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 66, No. 22015년 3월/4월

In This Issue

Sea Change Comes to Bagamoyo
600년 동안 인도양으로 향하는 동아프리카의 가장 중요한 관문 중 하나였던 탄자니아의 바가모요에서 남자들이 어선에서 작업하고 있다.



Be happy, my soul, let go of all worries.
Soon the place of your yearnings will be reached.
The town of palms, Bagamoyo. 
Far away, how my heart was aching. 
Be quiet, my heart, all worries are gone. 
The drum beats, and with rejoicing
we are reaching Bagamoyo.
 — Song of the Caravan Porters
 (circa 19th century, original in Swahili)

글 Amanda Leigh Lichtenstein
사진 Mariella Furrer

The town’s tide of trade may come in yet again under mega-port development plans promoted by native-son President Jakaya Mrisho Kikwete.

마을의 무역 물결이 마을 출신 대통령 Jakaya Mrisho Kikwete이 추진하는 거대 항만 개발 계획으로 인해 다시 한 번 밀려온다.

다르에스살람 북쪽에서 바가모요까지 구불구불하고 야자수가 늘어서 있는 도로 중간, 선원들이 자신들의 방식으로 일하고 있는 장소에서, 차량들이 수도부터 시작되는 오래된 2차선 도로의 폭을 두 배로 만들면서 멈춰 있다. 버스와 자동차는 길이 좁아지고 싱싱하고 푸르른 계곡이 열리며 양쪽 차량들이 가까워질 때까지 먼지투성이의 구불구불한 도로를 힘겹게 지나간다. 바가모요 마을에서 작은 가게와 미술관이 길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kanzu(칸주)를 입고 kofia(코피아)를 쓴 노인이 낡은 자전거를 타고 미끄러지듯 지나가며, 플래시 캡을 쓴 젊은 무리가 그늘에서 자신들의 모터바이크와 함께 머무르고 있다. 형형색색의 히잡을 쓰고 밝은 드레스를 입은 여성들, 스키니 진과 티셔츠를 입은 여성들이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도로를 따라 짝을 짓거나 혼자 천천히 걷고 있다. 바가모요의 들쭉날쭉한 백사장 해안을 따라 조수가 살짝 밀려온다. 해질녘이면 마을은 조용해지고 이따금 개 짖는 소리만이 적막을 가른다.  

총선은 1964년부터 탄자니아 공화국 전역에서 시작되었는데, 대통령 Jakaya Mrisho Kikwete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5년 임기를 결정짓는 10월 총선이 가까워오고 있다. 교외에서 야당인 Chadema(민주발전당)의 지지자들이 차에서 경적을 울리면서 파란색, 흰색, 빨간색 깃발을 흔들고 수도인 다르에스살람에서 북쪽으로 70킬로미터 떨어진 이곳 Kikwete의 고향에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려 하고 있다. 사실 대부분의 바가모요 주민들은 Kikwete를 바가모요의 아들로서 지지하며, Kikwete는 탄자니아의 다르에스살람, 탕가 및 음트와라의 아주 작은 항구들 뿐만 아니라 케냐의 라무 및 몸바사의 항구와 경쟁할 "거대 항만" 계획을 세워 그의 마지막 임기를 그가 사랑하는 고향의 전례 없는 미래를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A few kilometers southeast of Bagamoyo lies the site of East Africa’s oldest known mosque, now-ruined Kaole, built out of coral stone by traders who arrived in 1250 ce from Shiraz (now in Iran). Their commerce first linked this coast to the Arabian Peninsula, Persia, India and China. 
바가모요에서 남동쪽으로 수 킬로미터 떨어진, 현재 폐허가 된 카올레에 (현재 이란의) 쉬라즈에서 출발해 1250년에 도착했던 상인이 산호석으로 지었던, 동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모스크의 옛터가 있다. 그들의 상업으로 처음 이 해안을 아라비아 반도, 페르시아, 인도 및 중국으로 연결했다.  

오늘날 알 수 있듯이 조용한 바가모요는 거대한 변화가 낯설지 않다. 탄자니아의 프와니 주 내에(해안에) 위치한 바가모요는 낡고 오래된 도시이고 인구는 30,000명으로 추산되며, 독일, 인도 및 아랍의 디자인에서 영감을 받은 역사적인 건축물과 이제 막 조성된 현대적인 상업 구역이 줄지어 있다. 바가모요는 또한 소말리아 중앙의 모가디슈에서 탄자니아 남부의 킬와까지 1,000킬로미터 이상 뻗은 "스와힐리 해안" 상업 네트워크에 편입되자마자 40킬로미터 연안의 잔지바르섬을 경유하는, 아프리카 내륙과 나머지 세계 사이의 연결 고리가 되었다.  

바가모요 지도

4년의 성공담을 가지고 있는 레스토랑 Poa Poa를 소유한 34세의 사업가 Felix Nyakatale에게 바가모요는 "주의를 환기시켜주는 유령 마을"처럼 느껴진다. 탄자니아 북서부의 킬리만자로 산 인근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는 개척자 정신을 가지고 이 해안으로 왔으며 스무디, 피자, 현지 생선, 자극적인 스튜 및 ugali(우갈리, 뜨거운 구운 옥수수 가루)를 찾는, 급증하는 관광객들에게서 기회를 보았다. 키가 크고 말랐으며 잘생긴 그는 레스토랑을 열게 된 배경에 관해 부드럽고 자신 있게 이야기한다. "이런 곳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어요. 사람들은 음악과 친구를 찾기 위해 여기에 옵니다."

그가 바람이 잘 통하는 꼭대기 층에서 살고 있는, 복원된 역사적인 2층 스와힐리 하우스의 1층에 위치한 Poa Poa는 비지니스 감각, 위험 및 사회적 변화를 대표한다. "모두가 여기로 찾아옵니다"고 Nyakatale은 자신 있게 말한다. "Poa Poa는 현지인, 단골손님, 외국인 및 막 방문한 관광객들이 찾는 곳입니다. 이는 멋진 조합이죠. Poa Poa는 항상 바쁩니다." 그에게는 개발 계획이 희망을 가져다준다. "바가모요가 성장할수록 Poa Poa는 번창할 것입니다. 이곳에서 새 주방도 짓고 있죠. 한 번 보세요."

Built by Omani sultans based in Zanzibar, the old customs house was later used by Germany, which made Bagamoyo its headquarters in East Africa in 1884. 
잔지바르에 근거했던 오만의 술탄에 의해 지어진 옛날 풍의 집은 이후 1884년 바가모요에 식민지 총독부를 두었던 독일인들이 사용하였다.  
“We welcome development of every kind, as long as there’s a clear plan,” says Abdallah Ulimwengu of the Bagamoyo Tour Guide Association.
"저희는 계획이 명확하다면 어떤 개발이든지 환영합니다"고 바가모요 여행 가이드 협회의 Abdallah Ulimwengu는 말한다.

바가모요는 탄자니아의 지도상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 중 하나이다. 바가모요의 기원은 1세기 익명의 그리스 해상여행자가 쓴 중국, 인도, 동아프리카 및 아라비아의 바다 여행 안내서인 Periplus of the Eritrean Sea(에리트레아해의 항해 안내서)보다 앞선다. 서기 600-8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반투어를 구사했던 Zaramu, Zigua, Doe, Kwere족이 바가모요에 살았었는데, 이들은 탐험가들이 Azania(아자니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호칭)라고 언급했던 곳의 내륙에서 발원하였다. 낚시, 사냥 및 채집으로 근근히 살아가던 그들의 삶은 1250년 페르시아(현재 이란)의 쉬라즈에서 도착한 한 가문의 무리로 인해 붕괴되었다. 비옥한 땅과 충분한 어획량에 끌린 "Shirazis(쉬라즈인)"는 바가모요에서 남동쪽으로 수 킬로미터 떨어진 오늘날 카올레에 항구와 정착지를 만들었다.

검은 맹그로브에서 파리들이 윙윙거리고 귀뚜라미가 우는, 지금은 폐허가 된 카올레가 중요한 역사적 순간을 환기시킨다고 바가모요 여행 가이드 협회의 사무총장 Abdallah Ulimwengu는 설명한다. 그는 먼 곳을 응시하면서, 바가모요의 복잡하고 얼룩진 역사를 집약하는, 오랫동안 버려진 모스크의 허물어진 아치 위를 천천히 걷는다.  

비록 동아프리카에서 이슬람의 존재는 공식적으로 7세기 에티오피아 왕국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그는 쉬라즈인이 이 중남부 해안에 도착한 최초의 무슬림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쉬라즈인은 울퉁불퉁한 산호석으로 지역 최초의 모스크를 지었고, 거친 아라비아 필체를 새겼다. 중국의 자기, 보석과 가정용품을 가지고 도착한 카올레 상인들은 상아, 코뿔소 뿔, 동물 가죽, 거북딱지, 유리 구슬, 단도, 그릇 및 기타 보물을 수출하러 나갔고, 종종 남쪽으로 300킬로미터 떨어져 있으며, 인도양의 해양 무역의 원동력이 되는 계절풍의 남쪽 한계선인 킬와의 스와힐리 도시 국가까지 나아갔다. 쉬라즈의 통치자 Ali ibn Al-Hassan의 이름으로 킬와에서 주조된 동전은 이 해안을 따라 이루어진 무역의 규모를 암시해 준다. Ulimwengu가 웃으면서 언급한 카올레라는 명칭은 대략 "아랍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러 가자"를 의미하는 반투어 chite kalole mwaarabu vitandile에서 유래한다.  

킬와는 1500년대 초까지 무역의 중심으로 번성했다. 포르투갈 탐험자 Vasco de Gama는 인도로 가는 여정 중 1498년 초 스와힐리 해안에 도착했고 1505년 킬와를 뒤집어 엎었다고 하는 Francisco de Almeida를 따라갔다. 머지 않아 포르투갈인들은 쉽게 카올레를 정복했고 150년 동안 악명 높고 인정사정없는 통치를 시작했다.

In town, the old slave market has become  The Bagamoyo Art Market, supported by the town’s artist community around the Bagamoyo Institute of Arts and Culture, which teaches Tanzanian painting, sculpture, drama, dance and drumming.
마을에서는 오래된 노예 시장이 바가모요 예술 시장이 되었다. 탄자니아의 그림, 조각, 연극, 춤 및 드럼 연주를 가르치는 바가모요 예술문화 협회 소속의 마을의 예술가 커뮤니티가 이를 지원한다.

1698년 오만의 Saif bin 술탄은 케냐 몸바사의 포트 지저스에서 전투를 전개하고 승리하여 해안을 되찾았다. 머지 않아 오만은 잔지바르섬을 포함한 스와힐리 해안의 대부분을 지배했다. 카올레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술탄은 스와힐리 북쪽 해안에서 페르시아의 Shomvi 정착민들을 이용했고 파키스탄에서 유목민 발루치족 용병을 고용했다. 카올레는 잠시나마 안정되었다.

Ulimwengu에 따르면 "다루기 힘든 망그로브의 침범"이 카올레를 점진적으로 몰락시켰다. 그는 현재 40대이며 지난 15년을 바가모요의 과거를 알아내는 데에 보냈다. 탄자니아의 키고마 출신인 그는 남아프리카에서 몇 년을 산 후 바가모요에 왔고 그 직후 이 곳에 묻힌 이야기에 이끌렸다고 말한다.  

그는 근처의 질퍽질퍽한 습지를 가리키며 "다른 사람들은 인근 Dunde 마을의 성장이 중심 항구인 카올레를 쇠퇴하게 했다고 말하지만 전 망그로브가 카올레를 쇠퇴하게 했다고 생각합니다"고 말한다. "이런 해안에 배를 댈 수 있는 방법이 없었어요." 200년 후, 오만의 술탄은 왕조가 교체되면서 지배권을 상실했고, 카올레는 중요성이 퇴색되면서 잊혀져 갔다.

Appearing here as a theme in local paintings at an art shop, journeys have meant much to the history of Bagamoyo—whose poetically ambiguous name means both “to unburden” and “to lay down” your heart—gateway east across the Indian Ocean and west into and out from the continent. 
미술품 가게의 현지 그림에서 하나의 주제로 나타나는 여행은 동쪽으로 인도양을 가로지르고 서쪽으로 유럽 대륙의 안과 밖으로 향하는 관문으로써의 바가모요의 역사를 강하게 의미한다. 바가모요의 이상화되고 애매한 명칭은 마음의 "부담을 덜다"와 "내려놓는다"를 의미한다.  

1830년대 초에 Said bin 술탄은 그의 궁정을 오만의 무스카트에서 잔지바르의 스톤 타운으로 옮겼다. Said bin 술탄이 1856년 죽은 이후 그의 아들 Majid bin 술탄이 뒤를 이어 잔지바르를 통치했고 Majid가 아프리카 내륙 안팎의 관문이었던 바가모요에 의지해서 노예 무역과 상아 무역을 감독했다. 1800년대 중엽 및 그 이후 몇 년동안 20,000~50,000명으로 추산되는 노예들(및 포로들에 의해 운반된 엄청난 양의 상아)이 매해 바가모요를 통해 수송되었다. 비록 소수의 노예들이 바가모요의 엘리트들에게 종사하기 위해 남았지만 압도적으로 많은 노예들이 정향 또는 설탕 농장에서 일하거나 가사에 종사하기 위해 먼저 잔지바르로 보내졌고 이외의 많은 노예들이 더 멀리 중동 및 인도 아대륙으로 보내졌다.

이때 항구는 카올레에서 현재 mji mkongwe로 알려진 "오래된 마을"로 이동했다. mji mkongwe에는 오늘날 노후되고 복원된 상태의 아랍, 독일 및 인도 건물이 있고, 세 지역을 통해 바다와 평행하게 뻗어 있는 자갈길이 늘어서 있다. Ulimwengu는 이 대로를 따라 늘어서서 허물어져 가는 건물을 하나하나 안다. 여기서 모터바이크에 탄 젊은이들이 길가에서 수다를 떨면서 승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Felix Nyakatale sits outside his four-year-old restaurant, Poa Poa, and he welcomes the prospect of port-related construction. “I’m confident that Bagamoyo is a city that is growing,” he says. 
Felix Nyakatale은 그의 4년 된 레스토랑 Poa Poa 밖에 앉아 항만 관련 건설 가능성을 환영한다. "저는 바가모요가 성장하고 있는 도시라고 확신합니다"고 그는 말한다.  

"대부분의 바가모요의 젊은이는 이 곳의 역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하나의 길을 지나 햇볕을 잘 받고 먼지투성이인 다른 길에서, Ulimwengu는 현지 예술가들을 가리켰다. 그들은 원래 노예 시장이었던 나무로 된 파빌리온을 그림, 조각 및 나무 조각품을 특징으로 하는 실외 갤러리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갤러리는 더 큰 세계 경제에 편입하고자 하는 젊은 바가모요 예술가들의 공통의 열망을 표현하며, 역사의 목소리가 아직까지 매 길모퉁이에서 메아리치고 있는 것 같다고 그는 말한다.

1845년 영국은 인도양을 일순하였다. 세계적인 노예폐지운동은 인도양의 노예 무역의 금지로 이어졌고 1873년 잔지바르에서 폐지되면서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수백명의 노예해방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이주하였고 일자리를 구하려 했으며 그들이 받을 수 있는 교육을 받으려 하였다. 프랑스와 영국의 카톨릭 선교사들은 1860년 잔지바르에, 그리고 1868년 바가모요에 학교를 세웠다. 술탄과 현지의 샤이흐들은 이러한 포교를 일반적으로 환영하였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를 전략적인 타협과 종교적인 관용의 혼합물로 본다.

1884년 독일이 탄자니아 본토의 행정권을 획득했고 이후 탕가니카로 불렀으며, 바가모요에 식민지 총독부를 세우고 잔지바르에 있는 오만의 권좌를 위협했다. 독일의 지배로 새로운 세제가 도입되었고 이는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1889년 Harth의 Bushiri bin Saleim가 이끄는, Bushiri War로 알려진 실패한 반란이 바가모요의 해안에서 일어났다.  

비록 바가모요는 가장 중요한 항구였고 독일령 동아프리카의 수도였지만, 독일인들은 1891년 바가모요에 총독부를 유지하면서 그들의 주요 항구를 남쪽의 다르에스살람으로 옮겼다. 일부 사람들은 다르에스살람이 큰 배를 수용할 수 있었다고 말하지만, Ulimwengu는 또한 독일인들이 바가모요 북쪽의 Pangini에서 반란을 일으킨 Bushiri에 의해 쫓겨났고, 다르에스살람이 더 남쪽에 있었으며 정치적으로 더 안전한 지역이었다고 주장한다.

독일의 지배 아래 바가모요의 주민들은 계속해서 농업, 어업 및 현재 가장 큰 바가모요 지역의 해안 마을에 늘어선 다우 배 건조로 근근히 살아갔다. 잔지바르에서 바다를 가로질러 오만의 술탄이 아직 탄자니아의 일부를 통치하고 있었으며, 두 세력은 술탄의 지배를 바가모요 해안에서 16킬로미터 떨어진 섬까지 확장하는 협정을 맺었다.  

A fence keeps visitors at a distance during restoration of the 1897 headquarters of the German colonial administration. 
What is known as the Old Fort is the town’s oldest surviving building, built in 1860 as a private residence and taken over and fortified in 1870 by Sultan Barghash ibn Said of Zanzibar. Two decades later, Germans were using it as a military camp; later, the British posted police in it; and today it hosts the town’s Department of Antiquities.
With its hexagonal minaret, the mid-19th-century Gongoni Mosque is the area’s oldest working mosque.
맨 위: 1897년 독일의 식민지 총독부를 복원하는 동안 울타리가 간격을 두고 방문객들로부터 건물을 보호하고 있다.   중간: Old Fort로 알려진 마을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건물은 1860년 사택으로 지어졌고 1870년 잔지바르의 술탄 Barghash ibn Said가 탈취하여 요새화하였다. 20년 후 독일인들이 이 건물을 병영으로 사용하였고 이후 영국인들이 이 안에 경찰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유적 관리 부서가 관리하고 있다. : 6각형의 첨탑이 있는, 19세기 중엽에 지어진 Gongoni 모스크는 지역에서 가장 오래되고 현재 운영 중인 모스크이다.

독일이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이후 바가모요는 다시 영국의 지배 아래에서 변화에 직면했다. 길 이름이 바뀌었다. 새 도로와 철로가 건설되었다. 43년 후인 1961년 탕가니카 공화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했고 1964년 두 영토에서 모두 인정한 이름으로 잔지바르와 합병하였다. "탄자니아" 초대 대통령이었던 Julius Nyerere는 헌신적인 mwalimu(선생님)으로 불렸고 민족 자결권과 탄자니아의 미래를 결정할 사회주의 운동인 Ujamaa를 홍보하기 위해 그의 임기 초에 바가모요를 방문했다. 머지 않아 바가모요는 바가모요 마을과 오래된 카올레 사이의 도로 주변에 군 훈련소를 제공했다. 이 훈련소는 포르투갈의 지배를 견뎌냈던 탄자니아의 남쪽 나라, 모잠비크의 독립을 모색했던 모잠비크 해방 전선(frelimo)의 군인들을 위한 것이었다.  

탄자니아가 독립한 지 51년이 지난 현재 바가모요의 주민들은 한번 더 문자 그대로 그리고 비유적인 의미 그대로 상전벽해를 증명할 상황에 직면했다. 작년, 대통령 Kikwete는 중국 국가주석 Xi Jinping과 합자하여 총 8억 달러의 16개의 개발 계획을 승인했다. 2013년 3월에 조인된 30년 기본협정 하에서, 이 계획들은 바가모요의 경제, 해안 지대 및 생태계를 동아프리카 사상 최대의 항구, 국제 공항 및 산업 단지로 완전히 변화시킬 것이다.

공사가 아직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에 바가모요 주민들은 상대적으로 The Citizen의 뉴스 또는 구두로 듣지 않고서는 이 계획들을 알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현지의 지도자들이 계획을 알려주고 있고, 지역사회조직가가 회의를 열였으며 매입이 계획된 몇 부동산에 대한 보상이 산정되고 있다. Kikwete 정권에 따르면 항구 건설은 7월 1일부터 시작한다고 한다.  

거대 항만 계획은 염려와 흥분을 동시에 불러 일으키고 있다. 케냐에 기반한 개발 컨소시엄인 Trademark East Africa는 거대 항만 계획이 "지역 무역의 규모를 탄자니아에 유리하도록 기울게 할 것이다"라고 언급하였다. 아직 바가모요 주민들은 중년의 지역사회조직가인 Anthony George Nyanga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그의 근무 시간 이후 차가운 오렌지 환타를 마시며 플라스틱 의자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항구가 현지 사람들의 요구를 무색하게 할 것이라는 그의 걱정을 털어놓는다. "이곳의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저희는 젊은이들을 위해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하고 더 많은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저희의 교육 시스템은 끔찍한 문제점에 직면해 있습니다. 성공하기 위해,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만이 아닌 지역 사회를 책임져야 합니다." 그러나 Poa Poa 레스토랑의 Felix Nyakatale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저는 바가모요가 성장하고 있는 도시라고 확신합니다"라고 그는 주장한다. "저는 제 레스토랑에 오는 사람들을 유지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Stylistic testimony to Indian Ocean trade, a wooden door carved in vegetal rosettes and arabesques shows patterns that much resemble countless others from the Arabian Peninsula to India.
인도양 무역의 감각적인 증거인, 장미 모양 리본 및 아라베스크 무늬가 새겨진 나무문은 아라비아 반도에서 인도를 아우르는 무수히 많은 양식들을 닮아 있다.

이 말이 어려움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가장 큰 형태로 거의 5킬로미터 길이와 내륙으로 1½킬로미터 길이로 추산된 바가모요 항구는 매해 2천만 개 이상의 컨테이너를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비교를 위해, 다르에스살람 항구는 현재 매해 500,000 - 800,000의 컨테이너를 처리하고 있고, 탕가 항구와 음트와라 항구는 이보다 적은 컨테이너를 처리하고 있다.) The Guardian에 따르면 거대 항만은 탄자니아에서 "중국으로 향하는 수송" 뿐만 아니라 잠비아, 짐바브웨 및 콩고민주공화국(drc)에서 채굴된 수요가 많은 광물의 수송 및 말라위와 부룬디의 수출 무역을 용이하게 할 것이다.

예상되는 상품, 서비스 및 인력의 이동과 더불어 바가모요 주민들은 그 범위와 규모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다. 바가모요 마을은 총 인구 35만명 이상의 프와니 주에 속한 바가모요 지역의 16개 구 중 하나이다. 목소리가 부드럽고 사려 깊은 미국인 Terri Place는 그녀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주요 질문들을 이야기한다. 그녀는 바가모요 마을에 20년 동안 살고 있고 학교와 고아원을 겸용하는 Baobab Home을 총괄하고 있다. 이는 현지 농부들 및 내륙의 외국인 투자자들 사이의 분쟁을 부추겼던 최근의 바이오 연료 계획과 관련해서 벌어졌던 현지의 경쟁에 관한 질문이다. "이런 민간 파트너쉽이 중국에게 너무 많이 자율성을 부여할 것인가?" 그녀는 사색에 잠긴다. "중국은 그들이 파키스탄에서 한 것처럼 군사 기지로서 해안의 일부를 사용할 것인가?" (비록 중국의 고위 관리는 이러한 소문을 완강하게 부정하고 있지만, 주민들의 마음에는 그에 대한 우려가 계속 남아있다.) 그리고 그녀는 주로 모두가 정확히 어디에 새로운 거대 항만이 건설될 것인지 궁금해하고 있다고 말한다.

Lead conservationist for the Bagamoyo Department of Antiquities, Benedicto Jagadi underscores the adage that people must know their history to know their future. 
바가모요 유적 관리 부서의 주요 환경 보호 활동가인 Benedicto Jagadi는 사람들이 그들의 미래를 알려면 그들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는 격언을 강조한다.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최근에 발표된 Bagamoyo Special Economic Zone Master Plan(바가모요 특별 경제 구역 마스터 플랜)에서는 Mlingotini에서 최대 Mbegani까지 약 5킬로미터의 해안선에 걸쳐 그 사이에 최소 6개의 작은 어촌 및 농촌에 영향을 주는 거대 항만을 보여준다. 이 마을들과 Pande, Konde 및 Zinga 같은 곳은 이미 조사 및 평가가 끝났다. 40세의 어부이자 2,000명 이하가 사는 마을인 Mlingotini에서 오랫동안 거주한 Rajab Rajab은 그의 발가락으로 모래를 파면서 해진 나무 벤치에 앉는다. 그는 주민들이 마을이 어떻게 변할지 짐작하지 않은 날이 단 하루도 없다고 설명한다. 새로운 항구는 최소 Mlingotini의 절반을 삼킬 것이고 이는 Mlingotini와 Mbegani 사이의 바다인 Waso 만에 있는 모든 이들의 관계를 변화시킬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곳에서는 수백년 동안 해안 주민들이 다우 배 건조와 어업의 기술을 완벽하게 발전시켰다.

이는 또한 기회를 가져다 줄거라고 그는 말한다. 그는 Bagamoyo District Council’s Sustainable Eco-Tourism for the Enhancement of Poverty Alleviation and Bio-Diversity Conservation(가난 완화 및 생물 다양성 보호의 증대를 위한 바가모요 지역 의회의 지속 가능 생태 관광)과 협력하고 있는데, 이들은 연구와 다이빙을 통해 "해양 생물을 이해하기 위해 관광 업계와 협력하여" 고용을 증가시키기를 희망하고 있다. 모랫길에서 마주치는 모든 사람과 인사하는 Rajab은 바다와 바다에 관련된 모든 관습 및 전통에 대한 타고난 유대를 자랑한다. 그는 큰 배가 부두에 댈 수 있도록 항구에 준설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또한 준설 작업이 해저의 침적토를 휘저어 산호를 질식하게 할 것을 알고 있다. 일반적으로 오염을 일으키는 폭발물을 이용한 어업 같은 좋지 못한 관행과 마찬가지로, Rajab은 어떻게 거대 항만이 주는 변화가 사람들, 내륙 및 바다 사이의 관계를 돌이킬 수 없게 무너뜨릴지 예리하게 알고 있다. "이곳의 노인들은 몇 번의 회의를 소집했고 저희는 공동체로서 이 문제를 논의했지만 아직까지 불확실합니다"고 그는 말한다.

정부 감독관이 평가 중인, Mlingotini에서 북쪽으로 수 킬로미터 떨어진 Mbegani 및 Pande 마을에서, 38세의 어부 Hassan Alawi는 한낮의 더위 속에서 편안하게 맨발로 걷는다. 그는 그의 보통의 집 및 몇 그루의 과수가 2011년 Economic Processing Zone Authority(수출 가공 지대청)에 의해, 그리고 작년 3월 현재 거대 항만 계획 진행을 후원하고 있는 Tanzania Port Authority(탄자니아 항만청)(tpa)에 의해 2배로 평가받았다고 말한다. Alawi 및 약 700명의 마을 사람들은 tpa가 그들에게 이주가 임박했고 보상이 넉넉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보상은 1헥타르당 최소 천만 실링(약 미화 6,000 달러)에 추가로 집과 과수에 대한 보상도 있을 것이라고 한다. Alawi는 변화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역 사회에 일자리를 가져올 것이라고 믿는다. 그는 "저희는 모두 하나의 마을 사람들로서, 가족으로서 함께 이주할 수 있습니다"고 희망한다.

또한 거대 항만의 대부분이 들어설 것으로 예상되는 장소에 현재 위치한, 어업의 발전을 위한 탄자니아의 대학의 이전이 예정되어 있다. 1966년에 설립된 대학은 현재 모든 어업 관련 교육 및 연수에 대한 공식적인 탄자니아 정부 기관이다. 현직 사업 지원 책임자인 Abdillahi Kamota는 대학이 이미 이전할 준비가 되어 있고, 그는 확실한 사업 계획을 보고 싶다고 말한다. Kamota는 항구가 대학의 400명의 학생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를 바라고, 그가 관리하며 지역 및 국제 시장에서 현지의 경쟁력을 높일 최신식의 어류 유인기를 갖춘 "거대 항만"의 건설을 보기를 원한다. Kamota는 그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고 말한다. 그는 대학이 이전해야 할 경우 "더 나은 시설"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South of Bagamoyo, children play in the village of Mlingotini at the edge of the five-kilometer stretch of coast marked for mega-port construction.
바가모요 남쪽의, 아이들이 놀고 있는 5킬로미터로 뻗은 해안의 가장자리에 있는 Mlingotini 마을은 거대 항만 건설지로 지정되어 있다. 지역의 성장은 이미 새로운 아파트로 증명되고 있다.오른쪽 아래 
Growth in the area is already evidenced by new apartments, below-right.
A house in Mlingotini. According to the Bagamoyo Department of City Planning’s Notice Board, up to 321 residents from four villages have already been paid undisclosed relocation fees. 
: Mlingotini에 있는 집. 바가모요의 도시 계획국의 게시판에 따르면 4개 마을의 최대 321명이 이미 미공개 이전 비용을 지급받았다고 한다.  

실제로, 바가모요의 도시 계획국의 게시판에 따르면 4개 마을의 최대 321명이 이미 미공개 이전 비용을 지급받았다고 한다. 바가모요의 새로운 일원인 인기 있는 장소 Dee’s에서 어느 날 쌀과 고기 스튜가 수북한 접시와 함께, 역사가 Ulimwengu는 "저희는 계획이 명확하다면 어떤 종류의 개발이든지 환영합니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문화 유산, 역사적인 건물 및 다양한 생태계에 보호에 대해 걱정한다. "저희는 일자리가 필요하기 때문에 공장과 항구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고 그는 설명하고, 1979년의 고대유물법 같은 법이 시행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Ulimwengu 동료이자 Ministry of Natural Resources and Tourism(천연 자원 관광부) 내에 있는 바가모요 유적 관리 부서의 주요 환경 보호 활동가인 Benedicto Jagadi는 사람들이 그들의 미래를 알려면 그들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는 격언을 강조한다. 그는 Old Fort 내의 그의 작은 사무실에 앉아 오래된 마을의 주요 도로를 바라보면서, 탄자니아의 법을 설명할 때 그의 참고 도서를 꺼냈다. Jagadi는 특정 법규를 가리키면서 법규가 1860년 전 지어진 "역사적인" 모든 건물 뿐만 아니라 1860년 에 지어진, 아직까지 역사적 가치가 있는 모든 건물을 규정한다고 설명한다. Jagadi는 따라서 Kaole 유적이나 오래된 마을 같은 보호 구역이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다른 유적들에 대해서는 덜 확신하고 있다.  

1925년 바가모요에서 태어난, 연장자이자 지역 사회 대표인 Hatibu Bakari는 그의 친구 Mohammed Issa Mitoso와 함께 지난날을 회상한다. Mohammed Issa Mitoso는 1939년 태어나 "Rammiyya B"로 알려진 지역의 이슬람학을 위해 Rammiyya School 근처에 살고 있다. 정오에 두 사람은 고전적인 스와힐리 양식의 집인 Bakari의 단층집의 작고 어두운 거실에서 빛이 바랜 붉은 벨벳 의자에 앉는다. 밖에서는 그의 아내가 숴이 소리를 내며 닭의 목을 베어내고 플라스틱 욕조의 물을 뜨거운 햇빛을 향해 붓고 있다. 안에서는 Bakari와 Mitoso가 평화, 존경 및 신뢰의 시간이라고 말하는 시간을 회상한다. Bakari는 모두가 "문을 열어둔채 놔두고 아이들이 계속 그들의 부모를 두려워했던" 때를 기억한다. Mitoso가 동의한다. "이 곳 주변에 '제발'은 없습니다. '지금 나에게 줘'만이 있죠." Mitoso는 ustarabu(예의), ukarimu(환대), upole (친절), samehe(용서) 및 subira(인내)를 포함한 스와힐리의 문화적 가치와 전통에 더 맞추어 그의 향수를 바가모요로 돌렸다. "변화는 많은 인내를 필요로 합니다"고 Mitoso는 말한다. "그리고 이 곳 바가모요에서 변화가 매우 빨리 일어나고 있습니다."

A musician himself, Abu Juma sells drums both to fellow Bagamoyo musicians and tourists.
음악가인 Abu Juma는 동료인 바가모요의 음악가들과 관광객들에게 드럼을 판다. Baobab Home에서 그들이 돌보는 10명의 아이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는 Terri Place와 Caito Mwandu 또한 가족과 아이들을 위한 건강 그룹을 운영한다.  

바가모요의 젊은 세대는 다른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변화를 열망하는 많은 젊은이들은 그들 세대가 직면한 최고의 어려움으로 취업을 꼽는다. 18세인 Shafee는 저렴하고 3륜의 지붕이 덮인 모터바이크인 bajaj를 운전하여 생계를 꾸려 나가고 있다. 그는 어두운 시간에 친절한 미소와 함께 승객들을 태우고, 항상 대기 중이며 겨우 먹고 살 만큼 번다. 그는 바가모요의 울퉁불퉁하고 움푹 패였으며 파헤쳐진 도로를 알며 1년 이상 제멋대로 뻗어 나가는 마을 주변을 쌩 하고 지나간다. "저는 매우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고 그는 말한다. 이는 학비가 없어 학교를 다닐 수 없고 심지어 일자리를 찾을 기회나 연줄이 적음을 약간 의미한다. "저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세요"라고 그는 말한다. "승객들에게 더 말을 잘 하기 위해 연습해야 합니다." 정다운 학생인 그는 그의 뒷주머니에 영어 단어 공책을 넣어 두고 있다. Shafee는 그가 거대 항만에 대해 약간 알고 있다고 인정하며 그저 "그의 삶을 찾고" 상당한 수입을 벌어 가족에게 자랑하기를 바란다.

다른 탄자니아의 젊은이들은 항구와 철도 건설 일자리 뿐만 아니라 사업 및 관광업의 급성장을 수반할 것으로 예상되는 새로운 레스토랑과 호텔로 이득을 보기를 희망하면서 최근 바가모요로 이주하고 있다. 바가모요의 도시 계획국의 도시 계획 설계자 Emma Mihayo는 그녀의 비좁은 사무실에서, 공문서가 쌓인 책상에서 정보를 보고한다. 문서에는 대부분 다르에스살람, 잔지바르 및 탕가에서 이주해 온 수백명의 새 주민들이 종종 바가모요의 광활한 열대 우림과 농지를 약간 그리고 무단으로 점유하러 온다고 나와 있다. 그녀는 두 명의 동료가 함께 곧 있을 이주에 대해 매일 문의를 받는다고 말한다. 그녀는 이주를 열망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가난하게 살고 있다고 말하며, 정확히 어느 마을의 사람이 이주를 할지 그리고 모든 마을이 이주하거나 이용 가능한 땅에 따라 흩어질지 아직 불확실하다고 덧붙인다.

Posing with 10 of the children they care for at The Baobab Home, Terri Place and Caito Mwandu also run health groups for families and children. 
Baobab Home에서 그들이 돌보는 10명의 아이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는 Terri Place와 Caito Mwandu 또한 가족과 아이들을 위한 건강 그룹을 운영한다.  
Traditional fishing and farming, raising coconuts, cassava or bananas, all appeal less and less to the town’s largely young population. Rajubu Vwai, top, grew up as a fisherman and farmer in Mlingotini, but he recently signed up for training as a tour guide.
Bajaj driver Shafee, 18, above, knows every road and pothole in Bagamoyo. “I come from a very poor family,” he says, adding that making his family proud by earning a decent income comes first. 
전통적인 어업과 농업, 코코넛, 카사바 또는 바나나 재배는 모두 마을의 대부분의 젊은이들에게 점점 더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 맨 위 Rajubu Vwai는 Mlingotini에서 어부 및 농부로서 자랐지만 최근 여행 가이드 교육에 참가했다. 18세의 Bajaj 운전사 Shafee는 바가모요의 모든 길과 움푹 파인 곳을 안다. "저는 매우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고 그는 말하며 상당한 수입을 벌어 가족에게 자랑하는 것이 최우선 사항이라고 덧붙인다.  

젊은이들은 또한 어업과 농업, 코코넛, 카사바 및 바나나 재배 같은 전통적인 마을의 직업을 외면하는 대신에 다르에스살람과 잔지바르에서 운전이나 관광 호텔, 리조트 및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겉보기에 더 유망한 직업을 선호한다.  

이는 Mlingotini의 Rajab을 걱정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그는 "젊은이들이 육지와 바다에 대한 아주 오래된 유대를 잊어버리고 있고 이는 우리의 문화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로부터 단절되고 미래에 대해 아직 불확실한 바가모요의 많은 젊은이들은 이런 겉보기에는 임박한 변화를 기다리는 동안 선택할 옵션을 제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운동가, 음악가 및 교육자인 Vitali Maembe는 30대 초반에 젊은이들이 그들의 소리를 찾고 예술을 통해 전통과 연결되는 것을 돕기 위해 Jua("태양") 예술 마을을 세웠다. 들판이 보이는 임대 건물에서 젊은이들은 현대 음악과 전통 음악을 배우고 연주하기 위해 모인다. 일주일에 2번 또는 3번의 연습 후 막연히 구성된 밴드는 차와 비스킷을 음미하면서 젊은이들이 직면한 문제에 대해 이야기한다. 벽에 테이프로 붙여진, 손으로 쓴 포스터는 "민주주의"와 "통합" 같은 단어들을 설명한다. 대화 중에 그들은 무시코 기타 리프와 드럼 소리를 연습한다.

이번 선거 기간에, 부패에 반대하는 거리낌없는 음악 캠페인으로 잘 알려진, 민속 음악 기타리스트이자 가수인 Maembe에게 여당과 야당 모두 그들의 캠페인을 홍보하기 위해 접근하고 있다. Maembe는 양 쪽 모두에게 퇴짜를 놓았고 "나는 차리리 내가 믿는 것에 대해 내 마음으로부터 노래하는 독립 예술가가 되겠다"고 말한다.  

학교의 소녀들과 거리의 소년들을 지키는 일이 그의 취미 중 하나이며, 그는 바가모요가 가진 축제, 워크숍 및 사람과 사람 간의 대화를 통하여 젊은이들의 에너지를 활용하는 잠재력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젊은이들은 상업 및 해상 운송의 중심으로써 뿐만 아니라 예술과 문화의 중심으로써 바가모요를 지도상에 다시 표시하게 할 것이다. 그는 탄자니아의 단 하나밖에 없는 공연 예술 대학인 Bagamoyo Institute of Arts and Culture(바가모요 예술문화 연구소)와 더불어 바가모요가 전통적인 문화의 기둥 위에 세워지기를 희망하고 있다.

Founder of the Jua (“Sun”) Arts Village that offers art, dance and music to children and youth, Vitali Maembe plays guitar and sings with his students. A respected musician, he creates a Tanzanian yet universal sound that touches Bagamoyo’s historic tensions between distant and local, tradition and change.  
아이들과 젊은이들에게 예술, 춤 및 음악을 제공하는 Jua("태양") 예술 마을의 설립자인 Vitali Maembe가 기타를 치고 그의 학생들과 함께 노래하고 있다. 존경 받는 음악가인 그는 먼 지역과 현지 사이에서, 전통과 변화 사이에서 바가모요의 역사적인 갈등에 다가가는 탄자니아의 보편적인 소리를 다시 만들고 있다.  

젊은이들이 해질 무렵에 Maembe의 현관에서 자신들의 마음을 노래하는 동안 해진 고기잡이 다우 배가 바다에서 녹슨 닻을 내리지 않은 채로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다. 새벽에 어부들은 햇빛에 바래고 기름이 스며든 셔츠와 느슨하고 올린 바지를 입고 해안을 따라 천천히 걷는다. 젊은이들 또한 해진 플라스틱 쌀푸대에 운반되는 간단한 식사를 팔면서 지나간다.

수평선에서 멀리 보이는 이렇게 현재 조용한 마을이 어떻게 모든 쉬라즈인, 포르투갈인, 독일인 또는 영국인 지배자들의 상상을 훨씬 넘어 곧 대양을 횡단하는 무역의 중심지로써 미래로 내던져지게 것인지 상상하는 것은 어렵다. 바가모요가 또다른 역사적인 변화에 대비하는 동안 시계처럼 진행되는 인도양의 조수가 공동의 열망을 진정시킨다. 준비 중인 Kikwete의 유산 프로젝트와 더불어 주민들이 새 지정학적 기반에 합류하기 전에, 변화는 단지 시간 문제인 것으로 보이고, 이 역사적인 해안을 따라 얼마나 많은 마음의 짐이 덜어질지 또는 얼마나 많이 내려놓을지 아직 아무도 알지 못한다.    

Amanda Leigh Lichtenstein Amanda Leigh Lichtenstein(@travelfarnow; www.travelfarnow.com)는 시인, 작가이자 교육자이다. 그녀의 예술 및 문화에 대한 글은 주로 Selamta, Contrary, MamboAddis Rumble에 나온다. 그년는 현재 잔지바르에 대한 개인적인 글 모음집을 작업 중에 있고 그녀는 에티오피아 남부에서 소녀들의 창작 프로젝트를 총괄하고 있다.
Mariella Furrer Mariella Furrer (mariellafurrer.com)는 케냐와 남아프리카에 기반한 보도 사진가이다. 스위스계 레바논인인 그녀는 남아프리카에서 성장했고 신문, 잡지, 책, 비영리 단체 및 비영리 법인을 위해 아프리카, 유럽 및 중동을 취재한다. 올해 그녀는 매해 열리는 세계 보도 사진전에 심사위원으로 종사했다.  


This article appeared on page 12 of the print edition of Aramco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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