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 66, No. 12015년 1월/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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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의 기근과 술탄 이야기 // 글 Tom Verde 
Robert French / 브리지만 이미지
12세기 후반 이후 아일랜드의 드로에다는 해상 무역으로 번성하였다. 이 보인강 부두 사진은 1885년에 촬영되었는데, 이는 1847년부터 1850년대 초반까지 지속되었던 "대기근"이 있은지 한 세대가 지난 시기이다. 세 척의 터키 선박이 대기근 시기에 식량 지원을 했다면 이 곳에서 정박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1847년 최악의 아일랜드 감자 기근의 해에 이스탄불에서 오스만 술탄에게 고용되었던 아일랜드 의사가 군주에게 굶주리는 동포를 지원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의 간청으로 술탄 Abdülmedjid 1세는 £10,000를 그에게 약속했지만,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약 £2,000를 지원한다는 사실을 알자 술탄은 외교상 격식을 갖추기 위해 그의 기부금은 £1,000로 줄였다. 더 많은 지원을 결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비밀스럽게 곡식을 실은 세 척의 배를 더블린 북부의 라우스 카운티에 있는 드로에다 항구로 보내 정박하게 하였다.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드로에다 시는 터키식 별과 초승달을 드로에다의 초승달에 통합시켰는데, 이 상징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드로에다 유나이티드 축구단의 유니폼에서도 나타난다.

이제 수많은 아일랜드 이야기처럼 일부 이야기는 진실이지만 일부 이야기는 전설이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무엇일까? 바로 감언이설이다.

조각가 Rowan Gillespie가 기근 을 견뎌내고, 기근을 피해 이주했으며, 사라져버린 수백만 명의 아일랜드인들을 기리기 위해 1997년 더블린에 세운 작품은 아일랜드 최악의 나날들을 생생하게 상기시킨다. 
조각가 Rowan Gillespie가 "기근"을 견뎌내고, "기근"을 피해 이주했으며, 사라져버린 수백만 명의 아일랜드인들을 기리기 위해 1997년 더블린에 세운 작품은 아일랜드 최악의 나날들을 생생하게 상기시킨다. 

다른 수많은 외국 정부처럼 오스만 궁중에서도 1847년에 아일랜드로 기근 지원을 보냈다. 그리고 사실 술탄의 첫 번째 간청은 외교적 존중을 줄이는 것이었다. 1839년부터 1861년까지 Abdülmedjid 1세가 통치하는 동안 한 명의 아일랜드 의사를 포함한 수많은 외국 국적자들이 톱카피 궁과 오스만 터키 정부(오스만 정부의 관리직)에서 근무하였다는 점도 사실이다. 이 아일랜드의 아들은 술탄이 지원을 보내도록 결정하는데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설사 그랬다고 할지라도 선박에 대한 세부 정보와 도시의 상징적인 별과 초승달과의 연관성은 흐릿하기만 하다. 

영국 와이트 섬의 감자 밭을 황폐화시킨 "이전에는 없던 엄청난 병충해"의 소식이 1845년 8월 런던대학교의 식물학자 John Lindley의 사무실까지 닿았다. 가드너의 연대기적 원예 관보(Gardner’s Chronicle and Horticultural Gazette)의 편집장인 Lindley는 조심스럽게 걱정을 표했으며 독자들에게 병충해에 관한 추가 정보를 요청했다. 하지만 8월이 지난 후, 대재앙이 본토 인근에 닥쳤을 때, Lindley가 관측한 대로 "코벤트 가든 마켓에 안전함[감자]은 남지 않게 되고" 그의 목소리는 경고로 바뀌었다. "공포스러운 문제가 감자 수확 중에 발생했습니다. 모든 곳에서 파멸에 대한 이야기가 들렸습니다.... 이러한 병충해를 치료할 수 있는 방법조차 없습니다... 엄창난 재앙이 우리를 찾아 왔습니다."

영국 본토에도 불안이 퍼졌지만 가을에 아일랜드를 덮친 혼란과 비교할 수 없었다. 멈출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 병충해는 실질적으로 3백만명 이상이나 되는 아일랜드 하위 계층의 유일한 영양 섭취물인 곡물의 3분의 1을 지구상에서 지워버렸다. Lindley와 해결책을 간절하게 찾던 더블린 거주 동료들은 몰랐지만 병충해의 원인은 감자역병균이라는 곰팡이류로 식물의 시든 잎에서 약간 하얀 부분으로 처음 나타났다. 병충해의 씨앗이 공기상으로 급속도로 확산되었고, 몇 시간 안에 수많은 땅에 있는 건강한 덩이줄기를 악취가 매우 심한, 썩은 검은 덩어리 무더기로 만들었다. 다음 해에는 병충해가 섬 전역으로 퍼지면서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충격을 받은 목격자는 수만 헥타르의 논밭이 사라진 "밤의 소행"이라고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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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인들이 지나치게 감자에 의존했다는 점이 위기를 악화시켰다. 신세계의 작물이었던 감자는 영국 식민지 주민이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반 동안 아일랜드로 들여왔다. 초반에는 감자가 상류층의 진미로 여겨졌다. 1800년 아일랜드의 서늘하고 습한 기후에 적합한 "럼퍼" 감자는 가난한 노동자 계층 사이에서 주식으로서 오트밀의 자리를 대체했다. 싸고 수확량이 높으며 영양가 있는 럼퍼 감자는 약간의 우유 또는 버터밀크와 섞어서 충분히 먹으면 생명 유지에 필요한 충분한 양의 탄수화물, 단백질, 미네랄을 제공했다. 따라서 아일랜드 남성은 평균적으로 하루에 감자 45개, 여성은 36개, 아이는 15개를 먹었다. 아일랜드 경제와 생활에 감자가 깊게 자리잡았고 전통 게일어 노랫말처럼 Grá mo chroí(내 진정한 사랑)으로 불렸다.

맨 위: 1826년 설립되고 19세기 중반까지 도시의 지배적인 해상 기업이었던 드로에다 정기 기선사의 장식용 금속 그리드는 도시의 초승달과 별 상징(여기서 여섯 지점의 별을 보여줌)에서 각 모서리를 장식한다.
위에서 보이듯이 초승달과 별이 있는 깃발이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에 드로에다의 역사가 Brendan Matthews에 따르면 부정확한 이야기가 터키의 지원에 대한 도시의 환영으로 연결되어 1930년대까지 유포되기 시작했다.
브리지만 이미지
맨 위: 1826년 설립되고 19세기 중반까지 도시의 지배적인 해상 기업이었던 드로에다 정기 기선사의 장식용 금속 그리드는 도시의 초승달과 별 상징(여기서 여섯 지점의 별을 보여줌)에서 각 모서리를 장식한다. 위에서 보이듯이 초승달과 별이 있는 있는 깃발이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에 드로에다의 역사가 Brendan Matthews에 따르면 부정확한 이야기가 터키의 지원에 대한 도시의 환영으로 연결되어 1930년대까지 유포되기 시작했다.

이 사랑받고, 중요한 자원을 잃었지만 아일랜드에는 결코 식량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농장과 목초지는 돼지, 가축 및 양들이 많이 있었고, 또한 밀과 적은 편이지만 귀리와 야채도 있었다. 또한 하천, 강, 호수와 해안가는 물고기들로 풍부했다. 잔인한 아이러니는 바로 이러한 지역 대부분이 굶주린 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는 출입 제한지였다는 점이다.

대영제국의 일부였던 아일랜드 최고의 땅은 부유한 영국인과 영국계 아일랜드 집안이 소유한 곳이었으며, 수많은 땅의 주인들은 아일랜드에 거주하지 않았거나, 거주하였다고 하더라도 농사지에 발을 들여놓기 위해 더블린 시가지에서 멀리 벗어나 있지도 않았다. 

"대다수의 아일랜드 지배 계층은 주식을 보유한 남미의 광산보다 소유한 시가지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역사가 Tim Pat Coogan은 기근의 음모: 아일랜드 대비극 당시 영국의 역할(The Famine Plot: England’s Role in Ireland’s Greatest Tragedy)에서 이와 같이 말했다.

상류층이 더욱 멀어지게 된 것은 1801년 연합법 때문인데 이로 인해 아일랜드 국회가 해산되고 국정을 멀리 떨어진 런던 정치가들의 손에 맡기게 되었다. 일부 영국 의원들은(MPS) 진정으로 아일랜드의 안녕을 걱정했지만, 대부분은 아일랜드인들을 눈꼽만큼도 이해하려 하거나 동정조차 하지 않았다. 굉장히 냉담하게도 아일랜드인들은 런던 타임즈에 1848년 1월에 설명된 대로 "돼지우리에서 뒹구는 계급"이었다. 

지역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사라진 수많은 "부재 지주"들은 알려진 대로 그들의 재산을 현지의 부유한 농부들인 "중개자"에게 임차하였다. 이들을 고용한 가문처럼, 중개자는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수준 이상 관리했던 사유지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결국 고리대금으로 소작농에게 전대하였다. 주로 라인스터 동쪽 주의 소작농들이 "지주"의 농장에서 특정 기간 동안 일해서 지대를 납부하는 "소농"이라는 토지를 가지지 않은 노동자에게 작은 토지를 임대하여 땅을 세분화하였다. 서쪽 코나하트에서는 소작농들이 스스로 콘에이커 땅이라는 더 작은 토지를 유량 노동자에게 임대했고, 소작농이 중개자에게 내는 지대의 두 배를 매겼다. 

이 두 가지 체계에서 국가 경제의 부담을 떠안은 것은 아일랜드의 최하위층이었다. 나폴레옹 전쟁(1803년-1815년) 기간 동안에는 몇 가지 좋은 점이 있었다. 분쟁으로 인해 중앙 유럽과의 무역이 중단되었고, 영국은 식품류와 제조 상품들을 아일랜드에 의지했다. 하지만 계속적인 인구 급증과 전쟁의 종료로 아일랜드는 인구 과잉과 직업 부족을 겪게 된다. 1840년대에 한때 부유했던 가정도 5천년 전 청동기 시대부터 아일랜드의 농기구로 알려진 "레이지 베드"라는 평행한 상고 머리의 흙무더기에서 감자를 얻어 생존하면서 근근이 버텨갔다. 호수나 하천에서 사냥을 하거나 낚시를 하는 것은 범법 행위였고, 해안에서 낚시만 하려면 보트와 태클이 필요한 계절별 작업이었다. 병충해가 발생한 1845년에 수많은 사람들이 음식을 살 돈을 벌어야 하는 낚시 도구를 전당포에 맡기거나 팔았는데, 다음 해에 상황이 더욱 심각해질 것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아일랜드가 굶주림에 시달렸지만 아일랜드 농장에서 수확한 대부분의 식량은 계속해서 영국으로 수출되었고 지주들의 돈주머니만 불려주었다. 혁명적인 아일랜드인 John Mitchell은 20년이 지난 1868년 열이 올라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께서 병충해를 보냈지만 영국은 기근을 보냈다." 

드로에다의 깃발은 다섯, 여섯 그리고 일곱 지점의 별들로 다양하게 나타났다. 드로에다 유나이티드 축구단(상단)은 다섯 개를 표시하며, 세인트 존 빈민 구호소(위와 아래 자세하게 나타남, 아래)는 일곱 개를 표시한다. 상징은 비잔티움에서 유래했는데, 별이 여덟 가지 지점을 나타낸다. 영국의 리차드 왕(
드로에다의 깃발은 다섯, 여섯 그리고 일곱 지점의 별들로 다양하게 나타났다. 드로에다 유나이티드 축구단(상단)은 다섯 개를 표시하며, 세인트 존 빈민 구호소(위와 아래 자세하게 나타남, 아래)는 일곱 개를 표시한다. 상징은 비잔티움에서 유래했는데, 별이 여덟 가지 지점을 나타낸다. 영국의 리차드 왕(
드로에다의 깃발은 다섯, 여섯 그리고 일곱 지점의 별들로 다양하게 나타났다. 드로에다 유나이티드 축구단(상단)은 다섯 개를 표시하며, 세인트 존 빈민 구호소(위와 아래 자세하게 나타남, 아래)는 일곱 개를 표시한다. 상징은 비잔티움에서 유래했는데, 별이 여덟 가지 지점을 나타낸다. 영국의 리차드 왕("사자왕")은 비잔틴이 통치한 키프러스에 억류해 있었던 1192년에 초승달과 별을 채택해 2년 뒤 드로에다 항구에 수여하였다.
드로에다의 깃발은 다섯, 여섯 그리고 일곱 지점의 별들로 다양하게 나타났다. 드로에다 유나이티드 축구단(상단)은 다섯 개를 표시하며, 세인트 존 빈민 구호소(위와 아래 자세하게 나타남, 아래)는 일곱 개를 표시한다. 상징은 비잔티움에서 유래했는데, 별이 여덟 가지 지점을 나타낸다. 영국의 리차드 왕(

특히 수정주의 역사학자 Coogan과 같은 현재 역사가들은 Mitchell의 관점에 동감하며 "기근"이라는 단어가 음식의 부족을 암시하고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대기근"이 더욱 정확한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생산하고 운송할 수 있는 식량은 많았지만 정작 재배하는 사람들은 식량을 살 여력이 되지 않았습니다." 로스코몬 주의 스트록스타운 공원에 있는 아일랜드 기근 박물관의 큐레이터인 John O’Driscoll이 말한다.

가지고 있는 모든 돈을 지출하고 소작농이 가지고 있는 땅을 음식을 사기 위해 팔아 임차료를 갚을 돈이 없게 되었을 때, 지주의 명령으로 무장 관료들에 의해 쫓겨났다. 소작농이 돌아오는 것을 막기 위해 구조대는 오두막을 불태우거나 돌무더기로 토지를 줄였다. 그런 광경을 목격한 스트록스타운 교구의 Michael McDermott 신부님은 분노에 휩싸여 1847년 12월에 이브닝 프리맨(The Evening Freeman)에 투고했다. "그렇게 큰 군대와 경찰의 나태한 모습을 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가난한 사람의 오두막을 둘러싸서, 지붕을 불지르면서 반은 굶고 반은 벌거벗은 어린이들이 절망감에 휩싸인 고성을 지르며 불꽃에서 멀어지고, 어머니가 극한의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엎드려 있었으며, 상심한 아버지가 무릎을 꿇고 간청하고 있었다. 아무런 대안 없이 끔찍한 변방을 떠났고 배수로에서 죽어갈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죽어갔다. 1847년에는 병충해에서 벗어났지만 수확량이 전체 인구를 먹일 만큼 충분하지 않았다. 1851년 아일랜드 인구 조사에 기록된 대로 1844년부터 1847년 사이 기아로 인한 사망자가 대부분의 주에서 대폭 상승했다. 로스코몬 주에서는 8명에서 480명, 마요 주에서는 51명에서 927명, 케리 주에서는 15명에서 586명으로 증가했으며, 이런 이유로 "블랙' 47"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Mitchell이 말한 것처럼 분노로 휩싸여 반응한 사람이 있었고, 폭동이 수많은 아일랜드 마을과 주요 도시에서 잇따라 일어났고 가정, 가게, 창고에 근거한 갱과 군중들이 돌아다녔다. 다른 사람들은 이민을 선택해 더 좋은 삶을 희망하며 미국으로 가기 위해 지불할 수 있었던 페니들을 긁어 모았다. 1851년 25만 명의 아일랜드 이주민들이 미국으로 떠났고 보스턴과 뉴욕에 주로 자리 잡았다. 1855년에는 이 두 도시의 아일랜드 태생 인구가 3분의 1이나 되었다. 

이주민들에게 해운 중심지인 영국 리버풀은 일반적으로 대서양 횡단길에 있었다. 아일랜드 도시들 중 정기적으로 리버풀에 증기선 수리를 제공한 곳은 드로에다였으며, 드로에다는 더블린 다음으로 아일랜드에서 두 번째로 큰 이민 항구가 되었다. 

"드로에다 항구를 통해 리버풀로 가 미국으로 이주하는 사람의 수가 전년도의 숫자를 초과했습니다." 드로에다 아르거스(Drogheda Argus)에서 보고하길, 1847년 2월 드로에다 부두에서 70,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이주했다. "매일 마을은 시체처럼 보이는 이민자들과 매우 끔찍한 몰골의 불행한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여자와 어린이는 정기 기선 부두에 놓여 있는 순무 조각들을 위해 가축과 다투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또한 이미 끝난 광경 속에서도 아일랜드 도처의 수출 선박들은 식량의 무게로 인해 신음 소리를 냈다.

"길거리에서 5분만 서있는다면 비참하고, 지저분하며, 굶어가는 생물체들이 즉시 당신을 둘러싸고, 그들의 얼굴에 맺혀 있는 눈물과 비애를 목격할 것이다." 켄메어 교구의 John O’Sullivan 신부님이 1847년 12월 영국 재무부 차관보인 Charles Trevelyan에게 보낸 편지에 적은 내용이다. "비용이나 지출이 어떻게 되든지, 어떤 당에서 비용이나 지출을 대주던지 관계 없이 모든 기독교인들은 인정해야 합니다. 풍족함 속에서 사람이 굶주림으로 고통 받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요."

그러나 Trevelyan은 O’Sullivan의 견해를 공유한 기독교인이 아니었으며, 아일랜드의 "도덕적 그리고 정치적" 개선을 위한 기회로서 하느님이 보낸 병충해라고 믿었다.

하지만 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O’Sullivan의 간청에 관심을 가진 통치자가 있었다.

바로 1847년 24세가 된 Sultan Abdülmedjid 1세였다. 16세의 나이로 오스만 왕좌에 오른 그는 1861년 39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모로코에서 중앙 아시아에 이르는 제국을 통치했다. 그는 달필가였고, 아랍어, 페르시아어, 불어에 능통했다. 유럽 문학의 열혈 신봉자였으며 클래식 음악과 오페라, 황제가 외출할 때 텐트에서 흘러나오는 새롭게 녹음한 음악인 티니까지 섭렵한 음악 애호가였다. 또한 서양 과학, 의학 및 기술의 최근 진보에 큰 관심을 공유했다. 1847년 이스탄불의 베일레르베이 궁에서 Samuel Morse의 새로운 발명품인 전신의 시연을 본 후, 그는 발명가에게 Nishan Iftichar(영광의 기사단)이라는 칭호를 부여하고 개인적으로 하렘과 궁의 중앙 입구 사이에서 기쁘게 메시지를 전송했다. 

그는 천성이 부드럽고, 지능적으로 일을 의식하며, 품위가 있지만 동시에 겸손한 사람이었다. Stratford Canning 영국 대사혁신에 대한 열정뿐만 아니라 Abdülmedjid 1세는 기부로도 알려져 있다. 어린애처럼 자주 아팠던 그는 전염병의 참사를 국민들과 함께 나누길 희망했다. 예를 들어, 그는 공식 제국 순방 중 그가 있는 동안에는 마을 어린이들에게 예방 주사를 맞추었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그는 진보적이었다. 제국을 현대화하기로 결정한 젊은 술탄은 그의 아버지인 Sultan Mahmud 2세에게 영감을 받아 광범위한 탄지마트("재조직화") 조직에 착수했다. 여기에는 재판 없는 사형 철폐, 최초의 오스만 지폐 발행, 최초의 오스만 국회의 기반 다지기, 한 상부 아래 현대적이고 대중적인 기관, 학교, 대학교 시스템 확립, 새롭게 교육부장관 신설이 포함된다. 인종적 국민주의를 누그러뜨리길 희망하며 그는 인종이나 종교에 관계없이 모든 오스만 국민들에 법 앞에 전체적인 시민권과 평등을 확장했다. 궁에서 그는 몇 세기 동안의 부담이 되는 예의는 무시했다. 그는 자신이 허락하는 한 외국 사절은 더 이상 출입구에서 예식용 검을 확인하지 않아도 되었고, 장미 향수로 몸을 적시지 않아도 되었으며, 유니폼 위에 카프탄을 입고 술탄보다 낮은 위치에 앉지 않아도 되었다.

"새로운 통치 기간 동안 대사관은 그의 곁에 칼을 두고, 손에 삼각모를 든채 술탄과 직접 마주하고 서있었다." 한 영국 특사가 보고한 내용이다.

Abdülmedjid에게 자유롭고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었던 사람들 중에는 아일랜드계 런던 상인의 아들이었던 영국 대사 Stratford Canning이 있었다. Canning은 젊은 술탄의 야심을 존경했지만, 오스만 궁중의 장기간 있던 외교관 중 한 명으로서 그들의 역경에 대한 장기적인 전망을 가졌다.

"그는 천성이 부드럽고, 지능적으로 일을 의식하며, 품위가 있지만 동시에 열정으로 가득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Canning은 그를 이렇게 관찰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소원을 현실로 만드는 힘과 결단성이 부족했습니다."

궁극적으로 Abdülmedjid는 Canning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입증했고 그렇게 어린 시기에 결핵에 걸리지 않았다면 더 위대한 혁명을 달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한평생 병약했으며, 역사가 Miri Shefer-Mossensohn에 따르면 일반적이고 유행에 따른 사치였다고 하지만 안 좋은 그의 건강이 특히 외국 의사들에게 둘러싸여 지내야 했던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프랑스인, 독일인, 이탈리아인. 오스만 제국은 항상 유럽 의사들과 [함께] 자국 오스만 의사들을 두었는데 이런 역사는 1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오스만 의학: 치료 및 의료 기관, 1500-1700(Ottoman Medicine: Healing and Medical Institutions, 1500-1700)의 저자 Shefer-Mossensohn의 말이다. 그녀는 개연성에 근거한 한 가지 필수 근거를 지적한다. "어떤 의사가 더 뛰어난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다양한 기술을 가진 의사를 최대한 많이 고용한 것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Abdülmedjid의 개인 전문의 팀에는 네덜란드계 영국인인 Michael Millingen이 있었는데 그는 Lord Byron이 임종할 때 곁을 지켜 주었고, Spitzer라는 비엔나 해부학자를 보살핀 사람이다. 또한 아일랜드 코크 주에서 온 아일랜드 의사인 Justin Washington McCarthy가 있었다. 1789년 즈음 법정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난 McCarthy는 그의 고향 신문사인 코크 이그재미너(Cork Examiner)에서 1841년 9월 8일에 "터키 수도의 의사로서 오랜 기간 상당한 명성을 얻은 사람"으로 글에 실렸다. 그는 Abdülmedjid의 아버지가 군림했던 시기에 오스만 궁에 들어가기 전 10년도 더 되는 시기에 에딘버러와 비엔나에서 교육을 받았다. 

McCarthy가 술탄의 아일랜드 음식 지원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다는 최초의 언급이자 증거 자료는 아일랜드 작가이자 애국자인 William J. O’Neill Daunt의 일기에서 나타난다. 사건을 설명한 후 약 6년이 지난 뒤 1853년 1월 17일 에딘버러에서 글을 쓰기 시작한 Daunt는 "M’Carthy [sic]씨가 돌아왔다. 그의 아버지는 술탄의 의사였다."라고 상기한다. 다음날 입장 시 그는 "M’Carthy(터키인)가... 저에게 술탄이 기근이 닥친 아일랜드 인들에게 £10,000를 지원할 용의가 있지만 영국 대사 Cowley가 £1,000만 기부한 영국 여왕의 이름으로 방해를 하고 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아마 외국에서 더 많은 금액을 기부한다는 점에 신경이 쓰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Daunt의 자세한 이야기가 계속 된다. 빅토리아 여왕은 지원을 두 배로 늘리기 전 1847년 고작 £1,000만 보냈었다. (그녀의 인색함에 아일랜드 신문사는 그녀에게 "기근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술탄 Abdülmedjid 1세의 금전적 지원뿐만 아니라 1847년 5월과 6월 세 척의 오스만 선박이 드로에다에 도착했다. 옥수수를 가득 실은 두 척의 배가 오스만의 테살로니카 항구에서 도착했고 붉은 밀을 실은 한 척의 배가 슈테틴에서 왔다. 역사가들은 여전히 이 세 척의 배가 기부 때문에 도착했는지 아니면 단순 상선이었는지 불분명하다고 하지만, 아일랜드인들은 이제는 이스탄불의 오스만 기록 보관소의 일부가 된 화려한 편지로 감사를 표했다. 사본은 아일랜드 국립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오스만 기록보관소 / 무스타파 Öztürk Akcaoğlu 제공
술탄 Abdülmedjid 1세의 금전적 지원뿐만 아니라 1847년 5월과 6월 세 척의 오스만 선박이 드로에다에 도착했다. 옥수수를 가득 실은 두 척의 배가 오스만의 테살로니카 항구에서 도착했고 붉은 밀을 실은 한 척의 배가 슈테틴에서 왔다. 역사가들은 여전히 이 세 척의 배가 기부 때문에 도착했는지 아니면 단순 상선이었는지 불분명하다고 하지만, 아일랜드인들은 이제는 이스탄불의 오스만 기록 보관소의 일부가 된 화려한 편지로 감사를 표했다. 사본은 아일랜드 국립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어떤 아들이 해당 년도에 에딘버러에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McCarthy에게는 이스탄불에서 태어난 2명의 아들이 있었다. Cowley 경은 Hon. Henry Wellesley였으며, Canning이 영국을 떠난 1847년 대사로 근무했던 Canning 대사의 chargé d’affaires였다. 또한, 영국 여왕에 대한 존중으로 인해 기부금을 줄였다는 술탄에 대한 이야기는 런던에 소재한 예술 및 정치 기사인 The New Monthly 잡지의 최소한 3년 후인 1850년 10월호에서 나타난다. 터키의 에개해 해안에 있는 스미르나(현재: 이즈미르)에서 적은 이 글에서 통신원 Mahmouz Effendi는 "최근 아일랜드 기근 당시 젊은 술탄 Abdul-Medjid가 1,000l 스털링의 엄청난 기부를 해 신앙심 없는 자들에 대한 자신의 종교적 신념이 주는 고통을 완화하고 더 많은 금액을 지원할 수 있었음을 칭송하고 이러한 경우 영국의 현 군주가 첫째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예의를 차려야 했다고 말한다. 

러시아의 위협으로 오스만이 영국과 동맹을 맺었던 크림 전쟁(1853-56)의 불길한 전조가 있던 당시 파견된 Effendi의 보고서에는 "영국 지중해 군단의 지휘관인 Admiral William Parker 휘화에 아일랜드 인이 있었다면, "에메랄드 섬의 아들이 전투의 순간에 술탄의 시기적절하고 고귀한 너그러움을 기억하고 있었고, 적에 누가 되든지 이 감사에 젖은 아일랜드 놈이 용감하게 싸우고 집으로 돌아갈 것을 확신한다!"라는 글이 있다. 

의사인 McCarthy가 개인적으로 술탄에게 기근에 대해 알렸다는 증거 자료가 없지만 알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1847년부터 일어난 황폐화로 전세계 구호 단체들에게 영향을 주는 전세계 뉴스가 되었다.

1847년 4월 21일 런던 타임즈에서는 간략하게 그 선물에 대해 칭송한다. 
1847년 4월 21일 런던 타임즈에서는 간략하게 그 선물에 대해 칭송한다. 

"놀라운 국제적 구호 노력이 있었습니다. 전세계에서 기부금이 왔습니다. 카라카스, 케이프 타운, 멜버른 그리고 마드라스까지 말이죠." 코네티컷의 퀴니피악 대학교에서 아일랜드의 대기근 기관 이사를 맡은 Christine Kinealy의 말이다. 기본적으로 더욱 동점심이 많았던 Trevelyan의 전임자 Robert Peel 경 하에서 영국 정부가 구빈원 등 다양한 프로그램 형식으로 수백만 파운드의 구제책을 제공했지만 Kinealy는 개인 기부 또한 전체적인 노력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했다는 점을 말한다. 개인 의사들 중 가장 중요한 사람은 다양한 아일랜드 마을과 도시에 무료 급식소 건설을 도왔던 중산층 영국인과 미국 퀘이커 교도였다. 하지만 Kinealy는 가장 감동적이고 인상깊었던 외국 기부는 기근이 덮친 아일랜드만큼 가난한 나라에서 왔다는 점을 지적한다.

"인도에서 국가에서 가장 적은 임금을 받는 카펫 청소원이 아일랜드로 돈을 보냈습니다. 미국에서는 촉토 및 체로키 인디안 부족이 돈을 보냈습니다"라고 그녀는 말한다.

개인 기부 전달을 담당한 곳은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하이랜드에 소재한 조난 구제를 위한 영국 협회였는데, 이 곳은 영국 구호 협회(또는 bra)로 흔히 알려져 있으며, 이 곳은 1847년 1월에 창립되었다. 1849년 연간 보고서에 따르면 조직은 "제국의 주인이신 술탄이 1,000l을 기부하였고, 오스만 제국 및 다른 수많은 주에서 따라할 매우 후한 사례가 되었으며 영국인들과 동정심, 인류애 그리고 인류애로 독점적인 관계를 맺었다"며 공개적으로 칭찬했다. 오스만 제국 내부에서 있었던 다른 기부금에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일반인들이 모은 £450.11와 가톨릭 자선 단체인 세인트 빈센트 드 폴(St. Vincent de Paul)(svp)회의 사제단이 보낸 £283가 있었다. 

보인강에 있는 드로에다 부두는 아일랜드 해 어귀 근처에 있다.
보인강에 있는 드로에다 부두는 아일랜드 해 어귀 근처에 있다.

bra 보고서는 현재 이스탄불의 오스만 기록 보관소에 보관된 서한에 포함되어 있는데, 여기서 수많은 아일랜드 상류층과 성직자들이 Abdülmedjid 1세의 너그러움에 감사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피지에 적히고 토끼풀과 헤더로 장식한 매우 정형화된 문서의 텍스트에서는 "아일랜드의 고통과 괴로워하는 주민들"을 도와주고 "다른 유럽 국가들에게 가치 있는 본보기를 제시했다"며 칭송한다. 편지로 우쭐해 있는 Abdülmedjid 1세는 반복적으로 답장을 한다. "아일랜드 사람들의 고통을 들었을 때 엄청난 고통을 느꼈습니다. 할 수만 있었다면 힘을 다해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었을 것입니다.... 안심시키기 위해(그들을) 전 그저 제 가슴 속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기울일 뿐이었습니다. 영국 여왕의 국민 일부가 당하는 고통에 대한 동점심을 나타내는 것 또한 내 의무였습니다. 영국이 터키와 진정한 최고의 우방국이 되길 고대하기 때문이죠."

놀랍지 않지만 감탄으로 찬 이러한 공통의 말들 사이에는 외교가 숨겨져 있었다. 아일랜드 서한에서는 술탄이 다스리는 "광범위한 영토" 가 영향력을 미치면서 러시아의 차르 Nicholas i세가 전쟁으로 그를 위협할 당시 Abdülmedjid의 영국에 대한 따듯한 인성이 영국 여왕에게 희미하게 어필했다고 정중하게 인정한다. 

할 수만 있었다면 힘을 다해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었을 것이다... [그들의] 평안을 위해 내 가슴 속의 명령을 들을 수 밖에 없다. - Abdülmedjid 1세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 신문 표제는 Abdülmedjid를 칭찬했다. 1847년 4월 21일 네이너 가디언(The Nenagh Guardian)에서 "아일랜드의 괴로움-터키의 동정심"이라는 표제를 실었고, 더블린의 더 네이션(The Nation)에서는 4일 먼저 "술탄과 아일랜드인들" 간의 우정에 대해 실었다. 심지어 매우 보수적인 런던 타임즈도 같은 날 아일랜드인들에 대한 술탄의 너그러움으로 "큰 신뢰를 얻었다"고 선언한다. 이야기를 알아차린 영국 종교 잡지인교회와 주 관보(Church and State Gazette)에서는 4월 23일 Abdülmedjid를 "기독교 국가와의 따듯한 공감"이라는 점을 들어 "무수히 많은 이슬람인들을 대표하는" 통치자라고 칭송했다. 기사는 "공통적인 인간애의 진정한 기부 속에서 그러한 공감이 상승하고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도들 간에 계속 유지되기를" 희망하며 신문에 실렸다. 6년 후 크림 전쟁이 일어나는 시기에 일부 영국인들이 러시아의 야심을 좌절시키기 위한 무슬림의 지원에 대해 기독교 국가의 타당성에 의구심을 가졌으며, 다른 사람들은 "공통적인 인간애의 진정한 기부"를 잊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는 기독교인이 아닌 술탄으로서 큰 스트레스를 겪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왜 우리가 그를 지지해주어야 하죠?" 울버햄턴의 Jack Robinson이 1853년 11월 데일리 뉴스 독자란에 쓴 글이다. "전 일부 사람들이 기근이 아일랜드를 참혹하게 만들었을 때 그가 얼마나 기독교인처럼 행동했는지 일깨우길 바랍니다."

Abdülmedjid가 아일랜드로 £1,000를 보냈다는 사실은 잘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곡물로 가득 채워진 선박들은 무엇일까? 여기서 사실과 허구의 구분이 더욱 어려워지지만, 술탄이 £1,000 이상 지원했다는 점을 제시하는 상황적 증거 자료가 있다.

현재 약 70,000명의 사람들이 드로에다와 인근 지역에 살고 있으며, 그 중에는 더블린으로 통근하는 수많은 사람들도 있다. 이 곳은 역사적인 항구로서 터키의 주식인 패스트 푸드 그릴 케밥처럼 해외의 영향을 오랜 기간 받아 왔다.
현재 약 70,000명의 사람들이 드로에다와 인근 지역에 살고 있으며, 그 중에는 더블린으로 통근하는 수많은 사람들도 있다. 이 곳은 역사적인 항구로서 터키의 주식인 패스트 푸드 그릴 케밥처럼 해외의 영향을 오랜 기간 받아 왔다.

1849년 7월 21일 미국의 주간 뉴스인 알비온(The Albion)에서는 "술탄은 본래 £10,000와 더불어 식량을 잔뜩 실은 선박들을 제공하기로 했습니다" (강조 추가)라고 보도했다. 브루클린 데일리 이글(The Brooklyn Daily Eagle)의 1849년 9월 29일 2페이지에 있는 "왕족의 에티켓과 그 결과"라는 유사한 이야기에 따르면 "기근이 아일랜드를 망치고 있는 동안 터키 술탄인 Abdul Medjid Khan이 만 파운드 기부를 제안했으며, 굶주리는 아일랜드 인들을 돕기 위해 식량을 실은 선박 일부를 보냈다"고 한다(강조 추가). 1851년 출간된 전기 작가 Charles Mackay의 Robert Peel 경의 삶과 시간(Life and Times of Sir Robert Peel) 4권에서도 술탄이 "식량을 실은 일부 선박"과 함께 £10,000를 보내려 했다는 동일한 주장을 한다. 몇 년이 지난 1880년, 영국 왕실에 친구가 없는 아일랜드 애국자인 Charles Stewart Parnell은 이 문제에 대한 핵심을 지적했다. 그는 빅토리아 여왕이 터키 곡물 선박과 더불어 £6,000에 달하는 화물을 가로막았다고 주장했다. 또한 빅토리아 여왕이 아일랜드로 어떠한 금전적 지원도 하지 않았다고 언명했다. 이는 그의 이야기를 의심하게 한다. 그의 잘못된 주장은 다름 아닌 Winston의 아버지 Randolph Churchill 경에게 비난을 받았다. 두 남자의 불화는 계속해서 영국과 호주 신문에서 벌어졌다. 최근 아일랜드 작가 Ted Greene는 그의 기념서 드로에다: 아일랜드 역사 속 장소(Drogheda: Its Place in Ireland’s History)(2006년 출간)에서 빅토리아 여왕이 우선 코브(코크)에서, 그 뒤 벨파스트 항구에서 배가 들어오는 것을 막았지만 결국 드로에다의 작은 항구에 비밀스럽게 정박하는데 성공해 음식을 제공했다."(원본 주안점)고 말한다.

"식량을 실은 일부 선박"에서 드로에다에 "비밀스럽게" 정박한 세 척의 배로, 이야기는 Abdülmedjid가 기부금에 일부 식량을 추가한다는, 실현되지 않았다는 이야기에서 영국 세관 당국을 통과한 곡물을 실은 배들의 비밀 작전으로 몇년이 지나면서 발전해왔다. 두 가지 모두 Kinealy는 이 이야기의 특정 장에 대한 의구심을 떨칠 수 없었다.

"단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만약 빅토리아 여왕보다 더 많은 지원을 요청받지 않았고, 영국과의 동맹 강화를 원했다면, 동맹국을 모독할 수도 있는 세 척의 선박을 몰래 보낼 위험을 감행했을까요?" 그녀는 주장한다.

하지만 터키 북부의 카스타모누 대학교에서 역사학 조교수를 역임하고 있는 Ahmet Öǧreten이 터키 무슬림의 관점에서 선박의 이동은 가능하다고 말한다.

"무슬림에게 있어서 기부를 하고 그 중 일부만 허용된다면 나머지 금액을 돌려 받지 않는 것이 흔한 관습이었습니다. 전체 기부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어떻게든 찾게 되어 있습니다"라고 Öǧreten은 말한다. 그는 이 에피소드에 대한 연구를 준비 중이다. 술탄이 종교적인 의무로서 본래의 간청을 들어주었을 것이라는 그의 믿음은 Henry Christmas 목사의 1854년 Abdülme-djid 전기에 반영되어 있다. "내 종교가 환대에 대한 법칙을 준수하게 만들었다.", Christmas는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공격으로부터 도망친 폴란드와 헝가리 피난민들의 유입에 대한 술탄의 언급을 인용했다. 프로테스탄트 목사는 아일랜드로 보낸 선물 이야기와 함께 Abdülmedjid의 "진정한 기독교 정신, 유럽에 있는 모든 기독교 왕자보다 더 터키의 Mohammeden[sic] 술탄에게 더 많은 점이 있다"는 예시로써 인용했다.

아일랜드와 이스탄불의 기록 보관소를 찾아본 Öǧreten은 적어도 술탄의 기부가 사실 공개 보고된 것보다 다소 많은 양이라는 점을 제시하는 증거 자료를 공개했다.

"오스만 기록 보관소에 있는 문서에 따르면 그는 1,000[영국]파운드가 아니라 1,000터키 리라를 기부했습니다." 교수의 말이다. 문서는 술탄에게 감사를 표하는 아일랜드 서한에 등장한 사람 중 한 명인 "Mosyo O’Brien", 아마도 서한의 서명인인 ("Monsieur") Lucius O’Brien 경으로 보이는 사람의 요청에 대해 다룬다. 펜이 작았는지 해석이 잘못되었는지에 관계 없이 문서에 적힌 금액은 "1,000리라"였으며, 이는 Öǧreten가 그 당시 £1,000보다 더 높았을지도 모른다고 지적한다. 1847년 1 오스만 리라의 환율이 £1.20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Abdülmedjid의 1,000리라(£1,200) 기부는 오늘 통화로 약 $160,000일 것이다.

금액에 상관없이, "1847년 드로에다와 터키 선박(Drogheda & The Turkish Ships of 1847)" 연구의 저자이자 드로에다 역사가인 Brendan Matthews에 따르면 먼 거리에 있는 무슬림 통치자는 궁극적으로 합류 지점의 상황과 마지막으로 별과 초승달을 사용하는 마을 깃발이 우연의 역할을 해 그를 드로에다 구전의 영웅이 되었다고 한다.

"정기적으로 드로에다에서 리버풀에 기선 정비를 제공했던 개인 회사인 드로에마 정기 기선사의 상징은 초승달 위에 하얀 별 다섯 개가 자리잡힌 녹색 깃발입니다." Mattews의 설명이다. 회사는 이 배너를 채택했는데, 이는 오늘날 오스만이 아닌 이슬람 유산과 유사해졌지만, 12세기 후반 이후 별과 초승달을 특징으로 한 드로에다의 도시 장식과는 달랐다.

1995년, 드로에다의 시장인 William Frank는 술탄의 지원을 드로에다 호텔 입구에 있는 이 기념 명판으로서 인정하였는데, 이 호텔은 옥수수와 밀 배급을 책임지던 오스만 선원들이 묵었을지도 모르는 곳과 동일한 호텔이다.
1995년, 드로에다의 시장인 William Frank는 술탄의 지원을 드로에다 호텔 입구에 있는 이 기념 명판으로서 인정하였는데, 이 호텔은 옥수수와 밀 배급을 책임지던 오스만 선원들이 묵었을지도 모르는 곳과 동일한 호텔이다.

Matthews는 말한다. "그들은 1194년 사자왕 리차드에 의해 드로에다에서 헌정됩니다." 리차드 왕은 제3차 십자군 전쟁 시기에 성지로 가던 중 마지막 비잔틴 황제에 의해 키프러스에 잡혀 있었던 1192년 이 상징을 채택했다. 고대 비잔틴의 수호 여신인 아르테미스의 초승달과 성모 마리아의 여덟 별을 합친 본래의 상징은 4세기 이후 비잔틴 황제가 사용해 왔었다. 14세기 이후까지도 이슬람의 상징이 되지 않았다.

한편, 1846년부터 1847년까지 아일랜드로 가는 상업적 곡물 수출이 197,000톤에서 909,000톤까지 4배 이상 상승했다. 외국 곡물, 그 중 특히 오스만 곡물의 갑작스러운 유입을 경험한 항구 중 한 곳이 드로에다였다. "1847년 기근이 일어나기 전 드로에다의 외국 무역은... 발트해 연안과 미국 대륙의 목재 화물 소수로 국한되어 있었습니다."라고 Anthony Marmion이 1853년 출판된 그의 저서 고대 및 현대 아일랜드 해양 항구 역사(Ancient and Modern History of the Maritime Ports of Ireland)에 썼다. "하지만 그 이후, 특히 그 이후 4년 동안, 상당한 외국산 밀 수입 무역이 있었고, 특히 흑해에서 더욱 많의 양의 인도산 옥수수가 들어왔습니다."

이러한 확장은 Abdülmedjid의 탄지마트로 인한 오스만과 유럽 간 무역 상승의 일환이었다. 역사가 Mark Mazower의 2006년 출판된 그의 저서 살로니카, 유령의 도시(Salonica, City of Ghosts)에 따르면 "서양 유럽의 역동적인 산업화 경제와의 새로운 무역 연결 구축"을 추구하는 상업부가 이를 확립하였다. Carter Vaughn Findley는 그의 2010년 연구 터키, 이슬람, 국가주의, 현대성(Turkey, Islam, Nationalism, and Modernity)에서 1840년과 1876년 사이에 일어난 이 무역 자유화로 오스만의 수입 가치가 £470만에서 £2,000만으로 증가했다고 말했다. 전문가 Findley는 "발트해 연안 농산물이 불균형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조각가 Rowan Gillespie가 기근 을 견뎌내고,  기근 을 피해 이주했으며, 사라져버린 수백만 명의 아일랜드인들을 기리기 위해 1997년 더블린에 세운 작품은 아일랜드 최악의 나날들을 생생하게 상기시킨다. 

해당 기간의 신문도 샅샅이 뒤져 Matthews는 발트해 연안 지역에서 온 세 척의 배가 1847년 5월 드로에다에 정박했다는 점을 알았다. 바로 널리 알려진 Abdülmedjid의 선물이 온 달이다. 그 중 두 척의 배인 포르쿠핀은 테살로니카(살로니카)에서 인디언 옥수수를 실었던 반면, 세 번째 배인 알리타는 "터키산 붉은 밀"로도 알려진 붉은 밀을 현재는 폴란드령인 발트해 연안 항구인 슈테틴에서 실어왔다. Matthews는 "비밀 선박"이라고 부르는 세 척의 선박이었다고 제시하지는 않지만, 오스만 제국의 곡식선들의 우연한 집합점, 드로에다 정기 기선사의 별과 초승달 깃발, 항구에 모여 있던 절망에 찬 사람들이 이러한 전설의 씨앗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사르디니아인, 이집트인 그리고 그리스인 선원이 탄, 오스만 제국에서 온 세 척의 배가 있습니다. 이들은 오스만 제국의 별과 초승달에 대해 잘 알고 있죠. 70,000명의 굶주린 아일랜드 사람들이 직업이나 음식 또는 아일랜드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기 위해 부두에 몰려 있습니다. 그리고 세 척의 현지 선박이 오스만 선원들이 식별할 수 있었던 별과 초승달이 그려진 깃발을 날리며 있습니다." Matthews가 요약한다. 그는 이러한 상황이 굶주리는 아일랜드 인들에게 직접 일부 곡식을 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부 선원들이 동정심에서 또는 별과 초승달이 현지 선박의 돛대에서 휘날리는 항구에서 애매모호한 연대감에서 비롯되어 자발적인 인도주의적 행위를 하게 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한다.

"아마 음식으로 가득 찬 바구니 100개를 주지 않았을까요? 곡물로 찬 바구니 20개를 줘서 100명의 가족을 먹이지 않았을까요? 말로써 전래되던 역사 속에서 이 이야기로 이어진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비극의 시기에 터키인들이 가져온 음식을 받게 되었죠." Mattews의 말이다.

Matthews는 이 이야기가 계속 전래되면서 "비밀" 선박과 "터키식" 별과 초승달 "채택"의 이야기가 격하게 환영을 하는 도시 공직자들에 의해 꾸며졌다고 믿는다. 그는 요약하길 그런 꾸밈이 이야기가 구전되면서 덧붙여졌을 가능성이 있다. 구전 전통으로 유명한 문화의 놀라운 부산물인데 마치 줄리어스 시저가 갈리아 전쟁에서 쓴 글에다가 "기억을 사용"하는 것을 선호한 것처럼 말이다.

진실이 어떻게 되든지 간에 "대기근"이라는 역사 속에 있던 이 장은 그림과 돌에 새겨져 영원하게 되었지만, 아직 장편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터키 제작자인 Omer Sarikaya의 야심은 충족되어야 한다. (반대쪽 사이드바를 참조하십시오.)

하지만 가슴에서는 어떤 빚도 지지 않았지만 진실하고 개인적으로 자비를 필요로 했던 사람들을 향한 오스만 통치자의 너그러운 행위에 대한 반박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 담겨 있다.

Tom verde 코네티컷에서 거주하는 프리랜서 작가인 Tom Verde (writah@gmail.com)는 정기적인 AramcoWorld의 기고자입니다. 

 

이 기사는 Aramco World의 인쇄판 2페이지에 실려 있다.

2015년 1월/2월호 이미지는 Public Affairs Digital Image Archive를 참조한다.

This article appeared on page 2 of the print edition of AramcoWorld.

Check the Public Affairs Digital Image Archive for 2015년 1월/2월 imag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