Pointe)이 루 드 카통(Rue de Caton)에 있는 그녀의 집에서 은신하고 있는 동안 정보 제공자의 역할을 했다. 라 푸앙은 수상의 영예에 빛나는 이탈리아 감독 질로 폰테코르보(Gillo Pontecorvo) 감독의 1966년 영화 알제리 전투(The Battle of Algiers)에 나오는 영웅이다.

알제리 전투에 대한 야세프의 회고록에서 그는 자신의 12살짜리 조카를 영화에서 뿐 아니라 마르티르광장의 초상화 벽에서도 불리는 것처럼 “쁘띠 오마르(Petit Omar)”라고 부르지 않고, 대신 다소 간단하게 매우 어린 트레 죈느(très jeune)라고 부른다. 그 조카는 망보는 역할을 했으며 알리 측에서 죽었다. 우리아는 오마르를 용맹한 아이이면서도 구슬치기와 다른 길거리 놀이의 전문가로 기억하고 있다.

그녀는 이와 유사하게 “나는 내 어린 시절의 카스바 때문에 건축가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곳은 자유, 테라스에서 놀 수도 있고 골목길에서 숨바꼭질할 수도 있으며 자기 자신다워지는 법을 가르쳐준 곳을 상징했다. 그리고 도시 계획이 내게 이런 느낌을 줄 수 있다면 나는 물론 도시 계획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사회 복지 사업과 주택, 도로, 배관 수리 등을 제공하는 퐁다시옹 카스바(Fondation Casbah)의 사장인 원주민의 아들 벨카셈 바바치(Belkacem Babaci)(맨위)는 카스바는 “과거가 있기 때문에 미래가 있으며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만 과거와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언젠가 프랑스 감옥이 있었던 카스바의 오래된 벽 바깥의 거리에는 16세기 초 알제리 왕의 초대를 받고 스페인인을 쫓아낸 터키 출신 해적인 카이르 알-딘의 동상이 서 있다.
사회 복지 사업과 주택, 도로, 배관 수리 등을 제공하는 퐁다시옹 카스바(Fondation Casbah)의 사장인 원주민의 아들 벨카셈 바바치(Belkacem Babaci)(맨위)는 카스바는 “과거가 있기 때문에 미래가 있으며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만 과거와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위: 언젠가 프랑스 감옥이 있었던 카스바의 오래된 벽 바깥의 거리에는 16세기 초 알제리 왕의 초대를 받고 스페인인을 쫓아낸 터키 출신 해적인 카이르 알-딘의 동상이 서 있다.

우리아의 물리적인 자유의 감정은 세르반테스의 친구이자 포로였던 안토니오 데 소사(Antonio de Sosa)의 말에서 울려 퍼진다. 안토니오 데 소사는 카스바를 솔방울에 비유했고 그의 1612년 작품인 알제의 지형학(Topography of Algiers)에서 "… 지붕을 통해 도시 전체를 걸어갈 수 있을 만큼 빼곡한 집들이 있었다"고 썼다. 세르반테스가 이곳에 대한 자신의 기억을 토대로 한 돈키호테의 “포로 이야기(Captive’s Tale)” 장에서 그는 “부자와 중요한 무어인의 집 창문은 일반 무어인의 집처럼 창이라기보다는 구멍 같아 보였고 두껍고 닫힌 격자 구조로 덮여 있었다”고 설명한다.

부히레드 가족의 집은 이 설명과 딱 들어맞는다. 와사트 알-다르(wasat al-dar)라는 실내 파티오가 있고 집의 가운데는 3개의 상부 갤러리로 둘러싸여 있으며 모두 타일로 덮여 있고 편자 아치 모양을 이루며 평지붕을 이루고 있다. 또한, 성지의 분위기도 있다. 문 앞의 표지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1954년 11월 순교자의 기억을 일깨워준 샤히드 ["순교자"] 무스타파 부히레드(Shahid [“martyr”] Mustafa Bouhired)의 집.” 계단 위의 가짜 벽은 알리 라 푸앙의 은신처로 연결된다. 우리아의 세입자이자 카스바에서 거의 평생을 살았던 쾌활한 78세 노인인 주비르 마무(Zubir Mamu)의 침실에 있는 환기구는 은신처로 연결된다. 그는 “이곳을 볼 때마다 그가 생각난다”고 말한다.

1957년 프랑스 낙하산 부대가 루 드 카통(Rue de Caton)의 집을 급습했고 알리 라 푸앙과 십여명 이상의 동료들을 살해했으며 지금은 알제리 국기와 기념품을 판매하는 기념품 가게가 서 있다.

1957년 프랑스 낙하산 부대가 루 드 카통(Rue de Caton)의 집을 급습했고 알리 라 푸앙과 십여명 이상의 동료들을 살해했으며 지금은 알제리 국기와 기념품을 판매하는 기념품 가게가 서 있다.

1966년 고전 영화 알제리 전투(The Battle of Algiers)의 한 장면에서 브라힘 해기아그(Brahim Haggiag)가 연기한 알리 라 푸앙이 반군 지도자 사디 야세프의 젊은 사촌의 말을 듣고 있다.
코발/아트 리소스
1966년 고전 영화 알제리 전투(The Battle of Algiers)의 한 장면에서 브라힘 해기아그(Brahim Haggiag)가 연기한 알리 라 푸앙이 반군 지도자 사디 야세프의 젊은 사촌의 말을 듣고 있다.

루 드 리용(Rue de Lyon)에 있는 마무 소유의 집은 이제 슬프게도 사라졌으며("disparu") 젊은 시절의 시네마 에뜨왈(Cinema Étoile)은 닫혔다("fermé ”)고 말한다. 루 블뢰(Rue Bleu)에서 그는 알제리 민족주의 연구서인 알제리 — 국가와 사회(L’AlgérieNation et Société)를 쓴 고 모스테파 라셰라프(Mostefa Lacheraf)가 살았던 지금은 없어진 집을 지나며 카스바를 "잃어버린 세계"(monde aboli)라고 불렀다. 마무는 “카스바는 예전 같지 않다. 지금 너무 많은 사람이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 채로 살고 있다. 문화나 역사는 물론 독립과 투쟁을 위해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있다.”라고 말한다.

마무가 카스바의 거리를 프랑스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이 세대간의 괴리를 나타내고 있다. 프랑스인이 도착했을 때 거리는 벽, 게이트 또는 시장 같은 인근의 랜드마크로 알려졌었으므로 외부의 벽을 따라 색깔로 구분한 선을 그려 미로를 벗어날 수 있도록 했다. 마무는 프랑스의 컬러 이름으로 거리를 알고 있다. 독립한 후 거리의 이름은 대부분 길거리에서 죽음을 맞이한 알제리 영웅들을 기려 이름을 바꾸었다. 명판은 압델 라만 아르바지(Abdel Rahman Arbaji)가 지붕 위에서 총을 맞으며 떨어져 39번지 문밖에서 사망했던 루 라시드 카바시(Rue Rachid Khabash)의 위치 등 그러한 위치를 표시하고 있다.

비르 제바(Bir Djebah)에서 과거에 150개 이상이었지만 카스바에서 아직 운영되고 있는 6개의 공설 분수 중 하나인 “양봉가의 우물(the well of the beekeeper)” 명판은 무기를 든 투아티 사이드(Touati Said), 라디 흐미다(Radi Hmida), 라할 부알렘(Rahal Boualem), 벨라민 모하메드(Bellamine Mohamed) 4형제를 기념하고 있다. 여기에는 “사형 선고를 받아 바바로스(Barbarousse) 감옥에서 1957년 6월 20일 새벽 3:25분과 3:28분 사이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다”라고 자세하게 적혀 있다.

감옥은 랑프 로니 아레즈키의 친구들(Friends of the Rampe Louni Arezki)이라는 문화 활성화 그룹의 회장인 로니스 앳 우디아(Lounis Aït Aoudia)를 기억할 특별한 장소이다. (랑프(Rampe)는 가파르게 솟아 있는 거리를 나타내는 프랑스 단어이며 로니 아레즈키(Louni Arezki)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자유 투사의 또 다른 이름이다.) “어렸을 때 나의 침실 창은 감옥의 벽 바로 아래 있었다”고 앳 우디아(Aït Aoudia)는 회고한다. “처형이 있던 날이면 나는 죄수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는 새벽이 되기도 전에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그들은 자유의 송가인 ‘산으로부터 자유의 소리가 솟아오르고 있다!’를 부르곤 했다. 내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셨고 아버지 얼굴은 창백해졌으며 부모님은 내게 다시 자도록 말씀하시곤 했다. 하지만 같은 노래를 90번이나 들었고 그 해 90명의 죄수가 처형되었다.”

앳 우디아는 최근 카스바 원주민의 또 다른 아들을 데려왔다. 그는 자서전 Éclats de soleil et d’amertume(태양과 쓰라림의 광채)의 저자인 비엔나에 있는 경제학자 카더 베나마라(Kader Benamara)로 책을 읽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카스바 주택의 10%만이 집주인이 거주하고 있으며 다른 주민들은 모두 시골 지역의 불법 점유자들입니다.”라고 베나마라는 말한다. “우리의 일은 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치고 카스바가 우리나라의 부와 자부심이 새로 피어나는 곳이었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지요.”

유네스코는 카스바를 “메디나 또는 이슬람 도시의 독특한 형태”라고 규정하고 1992년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했으며 알제리는 2003년 이곳을 보호 구역으로 지정했다. 현상황이 악화된다면 이 지역의 존속이 위협받기 때문이다.베나마라는 1942년 12월 미국-영국 연합군의 독일 공중 폭격 도중 루 랑동 17번지의 지하실에서 태어났으며, 1850년 알제리의 카빌리(Kabylie) 산악 지역을 진압한 프랑스 장군 자끄 루이 랑동(Jacques Louis Randon)의 이름을 붙였다. 그 후, 알리 라 푸앙의 실제 이름인 루 아마르 알리(Rue Amar Ali)로 개명했다. 

베나마라는 “나와 같은 어린이에게 카스바는 밤낮으로 마법과 같은 장소였으며, 누군가에겐 한 때 이웃이었고 언젠가 이곳에 살았던 모든 사람의 유령으로 채워져 있다. 나는 아직도 내가 사탕 판매원이 거리를 다니면서 목을 목이 쉴 정도로 큰 소리를 외치고는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이 사탕이면 모든 근심을 잊게 될 거에요!’ 그리고 우리 아이들은 그 소리를 듣자마자 군침을 흘릴 것입니다.” 

아마도 주민과 지지자에게 사회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퐁다시옹 카스바(Fondation Casbah)의 벨카셈 바바치(Belkacem Babaci) 회장보다 카스바 지역 부흥에서 힘을 쏟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집이 무너질 위험이 있거나 이웃이 공동의 벽에서 배관 누수를 해결하도록 동의해 주지 않을 경우 그를 찾아온다. 바바치는 이전 바르바리(Barbary) 해적의 소굴이었고 알제리 해군 본부가 자리 잡고 있는 호화스러운 팔레 데 레(Palais des Raïs)에서 태어났다. 그는 “제 할아버지는 선장이셨고 저희에게 이곳 입주권을 주셨어요. 따라서 저는 예전의 카스바 건축 양식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알고 있지요.

꽃무늬와 조개를 모티프로 틀을 잡은 7개의 큰 메달이 출입구 위에 조각되어 색이 칠해진 패널을 장식하고 있다. 패널의 큰 메달은 “승리자는 [없고] 신만 있다

꽃무늬와 조개를 모티프로 틀을 잡은 7개의 큰 메달이 출입구 위에 조각되어 색이 칠해진 패널을 장식하고 있다. 패널의 큰 메달은 “승리자는 [없고] 신만 있다"는 것을 뜻한다.

150개의 공설 분수가 있던 곳에 지금은 6개만이 아직 흐르고 있다. 
150개의 공설 분수가 있던 곳에 지금은 6개만이 아직 흐르고 있다. 

“1830년 프랑스인이 들어오기 전에 알제의 대표 도시는 카스바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카스바는 크기도 작아졌으며, 도시의 작은 일부가 되었습니다. 한때 성채는 주거 지역부터 현대적인 도시까지 모든 것을 에워싸도록 확장되었고 프랑스는 넓은 아케이드와 상업 거리가 있는 바다 쪽까지 길을 냈습니다. 그들은 동쪽의 바브 아준(Bab Azzoun)부터 서쪽의 바브 알-웨드(Bab al-Oued)까지 도시의 벽과 입구를 허물고 사원을 교회로 바꿨습니다. 성을 허물어 광장으로 만들거나 박물관으로 변경했습니다. 카스바에서 가장 유명한 공원인 마르티르 광장(Place des Martyrs)은 전쟁 영웅의 이름을 딴 것이며 알제리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성이었지요.”

다르 무스타파 파샤(Dar Mustafa Pasha) 필체 박물관과 다르 케다우지(Dar Khedaoudj) 민중 예술 및 전통 박물관은 지역의 역사를 함께 엮기 위해 카스바에 있는 대부분의 개인 주택이 그랬던 것처럼 반짝이는 보석으로 복원되었다. 다르 케다우지의 영화감독인 아지자 아이샤 아맘라(Aziza Aïcha Amamra)는 오뜨 카스바(Haute Casbah)에서 그녀가 말하는 산인 자발(jabal)에 있는 어머니 집에서 태어났다. 경험 많은 민속학자인 그녀는 하루의 첫 식사를 위한 대포 신호를 기다리고 있을 때 불렀던 라마단의 노래를 기억하고 있다: “불러주세요. 기도자에게 우리를 불러주세요. 오 샤이흐! 대포 소리가 ‘쿵 쿵’하고 울렸네!” 이제 먹을 준비가 되었네! 냠냠!”

하지만 벨카셈 바바치의 어린 시절 기억이 이렇게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저는 프랑스인의 무서운 차별을 기억하고 있어요”고 그는 말한다. “프랑스 언어 수업에서 항상 '우수'였던 제 점수에도 불구하고 가장 게으른 프랑스 학생 뒤에 앉아 있어야 했습니다. 교사들은 indigène, 즉, 원주민이라고 우리를 부르며 인정해 주지 않았지요. 심지어 알제리가 프랑스의 일부였고 우리가 그들보다도 오히려 프랑스어를 완벽하게 구사했으며, 완전한 프랑스 시민이었음에도 말이죠.”

아이들이 알리 라 푸앙의 집 폐허 아래에서 놀고 있다. 이 건물의 일부는 독립운동의 희생자를 기억하기 위해 복원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카스바의 주택 중 현재 10%만이 소유자가 거주하고 있다고 퐁다시옹 카스바의 벨카셈 바바치 회장은 말한다.
아이들이 알리 라 푸앙의 집 폐허 아래에서 놀고 있다. 이 건물의 일부는 독립운동의 희생자를 기억하기 위해 복원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카스바의 주택 중 현재 10%만이 소유자가 거주하고 있다고 퐁다시옹 카스바의 벨카셈 바바치 회장은 말한다.

바바치 회장은 카스바 주민이 진지한 얼굴을 하고 프랑스 식민지 개척자를 흉내 내는 유머에 주목한다. 그는 다음과 같은 유머를 기억한다. “당나귀는 우리의 배달 도구이자 쓰레기 수거업자였으며 버스 운전기사처럼 모든 집에 대해 알고 있다. 우리는 당나귀에게 1492년 이베리아에서 카스바의 첫 번째 주민들 다수를 몰아냈던 스페인 국왕인 이사벨라와 페르디난드, 또는 500대의 해군 선박이 1541년 알제리를 비참하게 파괴하지 못했던 찰스 5세 같은 풍자적 이름을 붙였다. 따라서 당나귀 모는 사람은 ‘왼쪽으로 돌아, 이사벨라, 오른쪽으로 돌아, 찰스’라고 소리쳤다.”

바바치 회장은 알제리 혁명의 여파로 약 만여 명의 주민이 떠났을 뿐만 아니라 1990년의 사회적 갈등으로 카스바의 사회 구조가 파괴되었다고 말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한때는 유럽인을 위한 감옥이었고, 독립 전쟁 중에는 프랑스에서 운영했던 집단 수용소였던 이곳이 이제 불법 거주자들이 모이는 막다른 골목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카스바는 과거가 있기 때문에 미래가 있으며 우리는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만 과거와 싸워야 한다”고 확고하게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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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자신의 집 기둥에 기대어 포즈를 취한 소녀. 자신의 집 현관의 편자 아치 밖에서 옛 애국주의자 세대에게 잘 어울리는 알제리 모자인 셰샤(chechia)를 쓰고 있는 미라위 스망(Miraoui Smain). “많은 사람이 이 모자의 의미를 모르고 있습니다. 저는 자유를 위한 투쟁의 일부였습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위쪽 카스바에서 포즈를 취하고 서있는 두 소년. 이제는 방문객이 뜸해진 위쪽 카스바에서 접시와 커피포트 등을 판매하고 있는 놋쇠 세공인 하셰미 벤미라(Hachemi Benmira).

유네스코는 카스바를 메디나 또는 이슬람 도시의 독특한 형태라고 부르고 북아프리카 및 16세기와 17세기 사하라 사막 이남 지역의 아프리카에서 도시 계획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1992년 세계 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되었고 2003년 알제리는 "도시 구조의 악화를 미리 방지하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유네스코의 요청에 따라 카스바를 보호 구역으로 지정했다. 그러나 최근에 UN 기구의 부주의로 인한 인가 취소로 존립의 위협을 받아 왔다.

제카흐 압델와합(Zekagh Abdelwahab)은 붕괴 위험이 있는 주택에 응급 수리를 제공하여 카스바를 보호하기 위한 알제리 문화부의 정책을 감독하고 있다. 사실 현재 많은 구조물이 벽, 거리로 돌출되어 있다. 또한 오래된 나무 기둥으로 지탱하고 있는 기울어진 벽, 거리를 따라 늘어선 갈라진 발코니, 부서진 아크 등이 안뜰의 아케이드를 구성하고 있다.  

약 700채의 주택이 이미 압델와합의 긴급 수리를 받았다. 압델와합은 “카스바는 여러 피해를 겪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지진의 여파로 수도관이 파괴되어 누수가 발생하고 그 결과 지반이 약해지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주택 세입자드은 수리 기간동안 집을 떠나기를 거부하지만, 이들을 설득하는 것이 우리의 일입니다.” 무지의 결과는 항상 존재한다. 주택이 붕괴한 곳에 불규칙하게 들어선 건물들은 마치 들쑥날쑥 이가 입속을 보는 것 같다.

압델와합과 그의 건축가 팀은 특히 이전 100년 동안 주요 역사적 성채 및 기타 주택 허물거나 무너지도록 허용한 1930년의 프랑스에 의해 건설된 일종의 인공적인 견본 주택인 오뜨 카스바에 대해 유감을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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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위에서 시계 방향으로: 목공인 칼레드 마히오트(Khaled Mahiot)의 선반으로 바뀐 격자 모양의 윈도 스크린은 16세기에 카스바에 잠깐 억류되었던 스페인 작가 미겔 세르반테스에게 익숙할 법한 전통 공예이다. 위쪽과 아래쪽 카스바를 양분하는 시장 거리인 루 벤 셰나브(Rue Ben Chenab)를 따라 젊은이들이 오렌지를 팔고 있다. 할림 와궤노니(Halim Ouaguenouni)가 장식 타일과 축구팬 용품으로 장식된 가족이 운영하는 사탕 가게를 보고 있다. 한 소년이 카스바의 오랜 역사를 품고 있는 문 앞에 서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바세 카스바(Basse Casbah)에서 더 싼 집을 찾아 오뜨 카스바로 이사한 목공인 칼레드 마히오트는 선반에 있는 축을 돌려 세르반테스가 설명한 것과 같은 격자 모양의 윈도 스크린을 만들거나 놋쇠 세공인 하시미 벤미라(Hashmi Benmira)가 시디 람단(Sidi Ramdane) 회교 사원의 11세기 뾰족탑 근처에서 접시와 커피포트를 판매하는 것으로는 그들은 근근히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이러한 위쪽 구역에는 상인들도 별로 없고 관광객은 더욱 없다.

80세인 미라위 스망(Miraoui Smain)이 루 벤 셰나브(Rue Ben Chenab)에 있는 그의 주택 밖에 서있다. 루 벤 셰나브는 오뜨 카스바와 바세 카스바를 위 아래로 나누는 경계가 된다. 그는 오늘날 젊은이들의 티셔츠와 뒤로 쓴 야구 모자와는 전혀 다른, 오랜 애국주의자 세대의 꼭 맞는 알제리 모자인 셰샤(chechia)를 쓰고 있다. “내가 이들에게서 가장 걱정하는 것은 가난하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많은 사람이 이 모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릅니다. 저는 자유를 위해 싸웠고, 부도덕한 외세들이 카스바를 없애려는 시도를 목격했습니다. 과거를 잊지 않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카스바의 부자레 언덕(Bouzaréah Hill) 아래쪽 측면 위로 급한 계단이 있다. 이곳은 오스만 제국 시대의 성채와 유적으로 둘러 싸여 있다. 성벽은 수리가 필요하다. 늙어 가고 있는 이 도시가 다가오는 새로운 세기에 자신감을 되찾을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안토니오 데 소사가 1612년에 쓴 글이 오늘날 현실이 되고 있다. “조금씩 이 언덕은 위쪽으로 퍼져 나가 맨 꼭대기까지 산 경사면에 집들이 계속 세워지고 낮은 것 위에 더 높은 것이 들어서게 된다.” 중력과 역사 속 망각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이웃이 계속 서 있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루이스 워너(Louis Werner) 루이스 워너(Louis Werner)(wernerworks@msn.com)는 뉴욕시에 살고 있으며, 작가이자 영화감독이다. 
케빈 버브리스키(Kevin Bubriski) 케빈 버브리스키(Kevin Bubriski)(www.kevinbubriski.com)는 다큐멘터리 사진작가이며 버몬트주 폴트니에 있는 그린 마운틴 칼리지(Green Mountain College)의 사진학과 교수이다.

 

This article appeared on page 34 of the print edition of Saudi Aramco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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