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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공립 도서관 |
리틀 시리아(Little Syria)는 1916년 하퍼스(Harper's) 매거진 일러스트레이션에서 소개된 뉴욕 최대 식품 도매 시장 Washington Market에서 남쪽으로 세 블록 떨어진 곳에 있었다. |
"많은 언덕"을 의미하는 아메리칸 인디언 이름인 뉴욕 맨해튼 섬에 있는, 미국 초대 대통령 이름을 딴 lower Washington Street에는 한때 Sakakini, Khoury, Hawawiny 등 아랍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살았다. 이들의 절대다수는 오늘날의 레바논과 시리아에서 온 기독교 이민자였다. 이들은 1870년대에 별로 가파르지 않은 지형의 맨해튼보다 훨씬 더 높은 산에 있는 시리아 오토만(Ottoman) 지방을 떠나 이곳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주자들은 고향의 음식, 옷, 전통을 함께 가지고 왔다. 이들의 거주지는 리틀 시리아(Little Syria)로 알려졌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약 75년간 많은 아랍계 이민자들이 자유의 여신상이 보이는 이곳에 도착했다.
미국 자체가 그랬듯이 이곳 Washington Street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해갔다. 1940년대 후반 브루클린-배터리 터널의 착공과 함께 거리가 남쪽으로 갈라지면서 감소 추세였던 아랍 인구가 분산되었고 이 지역에 마지막으로 남은 아랍 식당이었던 Nile과 The Sheikh가 문을 닫았다. Lower Manhattan이 금융 회사가 밀집하고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고층 빌딩가로 바뀌는 사이 작은 상점과 도매점은 문을 닫았다. 공동 주택은 철거되었으며 한때 행상으로 생계를 유지했던 이 마을에 가장 아픈 상처였던 주차장이 마침내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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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NSOM CENTER, UNIVERSITY OF TEXAS(세부 내용 제공 아랍계 미국인 국립 박물관) |
그 후 2001년 9월 11일 북쪽으로 불과 몇 블록 떨어진 곳에 있던 세계무역센터가 파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최근 들어 아랍-미국 역사에서 이 지역의 역할이 새롭게 인식되고 있다. 이 지역에 이름을 준 시리아계 이민자 후손들은 리틀 시리아의 원래 모습이 사라지는 것에 대해 경고하기 시작했다. 2002년 뉴욕시 박물관에서 리틀 시리아에 대한 회의가 열렸으며 그 결과 <많은 세계로 이루어진 공동체: 뉴욕시의 아랍계 미국인>이 출판되었다. 미시간 주 디어본(Dearborn) 소재 아랍계 미국인 국립 박물관은 자체적으로 리틀 시리아에 대한 전시를 계획하고 있다. 그리고 1890년대 이 지역에서 활동을 시작했던 St. Joseph’s Maronite Church의 주춧돌이 세계무역센터의 폐허 속에서 발견됨으로써 역사적 재발견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작은 사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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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의회 도서관 |
위: Liberty Street 남쪽에서 Battery Place까지 Washington Street는 아랍 이민자들에게 소박한 거주지를 제공했으며 위의 이 식당에서는 고향의 향기가 난다. |
아랍 이민자들이 뉴욕에 몰려오게 된 최초의 계기는 1876년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Centennial Exposition이었다. 이 전시회에 많은 아랍 대표단이 참여했으며 이들은 고국으로 돌아가 미국에서의 새로운 기회에 열렬한 찬사를 보냈다. 1890년 미국 이민국은 레바논 출신의 Najib Arbeely를 고용해 이민자 수용 센터인 뉴욕 캐슬 가든(이후 Ellis Island)에서 레바논인들을 인솔하는 임무를 맡겼다. Abraham Rihbany는 1891년 자신의 미국 이주에 대한 회고록인 <A Far Journey>에서 "우리는 맨해튼 남단의 Battery Place에 도착해 부두에서 짐을 찾고... Washington Street의 숙소로 갔다."고 간결하게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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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의회 도서관 |
1900년대 초반 뉴욕 길거리의 손수레 음식 노점상은 종종 공장 근로자 임금의 두 배에 달하는 돈을 벌 수 있었다. |
이 지역은 그동안 역동적인 변화를 경험해왔다. 모든 사회 계층의 이민자들이 거주하고 생업에 종사하는 공간이었던 이곳은 미국 전역을 떠돌며 물건을 파는 아랍계 행상들에게 물건을 대주는 상점이 밀집한 거리로 서서히 변모해 갔으며 가게를 낼 형편이 못되었던 행상들은 비좁은 공동 주택에서 방을 세내어 생활하면서 멀게는 서부의 탄광촌까지 가서 물건을 팔고 돌아오곤 했다. 저명한 레바논-미국 역사학자 Philip Hitti는 자신의 첫 번째 저서 The Syrians in America(1924)에서 이렇게 기술했다. "장사하다 보면 먼 곳까지 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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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l Antoun 제공(3) |
위부터: 많은 재봉사, 건조식품 상인, 심지어 예능인들이 리틀 시리아 주변에서 새로운 틈새시장을 발견했다. |
1883년에 브루클린 다리, 1910년에 East River 지하 터널이 완공되고, 거주 환경이 더 좋은 외부 자치구의 접근성이 개선되면서 능력 있는 사람들은 맨해튼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족과 함께 이사했고 행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만 이곳에 남았다. 1935년까지 브루클린의 Atlantic Avenue는 "새로운 Washington Street"로 불렸다.
Washington Street에 거주한 아랍인의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는데, 이들이 도착 당시 "시리아인"으로 등록되었지만 나중에 인구 조사에서 "터키인"으로 분류되었던 것도 부분적인 이유였다. 1890년의 한 조사에서는 약 300가구로 추정했고, 1904년 한 신문은 총 1,300명으로 추정했다. 1899년에서 1907년 사이에 미국에 입국한 아랍 이민자는 총 41,404명이었으며 이후 3년간 15,000명이 추가로 입국했다. 그러나 나중에 도착한 사람 중에서 리틀 시리아에 정착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 중 한 사람이 Salom Rizk였다. 1925년 그는 조용한 시리아 마을에서 이곳으로 왔으나 이 지역을 한번 둘러본 후 아이오와 주 Sioux City로 가는 첫 기차표를 샀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뉴욕은 정말 압도적이었다. 모든 것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컸다. 수백만 명의 사람, 수백만 대의 자동차, 건물, 창문, 불빛, 소음이 한 덩어리가 되어 눈앞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그러나 남은 사람들은 리틀 시리아를 유명한 곳으로 만들었다. 1899년 이곳을 방문한 뉴욕타임스 기자는 많은 길거리 시장과 1895년에 지어진 Abrahim Sahadi 식료품 가게의 상품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알라딘의 동굴을 연상시키는 천장에 매달린 검과 램프, 색색의 유리 팔찌, "기구"를 갖춘 수연통에 대해 경탄하면서도 "나른한 눈이나 빨간 페즈 모자"를 발견하지 못해 실망하기도 했다.
Sahadi & Co.는 60년 전에 조카 한 명이 독립하여 아랍 고객을 대상으로 새 매장을 낸 후 지금까지도 브루클린의 Atlantic Avenue에서 건재하다. 현재 소유주인 Charlie Sahadi는 1967년까지 Washington Street에 남아 있던 종조부 Abrahim의 원래 가게를 기억하고 있다. 그는 "초창기부터 판매대에서 건과류와 견과류를 매우 다양한 고객에게 판매했었죠.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할바, 참깨 바, 살구 반죽을 만들었습니다."라고 말한다.
사업은 가족 모두가 참여하는 일이 되었다. Charlie의 아버지인 Wade는 1919년 레바논의 Zahle에서 도착한 후 Abrahim 밑에서 출장 영업을 담당했으며 미국 중서부행 기차를 타고 다니면서 도매 주문을 받았다. 레바논의 삼촌들은 아랍 요리사들이 모든 음식의 맛을 돋워 준다고 주장하는, 다른 곳에서는 구할 수 없는 양념류와 곡식, 놋쇠 쟁반, 커피 주전자, 절구와 절굿공이 등을 공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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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l Antoun 제공 |
언론에서는 리틀 시리아를 뉴욕의 가장 "이국적인" 이민자 마을로 소개하곤 했다. |
Arbeely 가족은 뉴욕 최초의 아랍어 신문 Kawkab Amrika(미국의 별)를 창간했으며 이후 Al-Hoda(지침)라는 이름의 또 다른 신문을 창간했는데 모두 Washington Street에서 인쇄되었다. Marian Sahadi Ciaccia(동명의 식료품 상점 가족과 관련 없음)는 아버지는 Jeita 마을에서 왔고 어머니는 레바논에서 서인도제도를 거쳐 이곳에 왔는데, 10대 시절에 Al-Hoda를 독자들에게 배달하던 일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학교가 끝난 다음에도 그 일 때문에 바빴죠. 배달할 때마다 5센트를 벌었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신문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아버지와 아랍어로 이야기를 나누었죠. 엄마는 아랍어를 잘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랍어는 우리의 비밀 언어 같았습니다."
아랍어를 읽을 수 없는 사람들은 영어로 된 Syrian World를 통해 지역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1926년 처음 발행된 이 신문에는 레바논 태생의 위대한 시인 칼릴 지브란의 문화적 동화를 권유하는 작품이 실리기도 했다. 지브란은 자신이 쓴 "시리아계 미국 청년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에서 랠프 월드 에머슨 및 헨리 제임스 같은 저명한 저자들을 언급했으나 당시 독자들에게는 너무 난해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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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renice Abbott / 연방 예술 프로젝트 / 뉴욕 공립 도서관 |
1930년대 중반 37 Wshington Street에는 빨래가 널려 있는 6층짜리 공동 주택이 상업 건물들 틈바구니에 홀로 남았다. |
아랍 이민자들은 미국에서 성공할 수 있었지만 문화적 장애물에 직면했다. 사회 개혁가 Jacob Riis는 1890년 뉴욕 공동 주택에서의 삶을 다룬 자신의 저서 <How the Other Half Lives>에서 이 불우한 사람들을 정형화하는 함정에 빠지고 만다. 집 없는 어린이를 다룬 장은, 지금은 인종 모욕이 되는 "거리의 아랍인"이란 제목을 달고 있다.
시리아계 미국인이자 Smithsonian Institution의 아랍-미국 역사 아카이브의 설립자인 Alixa Naff는 자신의 저서 <미국인 되기, 초기 아랍 이민자의 경험, 1880–1950>에서 1900년대의 행상은 연간 순이익이 1,000달러에 달했으며, 이는 공장 근로자 연 수입의 두 배에 달하는 돈이었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행상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1888년 12세의 나이에 리틀 시리아에 온 Ameen Rihani는 자신의 자전적 소설 <The Book of Khalid>에서 행상의 이점에 대해 "우리 동포, 상인이 지하실에서 썩어가는 동안 우리는 여행하면서 돈을 번다."라고 말했다.
Khalil Sakakini는 1908년에 뉴욕으로 이주했으며 회고록에서 그저 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초고속으로 움직여야 했던 경험에 대해 기록했다. "미국인들은 빨리 걷고 빨리 말하며 빨리 먹는다.... 어떤 사람은 입안에 음식을 넣고 씹지도 않은 채 식당을 떠나기도 한다."
그러나 Washington Street에서의 삶이 항상 두 배의 속도로 흘러갔던 것은 아니다. Times 기사에 따르면 "페즈 모자를 썼지만 다른 옷은 모두 미국인 같았던" 영어를 말하지 못하는 Arta라는 사람이 소유한 식당은 낮에는 커피 하우스였는데 이곳의 공기는 테이블 위 도미노의 찰칵거리는 소리, 파이프 담배 연기, 10센트에 팔렸던 "맛있었지만 프랑스 음식도, 독일 음식도 아니었던" 키베, laban과 가지 요리 냄새로 가득했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나중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오즈의 마법사"의 감독으로 잘 알려진 빅터 플레밍이 무성 영화로 만든 1919년 브로드웨이 연극 "Anna Ascends"의 배경이 되었다. 연극의 플롯은 커피 하우스에서 일하는 시리아 소녀 Anna를 중심으로 펼쳐지는데 그녀는 그 장소가 힌 갱단이 위장을 위해 내세운 표면상의 사업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마지막에 그녀는 미국 남편을 만나 행복하게 미국 문화에 동화된다. 1막은 Anna가 중동 이민자들의 특징인 화환처럼 동그랗게 만든 마늘 뭉치와 올리브유 캔을 바쁘게 정돈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허구 인물인 Anna가 커피를 팔았던 곳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1891년 세워져 이 지역 시리아 기독교인을 위한 교구로 활동했던 St. Joseph’s Maronite Church가 있었다. 1897년 Times의 결혼 소식란에는 팔레스타인 Jaffa 출신의 Miriam Azar가 Touma Elia와 결혼한다는 소식이 실렸다. 기사는 동양의 신비에 대한 흥분을 감추지 못한 어조로 교회 안에서 한 아기가 "아마도 순수한 아랍어"로 소리를 지르는 동안 "호기심을 자극하는 레이스 베일"에 감춰진 신부에 대해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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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ach Photo Service / MTA Bridges & Tunnels Special Archiv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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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D. Morrell / 브루클린 역사학회 |
1940년대에 Brooklyn-Battery Tunnel(맨 위)이 착공되고 리틀 시리아의 아래쪽 지역이 나뉘면서 오늘날까지 뉴욕 아랍계 미국인 커뮤니티의 중심으로 남아 있는 브루클린 Atlantic Avenue(위)로의 이주가 더욱 가속화되었다. |
아랍인들이 이 지역을 떠나면서 St. Joseph's 교회의 교구민 숫자도 줄어들었다. 교회는 매각되어 1984년 철거되었다. 교회의 벽돌은 대부분 세계무역센터 자리에 새로 들어서는 건축물을 짓는 데 사용되었다. Stephen Hector Doueihi 주교는 2002년 10월 브루클린 하이츠의 Our Lady of Lebanon Maronite Cathedral에서 수좌주교로 봉직 당시 전화를 받은 일을 기억하고 있다. 그라운드 제로(세계무역센터가 있던 자리)를 치우고 있던 불도저가 부서진 주춧돌 하나를 파냈는데 그 위에 새겨진 세 단어는 주춧돌이 마론파(주로 레바논에 거주하며, 동방 의식을 채용하고 있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일파) 교회의 것임을 시사하고 있었다. 주교의 성당은 이 사실을 알리고 싶었던 것일까?
주교는 이 일에 대해 "우리에게는 큰 놀라움이자 영광이었습니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한때 세계무역센터 근처에 우리의 소박한 교회가 있었지만 오래전에 철거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St. Joseph's 교회가 이전되면서 이미 몇 번 옮겨진, 라틴어가 새겨진 주춧돌이 그때 발견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이곳저곳 이동했던 많은 우리 교구민의 조상과도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137 Cedar Street의 St. Joseph's 교회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일어났다. 1889년에 지은 St. George's 시리아계 가톨릭 교구가 1925년 한때 하숙집, 아랍 식당, 최근 입국한 이민자들을 위한 대출 사무실, 시리아 Horns 지역민 출신의 가족 이름을 딴 H&J Homsy 의류 공장이 있었던 건물을 확장하여 103 Washington Street에 신고딕 양식의 교회로 다시 지어진 것이다. 베이루트에서 수학한 건축가 Harvey Farris Cassab이 교회의 테라코타 정면을 설계했다. New York Landmarks Commission은 6년간의 검토 후에 2009년 교회 건물(지금은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에 대해 완전한 보호를 받는 지위를 부여했다.
20살의 Carl Antoun은 1891년 Baskinta 마을에서 미국으로 건너오자마자 고향의 가족을 데려와 리틀 시리아에 정착한 후 실크 수입 사업을 시작한 Tanios Sadallah의 후손이다. "나는 퀸즈 자치구에서 자랐고 우리 가족이 원래 레바논에서 왔다는 사실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Antoun은 Washington Street를 걸어서 관광하는 투어를 이끌면서 말한다. "어느 날 할머니 집에서 아랍어로 적힌 오래된 사업 장부를 찾았는데 더 자세한 내용이 알고 싶었고 그래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이제 리틀 시리아에는 Antoun이 안내해줄 만한 옛날 건축물이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새 호텔 건물이 St. George’s의 한쪽에서 지어지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1925년 한 공제조합에 의해 지어진 커뮤니티 하우스와 더 오래된 공동 주택 건물이 무너져내릴 위험에 처해 있다. Antoun이 설립한 단체 Save Washington Street는 새 이민자들을 위한 성인 교육 학교와 진료소의 역할을 했던 커뮤니티 하우스를 보전하기 위한 로비를 펼치고 있다. 커뮤니티 하우스의 외부 구조는 식민지 재현(Colonial Revival)이라고 불리는 미국 스타일이 혼합된 양식으로서 영어 및 시민권 교육을 통한 문화적 동화를 상징했다.
언론인 Konrad Bercovici는 자신의 저서이자 뉴욕 내 모든 이민자 커뮤니티에 대한 연구 조사인 Around the World in New York에서 1920년 초반 리틀 시리아에서의 삶을 이렇게 묘사했다. "시리아 동네에 가 보면 꿈속에서 여행하는 것 같다." 커피 하우스, 보석 가게, 양탄자 가게, 심지어 "원산지와 용도를 알 수 없는 각종" 건뿌리와 과일 등 그곳의 모든 것들은 루마니아 이민자 출신의 Bercovici에게도 이국적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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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W. Dunlap / The New York Times / Redux |
103, 105-107 및 109 Washington Street에 있는 건축물이 오늘날 리틀 시리아에 남아 있는 전부다. 1891년 이곳에 정착한 고조부의 후손인 Carl Antoun은 남은 건축물들을 보전하기 위해 Save Washington Street를 설립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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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W. Dunlap / The New York Times / Redux |
그는 동네의 비좁은 공동 주택 건물 중에서 "100년 전 착한 네덜란드 시민"의 번창하는 집들이 있었다고 말한다. 시리아인들에게 그러한 집들은 "임시 텐트"에 불과했다고 그는 말한다. 외부인들이 일반적으로 그러하듯 그는 그들의 종교를 비판한다. 바닥에 앉는 것, 옷차림, 심지어 St. Joseph’s Maronite Church에서의 기독교 예배까지 모든 것이 그에게 "이슬람 방식"을 연상시켰다.
3년간 레반트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던 프린스턴 대학교의 종교학 교수 Lucius Hopkins Miller는 리틀 시리아에 대해 유일하게 객관적 설문 조사를 했다. 1904년 454가구 중에서 두 명으로 구성된 단 한 가구만이 이슬람교도였다. 그는 설문 조사를 통해 남성과 여성이 공장일에서처럼 행상일에도 거의 동등하게 참여했으며, 상점 계산대에서 근무하는 남성이 여성보다 더 많았고, 가내 재봉 작업에 종사하는 여성의 숫자가 남성보다 훨씬 더 많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Miller는 아랍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이주자 커뮤니티와 친숙했기 때문에 독특한 내부자의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 사회 개혁가 Jacob Riis는 이민자들의 주거 상태를 비난했지만 Miller는 아랍인들의 위생 상태가 다른 인종보다 더 우수했다는 지역 공동 주택 조사관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러나 Miller도 편견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못했다. 그는 행상일이 "과도한 상행위와 사기를 조장"한다고 말했다. 그는 동네 터키담배 공장이나 거울, 멜빵, 또는 여성 실내복 제조 공장에서의 일이 행상보다 더 낫다고 생각했다.
Bercovici는 리틀 시리아의 "카바(커피 하우스), 바자(시장), 벨리 댄스 홀, zaraf(대출 사무소), 아랍어 신문...." 등에 대해 과장해서 썼으며 주민에 대해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고 오래된 문명에서 온, 독특한 색으로 현대인의 팍팍한 삶을 물들이는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라고 묘사했다.
오늘날에도 새로 지어지고 있는 세계무역센터의 그늘에 가려진 이 지역은 귀 기울일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게 분명히 말하고 있다. 최초 이주민의 증손자인 Carl Antoun은 "이곳은 나에게 역사 수업과 같다.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많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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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l Antoun 제공 |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아랍 작가는 칼릴 지브란으로 1923년 그의 저서 <예언자>는 약 40개 언어로 번역되었고 1억 부가 인쇄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미국에서 최초로 출판된 아랍 소설의 저자는 지브란의 동포인 Ameen Rihani(1876–1940)로서 그의 저서 <The Book of Khalid>는 2011년에 출판 100주년을 맞았다.
예언자가 쉽게 읽을 수 있고 다소 평범하고 낭만적인 작품이라면 Rihani의 책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이 소설은 너무 어려워서 금방 절판되었고 최근 들어서야 다시 출판되었다. 촘촘한 플롯이 특징인 이 소설에서는 역오리엔탈리즘적인 영웅 전설이 미국과 중동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빅토리아 시대의 언어는 찰스 다우티의 <아라비아 사막의 여행>과 William Kinglake의 <Eothen>을 연상시키며 <돈키호테>와 볼테르의 <캉디드> 같은 반사회적 인물을 살짝 인용하는 <The Book of Khalid>는 현대 독자들에게는 어려운 도전이다. 그러나 이 책을 다 읽으면 풍부한 보상이 주어지는데 Rihani의 절친한 친구였던 지브란이 이 책에 삽화를 그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시인이자 문학사학자 Gregory Orfalea는 이 책에 대해 "유의어 사전에서 아무렇게나 뽑은 조잡한 단어를 사용하여 과장한" 책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월트 휘트먼이 <Leaves of Grass>에서 시도한 것처럼 책 안에 세상을 담으려는 시도를 찬양하면서 "이민자의 비현실적인 희망을 효과적으로 칭찬하면서도 동시에 비난하는 풍자적 지혜"라고 칭찬한다.
Rihani는 1888년 어린아이로 미국에 왔으며 Washington Street에 있는 아버지의 행상 물품 가게에서 4년간 일했다. 뉴욕의 풍경과 소리를 경험하고 베스트셀러와 연극배우를 접한 후 정규 교육에 목말랐던 그는 법률 학교에 입학했으나 곧 병에 걸렸고 회복하기 위해 레바논으로 돌아갔다. 돌아왔을 때 그는 자신의 기사와 10세기 철학자 Abu al-Ala al-Marri의 시 번역을 뉴욕 신문사 Al-Hoda에 기고할 준비가 돼 있었다. 이 신문사는 전 세계 아랍 저널리즘에 라이노타이프 인쇄를 도입한 곳이다.
선조가 살았던 산마을 Freike를 두 번째로 장기간 여행하는 동안 Rihani는 <The Book of Khalid>를 영어로 쓰기 시작했다. 이 책은 감수성이 예민한 청년이었던 자신이 뉴욕에서 겪은 많은 경험과 혼자 행동하는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자립정신, 합리적인 사고, 뛰어난 성취 등의 원칙을 기반으로 한다. 실제로 책 속에는 나중에 신생 국가 사우디아라비아의 외교관으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성인 Rihani, 영어와 아랍어로 책을 쓴 여행 작가, 그리고 파리와 뉴욕에서 활동한 다문화적 저술가로서의 자신의 모든 경험이 적절하게 묘사되어 있다.
아랍계 미국 문학자인 고 Evelyn Shakir는, 뉴욕의 지식인 사회에서 인정을 받기 위해 Rihani와 같은 아랍계 출신들은 미국 대중과의 소통을 신중하게 준비해야 했기 때문에 예언자, 설교자 또는 저술가의 모습을 해야 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렇게 한 목적은 <The Book of Khalid>의 한 등장인물의 말처럼 "동양의 대변인"이 되어 신비롭고 이국적인 동양의 영웅 전설과 사막 주민에 대해 서양인들이 가진 오리엔탈리즘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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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l Antoun 제공 |
이 책은 주인공 Khalid가 뉴욕에서 레바논, 다마스커스에서 이집트 사막으로 이동하고 수수께끼처럼 지구에서 사라지는 동안 성인 남자로 성장하기 위해 수행하는 일종의 "통과 의례"에 대한 이야기이다. <The Book of Khalid>는 세르반테스가 아랍인 원작자 Cide Hamete Benegeli의 텍스트에서 복제, 번역, 편집했다고 농담처럼 주장한 <돈키호테>와 상당히 유사한, "발견된 원고(found manuscript)"의 구조로 되어 있다. Rihani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책을 쓰기 위해 아랍어로 쓰인 Khalid의 자서전과 Khalid의 조수 Shakib이 프랑스어로 쓴 위인전을 참조했다고 주장했다.
일리노이 대학의 비교 문학 교수 Wa’il Hassan은, 고 Edward Said가 많은 오리엔탈리즘적인 고전 텍스트에서 사용한 것과 같은 모호하고 숨겨진 메시지가 <The Book of Khalid>에도 많이 있다고 말하지만 이 책은 아랍인이 쓴 것이다. Hassan은 Rihani가 유명 아랍 문학가의 이름을 친구처럼 코믹하게 들먹이고 아랍어와 영어 사이에서 언어유희를 즐기며 번역되지 않은 아랍어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데 주목한다. 그는 이 점에서 이 책이 아랍계 미국 소설보다는 "아랍화 된 영어 소설"에 더 가깝다고 말한다.
허기진 영혼의 소유자인 아랍계 뉴욕 이민자 Khalid는 예언자의 Jeremiah처럼 Jerry라는 이름의 예지력 있는 중고 책 판매인의 주문에 빠지지만, 천연두와 같은 어원에서 나온 단어인 mojadderah(렌즈콩과 곡물로 만든 레바논 음식)로 배를 채워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Rihani는 시리아에 해당하는 아랍어 단어의 동음이의어인 "sham"의 영어 의미를 사용해 유희를 즐긴다. Hassan은 Rihani가 두 언어와 문화를 모두 이해하는 독자, 즉 자신과 같은 독자를 위해 이 책을 썼다고 지적한다.
Rihani의 소설을 기념하기 위한 국제적인 활동인 Project Khalid의 집행 이사 Todd Fine은 이 책을 다시 출판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다. 소설 출판 100주년을 맞아 그는 미국 의회 도서관, 뉴욕 공립 도서관, 아랍계 미국인 국립 박물관에서 세미나를 열었다. 그의 노력에 힘입어 Random House는 이 책의 새 에디션을 배포했고 아랍계 미국인 하원 의원 두 명은 작가를 기념하기 위한 결의안을 도입했다.
Fine은 과거와 비교할 때 현재의 열정이 모순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과거 <문명의 충돌>을 쓴 고 새뮤얼 헌팅턴의 조수로 활동한 문화결정론자인 그가 지금 이 모든 것의 반대 입장에 선 아랍 작가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Rihani는 문화가 만날 때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준다."고 그는 말한다.
Rihani가 소설에서 이루어낸 동서양 간의 대화는 문명 합성을 위한 시도와 다름없다. <The Book of Khalid>의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아랍인들이 안달루시아에 대해 항상 말해온 것을 Khalid와 Shakib이 미국에 대해 말했다. 즉, 하나의 목소리를 가진 매우 아름다운 국가는 외국인들이 고국을 잊게 한다."
Rihani가 성공했을까? 100년이 지난 지금 사람들은 아직도 이 질문을 하고 있다.

감사 인사
편집진은 Elizabeth Barrett-Sullivan, Todd Fine, Carl Antoun의 큰 도움에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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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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