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 64, No. 52013년 9월/10월

In This Issue

2013년 10월은 가장 인기 있는 오페라 중 하나인 아이다를 만든 이탈리아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의 탄생 200주년 기념일이 있는 달이다. 고대 이집트를 배경으로 한 이 오페라는 이탈리아 베로나의 광대한 로마 원형극장에서, 이집트의 룩소르 신전 앞에서, 그리고 전 세계 각지의 크고 작은 오페라 극장에서 문자 그대로 수천 번 상연된 바 있다. 하지만 아이다의 성공 과정은 놀랄만큼 길고 복잡했다.

1863년부터 이집트를 통치한 케디브 이스마일은 1869년 수에즈 운하의 개통을 기념하는 축하 행사를 거창하게 열기로 마음먹었다. 실제로 천여 명의 공식 사절을 성대하게 대접하는 데 상당한 비용이 들었으며, 특히 가장 저명한 손님인 프랑스의 유제니 황후가 머물 게지라 궁전을 새로 짓는 데 막대한 비용을 투자했다. 또한 기념행사를 위해 카이로에 가스등으로 밝힌 거리, 조경된 정원, 카이로 최초의 오페라 극장 등을 갖추고 오스망 남작이 재개발한 파리와 비슷하게 완전히 새로운 구역을 세우는 데에도 엄청난 비용이 들어갔다. 하지만 케디브는 “내 나라는 더 이상 아프리카의 국가가 아니라 이제 유럽의 일부”이며 수에즈 운하가 세계 역사 또는 최소한 세계 무역의 흐름을 바꿀 것으로 생각했다.

BRIDGEMAN ART LIBRARY
수에즈 운하를 개통하고 카이로의 일부 구역을 새로 건설한 이집트의 케디브 이스마일 파샤는 "내 나라는 더 이상 아프리카의 국가가 아니라 이제 유럽의 일부"라고 말했다. 또한 밀라노의 유명한 라스칼라 극장을 본딴 오페라 극장에서 1869년에 주세페 베르디(맨 위)의 리골레토를 공연하며 고급문화의 전형을 구축했다. 그런 영광에도 불구하고 베르디는 처음에는 이스마일의 의뢰를 거절하고 나중에는 바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초연에 참석하지 못했다.

운하 개통식의 축하 행사는 가능한 한 최고로 화려해야 했다. 그렇다면, 작품들이 전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유명한 이탈리아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에게 개통식 기념 축하곡을 의뢰하는 것만큼 깊은 인상을 심어줄 수 있는 것이 또 있을까?

하지만 베르디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대답은 정중했지만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현재 진행 중인 작업이 많고, 저는 특정 행사를 위한 곡을 작곡하지 않기 때문에 유감스럽게도 이 영광을 거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1869년 11월 초에 이스마일은 진홍색, 흰색, 금색으로 장식한 새 오페라 극장에서 베르디의 가장 유명한 오페라 중 하나인 리골레토로 개관을 기념했다. 저명한 이탈리아 출연진과 61명의 라스칼라 극장 연주자와 더불어 베르디의 제자이자 친한 친구인 에마누엘레 무치오가 지휘를 맡은 리골레토 공연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오페라 극장도 마찬가지였다. 이스마일이 호화롭게 꾸민 극장 건물은 유제니 황후와 다른 군주들의 마음에 드는 듯했으며 이들은 거의 모든 공연에 참석했다. 금빛의 박스석과 반짝이는 샹들리에 등 누가 봐도 황후 또는 황제가 좋아할 만한 건물이었다. 이스마일도 마찬가지였다. 이스마일은 최초로 이집트의 영광을 노래하는 다른 누구도 아닌 위대한 베르디가 작곡한 대규모 오페라의 초연을 원했을 것이다.

예상과는 달리 이스마일의 소망은 곧 실현된다. 1871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케디브 오페라 하우스의 커튼이 올라가고 고대 이집트의 영광을 담은 놀라운 공연이 시작되었다. 이 시대의 가장 화려한 오페라인 아이다가 카이로에서 초연되었다.

BRIDGEMAN ART LIBRARY
고고학자이자 이집트 고대 유물 관리자인 어거스트 마리에트(위)가 쓴 에티오피아의 노예 소녀 이야기에 감명을 받은 베르디는 마음이 변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일일까? 단순히 찬양하는 노래는 쓰지 않는다던 베르디는 왜 갑자기 이집트에 대한 대규모 오페라를 작곡하기로 한 것일까?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이다에 베르디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바로 훌륭한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었다.

아이다는 포로가 된 아름다운 공주(주인공), 공주를 사랑하는 야심에 찬 군인 라다메스, 그리고 딸의 나라에 대한 사랑이 라마메스에 대한 사랑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아이다의 아버지 아모나스로 등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었다. 또한 힘은 가졌지만 라다메스의 사랑을 얻기 위해 아이다와 경쟁하며 질투심에 불탄 암네리스도 있다. 그리고 19세기 무대에 맞게 각색한 고대 이집트의 믿기 힘들 정도로 화려한 장관이 이 모든 것을 받쳐주고 있었다.

아이다의 탄생 과정을 완전히 이해하려면 이집트 왕이 만국 박람회의 이집트 전시를 위해 1867년에 파리를 방문했을 때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스마일은 1840년대에 파리에 있는 프랑스 참모대학에 다녔지만, 파리는 그때와는 아주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나폴레옹 3세의 명령에 따라 센 강 지역의 장관인 오스망 남작은 꾸불꾸불한 중세시대 골목길을 길고 곧은 대로로 바꾼 뒤에 가스등으로 밝히고, 주요 교차로에 멋진 건축물을 새로 지었다. 그 중 가장 아름답고 가장 큰 비용을 들인 건물은 기념비적인 오페라 가르니에일 것이다. 1867년에도 건축 중이었지만 사람들은 멋진 파사드를 볼 수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감탄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오페라 가르니에가 완공되기 전에 파리의 극장 애호가들은 친숙한 오페라 르 펠레티에로 모여들었다. 그 중 한 명이 이스마일이며 그는 8월 19일에 베르디의 새 오페라 돈 카를로스 공연에 갔다. 그날의 공연은 그에게 절대 잊을 수 없는 공연이었다. 베르디의 강렬한 음악이든, 호화로운 세트와 의상이든, 불운한 젊은 왕자에 대한 동정심이든 이스마일은 갑자기 오페라, 특히 베르디의 오페라 애호가가 되었다.

BRIDGEMAN ART LIBRARY
1870년 6월에 베르디와 극장 연출가인 카미유 뒤 로클은 프랑스어로 오페라 대본을 공동 집필했다. 4막 중 한 페이지의 여백에 베르디의 아내 쥬세피나가 적은 메모가 보인다.

이스마일이 카이로로 돌아왔을 때 그의 마음은 오스망 남작이 파리를 재창조한 것과 같이 카이로를 재창조하려는 계획으로 어지러웠다. 넓은 도로를 만들고, 새로운 구역인 이스마일리야와 구시가지의 이즈베키야 정원이 만나는 곳에 이집트 또는 중동 최초의 오페라 극장을 세우기로 했다.

이번에 파리에서 돌아온 이스마일에게 오페라 극장은 당시 문화의 상징과도 같았다. 오페라 극장이 있어야만 카이로가 유럽의 중심 도시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베르디의 오페라를 여러 번 초연했던 밀라노의 유명한 건축물인 라스칼라 극장과 비슷한 극장보다 좋은 것이 또 있을까?

이탈리아의 아보사니와 로시는 기꺼이 요청에 응했고 심지어 리골레토 공연 첫날에 맞춰 유제니 황후와 다른 사람들을 맞이할 수 있도록 시간 내에 건축을 완공했다. 예상대로 카이로 공연은 참석한 모든 사람을 만족시켰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 기뻐한 사람은 이스마일이었으며, 자신의 꿈인 이집트 오페라에 대한 의지가 더욱 강해졌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오페라를 만들려면 이야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재료가 거의 없었다.

이집트에서는 마리에트 베이라고 알려진 어거스트 마리에트는 작곡가도 아니고 극작가도 아니었다. 그는 고고학자로 명성을 쌓고 몇 년 뒤인 1858년에 이집트 고대 유물 관리자로 임명되었다. 약 35개의 발굴 작업 관리자, 유적물 보존 대변인, 이집트 고대 유물 박물관 관장이었던 그의 생각은 항상 고대 이집트의 영광스러운 시기의 영향을 받았다. 마리에트는 에티오피아의 노예 소녀와 이집트 공주 그리고 그 둘이 사랑한 이집트 장군에 관한 고대 이집트의 이야기를 썼다. 마리에트를 비롯한 많은 사람에게 아이다의 이야기는 이집트 왕이 그토록 원하는 이집트 오페라의 기본 바탕이 되기에 완벽했다.

마리에트가 1868년에 자신의 친구였던 프랑스인 오페라 대본 작가이자 연출가 카미유 뒤 로클을 이집트에서 안내했을 당시에 그 이야기를 보여주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확실한 것은 카미유 뒤 로클이 1869년 12월에 제네바에서 베르디를 방문했을 당시에 마리에트가 그 이야기를 오페라 형태로 각색하려는 계획이 뒤 로클에게 매우 중요했다는 것이다.

뒤 로클과 베르디가 함께 작업한 돈 카를로스가 대성공을 거두고 나서, 베르디와 새로운 오페라를 작업하길 원한 뒤 로클은 베르디에게 종종 가능한 주제를 보내 고려해 보도록 하곤 했다. 그 해 12월에 뒤 로클은 베르디에게 이집트 왕이 직접 의뢰한 고대 이집트를 배경으로 한 오페라를 제안했다. 하지만 베르디는 당시 다른 프로젝트를 작업 중이었으며, 그 오페라엔 관심이 없었다. 다음 해 3월 뒤 로클이 다시 그 이야기를 꺼냈을 때에도 베르디는 관심이 없었다.

카이로에서 리골레토를 공연한지 1년이 넘자 이스마일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새로운 국가적 오페라 작업을 시작해야 할 때였다. 그는 뒤 로클과 마리에트에게 더는 기다리지 말라고 지시했다. 베르디가 원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에게 작곡을 맡길 수도 있다고 생각한 그는 샤를 구노와 리하르트 바그너를 언급했다.

마리에트는 재빨리 뒤 로클에게 이 소식을 전하고, 베르디가 이 기회를 다른 작곡가에게 놓칠 것을 걱정한 뒤 로클은 마리에트에게 아이다 시나리오 사본을 달라고 요청했다. 마리에트는 23페이지에 달하는 제안서를 4부 인쇄하여 하나를 뒤 로클에게 보냈다. 뒤 로클은 그것을 5월 14일에 베르디에게 전달했다.

오페라의 배경이 고대 이집트라는 것 말고도 실제 시나리오는 강력한 인물들과 흥미로운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 이번엔 베르디의 마음이 움직였다.

베르디는 5월 26일에 뒤 로클에게 보낸 편지에서 “훌륭한 작품”이라며 이렇게 썼다. “구성이 멋지고, 아주 새롭지는 않더라도 매우 아름다운 상황이 두 세 개 있군. 그런데 누구의 작품인가? 글을 잘 쓰고 오페라도 아주 잘 아는 전문가의 솜씨가 보이는군.”

BRIDGEMAN ART LIBRARY
오페라 대본을 이탈리아어로 번역하기 위해 베르디는 안토니오 기슬란초니를 찾아갔다.

뒤 로클은 즉시 그 시나리오가 마리에트와 이집트 왕의 작품이라고 대답했다. (실제로 일부 장면은 뒤 로클이나 당시 이집트 왕이 고용한 이탈리아인 오페라 대본 작가인 테미스토클레 솔레라의 아이디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베르디가 매력을 느낀 것은 그것을 쓴 작가가 아니라 시나리오에 있는 드라마였다. 그리고 결국 6월 2일에 베르디는 뒤 로클에게 마리에트의 이집트 이야기는 매우 흥미로운 프로젝트라고 서신을 보내며 그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베르디는 사비로 오페라 대본을 완성하고, 배로 이동하는 것을 두려워했으므로 역시 사비로 그를 대신해 오페라를 지휘하고 감독할 사람을 카이로로 보내겠다고 했다. 악보와 오페라 대본이 완성되자 그는 사본을 이스마일에게 보냈다. 그러나 이집트를 제외한 전 세계 다른 나라에서 작품에 대한 권리를 유지하길 원했던 베르디는 이집트 내에서만 사용할 것을 요청했다. 마지막으로 베르디는 보수로 15만 프랑을 요구하며 카이로 초연 후에 이집트 이외의 오페라 극장에서 아이다를 상연할 권리를 조건으로 내세웠다.

10일 후에 뒤 로클은 마리에트로부터 전보를 받았다. 이집트 왕은 베르디의 조건을 수용하며 한 가지 조건을 요구했다. 오페라는 1871년 1월(6개월 후)까지 완성되어야 하며, 1871년 2월까지 케디브 오페라 하우스에서 초연할 준비가 되어야 했다.

6월 19일에 뒤 로클이 이탈리아의 산타가타에 있는 베르디의 집에 도착하여 며칠 간 두 사람은 뒤 로클의 모국어인 프랑스어로 시나리오를 구체화하는 작업을 했다. 하지만 아이다가 대부분의 이집트인에게 "이탈리아 오페라 극장"으로 알려진 곳에서 이탈리아인들에 의해 초연될 것이었으므로 이탈리아어로 된 오페라 대본이 필요했다. 따라서 6월 25일에 베르디는 악보 출판가이자 자신의 대리인이었던 줄리오 리코르디에게 서신을 보내 저명한 이탈리아 시인이자 오페라 대본 작가인 안토니오 기슬란초니가 프랑스어로 된 시나리오를 이탈리아어로 번역할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얼마 후에 기슬란초니, 리코르디, 베르디는 베르디의 집에서 만나 작업 범위를 정하고, 7월 중순에 기슬란초니가 베르디에게 아이다의 1막 대본을 보냈다.

베르디는 56세의 오페라 거장으로 자기 방식대로 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기슬란초니는 시인으로 서정적인 글을 쓰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전체적으로 이 둘의 다른 재능이 서로 보완해주었다. 하지만 베르디에게 극 진행 방법에 대한 확실한 아이디어가 있고, 시적 요소가 극적인 순간에 방해가 된다고 느낄 경우 즉시 그렇다고 말했다. 또한 베르디는 마음을 자주 바꿔 기슬란초니의 글도 수정해야 할 때가 많았다.

보통은 기슬란초니가 베르디의 수정 요구를 침착하게 들어주었다. 그는 베르디의 작업 방식을 이해하고 베르디의 의견을 존중했다. 하지만 라다메스가 아이다에게 "아니오, 당신은 죽지 않을 거요...당신은 너무 아름다워요"라고 하는 말은 아이다를 연기하는 소프라노가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 베르디 쪽에서는 수정하길 원했지만, 기슬란초니가 강력하게 반대해서 이번만은 시인의 의견대로 그 구절이 남게 되었다.

동시에 베르디는 이집트인들은 불멸을 믿었는가? 이시스 여신 또는 다른 신에 대한 여사제가 있었는가? 의식 무용 및 그 무용과 함께 하는 음악을 설명해주십시오...등등 마리에트에게 하는 질문을 뒤 로클에게 끊임없이 보냈다.

고대 이집트의 풍속과 관습에 대해 인정받는 전문가인 마리에트는 기꺼이 응답해주었다. 이집트 왕은 마리에트를 프랑스로 보내 파리 오페라 극장의 디자이너들이 제작 중인 의상, 보석, 소품 및 세트 등이 가능한 한 실제와 가깝고 화려한지 확인하게 했다.

마리에트는 뒤 로클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총독[즉, 케디브]이 원하는 것은 전적으로 고대 이집트의 오페라입니다. 세트는 역사적 기술을 바탕으로 하며, 의상은 상 이집트의 돋을새김에 따라 디자인합니다. 이 점에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으며 무대 구성은 최대한 화려해야 합니다. 총독이 화려한 스타일을 좋아하는 것을 아시죠.”

마리에트는 총독의 지시를 따르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1막에 기자 피라미드가 등장하고, 카르나크 신전도 다른 장면에서 등장한다. 마리에트는 의상을 상세하게 스케치하고 멋진 수채화로 마무리했다. 카이로의 디자인은 파리의 거장 디자이너들의 손에 맡겨져 고대 이집트의 영광보다 더 화려한 작품으로 태어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었다.

그 무렵 아무 조짐도 없이 모든 것이 바뀌었다. 1870년 7월 19일에 나폴레옹 3세는 프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파리 시민 대부분은 프랑스가 1~2주 안에 프러시아를 무너뜨릴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9월 1일에 프러시아는 스당 전투에서 프랑스를 물리쳤으며, 대부분의 프랑스 군대와 나폴레옹 황제를 포로로 잡았다. 9월 중순경에 프러시아는 베르사유에 도달했고 9월 20일에는 수도를 포위하고 봉쇄했다. 파리의 포위가 시작되었다.

잠깐 동안은 식품 및 다른 보급품과 더불어 프러시아가 모든 통신을 끊은 듯했지만, 프러시아는 파리 시민의 임기응변 기술을 생각하지 못했다. 9월 23일에 열기구 넵튠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프러시아인들 너머로 파리를 날아올라 125kg에 달하는 우편물을 싣고 에브뢰에 안전하게 착륙했다. 이 작전의 성공을 바탕으로 파리의 통신부 장관은 정기적인 열기구 서비스를 정착시켰으며, 그동안 뒤 로클이 베르디에게 보낸 메시지도 비교적 안정적으로 도착했다. 그러나 혹독한 포위 상태가 지속되면서 서신의 수는 줄고 서신 간격도 길어졌다.

반면 베르디의 대리인 리코르디가 산타가타로 보내는 서신은 점점 더 늘어났다.

베르디가 카이로 계약을 수락하고 얼마 후에 리코르디는 밀라노에서 아이다 공연 일정을 잡았다. 1871년 2월로 제안된 밀라노 공연일은 예정된 카이로 초연 날짜 뒤이므로 카이로 계약에 위배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11월이 되어 리코르디가 편지마다 언급했듯이 라스칼라 극장의 경영진이 초조해하고 있었다. 리코르디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포스터를 준비할 수 있을 것인가? 극장 측에서 기금을 요청할 수 있는가? 연주자들 고용은 어떻게 하는가?

BIBLIOTHEQUE NATIONALE / ROGER-VIOLLET / BRIDGMAN ART LIBRARY
“최대한 화려하게”라고 마리에트는 지시했다. 초연에서 2막에 등장한 마리에트의 카르나크 신전 세트는 나중에 다른 회사들이 위의 사진과 같이 도입하고 재해석했다.

베르디와 리코르디 모두 질문에 대한 답은 세트와 의상이 포위된 파리를 떠날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려있다는 것을 알았다. 떠날 수 없다면 카이로 초연을 연기해야 하고 밀라노 공연도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11월 말이 다가오자 오랫동안 기다렸던 뒤 로클의 메시지가 열기구를 타고 마침내 도착했다.

뒤 로클은 이렇게 적었다.“마리에트도 나처럼 파리에 갇혀있네. 아이다의 모든 작업은 일할 사람이 부족해서 중단되었네. 지금 우리가 파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지키는 것뿐이네.”

뒤 로클의 메시지가 도착하자마자 베르디는 카이로 오페라 극장의 관리자인 폴 드라네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그는 불만이 많았다. 베르디와 마찬가지로 그도 얼마 전에 의상과 세트가 예정된 초연 일정에 맞춰 카이로에 도착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며, 베르디가 2월에 라스칼라 극장에서 아이다를 공연할 계획이라고 들었다. 그는 베르디가 카이로가 아닌 밀라노에서 아이다 초연을 계획하는 것인지 물었다.

드라네는 계약 조건을 상기시키지는 않았지만, 아이다가 카이로가 아닌 다른 곳에서 초연되면 케디브에게 “…엄청난 고통을 줄 것”이라고 입장을 분명하게 밝혔다.

베르디는 재빨리 드라네에게 라스칼라 극장은 이미 아이다에 대한 준비를 중단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면서도 라스칼라 극장은 그래도 다음 해에 공연할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다행히도 1871년 1월에 파리의 포위가 해제되었다. 즉시 의상과 무대를 배로 실어 카이로로 보내고, 1871년 9월에 베르디는 제네바에서 드라네를 만나 카이로 오페라 극장 지휘자의 손에 완성된 악보를 넘겨주었다.

수개월의 작업과 걱정 끝에 이스마일이 아끼는 국가적 오페라를 위한 최종 준비작업이 마지막 단계에 있는 듯했다.

STAPLETON COLLECTION / BRIDGEMAN ART LIBRARY
사진의 악보는 1938년에 출판되었다.

한 가지 문제만이 남았다. 카이로 초연이 무기한 연기되면서 연기자 상당수가 다른 작품을 맡아 드라네와 베르디는 짧은 시간 내에 그들을 대체할 사람을 찾아야 했다. 다행히도 두 사람은 새로운 주요 연기자 대부분에 대해 의견이 일치했으며 베르디는 재능 있는 안토니에타 포초니가 아이다 역할을 수락하여 매우 기뻤다. 하지만 암네리스 역은 달랐다. 젊은 지휘자 프랑코 파치오가 거의 알려지지 않은 배우인 엘레오노라 그로시가 암네리스 역할을 잘 소화할 것이라고 베르디를 확신시킨 후에야 베르디가 동의하여 드라네는 안도할 수 있었다.

마리에트도 문제가 있었다. 드라네에게 보낸 서신에서 “[연기자는] 반드시 턱수염이나 콧수염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집트인들은 종교뿐만 아니라 관습으로도 수염을 기르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배우의 자만심이 공연의 본모습을 망칠까 걱정이 되어 “콧수염과 턱수염을 기른 파라오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다.

드라네는 재빨리 연기자들이 모든 면에서 이집트인처럼 보이게 할 것이라고 마리에트를 안심시켰지만, 초연 전날 밤에 거대한 아이다 세트를 움직이는 기계 장치에 문제가 발생하자 그도 걱정되었다.

그러나 초연 당일엔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

바다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의지가 없는 베르디는 그 자리에 없었지만 이스마일은 참석했다. 드레스 리허설 때 오페라 전체를 감상했음에도 커튼이 올라가고 자신이 상상했던 것보다 아름다운 고대 이집트의 모습이 나타나자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흥분되었다.

늠름한 라다메스 장군은 순은으로 만든 방패를 들고, 복수심에 불타는 암네리스는 실제 금과 원석으로 장식한 왕관을 썼다. 기자 피라미드와 카르나크 신전은 집념이 강한 공주의 질투로 인해 두 연인이 죽음을 맞이하는 내용의 배경으로 완벽했다. 무엇보다 라다메스가 에티오피아 공주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생각하며 부르는 서정적인 “Celeste Aida(청아한 아이다)”, 아이다가 신에게 고통을 덜어달라고 애원하는 내용의 “Numi, pietà del mio soffrir(하늘이여 돌보소서)”, 두 사람이 서로의 팔에 안겨 죽어가며 함께 부르는 “O terra, addio(이 땅이여 안녕)” 등 음악이 훌륭했다.

몇 주 전부터 매진사례를 일으킨 관객들은 베르디의 강렬한 음악과 함께 아이다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한 장면씩 감상하며 밤늦게 마지막 커튼이 내려오면서 암네리스는 위의 신전에서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고, 아이다와 라다메스가 서로에게 안겨 죽어가는 모습이 안 보일 때까지 넋을 잃고 앉아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갑자기 박수갈채가 시작되었다. 관객들이 거의 동시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며 "브라보, 브라보"라고 외치고, 총독의 자리로 고개를 돌려 “총독 만세”를 계속해서 외쳤다.

이스마일도 천천히 일어나 관객에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기쁨에 넘친 그의 얼굴에서 그가 느낀 막대한 안도감이 나타났다. 이스마일이 그렇게도 원했던 고대 이집트를 배경으로 한 오페라는 대단한 성공이었다.

STAPLETON COLLECTION / BRIDGEMAN ART LIBRARY
“세트는 역사적 기술을 바탕으로 하며, 의상은 상 이집트의 돋을새김에 따라 디자인합니다. 이 점에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습니다”라고 마리에트가 편지에 적었다. 그는 초연에서 모든 주요 인물의 의상을 자세하게 스케치했다.

그 성공은 얼마 후에 재연되었다. 1872년 2월 8일에 라스칼라 극장에서 아이다가 개막했다. 베르디도 참석하여 끝없는 환호와 32번의 커튼콜을 즐겼다. 4월 20일에 베르디는 파르마에서 아이다의 지휘를 맡았으며 나폴리에서도 지휘했다. 1878년까지 아이다는 부에노스아이레스부터 빈까지 전 세계 130개 이상의 오페라 극장의 무대에 올랐다.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오페라 극장에서 자주 상연하는 작품 중 하나이다.

한 비평가는 “아이다는 단 하나의 음도 삭제할 수 없는 유일한 그랜드 오페라”라고 평했다.

그러나 베르디의 생각은 달랐다. “시간이 아이다에게 걸맞는 위치를 부여해 줄 것”이라고 베르디는 말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제인 월드런 그럿츠(waldrongrutz@gmail.com)는 전직 Saudi Aramco 전속작가이며 지금은 중동에서 고대 유물 발굴 작업을 하지 않을 때 휴스턴과 런던을 오가며 지낸다. 어디서든 베르디의 멋진 음악을 감상하거나, 가능하면 베르디가 가장 아끼는 작품 중 하나인 이집트 오페라 아이다 공연을 보러 간다.


 

This article appeared on page 10 of the print edition of Saudi Aramco World.

Check the Public Affairs Digital Image Archive for 2013년 9월/10월 imag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