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 64, No. 52013년 9월/10월

In This Issue

인도에서 가장 큰 섬이지만, 일 년 중 대부분은 섬의 북동쪽이 넓은 염전을 사이에 두고 본토와 닿아 있다. 염전의 이름인 ranns(란)은 “황무지”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에서 나온 말이다. 대략 7월부터 10월까지 이어지는 우기에는 허리까지 물이 찰 정도로 자주 잠긴다.

쿠치 탐사 동영상은 위를 클릭하세요.

1947년 인도가 독립하고 1년 동안 지금은 구자라트 주에 속하는 쿠치는 독자적으로 자체 화폐인 코리를 사용했고, 군주 마하라자가 통치했으며, 인도의 수도 델리보다 30분 빠른 자체 시간대를 유지했다. 쿠치는 그 지역에서 거북이를 뜻하는 말인 카추아에서 따온 이름이며, 아라비아해에서 거북이가 뒤집혀 떠 있는 모양과 닮았다. 육로를 통한 인도 내륙과의 거리보다 동아프리카 및 아랍의 항구들과 더 가깝게 이어주는 바다가 쿠치의 역사를 가장 잘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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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Wells가 이 글에 언급된 장소를 찍은 동영상으로 쿠치의 소리와 공간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위의 지도에서 원하는 곳을 찾거나 아래의 링크 중에서 클릭하세요. 지도 크게 보기
  1. 인도 야생 당나귀 보호구역
  2. 바달리 – 공예품
  3. 바달리 – 마을
  4. 부지 – 아이나 마할(거울 궁전)
  5. 부지 – 프라그 마할
  6. 부지 – 직조물
  7. 부지 – 도시
  8. 부지 – 오래된 도시 성벽
  9. 목판 인쇄
  1. 공예품 프로모션 재단(Crafts promotion foundation)
  2. 길가 상점에서 판매하는 공예품
  3. 길가 상점에서 판매하는 공예품
  4. 촬영 중인 사진가 David Wells
  5. 다네티 – 자수 작품
  6. 아이라크푸르 – 이스마일 카트리
  1. 부지 – 하미르사르 호수
  2. 칼라 라샤(예술 보존)
  3. 쿠치(Kutch)의 기원은 무엇인가?
  4. 라크파트 요새
  5. 부지 – 마하라자 프라그말지
  6. 만드비 – 선대 목공 이브라힘 미스티
  1. 만드비 – 비제이 빌라스 궁전
  2. 만드비 – 나무 보트 만들기
  3. 만드비 – 항구와 도시
  4. 소금 제조
  5. 천일염 제조
  6. 슈르잔 공예품

지난 60년 동안 쿠치는 구자라트에 점차적으로 통합되었지만, 특히 인도와 유라시아의 지각판들이 천천히 움직이며 지속적으로 충돌하고 있는 활발한 지진대라는 특이한 지질학적 특성 때문에 여전히 별개의 지역으로 간주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고립된 지역의 동식물 군에 대해 고유의 진화적 경로를 가정하는 섬 생물다양성 이론과 문화적으로 유사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쿠치의 이런 다양성은 각기 다른 극락조의 화려한 깃털처럼 독특한 소수민족(라바리, 아히르, 자트 등) 의상의 다양한 자수와 염색 방식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

The Black Hills: Kutch in History and Legend(검은 언덕: 쿠치의 역사와 전설)의 저자인 L. F. 러쉬브룩 윌리엄스는 쿠치를 “끊임없는 침입, 여러 문화의 통합 등 기록된 것은 거의 없지만 놀라울 정도로 풍부한 역사를 간직한 인도 이야기의 축약본”과 같은 “신기한 반(半) 섬 국가”라고 표현했다. 1880년에 출간된 영국령 인도의 안내서인 Gazetteer of the Bombay Presidency(봄베이 관구 지명 사전)에서는 쿠치의 “민족적 특징”이 영국 정부의 그 어떤 식민지배 국가보다도 뚜렷하다고 언급했다.

이 지역의 분리는 18세기 두 남성의 전설적인 삶을 상징한다. 이 두 사람은 오늘날에도 많은 존경을 받으며 한때는 쿠치를 오가는 여행객들의 수호신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메카란 다다와 그의 강아지 모티아 그리고 당나귀 랄리아는 그레이트 란 지역의 소금 습지에 고립된 사람들을 구했다고 전해진다. 옛날에 스위스의 수도사들과 그들이 키우는 강아지들이 그레이트 세인트 버나드 고개에서 눈에 갇힌 여행객들을 구출한 이야기와 비슷하다. 남쪽으로 바다를 향해 더 가면 육지에 둘러싸인 중앙아시아에서 쿠치에 왔던 무라드 샤 알보카리가 문드라 항구에 묻혀있다. 그는 아라비아해를 건너는 선원들을 보호했다고 전해진다.

구자라트 동부에서 쿠치에 오려면 인도 야생 당나귀(khur)의 서식지인 쿠치만의 윗부분에 있는 리틀 란의 다리를 건너야 한다. 인도 야생 당나귀의 사촌격인 관련 변종은 몽골, 투르크메니스탄, 페르시아, 티베트에 있으며 이 중 일부는 세계자연보전연맹이 출간한 멸종 위기종 목록에 속해 있다. 5,000 제곱 킬로미터에 달하는 리틀 란의 야생 당나귀 보호구역과 그 주변에 4천여 마리의 인도 야생 당나귀가 서식하고 있다.

무굴제국 황제 자한기르(1569–1627)는 회고록에서 야생 당나귀를 사냥하고 먹은 이야기와 관련해 “대부분의 사람이 즐겨 먹지만 내 성향과는 맞지 않는다”고 밝혔다. 19세기의 한 영국 여성은 인도인들이 짐마차를 끌 목적으로 당나귀를 훈련시켰다는 헤로도토스의 의심스러운 설명 때문에 야생 당나귀 새끼를 올가미 밧줄로 잡을 수는 있지만 한 마리도 길들이지 못했다고 말했다. 오늘날 야생 당나귀들은 다가가기가 매우 쉬워 사냥은 비신사적이라고 할 수 있다.

야생 당나귀가 있는 곳이면 우기에 범람한 물이 마른 가을에 리틀 란에 와 손으로 직접 파낸 증발접시로 지하수를 퍼내는 4만 명의 염전 노동자들을 자주 볼 수 있다. 거친 태양이 염수를 말리면 마침내 염정이 나타난다. 염정은 1930년에 모한다스 간디가 영국이 소금을 독점하여 세금을 부과한 것에 항의하기 위해 구자라트의 수도인 아메다바드에서 바다로 행진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주요 산물이다. 리틀 란에서 인도 소금의 절반 가까이 생산하기 때문에 쿠치와 그 주변 지역이 모든 인도 가정의 식탁에 영향을 준다고 할 수 있다.

리틀 란과 그레이트 란 전역에 사람이 거주하는 섬(bets)들이 염전 바닥 위로 점점이 솟아 있다. 이 섬들은 “쿠치 본토”에선 단순히 “연안”이며, 쿠치 본토의 중심은 부지(Bhuj)로 1549년에 왕실이 권력의 중심으로 선정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부지의 중심부는 왕실 구역이며, 2001년 진도 7.9의 지진 발생 후에 세계 유적 기금의 위험에 처한 유산 목록에 올라 있다.

18세기에 지은 아이나 마할(거울 궁전)의 중앙에 있는 방은 바닥에서 천장까지 반사되는 유리와 금박을 입힌 회반죽 및 델프트 타일로 덮여 있다. 타일은 아프리카 해변에서 난파되어 본국으로 돌아가던 네덜란드 배에 의해 구조된 쿠치의 선원 람싱 말람이 네덜란드에서 들여온 것이다. 그는 네덜란드에서 유럽의 장식 예술을 배우고 쿠치로 돌아와 마하라자의 개인 건축사가 되었다.

이 방의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상아를 박아 넣어 장식한 문이며,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에서 몇 년 전에 런던 전시를 위해 대여 요청을 하기도 했다. 그 옆엔 한 가문이 오랫동안 통치한 것의 중요성을 언급하며 박물관의 요청을 거절하는 마하라자의 비서가 작성한 편지가 전시되어 있다. 편지에서는 “아시다시피 우리 왕조는 튜더 가문이 시작된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설명하며, 쿠치의 왕조가 헨리 8세보다 훨씬 앞선 400년 전에 시작되어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뻐기듯 상기시켜 주었다.

77세의 마하라자 프라그말지 3세는 19대손이다. 현재 그에 대한 칭호는 이름뿐이며, 쿠치가 1948년 인도연방에 합류하면서 가문의 지배권을 넘겨주었다.

구자라트 동부를 갈라놓았던 2002년의 종교 분쟁 당시에 그는 쿠치 지역이 휘말리지 않도록 노력했다. 궁의 정원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전화기를 자주 사용하지 않지만, 지역 전체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연락하여 그들이 문제를 막아내도록 그날 하루에 평생 전화통화한 것보다 많은 통화를 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에게 우리는 모두 쿠치 사람들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육로로 [구자라트의 수도인] 아메다바드까지 가는 거리보다 바다 건너 신드[파키스탄]가 쿠치와 더 가깝다”며, “배로 쉽게 갈 수 있었기 때문에 아라비아는 언제나 쿠치의 최고 무역 파트너”였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마하라자는 두 가지 육로 이동 수단을 높이 평가한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혈통이 끊겼지만, 아라비아와 인도 조랑말을 이종 교배한 것으로 유명한 “캐티워”와 비슷한 지역 품종 말과 다른 하나는 뜻밖에도 미국산 수입 자동차였다. 마하라자가 말에 올라탄 모습과 그가 아끼는 코르벳과 스튜드베이커의 운전대를 잡고 있는 모습의 사진이 궁전 벽에 걸려 있다.

쿠치는 오늘날 인도의 직물 관광 코스로 자리잡고 있으며, 이는 산스크리트어로 "창조성"을 뜻하는 슈르잔 재단의 공이 크다. 챤다 스로프는 긴 가뭄이 들어 그녀가 알던 마을 여성들이 음식을 구하기 위해 훌륭한 솜씨로 수놓은 원단을 팔 수밖에 없던 시기인 1968년에 슈르잔 재단을 설립했다.

2006년 롤렉스 어워드 문화유산 사업 부문 수상자인 스로프는 “여성들이 절망적인 상황이었다”며 “이미 보석과 심지어 가축까지 모두 팔고 가치 있는 자수 작품이 마지막으로 남은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녀는 여성들이 집안에 내려오는 작품을 뭄바이에서 좋은 가격에 팔도록 도와주었지만, 시장에 팔 상품을 만드는 일을 돕는 것이 낫다고 마음을 먹었다. 현재 120개 마을에서 운영 중인 슈르잔 재단은 1천 개의 자수 패널을 갖춘 “패턴 라이브러리”를 중심으로 생산 팀을 구성하여 여성들에게 꾸준한 수입을 제공하도록 직물 산업을 촉진한다. 각 패널은 다양한 기술, 민족별 디자인 또는 재료를 나타내며, 우수한 수공예가 잊혀질 위험이 있는 마을로 재단 버스가 방문할 때 교육 자료로도 사용된다.

지역에서 철저히 남성들의 영역인 전통 직물은 ajrakh(아이라크)이며 블록 프린트와 방염을 거친 천으로 숄과 터번에 사용된다. 이 말은 주로 남색을 많이 사용하여 파란색을 뜻하는 아랍어 azraq(아즈라크)에서 파생되었다. 영국 드몽포르 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이스마일 모흐메드 카트리 박사의 조상이 1634년에 지역 공예를 육성하기 원했던 제3대 마하라자의 초청으로 신드에서 온 이후 11세대가 지났다. 마하라자는 특히 직물 염색이 불순물을 용납하지 않고 많은 물이 필요한 작업이기 때문에 최고 품질의 지하수가 있는 땅을 선택하게 해주었다.

2001년에 발생한 지진 후에 우물물에 용존 철의 양이 증가하여 가족은 이름도 비슷한 아이라크푸르라는 마을로 이동했다. 이 가족이 모여 사는 곳을 방문하면 나무 블록을 사용한 양면 인쇄 및 낙타 배설물, 소다회, 피마자유 혼합물에 미리 담그는 작업부터 고무와 수숫가루로 방염 물질 반죽을 혼합하고, 다양한 자연물질로 만든 2차 염료(노란색-심황, 갈색-루바브, 주황색-석류 껍질, 빨간색-꼭두서니 뿌리, 검은색-고철, 병아리콩 가루 및 사탕수수 당밀 끓인 물)를 섞는 작업 등 직물을 생산하는 20여 가지 단계를 볼 수 있다.

쿠치에서 만든 500년 이상 된 아이라크의 작은 조각이 카이로 최초의 이슬람 정착지인 푸스타트에서 발견되었다. 1,200여 개의 조각이 있는 가장 큰 컬렉션은 영국 옥스퍼드의 애슈몰린 박물관에 있다. 그 박물관 관장들은 소장품에 개조 및 수선 자국이 많은 것은 아이라크가 고급 제품이 아닌 실용적인 옷의 원단이었으며, 색이 바래지 않는 우수한 품질의 염료와 정교한 디자인으로 봤을 때 이집트에서 많이 애용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한다.

아이라크 조각들은 20세기 초에 발견되었으며 이집트의 골동품 상인들이 판매했다. 이 조각들은 고대 인더스 계곡의 하라파 및 모헨조다로와 쿠치에 속한 돌라비라의 비슷한 모티브와 비교한 결과 인도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판명되었다. 쿠치의 염색공들이 아랍의 동전 이름을 따 riyal(리얄)이라고 부른 둥근 무늬와 같이 많은 디자인이 중동에 판매할 목적으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스마일 카트리 가족을 아이라크푸르로 이주하게 한 지진으로 약 2만 명이 사망하고 지역의 많은 부분이 황폐해졌다. 특히 1,200명의 힌두교인, 이슬람교인, 자이나교인이 살던 바달리 마을이 큰 피해를 당하여 총 325개의 가옥 중에서 85%가 무너졌다. 뭄바이 건축 팀의 지도 아래 마을 사람들은 적은 비용으로 지을 수 있는 세 가지 방식의 모듈식 주택을 디자인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최근 방문에서 마을의 지도자로 직물 염색하는 가족의 우두머리인 우마르 파루크와 자이나교도인 라빈 라캄샤가 지역 힌두교 사원의 여성 성직자이자 위원회 회장인 죠티벤 가우스와미와 동행했다. 한 방문객은 자기 마을이 왜 아가 칸 건축상(Aga Khan Award for Architecture) 후보지로 추천되었으며, 전 세계 각지에서 프로젝트를 후원하는 사회 경제 환경 디자인 네트워크와 국제건축가협회(UIA)로부터 찬사를 들었는지 궁금해했다.

가우스와미는 “기금이나 재료를 사용하는 것과 관련해 한 번도 다툼을 벌인 적이 없다”며 “항상 함께 서로 도와가며 작업하다 보니 주변 마을보다 먼저 마을을 재건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바달리의 사원과 모스크 둘 다 수리 과정에서 각기 다른 종교 공동체의 도움을 받았다는 점이 협동 정신을 보여준다.

쿠치에서 1819년의 지진으로 심한 피해를 당한 라크파트는 파키스탄 국경을 마주 보고 있는 코리만의 갯벌에 닿아 있는 항구 마을이다. 지진의 명칭은 100km 길이에 6m 높이로 단층을 따라 모래와 진흙으로 쌓은 벽에 따라 알라 분드(“신의 댐”)라고 지었다. 약 500km 떨어진 아메다바드에서는 지진으로 주 모스크의 뾰족탑이 쓰러지고, 기차역 바로 뒤에 있는 시디 바쉬르 모스크의 첨탑은 기차가 큰 소리를 내며 지나갈 때보다 심하게 흔들렸다.

라크파트는 한때 쿠치의 해상 무역에서 중요한 세금 징수 항구였다. 하지만 1819년의 지진으로 항구가 폐쇄되고, 인구도 감소하여 지금은 몇 명의 어부만이 거주한다. 그중 한 명인 라자크 누르 무함마드(22세)는 집에서 가오리에 물린 발을 치료하고 있다. 시크교의 창시자로서 메카로 가는 도중에 라크파트에서 쉬었다고 전해지는 그루 나나크(1469–1539)를 기리기 위해 들른 시크교 순례자 무리도 있다.

인도 국경수비대의 군인들은 매일 라크파트 요새의 만 쪽에 있는 탑에 올라 북쪽 지평선을 감시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배를 타거나 걸어서 습지를 건너 35km 떨어진 파키스탄 국경 경계표에서 기록부에 서명한다. 반대편에 있는 요새의 주요 출입구에 있는 오래된 나무문에 쇠로 된 날카로운 돌출 장식이 비스듬히 박혀 있다. 인도 군대는 육로로 이동하는 침입이 두렵지 않은 모양이다.

쿠치엔 세상이 뱀의 머리 위에 건설되고 뱀의 꼬리가 단단하게 고정되지 않아 뱀이 몸부림칠 때마다 땅이 흔들린다는 전설이 있다. 쿠치 지역의 지진에 대해 최고 전문가인 M. G. 타카르 교수는 물론 그 이론에 동의하지 않지만, 최근 그 지역의 인공위성 사진에 나타난 흐릿한 모양이 그의 관심을 끌었다. 진흙 바닥에 있는 사진이 찍힌 위치에 찾아가보니 마치 전설 속의 뱀이 먹은 음식을 다시 뱉어놓은 것처럼 알라 분드 지진 때 거의 덮여버린 오래전에 잊힌 5개 면의 항구가 나타났다.

타카르 교수는 또 하나의 잊힌 전설에도 관심을 두었다. 고대 인도 문헌에서 짧게 언급된 내용에 따라 히말라야 산맥에서 흐르는 반신화적인 사라스바티강의 정확한 위치이다. 사라스바티강은 가가르강 상류에서 강바닥을 따라 흐른다고 생각하지만, 마하바라타에 따르면 우기에만 한시적으로 흐르는 강이 그러하듯이 몇 번을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하다가 그레이트 란 어딘가에서 “바다로 뛰어든다.” 타카르 교수는 지하층의 운모 모래에 끊임없이 충적토가 풍부하게 나오는 등 강이 히말라야 산맥에서 시작한다는 증거를 찾고 싶어 한다.

연대기 작가 아리안이 기원전 325년에 알렉산더 대왕이 사령관 네아르쿠스의 지휘 아래 함대를 고국으로 보내기 위해 바다를 찾아 인더스 강의 가장 동쪽에 있는 지류를 따라 내려왔다고 하는 부분에서 알렉산더 대왕은 라크파트에서 멀지 않은 곳까지 왔을 가능성이 높다. 아리안이 이 인더스강 지류가 바다에 도달하기 바로 직전에 “편평한 지역에 넓게 퍼지며” 호수를 형성한다고 적은 내용이 그레이트 란이 범람했을 때와 매우 비슷하다.

지리학자 스트라보는 이곳 해안이 “진흙, 조류, 육풍 덕분에 특히 강의 입구에 습지가 많다”고 알렉산더의 키잡이 중 하나인 오네시크리토스의 말을 인용했다. 영국 작가 마이클 우드는 자신의 책 In the Footsteps of Alexander the Great(알렉산드로스, 침략자 혹은 제왕) 조사를 위해 10년 전에 라크파트를 방문하여 밑에 진흙이 아닌 바위가 있어 하류 부분에서 땅이 건조한 첫 부분이라는 이유로 그곳을 선택했다.

83세의 항해사이자 배 선장인 바바 말람은 알렉산더 대왕 해군의 어떤 군사보다 아라비아해를 폭넓게 항해했으며, 지금은 라크파트에서 해안을 따라 동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항구 마을 만드비에서 연금으로 생활하고 있다. 바바는 이름뿐인 칭호지만, 말람은 아랍어로 “교사” 또는 “거래에서 잘 아는 사람”이라는 뜻의 mu‘allim(뮤알림)에서 온 말로 여기선 “바다의 주인”이라는 뜻이다.

바바 말람이 60년 동안 동아프리카와 아라비아 반도의 항구만큼이나 남인도, 몰디브, 스리랑카로 자주 항해했던 경험은 위험으로 가득했다. 그의 아버지는 1964년에 망갈로르 주위에서 태풍으로 사망했다. 1963년 5월 20일에 폭풍이 오만의 살랄라를 강타했을 때 그가 상륙해 있는 동안 인도양에서 배가 가라앉고 선원 12명이 익사했다. 쿠치 마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지진이 일어난 날짜가 깊게 새겨져 있듯이 태풍의 정확한 날짜는 적어도 쿠치 선원들은 확실히 기억한다.

곱게 접은 카라치, 콜롬보 및 고아의 항박도와 기름칠한 켈빈 앤 윌프리드 화이트 콤파스 육분의, 손때 묻은 노리의 항해표와 함께 바바 말람은 아직 당장에라도 바다로 나갈 준비가 돼 있다.

만드비의 역사가 마누바이 판디가 한 “우리 문화는 바다와 함께 젖었다”라는 말은 다우선이 늘어선 만에서 물이 들어올 때 서 있으면 가장 잘 어울리는 듯하다. 영국 여성 마리아나 포스탄스는 1830년에 만드비의 해변에 왔다. 몇 년간의 생활을 바탕으로 한 Cutch: Or, Random Sketches(커치: 랜덤 스케치)에서 그곳의 뱃사람들은 “가장 용감하고 진취적”이며 “말람들은 특히 총명하고 아는 것이 많다”고 적었다.

새로운 선박을 건조하고, 고장난 배는 수리하고, 낡은 배는 분해하고, 물가에 그냥 버리는 배 등 모든 것이 보트야드에서 이루어진다. 부식 억제제로 사용하는 양기름과 땅콩기름의 진한 향기와 방금 톱질하여 자른 단단한 선박용 목제(버마 티크-데크, 말레이시아 살나무-수선 아래의 널판자, 자연적으로 휜 쿠치 바불나무(아카시아)-곡선 뼈대)와 함께 망치와 드릴 소리가 공기 중에 가득하다.

아라비아해의 상징적인 범선인 평면선미 외항 다우선은 이곳에서 남인도의 투티코린 항구에서 볼 수 있는 형태로 V 모양 선체를 가진 더욱 빠른 배로 교체되었다. 하지만 이런 기술도 라즈코트의 수제 쇠못, 모한다스 간디가 태어난 포르반다르에서 바느질하는 돛 등 옛날 구자라트 장인들의 기술에 의존한다.

86세의 선박 모형 제작자인 쉬비 부다 포피니의 미니어처 함대에서도 더욱 다양한 선체 디자인을 볼 수 있다. 그의 작업실 표시엔 “만드비 항구의 전직 사수”로 되어있지만, 그는 8살 때 동아프리카의 베이라, 잔지바르, 라무, 모가디슈부터 가까이는 과다르, 파스니, 라스 오르마라 등의 발루치 항구와 페르시아 만을 사이에 두고 아부다비, 반다르압바스, 바스라 등을 드나들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포피니의 모형은 현지의 machvo(마크보) 낚시용 보트, hourros(호우로스)라는 이름의 인더스 강 지류 보트, 쿠치 화물선 vahan(바한) 등이 있다. “힌두 홀리 축제 시기엔 대부분 말라바 코이어[코코넛 섬유질]를 싣고 떠나는 데에만 거의 언제나 42일이 걸렸으며, 돌아오는 디왈리 축제 시기엔 대부분 잔지바르의 클로브를 싣고 32일 만에 왔다”고 그는 기억한다. 그의 마음은 올해 디왈리 축제가 곧 시작할 것이라는 생각에 온통 사로잡혀 있다.

옛날에 화물 품목은 훨씬 다양했다. 역사가 러쉬브룩 윌리엄스는 “만드비 상선은 금괴, 곡물, 목재, 코뿔소 가죽, 카르다몸, 후추, 생강, 비단, 말라바르, 모카, 무스카트 및 아프리카 해안의 약물 등을 가져오고, 면, 직물, 설탕, 기름, 버터, 쿠치 및 내륙지역의 명반을 가져간다”고 매우 이국적인 쇼핑 목록을 적어놓았다. 코뿔소 가죽으로 만든 지역 공예품은 쿠치 박물관의 로열 실드 컬렉션에서 볼 수 있다. 준보석을 박아 장식한 것도 있다.

화물 수송 사업이 침체되면서 선대 목공 이브라힘 미스트리는 최근 새로운 유형의 의뢰인을 맞이하게 되었다. 바로 엄격한 수작업 기준으로 만들어진 고급 선박 소유주들로서 이들은 독특하고 바다를 사랑한다. 얼마 전에 그의 보트야드에선 현재 역사적으로 가장 정확한 방식으로 아라비아해를 항해하길 원하는 미국인을 위해 손수 조각한 부품으로 평면선미에 쌍돛대의 다우선을 완성했다.

미스트리는 곧 외국에 거주하는 구자라트일을 위해 10개의 돛을 장착하고 돛대가 셋인 33.5m 스쿠너를 만드는 대형 프로젝트에 착수할 예정이다. 이 배는 미국 최고의 선박 설계자가 설계한 것으로 그가 배를 만들 사람으로 직접 미스트리를 선택했다. 그는 컴퓨터로 작성한 새 보트의 청사진을 펼치며 “증조부는 단순히 보트야드에서 잔지바르와의 무역을 위한 다우선을 만드는 농부였다”고 말하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증조부님이 부유한 외국인을 위해 스쿠너와 다우선을 만들고 있는 저를 보면 뭐라고 하실까요?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변한 것은 많지 않습니다. 어쨌든 쿠치는 바다를 보고 있습니다.”

루이 베르너(wernerworks@msn.com)는 작가 겸 영화감독으로 뉴욕에 거주한다.

데이비드 H. 웰스(www.davidhwells.com)는 오로라 포토스 소속 프리랜서 다큐멘터리 사진가이다. 시각적 이야기에서의 빛과 그림자 사용과 문화간 소통을 전문으로 한다. 사진 워크숍에서 강의를 하며, www.thewellspoint.com에서 사진 포럼 The Wells Point를 발행한다.


 

This article appeared on page 24 of the print edition of Saudi Aramco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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