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사르 아킬은 선사시대 고고학자들 사이에서는 거의 신화적인 위상을 갖고 있지만 전문가 집단 밖에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15,000-60,000여년 전의 동물 뼈, 선사시대 도구, 화덕이 층층이 쌓여 있는 이 곳은 Levant는 물론 전세계에서도 가장 집중적이고도 지속적으로 인간이 거주한 구석시 시대 유적지 중 하나다. 현대 인류가 아프리카를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고 근동 지역이 대륙과 문화를 잇는 가교 역할을 수행했던 과거와 근 1세기에 걸친 과학적 연구가 밝혀낸 사실들이 크사르 아킬의 지난날을 설명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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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41,000년 전부터 26,000 년까지 거의 14,000년이나 지속됐던 Ahmarian 문화의 사람들은 크사르 아킬에서 거주했다. 고고학자들은 현장 발굴을 통해 수 천 점의 투사촉, 절삭 도구, 칼을 찾아냈다. |
선사시대 수만년 동안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크사르 아킬은 현장 소유주가 높은 석회석 절벽의 돌출된 부분 아래에서 보물을 파기 시작한 1920년대에 와서야 역사적 기록에 편입될 수 있었다. 고고학자들은 오늘날 베이루트 동북쪽 Antelias 마을 근처에 있는 레바논 산맥 기슭의 작은 언덕에 위치한 이 돌출 지역을 암석 주거지라고 부른다. 금과 은을 찾으려는 노력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 와중에서 근동 지역의 가장 중요한 구석기 시대 현장 중 하나가 우연히 발견되었다.
크사르 아킬에서 "혈거인"의 수공품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발견되자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American University of Beirut)의 동식물 연구가 Alfred Day씨는 Howard Carter씨와 Carnarvon 경이 투탕카멘 왕릉을 발견한 1922년 유적지를 조사하기에 이른다. Day씨는 암석 주거지의 뒷벽에서 보물꾼들이 파 놓은 구덩이를 살펴보다가 약 2000 점의 부싯돌과 뼈 유물을 찾아냈다. 이 소식을 접하게 된 Collège de France 구석기 시대 예술의 최고 권위자 Abbé Henri Breuil씨는 이 유적지를 더 자세히 조사할 것을 제안했다.
1937년 소규모의 예수회 소속 고고학자 팀은 Abbé Breuil씨의 충고에 따라 현장 조사를 시작했다. 당시 33살의 나이로 캠브리지 대학에서 근동 선사시대 연구의 최고 권위자였던 Dorothy Garrod 밑에서 수학하고 있었던 메사추세츠 보스턴 칼리지의 Joseph Doherty 신부가 발굴팀을 지휘했다. 다른 참가자들로는 후에 포드햄 대학(Fordham University)에 합류하게 되는 구석기 인류학자 J. Franklin Ewing 신부, 예루살렘 Pontifical Biblical Institute의 George Mahan 신부와 Joseph Murphy 신부 등이 있었다. 발굴 작업 당시 육체 노동을 담당했던 레바논 인부들은 23 미터(75피트)에 달하는 암석 주거지 퇴적물을 삽으로 파고, 체로 치고 분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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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di Choueiry씨 |
북풍을 피하면서 남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크사르 아킬은 해안가와 산악지역 사이에 위치한다. 이 지리적 위치로 인해 거주자들은 보호를 받았고 풍부하고 다양한 자원을 이용할 수 있었다. |
당시 Doherty 신부는 1930년대의 레바논 지역이나 1937년 4월 4일 처음으로 방문하게 된 크사르 아킬에 대해 아무런 사전 정보가 없었다. 크사르 아킬에 도착한지 불과 이틀 후에 그는 "유적지 근처의 Antelias 계곡은 지금까지 내가 본 곳 중에서 가장 야생적인 곳이다"라고 적었다. 그는 또한 "아프가니스탄의 야생지역이나 카이버 고개 근처의 인도 북서쪽 국경 지역—‘어느 벵갈 기병의 삶(Lives of a Bengal Lancer)’에서 묘사된—의 사진을 떠올려 보면 어떤 곳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적었다.
예수회 발굴단은 현장에 도착한 지 두달만에 작업 구역, 세면실, 주방, 6인용 잠자리를 갖춘 발굴 하우스를 축조했다. 이들은 30명 이상의 현지 노동자를 고용하고 발굴 작업이나 퇴적물을 걸러 유물을 찾아내는 작업과 같은 육체노동을 수행하는 대가로 일당 50 피아스터(레바논, 수단, 시리아, 아랍 연합의 통화 단위)를 지불했다. 발굴된 자료의 양은 실로 엄청났기 때문에 Doherty 신부는 "오직 예수회 수사만이 여행 경비 및 생활비를 포함해 $1750[오늘날 가치로 $28,000)의 지원금으로 이러한 규모의 작업을 수행할 엄두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예수회 소속이면서 저명한 프랑스 구석기 학자이자 지질학자였던 Pierre Teilhard de Chardin씨는 1930, 40년대에 Ksar Aqil 발굴 책임을 맡은 이 젊은 예수회 수사들에게 조언을 제공하면서 "처음에는 별로 힘들지 않았던 작업이 이제는 엄청나게 커져 버렸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보스턴 칼리지 발굴단은 수백 만 점의 유물을 발견했는데 이는 선사시대 고고학 현장 기준으로 엄청난 수의 유물이었다. 유물의 대부분은 레바논 석회석 기반암에에서 흔히 존재하는 부싯돌로 만들어 졌으나 죽은 동물 뼈, 바닷조개 구슬, 뼈와 사슴뿔 투사촉, 송곳, 다양하게 장식된 물건, 황토 색재도 많았다. 이 구석기 시대 유물을 충분히 설명하는데 거의 90년이 세월이 걸렸는데도 아직 크사르 아킬 현장의 잠재력이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랍지 않다. 레바논 대학의 Corine Yazbeck씨는 앞으로도 현장 작업을 계속하기를 희망하면서 "크사르 아킬은 레바논의 가장 중요한 선사시대 유적지이며 근동 지역 후기 구석기 시대에서 가장 긴 거주 기간을 포함한다"고 말했다.
인류의 진화와 지구 식민지화에 대한 현대의 관점은 화석 증거, 발굴 유물, 생물발생 자료에 기초하고 있다. 이 모든 자료가 시사하는 것은 현대 인간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비교적 최근인 약 200,000여 년 전에 아프라카에서 진화했다는 것이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인류의 기원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강력한 최신 분석 도구 중 하나가 바로 분자 생물학이다. 유전학자들은 미토콘드리아라고 불리는 작은 세포 내부 구조에서 추출한 DNA를 분석함으로써 수십만 년 동안 인간의 생물발생 관계를 측정하는 수단을 얻어냈다. 미토콘드리아는 화학 에너지를 발생시키기 때문에 세포의 발전소라고도 불리는데 자체 게놈을 보유하며 미트콘드리아 DNA(mtDNA)는 오로지 모계로부터 유전된다.
1987년 UC 버클리(University of California at Berkley) 학자들이 밝혀낸 연구 결과에 따르면 아프리카 인구의 mtDNA 시퀀스는 가장 광범위한 다양성을 보여준다. Kalahari San 같은 아프리카인들은 지구 상에서 가장 원시적인 유전 혈통을 갖고 있다. 이들은 가장 긴 시간 동안 진화적 변화를 축적해 왔다. 연구에 따르면 오늘날 사람들이 갖고 있는 모든 mtDNA의 기원은 약 200,000년전 아프리카에 살았던 한 명의 여성에서 유래한다. 이 여성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현대 인류의 유전적 어머니라는 의미에서 “미토콘드리아 이브”라고 불린다.
베이루트가 동서양의 접경지역으로 자라잡았던 때보다 수 만년 전에 이미 레반트 해안과 아라비아 반도 남부 지역은 우리 조상들이 아프리카를 떠나서 아시아, 유럽, 호주, 마지막으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동했던 통로였다. 이 지역은 또한 네안데르탈인(호모 사피엔스 네안데르탈렌시스)과 우리의 직접적인 조상이 공존하고 이종교배했던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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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단에서 하단으로: dorothy a. e. garrod; henri fleisch/levon nordiguian; hadi choueiry의 기록 |
오늘날 Antelias 지역에서 서쪽 방면으로 보이는 크사르 아킬을 보호하는 석회석 언덕은 최초 발굴 시점 이후 계속 채석되어 이제는 거의 평평해졌다. |
네안데르탈인과 현대 인류의 조상의 진화적 분리는 지금으로부터 약 440,000-270,000년 사이에 일어났다. 대중 문학에서 혈거인으로 알려진 네안데르탈인은 레반트 쪽 남부 유럽과 동쪽으로는 이라크 쿠르드 지역 및 남부 시베리아 지역에 거주했다. 독일 막스 플랑크 진화 인류학 연구소(Max Planck Institute for Evolutionary Anthropology) Svante Pääbo씨의 연구에 따르면 약 1-4%에 달하는 소량의 네안데르탈인 DNA가 아프리카인을 제외한 모든 현대 인류에 존재한다. 우리가 네안데르탈인 유전자를 갖게 된 것은 아마도 80,000-45,000년 전에 근동 지역에서 발생한 이종교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아프리카 이주” 이론 지지자들은 해부학적으로 현대 인류에 속하는 사람들의 아프리카 탈출은 파상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근동 지역으로의 초기 이주는 130,000년 전 이전에 발생했으며 오늘날 지도에서 아프리카의 뿔 지역과 아라비아 인근 지역을 조사해보면 두 개의 분명한 이주 경로를 짐작할 수 있다. 한 경로는 이집트 북부에서 시작해 시나이 반도로 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Bab el-Mandab 해협을 배로 건너 오늘날 예멘 지역에 도달하는 경로다. 현대 인류는 서로 다른 시기에 두 경로를 따라 이주한 것으로 보이고 이주시 특별한 위험은 없었으며 우리 조상들이 사냥했던 동물들이 이주 경로에 자주 출몰했을 것이다. 근동 지역이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가교 역할을 담당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현대 인류는 지리적으로나 유전적으로 아프리카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근동 지역은 인류의 가계도에서 줄기 부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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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지역 및 상층 지역 개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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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존된 사슴뿔을 찾아내는 발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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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반트 오리냐크인의 뼈와 사슴뿔 투사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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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된 7세 소년 Egbert의 두개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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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구석기 시대(ICP) 칼날 도구에는 사면 물체, 조각칼, 또는 끌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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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팀은 약 19 미터(62피트) 깊이까지 도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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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니 브룩 대학교(Stony Brook University)의 John Shea씨는 네안데르탈인과 현대 인류 간의 상호작용에 대해 두 집단이 이 지역을 둘러싸고 주기적으로 벌인 지리적 "줄다리기"로 표현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130,000년 전 우리의 조상인 현대 인류는 이 지역에 진입했지만 당시 이곳에 거주하고 있었던 네안데르탈인으로 인해 한동안 정착지에 제한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약 50,000년 전에 현대 인류가 또 다시 아프리카를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기 시작하면서 우리 조상들은 크사르 아킬 같은 지역의 유일한 주민이 되었다.
만약 이 두 그룹이 물리적 힘으로 경쟁했다면 네안데르탈인들은 쉽게 승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 인류가 인지적, 물리적, 문화적 이점을 개발함에 따라 네안데르탈인은 결국 지리적으로 제한된 일부 피난처로 쫒겨나고 말았다.
네안데르탈인은 많은 면에서 현대 인류와 다르지만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점은 두개골 해부에서 드러나는데 이들의 이마는 경사졌고 Occipital bun이라고 불리는 후두골이 많이 돌출되었으며 상안와융선이 뚜렷하며 턱이 없다. 육체적으로 강인하고 우리 조상보다 더 강력한 체격을 갖추고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작은 신장으로 인해 유럽과 같은 추운 기후에 더 적합했다.
스페인 지역의 내이 화석을 연구한 결과 네안데르탈인은 오늘날 인류와 비슷한 범위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목을 해부해본 결과 설골이 있었으며 이 덕분에 으르렁거리는 것 이상의 소리를 낼 수 있었다.
이들은 현대 인류처럼 언어 발달에 꼭 필요한 유전자를 갖고 있었으며 일부 구석기 인류학자들은 이들이 복잡한 언어 패턴을 구사할 수 있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컴퓨터로 네안데르탈인의 성도를 복원해 그들이 사용했을 소리 범위를 시뮬레이션 한 후 Florida Atlantic University의 Robert McCarthy씨는 이들이 복잡한 언어를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사실이 어떻든 간에 네안데르탈인의 목소리는 최소한 24,000년간 침묵을 지켜왔다.
네안데르탈인은 분명히 장거리 달리기 같은 활동에 적합하지 않았다. 네안데르탈인의 경우 운동 에너지 비용이 32% 더 높았기 때문에 유사한 환경에 거주했던 현대 인류에 비해 매일 100-350 칼로리를 더 섭취해야만 했다. 따라서 우리 조상들은 높은 연료 효율 덕분에 경쟁 우위를 확보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나온 증거에 따르면 네안데르탈인은 황토 안료를 장식 목적으로 사용했으며 이라크 쿠르드 지역 Shanidar Cave에서 발견된 유골 주변 흙에서 추출한 식물 꽃가루를 분석한 결과 시체에 야생화가 놓여져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들의 신체 장식과 매장 풍습은 단순하기는 하지만 현대 인류와 동일한 행동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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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 박물관 |
Egbert의 두개골은 1955년 J. F. Ewing씨가 의해 이 펜실베니아 대학교 석고 모형처럼 재건되었다. 원래 두개골은 약 40,000년 전으로 추정되는 계층에 위치해 있었다. |
네안데르탈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마도 서남아시아로 이주한 현대 인류가 이들을 내쫒았는지도 모른다. 네안데르탈인과의 접촉은 분명 다양한 상호작용으로 이어졌는데 William Golding씨의 저서 The Inheritors에서 묘사된 것처럼 어떤 경우에는 신체적 충돌과 자원 경쟁뿐 아니라 이종교배로도 나타났다. 네안데르탈인의 절멸은 50,000-30,000년전 사이에 발생한 급격한 기후 변화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이미 분리되고 고립되었던 네안데르탈인들에게 더욱 큰 압력으로 작용했다.
크사르 아킬은 약 45,000년에 걸쳐 많은 거주 계층이 층층이 쌓여 23 미터를 이루는 거대한 레이어 케이크 같은 형태다. 가장 오래된 계층은 중기 구석기 시대로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약 60,000년 간 이어졌다. 당시 네안데르탈인은 여전히 근동 지역을 배회하고 있었는데 이들 외에도 다른 종족이 이 지역에 존재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지역에서 재기중이었는데 아마도 두 집단은 서로 다른 곳의 암석 거주지를 사용한 것 같다. 네안데르탈인과 현대 인류가 같은 석기 가공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크사르 아킬의 중기 구석기 유물을 만든 집단이 누구인지는 아직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중기 구석기 계층 다음에는 후기 구석기 거주 계층이 나타나는데 근동 지역에서 단연 가장 긴 계층에 해당한다. 1937-1938년에 걸쳐 발굴 작업을 진행하면서 Doherty 신부는 그러한 거주 계층을 18개나 찾아냈다. 이후 저명한 프랑스 선사시대 학자인 Jacques Tixier씨가 정교한 층위학적 분할에 따라 현장을 연구하면서 실제 계층 개수가 그보다 몇 배 더 많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1938년 8월 23일 보스턴 칼리지 발굴 팀은 11.46 미터(약 38피트) 깊이의 마모된 바위 더미 아래서 해부학적으로 현대 인류에 속하는 희귀 유골을 찾아냈다. Doherty 신부가 1938년 9월 보스턴 칼리지 학장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가 얼마나 흥분했는지 잘 알 수 있다. “슬쩍 알려드립니다만 우리에게는 2개의 해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말씀드린 두개골과 해골 외에도 젊은 오리냐크 인의 아래 턱이 있습니다." Doherty 신부가 흥분한 것도 당연했다. 후기 구석기 시대 초기의 인간 화석은 오늘날까지도 근동 지역에서는 매우 드물며 표본도 소수에 불과하다.
두 개의 유골이 나란히 누운 채로 발견되었다. 한 해골은 조밀한 퇴적물에 덮여 있어 보존 상태가 열악했으나 다른 해골은 일부분이 퇴적물 밖으로 빠져 나와 있었기 때문에 발굴하기가 더 용이했다. 발굴팀은 보존 상태가 더 좋은 해골을 "Egbert”라고 명명했으며 영국 자연사 박물관(the British Museum of Natural History)의 Christopher Stringer씨는 이 해골이 약 7세의 나이에 사망한 어린아이의 것이라고 식별했다. 최근 옥스포드 대학 고고학 연구소의 Katerina Douka씨는 Egbert와 같은 계층에서 발견된 바닷조개 구슬이 40,000년 전의 것이라고 추정했다.
Doherty 신부는 두 어린이가 매장되었다고 보지 않았으며 "가엾은 두 어린이는 야생 돼지, 곰, 사슴 잔해를 처리하는 것처럼 조개무지에 던져졌다."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유골이 거주지 뒤쪽 바위 더미 아래에 위치한 것으로 보아 단순하지만 의도적인 매장이었던 것 같다. Egbert의 시체를 중요한 거주지 안에 두었다는 사실은 소중한 사람을 가까이 두고 싶은 욕망을 시사한다.
Egbert는 고고학자들에게 Ahmarian으로 알려진 수렵 - 채집자 집단에 속해 있었으며 이들은 약 41,000-27,000년 전 사이에 이 지역 전체에 걸쳐 분포했다. Ahmarian이란 이름은 이 선사시대 문화가 처음 인식되었던 베들레헴 근처 고고학 유적지 Erq el-Ahmar를 가리키는 동시에 이 사람들이 붉은 황토 안료(ahmar는 아랍어로 "붉은"을 의미)를 장식 목적으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Ahmarian 인들이 어떤 종류의 사회적 조직을 이루었고 일상 생활에서 어떻게 상호 작용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현대 수렵-채집인의 행동을 연구하는 것은 선사시대인들의 행동 방식을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다. 민족지학적 유추는 추측에 근거하기는 하지만 오래 전에 사라진 고대 문화의 생활 방식을 알아보는 한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우리는 Ahmarian인들이 현대 수렵-채집인들처럼 가족 관련 집단에서 생활했다고 추정한다. 무리 사회는 평등주의적이었으며 반유목적이었고 이동이 잦았으며 씨족과 연령에 기초한 느슨한 구조의 위계질서를 갖고 있었다. 북미 Lakota 인디언이나 호주의 Aboriginal Nyantunyatjara 같은 부족의 경우 남자들은 사냥을 하고 여자들과 아이들은 식용 식물, 덩이줄기, 과일 및 견과류를 채집하고 덫을 놓아 작은 사냥감을 잡는다. 여성들은 지역과 날씨에 대한 지식에 기초해 채집 활동을 수행하여 부족의 자급자족 생활의 50% 이상을 담당한다. 하버드 대학의 고 Glynn Issac씨에 따르면 이러한 협력적 사회 활동은 우리의 생존에 필수적이며 수백만 년 전부터 이루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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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아는 사람(4) |
Ahmarian 인들은 사슴뿔 같은 유기물로 만든 해머로 부싯돌을 내리쳐서 얆은 칼날을 쉽게 분리했다. 이 칼날들은 자르기 위한 칼이나 사냥을 위한 투사촉, 가죽을 벗겨내기 위한 도구로 바뀌었다. |
확실하게 알려진 사실은 Ahmarian 인들이 돌을 다루는데 능숙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수 천 점의 칼 도구를 크사르 아킬에 버렸다. 칼날이란 석재(Core)라고 불리는 부싯돌에서 떼어낸 칼 모양의 물체로서 특히 좁고 긴 모양을 만들기 위해 고안되었다. 후기 석기 시대 문화에서 좀 더 자주 나타나는 이 칼날은 시리아 Palmyra 지방 북동쪽에 있는 el-Kowm basin 현장에서 250,000 년 전에 만들어졌다. 사슴뿔 같은 유기물로 만든 해머를 사용해 Ahmarian 인들은 한 부싯돌에서 얇은 칼날을 많이 분리해낼 수 있었다. 이 칼날들은 자르기 위한 칼이나 사냥을 위한 투사촉, 가죽을 벗겨내기 위한 도구로 바뀌었다.
크사르 아킬의 Ahmarian 사냥꾼들은 두 가지 서로 다른 종류의 투사촉을 만들었는데 두 개 모두 편의적으로 제조되었고 디자인이 단순했다. 특히 칼날 끝은 날카로운 사슴뿔 가지와 같은 도구로 날카롭게 갈려졌다. 석재에서 떼어내는 방법 때문에 이미 얇은 칼날은 자루 안에 넣기에 매우 적합했다. 다른 Levant의 지역에서 만들어진 투사촉 스타일은 Ahmarian 부족의 현지화되었음을 시사한다. 북부 해안 지역에서는 Negev and Sinai 사막 지역 남쪽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평면 촉이라고 불리는 투사촉을 만들었다.
이 투사촉이 정확히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크기, 모양, 무게를 볼 때 창을 던지거나 활을 쏘는데 사용된 것 같다. Mount Carmel 지역의 Mugharet el-Wad 투사촉를 따라 el-Wad 투사촉이라고 불리는 크사르 아킬의 Ahmarian 투사촉을 복제해서 발사해본 결과 이 투사촉이 매우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석기를 손잡이에 부착하는 기술은 약 110,000년 전 네안데르탈인에게 알려졌다. 이들은 역청이나 식물 송진처럼 열로 활성화되는 접착제를 사용해 투사촉을 나무 자루에 부착했다. 네안데르탈인과 이후 Ahmarian 인들의 사냥 방식의 차이는 네안데르탈인이 제한된 공간에서 찌르기 창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 무기의 단점은 이름에서부터 분명히 알 수 있다. 큰 사냥감을 사냥할 때 부상을 당한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점이다. 워싱턴 대학의 Erik Trinkaus씨가 관찰한 것처럼 네안데르탈인의 유골에서는 오늘날 로데오 야생마나 숫소 라이더에게서 발견되는 것과 매우 흡사한 외상이 자주 나타난다.. 특히 머리와 목 부상을 당한 경우가 많아 이들이 큰 짐승을 가까이에서 사냥했음을 시사한다.
반면에 Ahmarian인들과 다른 후기 구석기인들은 상당히 먼 거리에서 사냥감을 공격할 수 있는 사냥 도구를 사용했을 것이다. 창 던지기는 긴 팔처럼 다트(Dart)라고 불리는 비교적 가벼운 발사 무기를 더 빨리 멀리 던질 수 있도록 해 주는 지렛대 역할을 한다.
Egbert의 부족은 매우 성공적인 사냥꾼들이었다. 크사르 아킬에서는 다마 사슴, 노루, 염소, 가젤 같은 중간 크기 동물의 뼈가 무수히 많이 발견되었다. 사냥 방식은 개인이나 소집단의 습격에서부터 사냥감에 몰래 접근하거나 매복하는 방법 등이 있었을 것이다. 현장에서 발견된 동물 유골을 분석한 결과 어린 동물의 수가 더 적어 주로 어른 동물을 사냥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어른 동물들은 고기를 가장 많이 제공하므로 사냥꾼들에게는 가장 가치 있는 목표물이었다.
Egbert와 또 다른 크사르 아킬 어린이를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당시 어린이들에게 닥쳤을 불행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당시 7세였던 Egbert는 어느 기준으로 보나 어린아이였지만 후기 구석기 시대에는 기대 수명이 짧았기 때문에 30살까지 살 경우 수명이 긴 편에 속했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Egbert와 동시대를 살았던 현대 인류의 수명이 획기적으로 증가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연장자들의 수가 증가하는 것은 사회적, 문화적으로 잇점이 있으며 생존 가능성 면에서 분명한 우위를 점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수명 연장이 현대 인류가 획득한 지식과 경험을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수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오늘날 할아버지들처럼 살아남은 연장자들은 사회적 결속과 지침을 제공하기 때문에 연장자 어른의 증가는 혈족 유대관계를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더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아 번식 연령에 도달하고 또 자녀의 번식을 지원함에 따라 인구 증가가 더욱 촉진되었다.
입구가 남쪽을 향하고 있는 크사르 아킬은 바다, 해안, 고지대 자원에 접근할 수 있는 안전한 계곡에 위치해 있다. 레바논에서 터키 남부에 이르는 여러 지역에서 발견된 매우 유사한 고고학적 자료가 보여주듯 해안 지역은 이동, 교역을 통한 교환, 동족 Ahmarian 집단과의 사회적 상호작용의 통로를 제공했다. 실제로 레바논과 주변 지역은 역사적으로 볼 때 상업 활동은 물론 아이디어, 과학, 예술, 음식의 전파의 도관 역할을 수행했다. 우리는 이제 인간에게 있어 중요한 기여가 수만 년을 거슬로 올라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Lebanese Directorate General of Antiquities가 후원한 베이루트 지역 신규 발굴이 진행되면 우리는 앞으로 더 많은 통찰을 얻게 될 것이다.
크사르 아킬은 위치적으로 거주 가치가 높은 지역이었고 이는 레바논의 옛 거주인들이 거의 45,000년 동안 이 지역에서 집중적, 거의 연속적으로 거주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이는 페니키아 문명이나 로마 문명처럼 이 지역을 거쳐간 다른 고대 문명의 역사에 비해서도 훨씬 더 긴 시간이다. 페니키아 유적은 Byblos 같은 곳에 존재하는데 Baalbek 현장은 로마 다음으로 가장 인상적인 유적지 중 하나다. 이 고고학 현장은 상징적이어서 전세계에서 관심 있는 대중이 쉽게 인식하는데 반해 크사르 아킬은 훨씬 덜 주목을 받는다.
1930년대 이후 석회석 절벽은 상당 부분 채석되었다. 레바논은 내전을 겪은 후 재건 과정에 있으며 크사르 아킬을 둘러싸고 있는 낮은 언덕은 집중적으로 개발되어 왔다. 건축 공사가 시작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현장은 여전히 시간의 흐름과 현대 인류의 이주 경로를 보여주는 존재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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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opher Bergman (christopher.bergman@urs.com)은 1979년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을 졸업하고 1985년 Institute of Archaeology in London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마쳤다. 그는 36년 간 크사르 아킬의 고고학적 시기를 고민해왔고 이제는 이곳을 대부분 이해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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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grid Azoury는 크사르 아킬에서 후기 구석기 계층 중 가장 초기 계층을 설명했다. 그녀는 시리아와 레바논에서 조사를 진행했는데 특히 트리폴리 근처의 Abu Halka의 암석 주거지를 조사했다. |
Helga Seeden은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의 고고학 교수이다. 그녀의 연구 관심사는 과거 사건을 해석하기 위한 방법으로 현재 전통 문화의 생활방식을 연구하는 민족 고고학을 포함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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