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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63, No. 52012년 9월/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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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frEdo daglI ortI / art archIvE / art rEsourcE
bob gomel / time life pictures / getty images
말을 탄 메흐테르 군악단을 묘사한 맨 위의 그림이 그려진지 40년 후인 1760년에 유럽의 오케스트라에서 처음으로 베이스 드럼과 심벌즈를 사용했다. boru(트럼펫) 6개, zil(심벌즈) 여섯 벌, davul(베이스 드럼) 8개, kös(팀파니) 세 벌이 보인다.
jamie squire / getty images
정확한 행군과 피가 거꾸로 돌고 심장이 두근거리게 하는 음악으로 먼 옛날의 음악적 조상을 모방하고 있는 현재 가장 유명한 메흐테르의 후예는 미식축구 경기와 명절 퍼레이드에서 지역의 자존심을 상징하는 미국의 마칭 밴드(marching band)이다.
fatih saribas / reuters / corbis
해마다 여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Trooping of the Colour에서 공연하는 영국 군악대(British drum corps)와 같은 유럽의 군악대는 투르크 제국의 악기는 들여왔지만 멜로디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미식축구 경기에서 마칭 밴드(marching band)의 공연 중에 심벌즈가 부딪치고 베이스 드럼이 울리면 메아리가 들린다. 오케스트라가 베토벤 교향곡 9번의 마지막 악장을 연주할 때도 수백 년을 따라 울린다. 록 밴드가 콘서트장에서 큰 소리를 내며 공연할 때도 들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뛰어난 군악대원이었던 강렬한 mehter(메흐테르) 음악인의 분명한 음악적 DNA인 소리 지문이다.

메흐테르 음악 샘플 듣기 여기

그들의 음악은 한때 터기 군사들을 격려했고 터키 황제를 위한 세레나데가 되기도 했으며 신비주의자들에게는 영감을 주었다. 처음에 유럽인들은 이들을 비웃었지만 이들 음악의 특징인 부딪치고 울리는 소리를 받아들이며 서양의 밴드와 오케스트라의 소리가 변화했다.

Mehter(메흐테르, "뛰어난"이란 뜻의 페르시아어에서 파생됨)는 원래 고위 관리의 하인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셀주크(Seljuk)의 황제였던 Alaeddin이 1289년에 mehterhane(메흐테르 군악대)의 시초를 오스만 제국 초대 황제인 오스만 i세를 위해 창설했으며 황제는 군악대가 연주할 때마다 Alaeddin을 기리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고 한다. 그런 관습은 사라졌지만 메흐테르는 오스만 제국과 오스만 술탄의 상징이 되었다. 군악대원은 황제의 kapıkulu(고용인)로 황실 근로자 중 가장 높은 임금을 받는 부류에 속했다. 1600년경이 되자 mehter는 술탄의 군악대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메흐테르 군악대는 1299년부터 1923년까지 지속하며 중동을 지배하고 전성기엔 유럽까지 위세를 떨쳤던 오스만 제국의 음경(Soundscape)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또한 뛰어난 궁중 작곡가와 훌륭한 연주자, 수피교(Sufi) 음악의 대가, 교회 및 유대교 성가대의 선창자, 떠도는 음유 시인, 마을 음악대 등도 있었다. 오스만투르크 시대의 여행가 Evliya Çelebi의 글에 따르면 오스만 제국에는 음악가, 가수, 악기 만드는 사람 등의 조합이 40여 개에 달했다.

유럽인들은 메흐테르 군악대의 음악을 여러 번 들을 수 있었다. 투르크 전쟁(Turkish Wars)으로 알려진 시기인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했을 때부터 1699년까지 오스만 제국은 동유럽으로 자국의 힘을 확장하려 노력했으며 음악인들도 전쟁에 참여했다. 심벌즈가 부딪히는 소리와 베이스 드럼 연주를 동시에 들어본 적이 없는 유럽인들이 받은 충격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1700년대 초기에 폴란드 황제 아우구스투스 2세와 함께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한 한 프러시아 병사는 몇 년 후에 매일 아침 그의 막사를 지나가던 메흐테르 군악대의 행진 때문에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엄청나게 시끄러운 소리(charivari)로 귀가 찢어질 듯했다”고 말했다.

목관악기인 주르나(zurna)와 더블 리드(Double reed)의 오보에와 비슷한 악기들이 매우 높은 음을 내며 멜로디를 연주하고 때로는 강렬하게 합주하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고 말했다. 트럼펫(Boru)은 강조되는 음을 연주했다. 그리고 작은 케틀드럼(Nekkare), 베이스 드럼 (Davul), 크래쉬 심벌즈(Zil).등도 있었다. 커다란 금속 초승달 모양을 단 긴 막대기로 종이나 때로는 말꼬리 장식을 한 çevgan이 딸랑딸랑 소리를 내며 아마도 다음 곡이 시작되기 전에 활기를 불어넣는 데 사용됐을 것이다. 만약 술탄 전용 군악대가 지나갔다면 낙타에 탄 병사들이 연주하는 낙타 가죽으로 만든 케틀드럼인 kös의 우레 같은 소리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정식 군악대는 각 악기의 효과를 확대하기 위해 악기 종류마다 7-9명의 연주자를 두었다.

천일야화(A Thousand and One Nights)를 프랑스어로 번역한 Antoine Galland는 1672년과 1673년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했을 때 kös에 가장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내가 보고 들은 것 중 가장 큰 네 개의 케틀드럼(Timbale)이 낙타에 실려 주위의 모든 것을 진동하고 흔들리게 했다. 모두가 놀랐을 뿐만 아니라 몸속까지 출렁거릴 정도였다.”

심지어 오스만 제국 사람들도 군악대의 음악이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They raise such a din that Venus begins to dance and the skies resound,” Çelebi는 메흐테르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들의 음악은 비너스가 춤을 추고 하늘 전체에 울려 퍼질 정도로 큰 소리를 낸다." 군악대가 지나갈 때면 "소음 때문에 머리가 터질 지경이다."

메흐테르 군악대는 제국에서 비 투르크 지역의 소년을 선발해 조직한 오스만의 친위 보병대 Janissaries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최전선에서 연주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오늘날 메흐테르 음악인은 터키에서 국가의 자랑거리로 남아있으며 군사 음악과 관련이 있다.

julian calder / getty images
이스탄불에 있는 터키 군사 박물관(Turkish Military Museum)에서 정기적으로 하는 공연을 찾은 어린 방문객도 1700년대 초에 메흐테르 군악대의 "엄청나게 시끄러운 소리(charivari)로 귀가 찢어질 듯했다”고 한 프러시아 병사의 말에 동의하는 듯하다.

록과 재즈를 연주하며 자란 터키출신 음악인인 Mehmet Sanlıkol씨에게 메흐테르 음악은 “Led Zeppelin, Herbie Hancock의 Headhunters 또는 James Brown의 음악”과 같다. 현재 전문 음악인이자 보스턴의 대학에서 음악을 가르치는 Sanlıkol은 자신의 책, The Musician Mehters에서 메흐테르의 레퍼토리가 단지 전쟁과 관련한 곡에 한정되지 않고 이보다 훨씬 다양하다고 밝힌다.

국가의 공식 군악대로서 그들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제국과 관련한 일상적인 임무를 맡았다. 기도를 위해 동이 트기 전에 사람들을 깨우고 밤에는 성과 타워에서 공연했다. 황제가 도시에서 이동할 때 동행하고 황제가 면도 중에는 그를 위한 세레나데를 연주했다. 의식이나 축하 행사에서 흥을 돋웠고 국빈 방문 시나 선전 행사 등에서 공연했다 오스만 제국의 사절과 주의 관리는 자신만의 소규모 메흐테르 군악대가 있었다.

메흐테르는 전쟁 음악과 더불어 다른 형태의 합주에서 인기가 있던 장엄한 기악곡인 peşrevsama‘i도 연주했다. 메흐테르는 Makkah로 향하는 성지순례(Hajj)를 하는 순례자를 위한 종교음악도 연주했다.

작은 규모의 비공식 메흐테르 밴드는 결혼식에서 민속 음악을 연주하기도 했다. 터키 민요 중에 “메흐테르가 연주하고 결혼식이 계속 진행되는 한 다른 것은 상관없어”라는 가사가 있는 곡이 있다.

수피교(Sufi)의 성직자단 역시 심벌즈와 Nekkare보다 큰 케틀드럼인 Kuddum를 사용해 메흐테르 스타일의 곡을 연주했다. 술탄 셀림(Selim) 3세(1796–1808)는 자신의 kös를 자신이 회원이었던 이스탄불 메블라비(Mevlevi) 지부에 빌려주었다.

Sanlikol은 유럽인들이 메흐테르 밴드를 “Janissary band”라 부르는데 터키 역사학자들은 이들을 그렇게 지칭한 적이 없다며 이는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메흐테르 군악대원들은 언제나 전쟁 중에 말을 타고 연주했지만 Janissaries는 말을 타는 것이 명백하게 금지돼있었다. 그럼에도 그 이름이 굳어져 버렸다.

독일의 시인 Christian Schubart는 1700년대 중반 메흐테르가 유럽에서 연주하는 것을 듣고 음악이 "매우 호전적이라 겁이 많은 사람도 자신의 가슴을 펴게 한다"라고 썼다. 그는 음악의 리듬이 간단해 군사용으로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각 비트가 매우 강렬하고 음조가 강해서 박자를 놓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라고 말했다.

dieter heinemann / westend61 / corbis

스만 제국이 1683년(첫 번째는 1529년)에 Vienna를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함락했을 당시에도 메흐테르가 함께했다. 그 전투를 지켜봤던 영국 외교관 Paul Rycaut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7월 26일, 맹렬한 공격을 계획한 투르쿠 진영은 높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 플루트, 심벌즈, 트럼펫 등의 악기를 가장 높은 음으로 연주해 아군을 격려하고 공격을 진행하도록 했다."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군대가 Vienna에서 패배한 후 메흐테르가 후퇴하면서 자신들의 악기를 전쟁터에 버리고 와 비엔나인들이 베이스 드럼과 심벌즈를 알게 됐다. 하지만 이는 상인과 외교관이 이스탄불을 방문하고 메흐테르에 관한 이야기를 수백 년간 써오면서 투르크의 모든 것에 대한 호기심을 불어넣은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유럽인들은 가장무도회나 퍼레이드에서 투르크식 의상을 입었고 연극과 오페라에 트루크 출신의 등장인물도 나타났다. 투르크 음악을 흉내 내는 길거리 밴드가 비엔나의 길모퉁이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Boston에 있는 New England Conservatory of Music 대학의 교수이며 오스만 제국 음악 전문가인 Robert Labaree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문화 공유에 관한 완벽한 사례이다. 전쟁 중인 상대국의 문화도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의 삶에 기본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1699년에 오스만 제국과 유럽은 카를로비츠 조약(Treaty of Karlowitz)을 체결하여 투르크 전쟁이 끝나고 동유럽에서 영향권의 범위가 나뉜다. 오스만 제국은 이를 기리기 위해 메흐테르 군악대를 며칠 동안 Vienna로 보내 연주하게 한다. 그 후 수십 년간 서구의 수도에 임명되는 오스만 제국 사신은 메흐테르 밴드를 함께 데려갔다.

18세기에는 Turquerie 또는 터기열풍(Turkomania)이라 알려진 대로 유럽에서 투르크 문화가 크게 유행했다. 투르크 문화가 가미된 오페라 각본이 수십 편이나 쓰였다. 유럽인들은 투르크 가운을 입고 투르크 파이프로 투르크 담배를 피우며 투르크 커피를 마셨다. 투르크인인 등장인물과 투르크 식의 막간이 달리 관계가 없는 발레나 연극에서도 나타났다. 귀족들은 투르크식 의복을 입은 자신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방을 투르크 문양으로 장식하고 새롭게 번역된 천일야화(A Thousand and One Nights)를 열중해 읽었으나 이는 투르크 문화가 아니었다.

초기에는 투르크, 중동, 동양을 풍자하는 차원에서 메흐테르 소리를 따라 했다고 Labaree 박사는 말한다. 하지만 수십 년이 지나면서 타악기의 소리를 받아들여 서양의 군악대와 오케스트라 모두가 변하게되었다.

군악대가 맨 처음 메흐테르 타악기 소리를 받아들였다. 1720년에 술탄 아흐메드(Ahmed) 3세는 폴란드의 아우구스투스(Augustus) 2세에게 선물로 전체 메흐테르 군악대를 보내고, 폴란드 군대는 이후에 투르크 밴드 형식을 도입한다. 러시아의 앤(Anna) 여왕도 1725년에 오스만 제국에서 온 자신의 메흐테르 군악대를 가지게 되었으며 1739년 러시아와 투르크 간의 베오그라드 조약(Treaty of Belgrade)에서 서명할 때 연주하게 했다. 그 후로 오스트리아와 프랑스가 투르크의 군악대 음악을 받아들였다. 1700년대 후반쯤에는 유럽의 거의 모든 군악대가 베이스 드럼과 심벌즈를 연주했다. 유럽의 악단이 투르크 식의 타악기를 좋아했으나 투르크 식의 멜로디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럽 악단은 종이 달린 악기인 çevgan도 들여왔다. 영국인들은 이 악기를 “Jingling johnnies”라 불렀으며 독일인들은 벨 트리(Schellenbäume)라 불렀다. 이 악기는 군의 연대 또는 부대를 나타내게 되었고 1차 세계대전까지 일부 유럽 군악대에서 사용했다. 실제로 독일의 군악대는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초기에 유럽은 군악대를 위해 투르크의 음악인을 데려오고 자국의 음악인을 투르크로 보내 배우게 했다. 나중에는 흑인 음악인에 눈을 돌려 이들에게 이국적인 동양 옷을 입고 연주하게 했다.

국의 군악대도 자연스럽게 유럽의 방식을 따랐다. 그리고 행진하는 악대의 인기가 민간 및 학교 악대로 퍼지면서 메흐테르의 크래쉬 심벌즈와 베이스 드럼이 마을의 퍼레이드와 축구장에서도 행진하게 되었다.

메흐테르 음악은 오페라에서도 자리를 잡았다. 작곡가들은 투르크 관련 주제와 각본의 오페라를 수십 편이나 썼으며 모두 메흐테르 형식을 모방한 음악이 포함되었다. Nicolaus Strungk는 자신의 1680년 작인 Esther에서 투르크의 크래쉬 심벌즈를 오페라에서 처음으로 사용했다. 하지만 유럽 군악대가 투르크의 타악기를 도입하고 투르크열풍(Turkomania)이 한창이던 1760년이 돼서야 일명 Janissary(오스만투르크 보병) 군악대 곡을 공공연하게 연주하는 것이 예술로서의 음악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사진: mehmet sanlikol
공식 군악대의 역할은 전쟁터에서 연주하는 것 이상이었다. 특별한 날에 기도를 위한 신호를 보내고 도시 내에서 술탄을 수행했으며 국빈 방문객을 위한 공연도 했다. 위의 사진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기타 악단은 성지순례를 하는 순례자에게 또는 다른 종교 행사에서 종교 음악을 연주했다. 아래: 우레 같은 소리를 내는 Kös 드럼은 짝을 지어 낙타의 등에 장착하는 경우가 많았다.
john weston

Christoph W. Gluck의 1760년 오페라 Le Cadi Dupé에서 처음으로 베이스 드럼과 심벌즈를 함께 연주했다. 가장 유명한 투르크 오페라인 The Abduction From the Seraglio(후궁 탈주)의 작곡가인 모차르트는 서곡과 “March of the Janissaries(보병의 행진)”이란 곡에서 메흐테르 음악을 사용했다. 모차르트는 작곡하면서 “오페라에 군악대 음악을 넣어 그 효과를 망치지 않으면서 관악기에 맞춰 편곡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상상할 수 없을 걸세”라고 편지에 적었다.

유럽의 클래식 음악 작곡가들 또한 투르크 음악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해석한 Alla turca라는 멜로디 형식으로 곡을 쓰기 시작했다. Alla turca 음악은 꾸밈음과 일정하게 반복되는 운율(행진 때 사용하는 리듬인 “왼쪽, 왼쪽, 왼쪽 오른쪽 왼쪽" 포함)인 “Leaping thirds”, 반복되는 멜로디, 장조와 단조 사이를 자주 왔다갔다하는 등의 음악적 장식이 들어간다. 모차르트, 하이든, 베토벤의 작품에서 Alla turca 형식을 볼 수 있다.

투르크열풍(Turkomania)이 한창일 당시에 피아노 제조업체들은 베이스 드럼, 크래쉬 심벌즈, 종, 방울 등의 소리와 비슷한 효과를 내는 "Janissary” 또는 “Turkish” 장치라 불리는 페달을 장착했다. 피아노 연주자들은 모차르트의 가장 유명한 피아노곡인 Rondo Alla Turca(터키 행진곡)을 연주할 때 이것을 즐겨 사용했다.

베토벤이 교향곡 9번을 작곡한 1824년 즈음엔 한때 터키에서 들여온 이국적 수입품으로 여겨졌던 타악기가 서양의 클래식 오케스트라에 흡수되었다.

베토벤 교향곡 9번의 마지막 악장의 역시 "터키" 행진곡으로 알려진 alla marcia(행진곡풍) 부분은 테너 독창과 남성 합창단이 크래쉬 심벌즈와 트라이앵글로 이루어진 군악대 타악기 소리에 맞춰 전율을 느끼게 한다. Bowdoin College의 음대 교수이자 18세기 음악 전문가인 Mary Hunter 박사는 베토벤이 구체적으로 터키의 음악이나 일반적인 군악대 형식을 표현하려 했는지는 알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베토벤의 교향곡 9번 마지막 악장을 들어보면 메흐타르의 타악기 소리가 오케스트라와 얼마나 잘 조화를 이루었는지 알 수 있다. 곡은 일련의 화려한 크러쉬 심벌즈 소리와 함께 끝난다.

럽의 악단과 오케스트라에서 메흐테르 타악기를 도입하던 시기에 오히려 메흐테르 군악대는 사라지고 있었다. 1826년에 술탄 마무드(Mahmud) 2세는 Janissary 보병대를 해산시키고 메흐테르 군악대도 해체한 후 대신 이탈리아의 악단 대표 Giuseppi Donizetti를 고용했다. 그는 서양식의 새로운 군악대를 모델로 삼고 기존의 메흐테르 레퍼토리를 벗어나 메흐테르를 기반으로 한 서양의 행진곡 형식으로 대체했다. “따라서 터키를 떠나 서양에서 도입한 동양의 것이 터키로 돌아와 서양에서 동양으로 들여온 것이 되었다”고 Labaree 박사는 설명한다.

메흐테르 군악대는 사라졌지만 수 세기 동안 심벌즈를 공급했던 제조업자들은 아직도 건재한다. 이들은 유럽과 아메리카의 새로운 시장에 공급하기 시작했다. 한 회사가 특히 과도기를 잘 이용했다.

1600년대 초반 메르테르 군악대의 전성기에 아르메니아계 투르크인 금속 세공사 Avedis는 술탄의 궁에 거주하며 일했다. 가족에게 전해져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연금술사이기도 했다. 그가 청동 심벌즈를 더욱 강하고 얇게 만드는 방법을 알아내자 술탄은 그에게 zildji(심벌즈 제작자)라는 칭호를 주고 80개의 금화를 하사하며 메흐테르 군악대의 심벌즈를 만들라고 명령했다. 1623년 다음 술탄은 그를 정부의 일에서 풀어주었다. Avedis는 자신의 회사를 차리고 계속해서 메흐테르 군악대뿐만 아니라 아르메니아와 그리스 교회에도 심벌즈를 납품했다. 그가 청동 심벌즈를 가볍게 만드는 자신의 비법을 장남에게 전수하며 가문의 전통이 시작되었다.

메흐테르 군악대가 해체한 후 Zildjian Company는 서양의 군악대와 오케스트라의 수요에 맞춰 심벌즈를 만들었다. Avedis Zildjian 2세는 스쿠너를 제작해 유럽으로 건너가 국제 박람회에서 자사 제품을 선보였다. 그의 심벌즈는 파리, 런던, 비엔나, 볼로냐(Bologna), 시카고에서 상을 받았다.

맨 위: 사진: zildjian company,
아래: tom kates / zildjian company
맨 위: Avedis Zildjian이 1929년 터키에서 보스턴으로 본사를 옮겨와 그의 가족 가업의 본사가 된 공장 문 앞에 서있다. 터키에서 첫 번째 Avedis가 1600년대 초기에 술탄의 메흐테르 군악대 Zildji(심벌즈 제작자)였다.

위: 아직도 보스톤 남부에서 Craigie와 Debbie Zildjian이 14대 째 전 세계 심벌즈의 65퍼센트를 공급하는 Zildjian Company를 운영하고 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오스만 제국이 몰락하자 회사 소유주인 Aram Zildjian은 다음 세대에게 비법을 전수하기로 했다. 그는 매사추세츠 주로 이주해 사탕 공장을 운영하고 있던 조카인 Avedis 3세를 1929년에 방문했다. 그들은 보스턴 남부 Quincy에 심벌즈 공장을 세웠다. Zildjian의 공정 중에 새로 모양을 만든 청동을 찬물에 담그는 과정이 있어 근처에 바다가 있는 그곳이 제격이었다.

1929년은 대공황(Great Depression)이 일어나는 미국에서 회사를 차리기에 적합한 해가 아니었다. 그러나 Zildjian은 운이 좋았다. 바로 재즈와 스윙 음악의 인기를 기회로 삼을 수 있었다. 그의 선대 조상들이 메흐테르 음악인, 행진하는 악대 그다음은 오케스트라를 위한 심벌즈를 만들었듯이 Avedis 3세도 유명한 재즈 드러머를 찾아다녔다. Zildjian은 그들이 필요한 것을 알아내 그렇게 만들었다. 나중에는 빅밴드(Big Band) 시대에 맞게 심벌즈를 더욱 크게 만들었다. 비틀즈가 1964년 Ed Sullivan Show에 나왔을 때 Ringo Starr는 Zildjian 심벌즈를 사용했는데 그 후 회사에 9만여 개의 심벌즈 주문이 들어왔다.

오늘날 Zildjian은 세계 최고의 심벌즈 제조회사로 전체 시장에서 65%의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14대째 이어오며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가족기업으로 현재 CEO는 Craigie Zildjian이다.

In 2011년에 Zildjian은 현 경영진의 손자 세대인 Gen16이라는 이름으로 두 개의 혁신적인 사운드 옵션 제품을 내놓았다. Zildjian 사는 기존의 유명한 아치형에서 심벌즈 소리를 디지털화했으며 음량을 낮춰 연주하거나 몇 가지 사운드 옵션이 추가된 어쿠스틱 일렉트릭 심벌즈 라인을 새로 출시했다. “아버지는 우리가 음악을 따라가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는데 Gen 16으로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라고 Craigie Zildjian은 말한다.

반면 터키에서는 메흐타르의 부딪히고 울리는 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다. 이스탄불에 있는 터키 군사 박물관(Turkish Military Museum)에서 여행객들을 위해 전통 복장을 한 연주자들이 여행객을 위해서 메흐테르 군악대 공연을 정기적으로 펼치고 현대적인 군악대 공연도 한다. 원래의 메흐테르 레퍼토리를 찾겠다는 정신은 아직 터키에서는 없지만 보스턴에서 이미 시작됐다.

000년도에 당시 Boston의 New England Conservatory of Music 대학원생이었던 Mehmet Sanlıkol은 인터넷에서 다운로드한 메흐테르 음악을 친구들과 “Risk”게임을 할 때 스스로 자극받기 위해 크게 틀어놓았다. 그는 "컴퓨터에서 음악을 듣기 시작하자 그 음악을 이해하려 노력하면서 더 자주 듣게 되고 그럴수록 더욱 빠져들게 됐습니다. 주르나(zurna)와 드럼(davul) 소리가 머리에 남은 상태로 잠자리에 들었는데…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회상한다.

그렇게 메흐테르 음악과 만난 Sanlıkol은 전통 터키 음악을 진지하게 공부하게 됐습니다. 그는 주르나(Zurna)를 포함한 악기 연주를 배우기 시작했고 터키어, 아랍어, 이란어, 그리스어로 "세계"라는 뜻의 비영리 음악 단체인 Dünya를 만들어 오스만 제국 당시와 이후의 다양한 터키 곡을 연주한다. Dünya 프로젝트 중 하나는 Sanlıkol씨가 “정통한” 메흐테르 밴드라 부르는 것으로 New England Drum and Winds Mehterhane이다. 이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1826년 이전 레퍼토리를 연주하는 메흐테르 악단이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문화를 더욱 깊게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터키의 메흐테르 레퍼토리보다 상대적으로 새로운 음악이 더 많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수백만 명의 터키인들은 서구의 영향을 받은 행진곡이 최소한 천 년이 넘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 굉장히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그가 말한다.

julian calder / getty images
당시 오스만투르크 제국 왕실의 메흐테르 군악대보다는 훨씬 적은 수이긴 하지만 보스톤의 New England Drum and Winds Mehterhane은 1826년 이전의 메흐테르 음악을 연주하는 세계 유일의 합주단이다. 1826년은 역설적이게도 이전에 영향을 주었던 서양식의 행진곡이 투르크의 메흐테르 음악을 압도하기 시작한 해이다.

Sanlıkol은 자신의 책과 Dünya, 메흐테르 밴드를 통해 사람들이 언젠가는 메흐테르 음악의 가치를 인정하게 되길 바란다. Dünya의 최신 CD, A Story of the City: Constantinople, Istanbul은 2011년 그래미상 후보에 올랐다. 이 앨범은 오스만 제국 음악의 모든 것을 보여주며 옛날 메흐테르의 전투곡 중 하나인 “Çengi Harbi(전쟁의 심벌즈)”를 담고 있다.

“전 메흐테르 음악의 소리를 사랑합니다. 그것이 가진 힘도 사랑합니다"라고 자신의 모국 음악 전통을 공유하길 원하는 Sanlikol은 말한다. “메흐테르에 관해 자세히 알게 될수록 당시 오스만 제국 사회와 음악이 매우 다양하고 국제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Graham Chandler

Kay Hardy Cambell (www.kayhardycampbell.com)은 보스턴 근처에 살며 ‘ud를 연주하고 Mount Holyoke College에서 해마다 열리는 Arabic Music Retreat 행사 기획을 돕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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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팀


 

This article appeared on page 2 of the print edition of Saudi Aramco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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