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 66, No. 22015년 3월/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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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리아에서 이베리아까지 글 Richard Covington

터키 해안에서 그리 멀지 않은 그리스의 작은 섬 사모스의 고고학 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가장 기이한 보물 중 하나는 현지에서 발굴된 것으로, 무시무시한 악마 파주주를 형상화한 청동 지팡이 머리이다.  

Top-left: Around 700 bce, the Phoenician settlement of Spal, a predecessor of Seville, Spain, was large and established enough that its priests used this sumptuous, intricate and heavy gold necklace for rituals. Part of the four-piece Carambalo treasure, it shows the high art that Phoenicia spread throughout the Mediterranean. Above-left: Dated slightly earlier and resembling others from Greece and Anatolia is a bronze cauldron  from Tomb 79 in Salamis, Cyprus, that features eight griffin and four siren-men protomes. Above-right: Under Ashurnasirpal ii, the Neo-Assyrian empire began its expansion west to the Mediterranean. This 113-centimeter  (44 ½") magnesite statue is a rare sculpture in the round from the period.
목걸이: 브루스 화이트 / 세비야 고고학 박물관; 가마솥: 브루스 화이트 / 키프로스 박물관; 조각상: 대영 박물관
맨 위 왼쪽: 기원전 약 700년경, 스페인 세비야의 옛 이름인 스팔이라는 페니키아 정착지는 넓고 충분히 안정되어 있었으며, 그 곳 사제들은 이 호화롭고, 섬세하며, 무거운 금목걸이를 종교 의식에 사용했다. 네 부분으로 된 카람발로 보물의 일부인 이 목걸이는 페니키아가 지중해 전역에 확산시킨 고급 예술을 보여준다. 위 왼쪽: 연대가 약간 빠르고 그리스와 아나톨리아 지역의 다른 유물들과 닮아 있는 이 청동 가마솥은 키프로스 살라미스의 무덤 79에서 발굴된 것으로 8개의 그리핀과 4개의 사이렌-인간 프로톰이 특징이다. 위 오른쪽: 신아시리아 제국은 아슈르나시르팔 II세 통치 하에서 지중해를 향해 서쪽으로 확장을 시작했다. 이 113센티미터(44 ½") 높이의 마그네사이트상은 그 시기 사방에서 볼 수 있게 만든 드문 조각상이다.

이는 동쪽으로 1,500킬로미터 넘게 떨어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유래했다. 이탈리아 토스카나에서는 현재의 아르메니아 및 터키 동부에 해당하는 우라르투 왕국에서 수입한, 마찬가지로 무시무시한 사자 머리가 청동 가마솥의 윗부분을 둘러싸고 있다. 스페인 남동부 해역에서는, 최근 발굴된 난파선에서 페니키아 신들의 이름이 새겨진 아프리카 코끼리 상아가 발견되었다. 이러한 포획물은 지중해 동부 끝에 있었던 페니키아의 심장부에서 4,000킬로미터나 떨어진 세비야나 카디즈 인근의 페니키아 식민지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동일한 해양 상인들은 그리스가 알파벳을 사용하여 글을 적는 페니키아인들의 현명한 생각을 받아들인 후 기원전 8세기에서 6세기 사이에 구전으로 전해지던 내용을 기록한 호머의 일리아드오디세이의 존재에 대해 기뻐할 수 있었다.  

이 때는 "세계화"와 인터넷이 지금의 초연결 시대를 정의하게 되기 훨씬 이전, 기원전 첫 밀레니엄의 첫 절반인 철기시대의 시작으로, 이미 통상로로 인해 근동, 북아프리카 및 지중해가 매우 복잡하고, 깊게 공생하는 문화망으로 엮여 있던 시기였다. 기원전 첫 새천년이 시작된 호머의 시대에는 매우 아름다운 금, 보석 및 상아, 이국적인 예배의식 도구, 영웅적인 사냥 및 전투 장면이 장인의 솜씨로 섬세하게 새겨진 정교하게 세공된 가구와 윤이 나는 은그릇은 물론, 보다 평범한 물건들의 대륙 간 교역이 융성했다.

Likely carved early in Ashurnasirpal ii’s 24-year rule (probably in 880 bce), this winged figure was among the gypsum bas-relief frescoes that decorated the Northwest Palace at Nimrud, the first Neo-Assyrian location in which such frescoes are known to have been produced. The cuneiform script in the middle records the ruler’s lineage and describes the city and palace. Originally, it was brightly painted.
윌리엄스 칼리지 미술관
아슈르나시르팔 II세의 24년 통치 기간 중 초기(약 기원전 880년)에 새겨진 것으로 보이는 이 날개 달린 조상은 최초 신아시리아 제국의 수도인 님루드의 북서쪽 궁을 장식한 석고 저부조 프레스코 가운데 하나이며, 당시 님루드에서는 그와 같은 프레스코가 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중간의 설형문자는 통치자의 혈통을 기록하며 도시 및 왕궁을 묘사하고 있다. 원래에는 밝은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여러 왕국, 영토, 문화가 있었지만 이러한 교역의 배후에는 신아시리아 제국이라는 하나의 주요 동력이 자리하고 있었다. 신아시리아 제국은 최고 번영기였던 기원전 7세기에 현재 이라크땅인 수도 니네베에서 바빌로니아, 이란 서부, 이집트 북부, 레반트와 아나톨리아까지를 아울렀다. 기원전 세 번째와 두 번째 밀레니엄 시기의 덜 넓고 덜 탐욕스러운 아시리아 제국의 계승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지중해까지 투영하지는 않았다. 서쪽에 도달하기 위해 신아시리아인들은 공물을 가져오고, 해상 교역을 수행하며 자원을 찾았던 페니키아인들과 동맹을 맺었다.  

활발하게 탐사했던 이유는 도구 및 무기를 만들기에 청동보다 우수하다는 것이 입증된 철을 찾기 위해서였다. 페니키아 선원 및 무역업자들은 북아프리카 해안의 카르타고, 지중해 및 이베리아 반도(현재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남서부 해안을 따라 있었던 주요 섬들을 포함, 고대 도시 전역에 걸쳐 거점을 만들었다.

기원전 7 또는 8세기 프리기아(현재 터키)의 실질적 군주였던 미다스 왕조차 이 문화 간 외교에서 일정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스 역사가인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미다스 왕은 델피의 그리스 신전에서 예언자의 신탁에 경의를 표한 최초의 외국 통치자였다고 한다. 이 여정으로 미다스 왕은 에게해를 건너 서쪽으로 800여 킬로미터나 항해했다. 미다스 왕이 만지는 모든 것이 금으로 변했다는 전설 - 아마도 그 이야기는 미다스라는 이름을 가진 이전 왕에 관련된 이야기일 가능성이 있으나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 - 이 있기는 하지만 그가 델피 신전에 헌정한 장엄한 왕좌는 나무와 상아로 만들어졌다. 이 대륙 간의 선물을 장식하는 데 도움이 된 작은 조각상은 35센티미터(9") 길이에 퉁방울 눈을 하고 있으며 왼손은 길들여진 사자 위에 놓여져 있고 오른손은 전통적인 "동물의 주인" 자세로 창을 붙잡고 있고, 올 겨울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열린 "고전기 태동의 시기 아시리아에서 이베리아까지"라는 제목의 전시회에서 다른 유물과 함께 당당하게 서 있었다.  

Found as far west as Italy and east to Iran, intricately carved Tridacna squamosa shells made for coveted luxury cosmetic containers. This one, carved on both sides, its hinge fashioned to resemble a human head, is dated to the seventh or sixth century bce, and it was found in Assyrian house 58 in Ashur.
JURGEN LIEPE / BPK / 중근동 박물관, 베를린 국립미술관 / 아트 리소스
서쪽으로는 이탈리아와 동쪽으로는 이란에 이르는 지역에서 발견된 정교하게 조각된 Tridacna squamosa 껍데기(호화로운 화장품류를 담아 놓던 용기로 제작됨). 양면에 모두 조각이 되어 있으며 경첩 부분에 사람의 머리를 닮은 형상이 새겨져 있는 이 유물은 기원전 7 또는 6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며 아수르의 아시리아 주택 58에서 발견되었다.

"우리들 스스로는 전지구적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람들이 얼마나 긴밀하게 상호 교류했는지 보려면 훨씬 더 과거를 돌아봐야 합니다." 전시회 큐레이터인 조안 아루즈(Joan Aruz)는 갤러리를 안내하며 이렇게 말했다. "기원전 첫 밀레니엄은 서로 다른 문화권의 예술과 물품이 세 대륙에 걸쳐 이동한 최초의 시대였습니다. 대부분 서아시아(근동)와 아프리카에서 유럽 남부까지 말이죠."  

"그 후에 온 것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이 시기를 이해해야 해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리스 고전기 이전이 어떠했는가에 대해 잘 인지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저 아테나처럼 제우스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녀는 웃으며 덧붙였다.  

서구의 고전적 세계가 가장 가까운 근동의 선조들에게 빚진 광범위한 빚을 따져볼 때, 전시회의 초점은 개별 왕국이나 국가에 있지 않고, 아시리아나 페니키아, 이집트나 유다왕국, 엘람, 우라르투, 그리스 에트루리아 또는 이베리아 등지의 삶에 있지도 않으며, 오히려 이 모든 것을 묶어준 것, 즉 예술적, 문화적, 경제적, 종교적 교류에 맞춰져 있다. 5년에 걸쳐 전시회를 기획하면서 아루즈와 동료들은 14개국 41개 박물관과 기관에서 260점의 유물을 선정했다. 이와 비교해 단일 문명에 국한된 전시회를 여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을 것이다.  

아루즈와 그녀의 팀은 이렇듯 까다로운 과제에 풍부한 경험의 힘을 이용했다. "아시리아에서 이베리아까지"는 동쪽의 인더스 계곡에서부터 지중해의 서쪽 끝까지에 이르는 지역의 초기 예술과 교역을 보여주는 일련의 연작 전시회 중 세 번째였다. 2003년 "최초 도시의 예술"이라는 전시회는 기원전 세 번째 밀레니엄의 메소포타미아 및 수메르 문화를 탐구했다. "바빌론을 넘어"라는 이름의 두 번째 전시회는 2008년에 열렸으며, 기원전 두 번째 밀레니엄을 지배했던 바빌로니아 제국을 들여다보았다. 이 최근의 설치전은 기원전 7세기 말 바빌로니아와 메디아가 아시리아를 정복할 때까지 아시리아가 근동을 지배했던 철기시대 초기, 첫 밀레니엄의 첫 절반의 시기를 아울렀다.

이 때는 전쟁으로 파괴된 시대였지만, 지질 구조상 문화적으로 동요한 시대이기도 했다. 이 시기는 근동의 예술 스타일, 종교적, 신화적 상징과 형상은 물론 금, 은, 동, 유리, 자기 및 돌을 만드는 새로운 기법이 서방으로 쇄도한 시기였으며, 이는 대부분 페니키아 상인, 떠돌이 장인과 그리스 용병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지중해 지역은 으르렁거리는 청동 그리핀, 성큼성큼 걷는 스핑크스, 관능적인 여신, 환상적인 조류 인간 및 의기양양한 왕의 모습을 형상화한 조각품들이 넘쳐났다. 피조물-형상은 악령퇴치 기능이 있었다. 즉, 벽의 요철, 가구, 가마솥 및 기타 물건에 놓아 악령을 물리치는 일종의 부적 역할을 수행했다.

이전의 전시회와 마찬가지로 "아시리아에서 이베리아까지"는 수정주의적이면서 포괄적이었고 대부분 근동 예술과 문화의 풍부함에 대한 인식을 강조하는 이야기로써, 이후 서구 고전기에 출현한 미학에 끼친 광범한 영향을 조명했다. "일반 대중은 현재의 사건에 더 집중하며, 이러한 장소들이 문화의 핵심적인 중심이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라고 아루즈는 지적했다. 예를 들어, 이라크 모술 지역은 최근 몇 년간 전쟁으로 고통받았지만 신아시리아 제국의 심장부였던 중요한 곳이었다고 덧붙였다.  

Domestic tableaux are rare for the eighth and seventh centuries bce: Most images of the time were devoted to gods, rulers and warfare. This Elamite bas-relief, carved in a bitumen compound, shows a woman seated on a chair, her feet daintily folded beneath her, proudly holding up a threaded spindle; a servant with a fly-wisk stands behind her. Its realism and simple humanity impart a glimpse into a private domain in the distant past.
루브르 박물관 / 브리지만 이미지
기원전 8세기 및 7세기에는 가정의 풍경은 드물었다. 해당 시기의 이미지 대부분은 신, 통치자 및 전쟁을 다룬 것들이다. 역청 화합물에 새긴 엘람의 돋을새김 작품은 의자에 앉아 있는 여인이 무릎 밑에 발을 우아하게 접어 넣은 채 나삿니 방추를 자랑스레 들고 있고, 뒤에는 하인이 플라이-위스크를 들고 서 있는 광경을 묘사하고 있다. 이 사실주의와 소박한 인간성은 먼 과거의 사적인 영역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이 야심찬 전시회는 모든 것을 다루지는 못했다. 전시회와 연계된 심포지엄에서는 흥미롭고 학문적인 이야깃거리가 부상하긴 했지만 전시회는 일례로 광범위하고 강력한 아랍의 스파이스 루트만을 다루었을 뿐이다. 아루즈는 특히 최근 이스라엘 메기도에서 페니키아인들의 병에서 계피의 흔적을 발견한 것에 열광했다. "이 계피가 동남아시아에서 왔음을 알게 된다면, 놀랍게도 이 사람들이 스파이스 루트를 따라 얼마나 멀리까지 이동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라고 아루즈는 설명한다.

이번 전시회는 사모스, 로도스, 사르디니아와 같은 섬은 물론 아르메니아 수도 예레반 및 기타 지역 등 잘 알려지지 않은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온 희귀한 유물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냈다. 또한, 대영 박물관과 같은 유명한 기관의 출중한 유물들을 창고에서 꺼내 수십 년 만에 최초로 전시하기도 했다. 투어 중 아루즈는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과거 이 유물들을 본 사람이 거의 없다는 말로 전시물을 소개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잘 알려진 유물을 점검하기 위해 박물관에 들렀다가 전시 중인, 혹은 지하실에 보관되어 있는 유물을 우연히 발견한 것이 꽤 된다고 했다. 이렇듯 이번 전시회에서의 공개를 통해 소규모 박물관들이 더 많은 관람객과 학자들을 끌어모으게 될 것이라고 아루즈는 전망했다.

An unflinching chronicle of conquest, this nearly panoramic bas-relief depicts the victory of Neo-Assyrians over the Elamites in about 653 bce at Til Tuba, now in Iran. Inscribed only a few years after the battle on limestone panels, each taller than a person, in Nineveh’s Southwest Palace, it uses more than a dozen sequential scenes, some of which are explained in cuneiform captions, to tell the story of the battle.
대영 박물관
수그러들지 않는 정복의 연대기인 이 파노라마식 돋을새김 작품은 기원전 653년 현재 이란 영토인 틸 투바에서 신아시리아 제국이 엘람에 대해 승리를 거둔 전투를 묘사하고 있다. 전투 후 몇 년이 흐른 후에 니네베의 남서궁에 있는 사람보다 큰 석회석 판에 새겨진 이 작품은 수십 개의 연속적 장면을 묘사하고 있으며, 그 중 일부에는 전투에 대해 설명하는 설형문자가 새겨져 있다.

때때로, 아루즈의 고고학적 탐사는 인디아나 존스의 직감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영화의 도굴꾼과 달리 아루즈는 채찍이나 훈련받은 원숭이가 아니라 자신이 속한 박물관의 명망을 이용했다. 이를 통해 이전 전시를 위해 뉴욕 기관에 작품을 대여한 박물관의 수많은 전시물들을 보다 쉽게 확보했으며, 문자 그대로 새로이 문을 열게 된 적도 있었다. 그라나다의 고고학 박물관은 수십 년간 문을 닫은 상태였는데, 아루즈는 불편함을 개의치 않고 동료들로부터 들은 바 있던 유물들을 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페니키아 묘지에서 유골 단지로 사용하기 위해 이집트에서 이베리아까지 운송된 설화 석고 단지와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어떤 단지에는 어머니, 자식 및 가정을 보호하기 위해 기원한 고대 이집트 신 베스의 하관이 발달한 얼굴이 담겨 있기도 했다.

Why a beast sacred to a Babylonian deity, and likely crafted in Babylon, ended up presented to a Greek goddess more than 1500 kilometers west remains both an enigma and a symbol of an era of cultural cross-pollinations.런던의 대영 박물관은 이와는 반대되는 상황이었다. 소장하고 있는 유물의 수가 매우 광대하고 백과사전적이어서 오히려 주목을 받지 못하는 유물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아시리아 왕 아슈르바니팔과 그 배우자의 독특한 사적인 연회를 묘사한 돋을새김 작품이 그렇다. 왕좌에 앉아 엘람에 대한 전쟁 승리를 축하하며 접시 모양의 컵을 들고 있는 왕과 왕비를 묘사한 이 설화 석고 조각상은 머리를 후려치지 않고, 사자를 사냥하거나 신하에게 악의적인 시선을 던지고 있지 않은 아시리아 지배자를 묘사한 보기 드문 형상 중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배한 엘람 왕의 참수된 머리가 근처 소나무에 매달려 있어 적어도 현대인들에게는 반응의 순간을 다소 망치기도 한다).  

"이 석판은 어둠에 가려져 있었지만, 반드시 가져야 한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죠"라고 아루즈는 당시를 회상했다.

이와는 달리 사모스섬에서는 소박한 유물 컬렉션이 또 다른 놀라운 광맥을 드러냈다. "여기서 놀라웠던 점은 거의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으로 걸어들어가자마자 근동의 공예품으로 가득차 있다는 점입니다"라고 큐레이터는 말했다. 사실상 이 공예품 모두가 그리스의 여성과 결혼의 여신인 헤라(제우스의 아내)의 신전에 대한 봉헌물로 이 섬에 오게 된 것들이다. 페니키아 상인, 아시리아 군대의 그리스 용병, 근동 및 지중해에서 온 사절과 순례자들이 헤라이온이라 알려진 신전에 모여들었고, 기부를 통해 여신의 가호를 간청한 것이다.

From Assyria, Anatolia and Egypt to North Africa, Greece, Italy and Spain came craft items whose eastern motifs lead historians to refer to them as “Orientalizing” motifs, including this gold necklace, above-left, from Carthage (now in Tunisia) with its Phoenician motifs from mid-seventh to sixth century bce, as well as a conical fragment of a Greek vessel for perfumes found in Italy, which is dated to about 700 bce, top-right. Above-Right: From this same era, and also found in Italy, has come this gilded silver bowl, embossed and engraved with concentric friezes of “Egyptianizing motifs” that combine a variety of Near Eastern themes.
(목걸이) 튀니지 국립 문화재 연구소(튀니스 소재); (부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그릇) 브루스 화이트
기원전 7세기 중반에서 6세기까지의 페니키아 문양이 담긴 카르타고(현재 튀니지)의 이 금 목걸이(위 왼쪽)는 물론 기원전 약 7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탈리아에서 발견된 향수용 그리스 용기의 원뿔 파편(맨 위 오른쪽)을 포함해 역사가들이 "동양화된" 문양이라고 언급한 동양적 문양의 공예품들은 아시리아, 아나톨리아 및 이집트에서 북아프리카, 그리스, 이탈리아 및 스페인으로 넘어왔다. 위 오른쪽: 근동의 다양한 주제를 결합하고 있는 "이집트화된 문양"의 동심원 프리즈로 양각되어 새겨진 금박의 은 그릇 또한 이탈리아에서 발견된 같은 시기의 유물이다.

기원이 분산되어 있기 때문에 사모스섬의 일부 유물은 해결을 기다리는 탐정의 수수께끼같기도 하다. 청동 말 갑옷 또는 프런틀릿은 4개의 여성 형성과 3개의 고양이 머리를 묘사하고 있다. 아람 말로 새겨진 문구는 이를 기원전 9세기 아람-다마스쿠스의 왕 하자엘에 대한 선물로 묘사한다. 재미있는 것은 아테네 북쪽 에레트레아 에개 해를 건너 32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발견된, 말의 눈을 가리는 데 사용된 청동 차안대에 똑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곳은 태양, 예술 및 예언의 신인 아폴로의 또 다른 그리스 신전에 바쳐진 곳이다. 아루즈는 두 유물 모두 아마도 동일한 배경에서 비롯했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Around the seventh century bce, Phoenician craft workers near Cádiz and Seville incised and carved numerous ivory and bone objects in Near Eastern styles, including this 13-centimeter (5") plaque that shows a griffin, a hunter and a lion.
미국 히스패닉 소사이어티 박물관
기원전 7세기 경, 카디즈와 세비야 인근의 페니키아 예술 장인들은 위와 같이 그리핀, 사냥꾼과 사자를 묘사한 13센티미터(5")의 명판을 비롯, 수많은 상아와 뼈를 근동 스타일로 새겨넣었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그녀는 재결합된 공예품을 살펴보며 큰 소리로 궁금해했다. 그녀가 추측하는 하나의 시나리오는 아시리아인들이 하자엘을 제패한 후 귀중한 호화 부품 세트를 다마스쿠스에서 다시 수도 님루드로 가져왔고, 거기에서 아시리아를 위해 싸웠던 그리스 용병들이 고향으로 귀환할 때 신을 위한 봉헌물로 이것들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아니면, 아마도 "현재 우리가 eBay나 인터넷을 통해 물건을 구하듯" 신전에 바칠 귀중한 봉헌물을 찾아다니며 여행하는 신전 관리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큐레이터는 "두 설명 모두 맞을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러한 물건들이 이동했을 수 있다고 추측하는 게 그저 놀라울 따름이죠." 이와 유사하게, 신화에 등장하는 용의 형상을 한 괴물인 mushhushshu(무슈슈)를 형상화한 13센티미터(5")의 청동 조각상 또한 사모스의 헤라이온을 장식했던 것이다. 바빌론에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큰 바빌로니아 신 마르두크에 대한 신성한 야수가 서쪽으로 1,5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그리스 여신에게 바쳐진 이유는 수수께끼이자 문화 교류 시대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유사한 공예품의 광범위한 분산이라는 이러한 주제는 전시회 전체를 관통했다. 아시리아를 상징하는 서 있는 스핑크스가 발톱을 제패한 아시아 적장의 머리 위에 올려 놓은 모습을 미세하게 세공한, 직경이 21센티미터(8")가 넘는 한 쌍의 청동 그릇은 같은 페니키아 작업장에서 나왔다고 할 정도로 거의 같아 보인다. 하지만 하나는 크레타에서, 다른 하나는 님루드 왕궁에서 발굴된 것이다. 아마도 두 그릇 모두 페니키아에서 만들어 졌거나, 아니면 떠돌아다니는 페니키아 장인이 크레타로 갔을 것이다. 확실히 알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그 두 청동 그릇이 문화적으로 밀접히 교류했던 세계의 분명한 증거라는 점이다.  

Showing that cross-pollination was nothing particularly new even in the late Bronze Age, this ivory game box depicting a chariot hunt dates from 1250-1100 bce. Found on Cyprus at Enkomi, it displays Aegean, Canaanite, Egyptian and Mesopotamian motifs and styles. 
대영 박물관
청동기 시대 말기에는 문화 교류가 특별히 새로울 것이 없음을 나타내는 유물로, 마차 사냥을 묘사한 상아로 만들어진 이 놀이 상자는 기원전 1,250~1,1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키프로스의 엔코미에서 발견된 이 놀이 상자는 에게 해, 가나안, 이집트 및 메소포타미아의 문양과 스타일을 나타낸다.  

아시리아인들에게는 겸손이 아니라 피로 얼룩진 전투, 정복 및 약탈이 장기였다. 전시회에 등장한 한 때 밝은 색으로 칠해져 있던 독수리 머리의 수호신을 묘사한 공예품과 같이, 사람 키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큰 슬라브와 유사한 석판은 님루드의 북서쪽 궁을 장식했다. 거의 모든 석판에는 학자들이 아슈르나시르팔 ii세를 칭송하는 기본 문구라고 칭한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세계의 왕이자, 아시리아의 왕 ... 모든 땅을 손에 넣은...전능한 전사".  

정복된 영토 중 하나는 현재 터키 동부 및 아르메니아에 해당하는 아시리아 북쪽의 우라르투 왕국이었다. 금속공예로 명성을 얻은 우라르투인들은 일반적으로는 악령을, 구체적으로는 아시리아 적군을 물리치기 위해 사자 머리가 달린 뱀과 신성한 나무로 장식한 무기, 투구 및 방패를 만들었다. 전시 중인 광택나는 웅장한 방패는 창의 찌르기 공격으로 구부러지고 큰 구멍이 생겨 패배한 실례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일그러진 갑옷을 보면서 아루즈는 "아시리아에 맞서 전투에 나가는 것이 어떤 의미였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씁쓸하게 논평했다.

“A strange combination of violence and tenderness,” said curator Joan Aruz of this ninth- or eighth-century bce plaque of ivory, gold and semiprecious stones, shown here nearly slightly larger than life-size, from Nimrud’s Northwest Palace. Though Neo-Assyrian in origin, its style is Phoenician and its iconography draws from Egypt, where such images expressed royal authority over territory, here interpreted as Nubia due to the youth’s hairstyle.
대영 박물관
큐레이터 조안 아루즈는 상아, 금 및 반귀석 판으로 만들어진 기원전 9세기 또는 8세기의 장식판에 대해 “폭력과 부드러움의 기이한 조화"라고 말했다(님루드의 북서궁에서 발굴한 것으로 사진이 실제 크기보다 약간 더 크다). 신아시리아 제국에서 기원했지만, 그 스타일은 페니키아식이며 도상학은 이집트에서 유래했다. 이집트에서는 그러한 형상이 영토에 대한 왕의 권한을 표현하는 것이었으며, 여기에서는 젊은이의 머리모양 때문에 누비아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내용은 아시리아의 단호한 전투 기풍을 가장 격렬하게 밀어부쳤던 틸 투바(현재 이란 남부)의 전투에 대한 섬뜩한 묘사였다. 높이가 2미터가 넘고 폭이 5미터 반에 가까운 벽면 크기의 파노라마식 돋을새김 작품은 수십 가지의 잔인한 장면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일례로, 엘람 왕 테우만과 그의 장남이 마차가 뒤집혀진 대학살의 전투지 속에서 서로를 마주본채 참수당하는 장면이 있으며, 아시리아인들이 엘람의 바빌로니아 동맹을 굴복시킨 후 굴욕의 의미로 조상의 뼈를 갈게 하는 장면도 있다.

보다 평온한 일상적인 장면은 일반적으로 조각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전쟁, 사냥, 그리고 액막이를 위해 신과 괴물에게 자비를 구하는 내용이 보통이었다. 바로 이 때문에 의자에 앉아 발을 무릎 밑에 우아하게 접어 넣은 채 나삿니 방추를 자랑스레 들고 있는 여성을 묘사한 고립된 가정 내 장면이 그토록 이례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 사실주의와 소박한 인간성은 먼 과거의 사적인 영역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힘주어 말하자면, 역청에 새겨진 돋을새김 조각품은 아시리아의 것이 아닌 엘람의 것이다.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또 다른 상아 돋을새김 조각품 또한 눈을 뗄 수 없는 흔치 않은 작품으로, 암사자의 공격을 받는 누비아의 소년을 묘사하고 있다. "암사자가 이빨로 소년의 목을 물어뜯는 바로 그 순간에 발톱으로 소년의 머리를 잡아 안고 있는, 폭력과 부드러움이 기이하게 조화되어 있어요."라고 아루즈는 말했다. 소름끼치는 주제에도 불구하고 마치 해독을 기다리는 신비로운 의미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소년의 희생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연민이 나타나 있었다.

“The Near East in antiquity was, as it is today, a diverse and complicated milieu of distinct polities, states and empires that cannot be fully understood without focusing on the cross-currents of their interaction.”전시회의 가장 큰 전시물 가운데 텔 할라프의 시로 히타이트에서 온 인상적인 두 개의 현무암 돌기둥은 2차 세계대전 당시의 폭격으로 산산조각난 30여 개의 조각품 잔해인 근 3만여 개의 고고학적 파편 더미에 맞닥뜨려야 했던 베를린 복원팀의 고집을 증명한다. 이 파편들은 근 60년 동안 페라가몬 미술관의 지하 저장고에 보관되어 있었으며, 동독 관리들은 작품이 복원할 수 없을 정도로 손실되어 버렸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낙관적인 통일 독일의 전문가들은 생각이 달랐다. 이는 본질적으로, 일련의 거대한 입체 퍼즐이며, 의심의 여지없이 갈라진 독일 국가를 한 데 묶는 것보다는 덜 복잡한 일일 터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기념비적인 시도였다. 전문가들은 30개가 넘는 조각품들의 재조립 작업을 2001년에 시작해 9년이 지난 후에 마무리했다. 기품 있는 턱수염에 전갈의 꼬리가 달린 조류 인간은 1미터 반의 키에 니네베의 잘 알려진 날개 달린 감시병과 같이 해당 지역의 서쪽 궁을 보호하면서 길가메시의 메소포타미아 서사시에 나오는 일출을 굽어보고 있었다.  

One of some 30 Syro-Hittite sculptures that took nine years to reconstruct after a World War ii firebombing, this early ninth-century bce basalt statue of a scorpion-tailed bird man once stood beside the “Scorpion Gate” of a palace at Tell Halaf in northern Syria.
STEFFEN SPITZNER / BPK / 중근동 박물관, 베를린 국립미술관 / 아트 리소스
2차 세계대전 폭격 후 복원에 9년이 걸린 30개의 시로 히타이트 조각상 중 하나인 기원전 9세기 초 현무암 석상은 전갈의 꼬리가 달린 조류 인간을 형상화한 것으로 한 때 시리아 북부의 텔 할라프 왕궁의 "전갈 문" 옆에 서 있었다.

근처에는 덜 인상적인 현무암 덩어리가 있었다. 양측에 한뼘보다 조금 긴 평범해 보이는 석비는 드라마틱한 역사적 중요성을 가진 독특한 기록임이 밝혀졌다. 아람어로 새겨진 텍스트는 기원전 9세기 시리아 왕 하자엘의 정복에 대해 기술해 놓았으며, 그 가운데 다윗 왕조의 후손들이 언급된다. 이는 성경 이외에 다윗 왕조에 대해 유일하게 알려진 언급이며, 유다 왕국의 설립자로서 다윗왕의 역사적 존재에 대한 최초의 고고학적 증거물이다.  

전시회에서 가장 섬세하며 마음을 사로잡는 작품은 Tridacna squamosa, 또는 대형 조개 껍데기로, 손바닥만한 크기에 미니어처 음악가, 연꽃봉오리, 종려나무, 그리고 놀랍게도 킬트를 입은 남자들이 멋지게 성장한 말을 타고 달리는 모습 등이 놀랍도록 자세히 새겨져 있다. 어떤 조개 껍데기의 경첩 손잡이에는 여성의 머리, 또는 여신 아스타르테를 닮은 형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파도 모양을 이루는 껍데기 뒷면으로 흘러갈수록 여인의 긴 머리가 깃털로 변하는 기법이 인상적이다. 또 다른 조개 껍데기에는 맨 위에 조류 인간의 머리와 얼굴이 새겨져 있고, 껍데기 외면에 식각된 급강하하는 날개가 작은 스핑크스 한 쌍을 보호하는 형상이다. Tridacna 조개는 인도양, 아라비아 만과 홍해의 따뜻한 물에서 잘 자라며, 그 껍데기는 먼 지역으로 수출되어 레반트의 작업장에서 조각품의 재료로 사용되었다. 그곳에서 화장품을 보관하는 호화 용기로써 다시 근동 및 지중해로 수출되었다.

이번 전시회에서 가장 잘 알려진 큐레이터의 성공은 놀랄 것도 없이 금과 관련되어 있다. 아루즈가 기원전 7세기 세비야의 카람볼로 보물을 대여로 획득한 일화는 스페인의 신문 1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무게가 2.4킬로그램(5¼ lb)이나 나가는 순금 목걸이, 팔찌 및 장식판은 현재 세비야 인근인 스팔의 식민지 주민들에 의해 페니키아 신인 발과 아스타르테에 대한 동물 희생 의식을 주관한 페니키아 사제들이 착용했던 품목들이다.  

이러한 유물들은 그 가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여서 고고학 박물관에서는 모형이 전시되고 원본은 국립은행의 귀중품 보관실에 보관되어 있다. 그러나 아루즈가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은 원본만을 전시한다고 주장하자 스페인 당국은 아루즈를 귀중품 보관실에 데리고 갔고, 뉴욕 전시회는 대중들이 그 유물들의 실제 모습을 볼 수 있는 이례적인 기회가 된 것이다.  

One of roughly 575 protective and symbolic creatures that adorned victorious Babylon’s Ishtar Gate, built between 604 and 562 bce after the Babylonian conquest of the Neo-Assyrians, is a mushhushshu dragon, rendered in glazed and molded brick. 
베를린 국립미술관 / 중근동 박물관
바빌로니아의 신아시리아 정복 후 기원전 604년부터 562년 사이에 건설된 바빌론의 이슈타르 대문을 장식했던 575개의 상징적 보호 피조물 중 하나인 mushhushshu(무슈슈) 용은 유약을 바른 이형 벽돌로 만들어졌다.  

모든 권력과 마찬가지로 신아시리아의 지배는 영완히 지속되지 않았다. 근동 지역을 수 세기 동안 굴복시킨 후 한 때 무적의 제국이었던 신아시리아는 기원전 7세기 중반 제국을 공동으로 지배하며 경쟁하던 형제들 간의 전쟁으로 치명적 악화일로를 걷게 되었다. 그 중 한 명인 아슈르바니팔이 머리에 흙이 든 바구니를 지고 있는 모습이 담긴 석판이 전시되었는데, 이 모습은 아슈르바니팔의 조부 세나케리브가 몇 십년 전 도시를 무자비하게 약탈한 후 바빌론을 재건하는 그의 역할을 상징화한 것이다. 새겨져 있는 글귀는 바빌론 왕이었던 아버지의 이름을 딴 손위 형제 샤마시-슈먀-우킨에게 다음과 같이 애정어린 소망을 굳게 서약하는 내용이다. "남아 있는 그의 날들이 길고 또한 행운으로 충만히 만족할 수 있기를."  

그러나 권력을 나눈지 16년이 흐른 후, 샤마시-슈마-우킨은 자신의 형제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아슈르바니팔은 도시의 거주자들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으로 몰아넣은 기근을 일으킨 바빌론에 4년간의 포위 작전을 시작했다. 패배한 형은 기원전 648년 자신의 불타는 궁에서 화염에 휩싸인 채 불에 타 죽고 말았다. 그 후 약 36년이 지난 기원전 612년, 아슈르바니팔의 수도인 니네베는 또 다시 복수심에 불타는 바빌로니아인들에게 약탈을 당했다. 신아시리아 제국은 결국 신바빌로니아 지배자들에게 무너졌고 머지 않아 기원전 539년 바빌론을 함락시킨 페르시아인들에게도 무너졌다.  

그로부터 약 200년이 흐른 후, 훗날 알렉산더 대왕이란 칭호로 불리게 되는 마케도니아 전사의 지휘 하에 있었던 군대는 서쪽에서 동쪽에 이르는 거대한 지역을 파죽지세로 정복하여 문화와 교역의 흐름을 뒤바꾸어 놓았으며, 서구 고전기의 부흥을 위한 세계 무대의 기반을 닦게 되었다.

Richard Covington 파리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Richard CovingtonAramcoWorld에 정기적으로 기고하는 것 이외에도 수많은 매체에 문화, 역사, 과학에 관한 글을 게재한 바 있다.

 

www.metmuseum.org

This article appeared on page 2 of the print edition of Aramco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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