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 66, No. 12015년 1월/2월

In This Issue

아라비아의 블루스 - 글 Edward Fox // 사진 Hatim Oweida
바레인 무하라크에서 열린 앙상블 무하카드 빈 파리스의 공연 중 가수이자 드러머인 무하마드 자이드가 sawt al-khaleej(사우트 알 칼리즈)의 가슴 저밈을 표현하고 있다.

카타르 수도 도하에서 택시를 타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아랍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채널은 99.0, 사우트 알 칼리즈. 아랍 지역에서 가장 인기 있고 영향력 있는 라디오 디지털 방송 네트워크이다. 도하에 기반을 둔 해당 라디오 네트워크의 이름은 "걸프의 목소리"라는 뜻으로, 쿠웨이트에서 오만까지 아라비아 반도 동부 해안을 따라 범아랍계 대중 음악으로 광범위한 아랍계 청중을 상대로 한 채널에 걸맞는 이름이다.

하지만 동부 아라비아 반도의 음악을 아는 누군가에게 이 이름에 대해 물어보면, 사뭇 헷갈리는 대답을 들을 것이다. "어떤 sawt al-khaleej(사우트 알 칼리즈) 말씀이시죠?" 오늘날 12년된 이 라디오 네트워크의 영향력은 라디오와 www.skr.fm에서 너무나 보편적이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우트 알 칼리즈라는 이름은 아랍 팝과 동격으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이 음악을 듣기 위해 조금만 찾아보더라도, 사우트 알 칼리즈가 바다에서 시작되어 육지에서 대중화되었으며 그리고 여전히 전 지역에 걸쳐 토속적인 스타일로 연주되고 있는, 오랜 지역적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된다. 장르 애호가들은 "진짜 사우트"를 암시하듯 간단하게 "사우트"라고 부른다.

타블 바흐리(씨 드럼) 연주자의 드럼 소리는 리드미컬한 박수 소리를 통한 청중들의 참여를 유도하게 된다.
타블 바흐리(씨 드럼) 연주자의 드럼 소리는 리드미컬한 박수 소리를 통한 청중들의 참여를 유도하게 된다.

이 "진짜 사우트"(saowt)는 19세기 말에 등장했다. 수많은 창시자들이 있지만 시기적으로 가장 초창기의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은 1903년 사망한 쿠웨이트인 압둘라 알 파라즈이다. 그의 후계자들은 상업 레코딩이 걸프 지역에 막 도달했을 당시 계속해서 사우트의 스타일을 발전시켜 나갔고, 그들의 작업은 1920년대에 최초로 제작된 78rpm 음반의 지직거리는 레코딩을 통해 현재에도 들을 수 있다. 사우트는 이와 같이 레코딩 못지 않게 교육과 공연을 통해 확산된 20세기 형식의 대중 음악이다. 

사우트는 아랍 음악에 걸프만 아랍국가들의 독특하게 기여한 사항일뿐만 아니라, 레반트와 마그레브의 전통을 따라 자리잡을 수 있었던, 서양 음악 애호가들에게도 쉽게 호소할 수 있는 음악이다. 실제로, 사우트는 블루스와의 장르적 유사성 때문에 "아라비아의 블루스"라고 불리기도 한다.

무하마드 빈 파리스 음악당에 전시되어 있는 골동품 '우드'는 한 때 많은 사우트 곡에 맞추어 연주되었다.
무하마드 빈 파리스 음악당에 전시되어 있는 골동품 '우드'는 한 때 많은 사우트 곡에 맞추어 연주되었다.

간단히 말해 사우트는 프렛이 없는 6현의 아랍 전통 류트인 우드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가수가 주도하고, 미르바스라 불리는 소형 드럼으로 반주하였다. 그 후, 사우트는 사교적 음악이 시작된다. 사우트 공연은 청중들의 참여를 동반한다. 청중들은 단지 듣기만 하지 않는다. 함께 노래를 부르고 섬세하고 강력하며 리드미컬한 박수 소리로 연주하기도 한다. "청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오해의 소지가 될 수 있는 것이, 청중과 연주자의 구별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가수가 곡을 리드하지만 현장에 있는 모든 이들이 박수를 치고, 후렴구를 노래하며, 함성을 지르고 춤까지 춰가며 참여한다. 사우트 곡 자체에는 미국 블루스의 풍미가 녹아 있다. 이야기를 전달할 뿐만 아니라 어려웠던 시절, 향수,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일,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 그리고 고통으로부터 구원 받기 위한 신에게의 호소 등과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아랍인이 아닌 청중들조차 가사를 이해하지 못해도 이것이 얼마나 심금을 울리는 음악인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으며, 그 누구라도 강력한 리듬을 이해할 수 있다. 

사우트는 걸프 지역 아랍국가들의 청자들을 과거로, 즉 사우트 곡에서 "천국의 문이 열린" 때라고 표현하듯 걸프 경제가 석유 산업으로 호황을 누리기 전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부로, 진주잡이로, 바다 상인으로 힘겨운 생활을 꾸려가던 옛 시절로 데려간다. 이는 일반적으로 드럼 반주, 노래 및 음송을 위해 현악기를 삼가하는 보다 간단한 형식의 소박한 아랍 내부의 음악과는 다르다.

무하마드 빈 파리스의 초상화가 무하라크 내 그의 이름을 딴 콘서트홀 내부를 응시하고 있다. 19세기 말 바레인의 지배계층 가문에서 태어난 빈 파리스는 스승을 따라 봄베이로 가 그 곳에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사우트 형식을 개발했다.
무하마드 빈 파리스의 초상화가 무하라크 내 그의 이름을 딴 콘서트홀 내부를 응시하고 있다. 19세기 말 바레인의 지배계층 가문에서 태어난 빈 파리스는 스승을 따라 봄베이로 가 그 곳에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사우트 형식을 개발했다.

오늘날 사우트는 사적인 장소, 그리고 대중적인 공간 모두에서 들을 수 있다. 순수주의자들은 집 안에서 친구들끼리 모인 곳이나 다르라고 불리는 클럽하우스 등의 사적인 장소가 진정한 최상의 공연 환경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는 전통적으로 남자들밖에 참석할 수 없는 행사다. 가정집과 같은 그러한 환경에서, 사우트의 밤은 사람들이 벽을 따라 놓여 있는 쿠션에 기대 둘러 앉은 좌식 방, 즉 마즐리스라는 곳에서 열린다. 다과가 제공되고, 사람들은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아무도 보고 있지 않아도 뒤에는 텔레비전이 틀어져 있기도 한다. 

이와 같은 음악의 밤은 늦은 밤까지 계속된다. 가수가 노래를 하고 싶으면 노래가 시작된다. 누군가가 사람들에게 집중하라고 외치고, 노래가 시작되면 왁자지껄한 잡담 소리가 잦아든다. 보통 모든 사람들은 연주되는 곡을 다 알고 있다. 그들은 사우트 전통의 일부이다. 

사우트 공연에서, 청중들은 춤을 추고 당김음 박수로 참여하며, 이렇게 연주자와 청중의 구분이 흐려진다.
사우트 공연에서, 청중들은 춤을 추고 당김음 박수로 참여하며, 이렇게 연주자와 청중의 구분이 흐려진다.
사우트 공연에서, 청중들은 춤을 추고 당김음 박수로 참여하며, 이렇게 연주자와 청중의 구분이 흐려진다.

이는 드럼 연주자들은 어떤 리듬을 연주할 지 알고 있으며, 그 밖에 모든 이들 또한 각각의 곡에 필요한 정교한 당김음 박수의 패턴을 알고 있음을 의미한다. 사우트 박수는 극장에서의 박수 갈채와 전혀 다르다. 사우트의 경우, 손바닥을 평평하게 펴고 강하게 부딪혀 날카롭고 정교한 타악 사운드를 만들어낸다.

사우트 곡은 악기 연주로만 된 서곡으로 시작하며, 반복적인 짧은 노래가락이 이어진다. 다음으로 노래의 핵심적인 가사로 이어지는데, 일반적으로 고대 아랍어에서, 그리고 때론 시에서 카시다라고 불리는 부분이다. 가사는 풍성하고 시적인 언어로 마음 속의 곤경을 표현한다. 예를 들면, HMV(His Master’s Voice) 레이블에서 바레인의 무하마드 빈 파리스가 1932년 이라크 바스라에서 최초로 녹음한 "Ma Li Ghusn al-Dhahab"("금빛 나뭇가지에 무슨 일이"),라는 노래의 "내 사랑하는 이가 건드리자 나뭇가지가 금빛으로 변했고, 그가 없는 지금은 낮게 구부러졌네"와 같은 가사다. 그런 다음 모든 이들이 참여하는 후렴구 tawshihah가 이어진다.

최근 걸프 연안국들의 민속 또는 문화 유산 부서의 지원을 받아 누구나 입장할 수 있는 대중 공연 공간에서도 사우트 콘서트가 열리고 있다. 예컨대 유산 보존 기관인 샤이크 에브라힘 빈 무하마드 알 칼리파 문화 연구 센터 음악당에서 거의 매주 목요일마다 사우트 연주회가 개최된다. 이 음악당은 바레인에서는 바레인의 수도 마나마의 역사 지구인 무하라크 소재의 복원된 저택인 빈 마테르 하우스에 소재하였다.

우드, 바이올린, 드럼이 어루러진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앙상블 무하마드 빈 파리스 구성원들이 카눈(아랍식 치터), 나이(목관 피리), 전자 건반을 연주하며 모두 앙상블 소속 가수들을 뒷받침하는 연주자들과 함께 동부 아랍 반도의 사우트 전통을 생생하게 유지하고 있다.
우드, 바이올린, 드럼이 어루러진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앙상블 무하마드 빈 파리스 구성원들이 카눈(아랍식 치터), 나이(목관 피리), 전자 건반을 연주하며 모두 앙상블 소속 가수들을 뒷받침하는 연주자들과 함께 동부 아랍 반도의 사우트 전통을 생생하게 유지하고 있다.

상주 악단인 앙상블 무하마드 빈 파리스는 사우트 전통 노래를 연주한다. 그룹은 해외 순회 공연을 다니기도 하며, 보통 최대 14명의 연주자로 구성되지만 목요일 밤에는 가수, 우드 연주자, 바이올린 연주자, 그리고 카눈(아랍식 치터), 전자 피아노, 나이(목관 피리) 및 다양한 드럼 연주자로 구성된 소규모 연주하기도 한다.

모든 악기가 들어가지만 사우트 편곡은 사적인 회합에서 들을 수 있는 노래와는 매우 다르다. 가수가 우드와 추진력 있는 리듬을 통해 스스로 반주하는 사우트의 핵심은 동일하지지만, 편곡은 훨씬 더 섬세해 "범아랍 대중음악"이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다. 아랍식 룸바와 같이 서양 악기와 혁신적인 리듬을 사용하게 된 것은 이집트의 영향을 암시한다. 

우드, 바이올린, 드럼이 어루러진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앙상블 무하마드 빈 파리스 구성원들이 카눈(아랍식 치터), 나이(목관 피리), 전자 건반을 연주하며 모두 앙상블 소속 가수들을 뒷받침하는 연주자들과 함께 동부 아랍 반도의 사우트 전통을 생생하게 유지하고 있다.
다른 이들이 사우트의 일부분인 박수의 패턴을 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앙상블 무하마드 빈 파리스의 드럼 연주자들 또한 음악을 완전히 외우고 있다. 악기 연주로만 이루어진 서곡이 끝나면 노래가 이어지고, 그 다음으로 후렴구인 tawshihah가 이어진다.

앙상블의 목표는 사우트의 현대화를 통해 사우트의 전통을 지켜나가는 것이다. 앙상블이 연주하는 곡 대부분은 마즐리스의 연주자들이 동일한 레퍼토리와 동일한 전통에 기대고 있기 때문에 이들에게도 친숙하다. 그렇긴 하지만, 앙상블의 연주는 이렇듯 현대화된 사우트가 정통인가 하는 의문의 여지를 남긴다. 

여기에서 다시 미국 블루스와의 비교가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순수주의자들이 정통 블루스는 어쿠스틱 기타를 연주하고 노래하는 미시시피 델타 사람에게서만 나온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이들은 뉴욕시의 극장에서 빅밴드와 함께 전자 기타를 연주하는 B.B.킹 역시 정통이라고 응답한다. 생존하고 성장하기 위해 전통은 진화하고 새로운 요소를 도입한다. 정통성에 대한 판단은 개별 청자들에게 남겨둔 채 말이다. 

노래가 시작하자 가수이자 우드 연주자인 칼리파 알 주메이리가 집중하고 있다.
노래가 시작하자 가수이자 우드 연주자인 칼리파 알 주메이리가 집중하고 있다.

분명, 앙상블 무하마드 빈 파리스에서는 전통적 스타일의 사우트를 고집한다. 악단이 무대에서 연주하고 청중은 마련된 좌석에 앉는 음악당의 설계에 따라 "청중"과 "연주자" 사이에 구분이 생기지만, 사우트 관객들은 조용히 앉아있지만은 않는다. 연주자들에게도 함께 노래하고 마찬가지로 리드미컬한 박수를 치라는 동일한 요구가 있다. 또한 한 두 명의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마치 친구들과 벌이는 음악의 밤에 있는 것처럼 연주자들 앞에서 춤을 추는 일도 다반사다. 

빈 파리스는 바레인에서 뿐만 아니라 전체 걸프 지역에서 여전히 유명하다. 음악당 바로 옆에는 빈 파리스가 거주했으며, 샤이크 에브라힘 센터에서 복원하여 그의 삶과 이력을 기리는 작은 박물관으로 탈바꿈시킨 아름다운 전통식 바레인 건물이 있다. 이 곳에는 그가 소장했던 악기와 78rpm 음반 및 기타 수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무하라크는 바레인에서 사우트의 요람이라고 여겨질 수 있다. 빈 파리스가 이 곳에서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현재 앙상블 무하마드 빈 파리스를 이끌고 있는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우드 연주자인 아레프 부셰이리 등 다른 많은 훌륭한 사우트 연주자들이 이 곳에서 태어났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하라크를 바레인의 공항이 있는 곳으로만 알고 있지만, 그 기원은 5,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무하라크는 영국이 총독부를 마나마로 옮긴 1923년까지 바레인의 수도였다. 오늘날 무하라크는 4 평방 킬로미터(1.5 평방 마일)에 거의 20만명의 인구가 거주하는 인구 밀집 도시이다. firjan이라고 불리는 구역들로 분할되어 있으며, 무하라크 토박이는 말하는 이의 억양만 듣고도 어느 구역 출신인지 알 수 있다고 한다. 과거 진주 상인 및 지배 가문이 집을 지은 곳이 바로 이 곳이며, 샤이크 에브라힘 센터는 이 중 빈 파리스의 저택을 포함해 10개를 복원했다. 

무하마드 빈 파리스 알 칼리파는 1895년 바레인의 지배 가문에서 1843년부터 1868년까지 통치했던 샤이크 무하마드 빈 칼리파의 손자로 태어났다. 10대 시절 그는 형으로부터 음악을 배웠으나 이후 음악 스승인 압드 알 라힘 알 아시리를 따라 봄베이로 여행을 갔다. 그 곳에서 그는 영국 행정부를 위해 선원이나 군인으로 일했던 대부분 예멘 출신인 아랍인 다수와 함께했다.

무하마드 빈 파리스와 같은 연주자들은 상업 레코딩 산업 뿌리를 내렸을 때 이력의 정점에 있었다.이는 그와 같은 출신 배경의 사람에겐 이례적인 일이었으며, 종종 집안의 골칫덩어리였던 것으로 묘사되곤 한다. 그러나 봄베이 체류를 통해 그는 음악적 지평을 한층 넓힐 수 있었으며, 새로운 사우트 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바레인으로 돌아와서는 가수로서 요구하는 곳이 많았다. 그는 두 명의 제자를 받아들였는데 그 둘이 바로 20세기 바레인의 위대한 대중 음악가 무하마드 주와이드와 다히 알 왈리드이다. 사우트에 헌신했던 음악가들 중 빈 파리스와 알 왈리드는 그들의 파란만장한 관계 때문에 종종 함께 회자된다. 

알 왈리드는 빈 파리스의 제자로 시작했지만, 곧 스승의 동료가 되었고 나중에는 경쟁자가 되었다. 그들은 잘못 만난 한 쌍이었다. 빈 파리스가 지배 가문 출신인데 반해 알 왈리드는 동아프리카 노예의 아들이었다. 빈 파리스는 알 왈리드를 동격으로 취급하는 데 대해 격분했으며, 특히 알 왈리드가 음악적으로 그를 능가하게 되었을 때 더욱 더 그러했다. 1947년 사망한 빈 파리스는 자신이 연습하는 곡을 듣고 알 왈리드가 더 나은 버전을 만들어내지 못하도록 비밀리에 리허설을 진행했다는 말도 전해진다.

미국 블루스와 마찬가지로 사우트는 모든 연령대의 참가자, 청자를 만족시키기 위해 갈망과 곤경을 다루는 가사를 복잡하고, 카타르시스적인 리듬과 결합한다.미국 블루스와 마찬가지로 사우트는 모든 연령대의 참가자,청자를 만족시키기 위해 갈망과 곤경을 다루는 가사를 복잡하고, 카타르시스적인 리듬과 결합한다.
미국 블루스와 마찬가지로 사우트는 모든 연령대의 참가자,청자를 만족시키기 위해 갈망과 곤경을 다루는 가사를 복잡하고, 카타르시스적인 리듬과 결합한다.

사우트의 기초는 쿠웨이트의 압달라 알 파라즈에 세워졌지만, 스타일은 이들과 같은 후대의 연주자들에 의해 정제되고 대중화되었으며, 이들은 상업 레코딩 산업이 중동에 뿌리내린 시기에 이력의 정점에 섰던 행운을 누렸다. 

1920년대와 30년대에는 걸프 지역의 경제가 석유산업의 등장으로 성장세였으며, 축음기와 같은 최신식 엔터테인먼트에 소비할 돈이 있었다. 영국 런던에 본사를 둔 HMV(His Master’s Voice)와 같은 유럽 기업들은 걸프 지역과 같은 신흥 시장에서 축음기를 판매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연주하고자 하는 레코딩을 제공해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는 축음기 회사의 상업적 전략의 일환으로 지역 아티스트들의 연주를 레코딩하는 것을 의미했으며, 이 덕분에 우리가 현재 이 시기의 수많은 대중 음악 레코딩을 접할 수 있는 것이다. 

무하라크는 사우트의 요람이자 20만명이 거주하는 도시임은 물론 무하마드 빈 파리스 가택 박물관이 있는, 바레인의 가장 역사적인 도시 중 하나이다.
무하라크는 사우트의 요람이자 20만명이 거주하는 도시임은 물론 무하마드 빈 파리스 가택 박물관이 있는, 바레인의 가장 역사적인 도시 중 하나이다.

최초로 상업 레코딩을 한 최초의 걸프 지역 음악가는 압드 알 라티프 알 쿠웨이티로, 1927년에는 바그다드에서만 레바논 기업인 Baidophon(위대한 이집트 가수 움므 쿨숨 음반을 레코딩한 레이블)에서 10곡을, 이후 다른 레이블에서도 곡을 녹음했다. 이들 레코딩의 인기에 힘입어 다른 레이블들 또한 시장에 뛰어들어 1929년 또는 1930년 빈 파리스의 제자인 무하마드 주와이드 및 1932년 무하마드 빈 파리스와 다히 알 왈리드를 비롯, 다른 걸프 지역 아티스트들의 곡을 녹음했다.

사우트를 한 두 나라의 음악가들을 참조하는 것만으로 언급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을 것이다. 국가적 경계를 무시하는 것이야말로 사우트의 정수라 할 수 있다. 사우트는 많은 지역의 영향을 받아들였으며, 쿠웨이트의 도시 살롱에서 유래되었다고는 해도 훨씬 더 먼 곳까기 거슬러 올라간다. 사우트는 걸프 지역을 여행하는 선원과 상인들의 음악으로 성장했으며, 전체 걸프 지역 및 인도양의 영향을 흡수했다. 오만의 살림 라시드 수리의 음악이 그 좋은 예다. 

예멘, 동아프리카, 잔지바르, 인도 및 서부 걸프 지역의 기타 항구와 교역하던 오만의 항구 도시인 수르에서 1910년경 출생한 그는 어린 시절 음악에 흥미를 보였으나 가족의 반대로 음악을 계속할 수 없었다. 실제로 그의 형이 총으로 그가 음악을 포기하도록 협박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선원으로 일하다 마침내 봄베이에 정착했으며, 그 곳에서 다른 음악가로부터, 그리고 압드 알 라티프 알 쿠웨이티의 음반을 통해 사우트를 배웠다.

봄베이에서 그는 가수로서의 명성을 확립해 나갔으며, 해외의 아랍인들 사이에서 유명해져 갔다. 1930년대 HMV(His Master’s Voice) 지역 지사에서 그에게 접근하여 몇 차례의 레코딩을 완료하기도 했으며, 이에 힘입어 다른 레이블에서도 녹음 작업을 진행했다. 이 때까지 수리는 증기선의 보일러 관리자로 일하고 있었으나 그 후 상업 중개인 및 번역가로서 봄베이에서 아랍 무역업자들과 함께 일했다. 1948년 인도 독립 후, 그는 바레인에 정착하여 1960년대까지 자신의 이름을 따 Salimphone이라는 자신만의 음반 레이블을 시작했다. 

빈 파리스의 오래된 저택 부지에 세워진 박물관은 그의 음악 및 레코딩 유산을 기리고 있다.
빈 파리스의 오래된 저택 부지에 세워진 박물관은 그의 음악 및 레코딩 유산을 기리고 있다.

Salimphone은 많은 이들 중 무하마드 빈 파리스의 레코딩을 제작했다. 레이블은 20세기 중반 음반 업계가 45rpm 레코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살아남지 못했으며, 수리는 1971년 오만의 고향으로 돌아가 1979년 사망했다. 말년에 그는 위대한 가수라는 명성을 얻었다. 오만 텔레비전에서 공연했으며, 오만 통치자인 술탄 카부스 빈 사이드에 의해 문화부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수리는 사우트 전통주의자였다. 자신의 곡을 썼으며 고전의 재해석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곡을 원래대로 노래했죠." 그의 아들인 사이드 살림 알리 수리는 말한다.  "곡에 변화를 가하지 않았어요."

사우트의 위대한 인물들은 전통을 굳건히 뒷받침하는 근간이며, 그러한 전통은 이러한 음악가가 노래하고 녹음한 곡을 통해, 그리고 사우트를 여전히 연주하는 사람들을 통해 살아 숨쉬고 있다. 하지만 최근 몇 십년 동안 디지털 미디어의 출현과 범아랍계 팝스타의 광범위한 지배 하에서(아이러니컬하게도 사우트 알 칼리즈 네트워크에 의해 확산된), 대부분 1980년대에 사망한 사우트 마스터들을 대체할 새로운 인물이 나오지 못했다 (위대한 마지막 사우트 음악가는 단언컨대 1979년 사망한 쿠웨이트의 아와드 두키였다). 또한 오늘날에는 아무도 새로운 사우트 곡을 쓰려고 하지 않는다.

무하라크에 있는 무하마드 빈 파리스 저택 박물관의 벽에 바레인의 유명 민속 음악가와 가수들의 얼굴이 찍힌 사진이 걸려 있다(왼쪽부터 알리 칼리드, 유시프 포니, 무하마드 주와이드).
무하라크에 있는 무하마드 빈 파리스 저택 박물관의 벽에 바레인의 유명 민속 음악가와 가수들의 얼굴이 찍힌 사진이 걸려 있다(왼쪽부터 알리 칼리드, 유시프 포니, 무하마드 주와이드).

몇 년 전 오만의 대중 음악을 조사할 당시 필자는 카세트 상점의 주인에게 사우트 레코딩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었다. "노인네들 음악이죠."라고 그는 무시하는 투로 말했다. 이 말에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다. 앙상블 무하마드 빈 파리스는 사우트를 현대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그러한 혁신을 반기는 애호가들이 있는 반면 1930년대나 40년대 사우트가 녹음되었던 옛 방식으로 사우트를 보존하길 원하는 사람들도 있다. 바레인 가수인 아흐메드 주메이리는 사적인 회합에서 단촐하게 연주하는 사우트야말로 "진짜 사우트"라고 말하기도 했다. 

오늘날 사우트가 어디에서 연주되든, 걸프 음악은 배 위에서 즉흥적으로 노래하는 진주잡이와 선원들의 노래에서부터 무하라크의 주례 라이브 공연에 이르기까지 널리 울려퍼지고 있다. 바레인의 한 음악 애호가가 말했듯 "지금 사우트 가수의 노래를 듣는다면, 무하마드 주와이드를 듣게 될 것이고, 무하마드 주와이드 안에서 무하마드 빈 파리스를, 무하마드 빈 파리스 안에서 압달라 알 파라즈를 듣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압달라 알 파라즈 안에서 옛 방식의 노래를 듣게 될 것입니다. 이들 모두를 현재의 사우트 가수에게서 듣게 되는 거죠."

Edward Fox Edward Fox (www.edwardfox.co.uk)는 Palestine Twilight: The Murder of Dr. Albert Glock and the Archaeology of the Holy Land(Harper Collins, 2001) 및 기타 저서의 저자 현재 런던에 살고 있다. 
사진작가인 Hatim Oweida(hatim.oweida@aramco.com)는 22년 동안 런던에서 국제 뉴스를 다뤘으며 현재 사우디아라비아의 다란에서 사우디 아람코의 수석 사진가로 일하고 있다.

 

 

이 기사는 Aramco World의 인쇄판 22페이지에 실려 있다.

2015년 1월/2월호 이미지는 Public Affairs Digital Image Archive를 참조한다.

This article appeared on page 22 of the print edition of Aramco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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