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잔 조약으로 케말 아타튀르크가 이끄는 터키공화국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지 일주일 후인 1923년 7월 31일에 이스탄불의 아시아 쪽, 소나무 숲이 있는 고지대의 술탄테페 지역에서 미래의 성공적인 사업가가 태어났다. 에르테군의 아버지 메흐메트 뮈니르는 로잔 조약 협상팀의 일원이었으며, 10년간 유럽에 머물며 아타튀르크의 대사로서 스위스, 프랑스, 영국에서 근무했다. 1936년에 터키에서 이름에 성을 사용하는 것이 의무화되자 뮈니르는 “희망에 찬 미래를 위한 삶”이라는 뜻의 “에르테군”을 성으로 선택했다.
아흐메트 에르테군의 첫 어린 시절 기억은 스위스 베른의 터키 대사관 정원에서 놀던 모습이다. 그 후 파리의 명문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프랑스어와 미적분에서 만점을 받았다. 런던에서 에르테군과 그의 여동생 셀마는 미래의 여왕인 엘리자베스 공주와 여동생 마거릿 공주를 가르친 경험이 있는 엄격한 영국인 여성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았다.
에르테군의 어머니 헤이뤼니사는 귀로 들은 음악을 모든 종류의 건반 악기와 현악기로 연주할 수 있는 뛰어난 음악가였다. 어머니가 당시 유명한 곡의 음반을 구매하면 에르테군과 그의 형 네수히가 밤에 몰래 음반을 방으로 가져왔다. 1932년에 네수히는 아흐메트를 런던 팔라디움으로 데려가 캡 캘러웨이와 듀크 엘링턴의 공연을 보여주었다. 에르테군은 2005년 인터뷰에서 “그전까지 흑인을 제대로 본 적이 없으며, 흰색 연미복을 입고 놀라울 정도로 반짝이는 관악기를 연주하는 그 아름다운 연주자들의 연주처럼 황홀한 소리를 들은 적도 없다”고 말했다. 2년 후 아버지가 터키공화국 최초의 미국 대사로 발령받아 워싱턴 D.C.에서 근무하게 되면서 그는 더욱 재즈에 빠져들었다.
에르테군은 워싱턴에서 남학생 사립학교의 고급스러운 분위기에서 생활했지만, 나중에 “진정한” 교육은 하워드 극장에서 받았다고 밝혔다. 당시 “흑인 구역”의 중심부에 있던 하워드 극장에서 듀크 엘링턴, 카운트 베이시, 빌리 홀리데이, 루이 암스트롱, 라이오넬 햄프턴 등을 만났으며, 뉴욕타임즈에 따르면 엘라 피츠제럴드에게 처음으로 사인을 부탁한 사람도 에르테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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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e gottlieb / 국회 도서관 |
1940년대에 에르테군은 흑인 및 백인 음악가들을 자주 대사관으로 초청하여 함께 어울려 연주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터키공화국 초대 대통령인 케말 아타튀르크의 흉상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에르테군은 1947년에 애틀랜틱 레코드를 설립했다. |
가열된 인종 간 정치적 갈등 상황과 상관없이 에르테군과 그의 형은 다양한 인종의 청중 앞에서 흑인과 백인 음악가들이 공연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인 유대인 커뮤니티 센터에서 워싱턴 최초의 통합 콘서트를 계획했다. 그리고 이 두 형제는 하워드 극장에서 토요일 밤에 만난 연주자들을 일요일 점심에 터키 대사관으로 초대했다. 부모님, 특히 음악가인 어머니와 연주자들을 설득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이들은 흰 제복을 입은 웨이터들의 시중을 받으며 식사를 마친 후에 대사관 연회장에 모여 함께 연주했다. 당시 사진을 보면 재즈 거장들이 더블버튼식 완벽한 맞춤 양복을 입고 거대한 케말 아타튀르크 흉상 앞에 서 있다. 이런 인종 통합 모임으로 인해 남부의 한 상원의원은 격분하여 대사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흑인이 정문을 통과하여 대사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대사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친구들이 정문으로 출입하지만, 의원님께서 대사관에 오시길 원한다면 뒷문으로 들어오셔도 좋습니다.”
1940년에 17세인 아흐메트는 메릴랜드주의 아나폴리스에 있는 세인트존스대학교에 입학하여 예술과 문학, 수학, 철학과 함께 해마다 새로운 언어를 공부했으며, 1944년 6월에 우등으로 졸업했다. 4개월 후에 터키 독립 21주년 기념행사 준비로 대사관이 분주하던 중에 61세의 뮈니르 에르테군 대사는 가슴에 심한 통증을 느꼈다. 그는 2주 뒤에 사망했다.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은 보도 자료에서 “개인적으로 친구인 터키 대사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에 슬픔을 감출 길이 없다”고 밝혔다. 대사의 시신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알링턴 국립묘지에서 보관된 후에 미주리 전함에 실려 고향인 술탄테페 지역으로 옮겨졌다.
외교와 음악 사이에서 진로를 고민하던 에르테군은 마음이 시키는 쪽을 선택했다. “제가 정말 좋아했던 일은 재즈, 블루스 같은 음악과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좋아하는 것을 했습니다.” 그는 대사관 근처의 아파트로 이사하고, 맥스 실버맨이 소유한 슬럼가의 음반 가게인 퀄리티 뮤직숍에서 시간을 보냈다. 78RPM의 올드 재즈 음반을 한 장에 10센트 또는 세 장에 25센트의 가격으로 살 수 있었던 이 가게는 나중에 “왁시 맥시”라고 알려졌다. 이 가게는 하워드 극장에서 몇 걸음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14살 때 어머니에게 장난감 레코드 녹음기를 선물로 받은 에르테군은 24세가 된 1947년에 진짜 레코드 회사를 차리기로 했다. 음반 제작의 핵심 재료인 셸락은 전쟁 중에는 공급이 제한되었다. 그 결과 rca 빅터, 컬럼비아, 데카와 같은 메이저 음반 회사는 당시 “레이스 뮤직”이라고 부르던 흑인 음악을 포기하고 백인 대중에 집중했다. 전후 경제가 피부색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의 소비에 영향을 주었지만 세련된 뉴욕일지라도 할렘 거주민들은 브로드웨이 극장까지 내려갈 수 없었다. 에르테군의 말처럼 “흑인들은 집에서 즐겨야 했으므로 음반이 바로 답”이었다.
하워드 극장에서 에르테군을 알게 된 라이오넬 햄프턴은 에르테군의 회사 설립에 15,000달러를 투자하겠다고 제안했다. 두 사람은 햄프턴의 재정 관리인이자 아내인 글래디스를 찾아갔다. 에르테군은 밖에서 기다렸다. 몇 분 후에 글래디스가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뭐라고요? 평생 하루도 일해본 적이 없는 저 멍청이한테 우리 돈을 주겠다고요?” 몇 년 후에 애틀랜틱 레코드의 화려한 사무실을 방문한 햄프턴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 모든 게 내 것이 될 수 있었다고!”
에르테군은 오래전부터 가족끼리 알고 지낸 치과의사 바흐디 사비트를 찾아갔다. 에르테군의 설명에 매료된 사비트는 자신의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10,000달러를 투자했다. 퍼시픽 재즈라는 서부의 음반회사 이름에서 영감을 받은 애틀랜틱 레코드가 탄생했다. 성장 중인 음반 산업의 다른 경영자들과는 달리 에르테군은 자신이 만드는 음악을 이해했으며 실제로 좋아했다. 그는 왁시 맥시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음악 사업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고, 사람들이 좋아하고 구매할 만한 음반과 새로운 유행에 관한 정확한 감각을 길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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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naud de rosnay / condé nast archive / corbis |
팝 듀오 소니와 셰어는 1965~1967년에 애틀랜틱 레코드에서 세 장의 히트 앨범을 제작했다. 이 사진은 같은 기간에 로스앤젤레스에서 촬영되었다. |
에르테군은 2007년에 롤링스톤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루이지애나주 오펠루서스 외곽에 사는 한 흑인이 있습니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일하지만 돈을 아껴써야 합니다. 어느 날 아침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듣습니다. 너무도 매력적인 정통 블루스곡입니다. 그는 이 음반을 꼭 갖고 싶습니다. 모든 일을 제쳐놓고 트럭에 올라 40킬로미터를 운전한 후 처음 보이는 음반 가게로 갑니다. 이런 음반을 만들 수 있다면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에스테군은 맨해튼 미드타운에 있는 외딴 호텔의 작은 스위트 룸에 사무실을 차렸지만, 애틀랜틱 레코드의 성패를 좌우할 인재는 미국 남부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혼잡하고 연기가 자욱한 곳에서 찾을 수 있다는 생각에 그런 곳으로 떠났다.
뉴올리언즈에서 어느 날 밤 에르테군은 “프로페서 롱헤어”라는 이름의 잘 알려지지 않은 천재가 미시시피 강 너머에서 합동 연주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 나섰다. 하지만 백인 택시기사가 흑인 지역으로 가길 원하지 않아 벌판 한가운데 내려주어서 그는 어둠 속에서 1.6킬로미터를 걸어야 했다. 멀리 보이는 집에서 나오는 불빛에 의지해 걷고 있었는데 집과 가까워질수록 피아노, 드럼, 노래소리가 매우 커 진동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에르테군은 밴드의 연주라고 생각했지만, 안으로 들어가서 보니 프로페서 롱헤어가 피아노에 달린 드럼을 오른발로 치며 혼자 연주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춤을 추고 있었고, 에르테군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종류의 음악을 연주하는 매우 독창적인 음악가에게 매료되었다. 에르테군은 본명이 헨리 롤런드 “로이” 버드인 롱헤어가 쉬는 동안 그에게 다가가 애틀랜틱 레코드와 계약할 것을 부탁했다. 롱헤어는 “정말 미안합니다. 지난주에 머큐리사와 계약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하지만 제 본명으로 계약했으니.... 당신과는 프로페서 롱헤어로 계약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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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ael ochs archives / corbis |
에르테군은 1960년대 중반부터 미국이 “영국의 침략”이라고 표현한 현상을 활용했다. 1967년 4월에 그는 밴드 크림의 에릭 클랩튼, 진저 베이커, 프로듀서 펠릭스 패팔라르디가 “Strange Brew”를 녹음할 때 조언을 해주었다. 이 노래는 밴드의 대표 앨범 “Disraeli Gears”의 첫 싱글이 되었다. |
롱헤어를 따라 루스 브라운, 빅 조 터너, 클라이드 맥패터도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 초반에 애틀랜틱 레코드와 계약했다. 하지만 전국적으로 애틀랜틱 레코드를 알린 것은 레이 찰스였다. 그때까지 레이 찰스는 냇 킹 콜의 부드러운 스타일로 연주했으며 부기우기 피아노곡은 연주해본 적이 없었다. 에르테군이 자신이 원하는 소리를 설명하자, 레이 찰스는 (에르테군의 말에 따르면) 갑자기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믿을 수 없는 스타일로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마치 융의 집단무의식 이론을 실제로 보는 것과 같았다. 이 위대한 음악가가 무엇인가와 연결되었으며 문화 전체에 대한 채널이 되어 그를 통해 쏟아져나오는 듯했다.”
1952년에 에르테군은 애틀랜틱 레코드에 제리 웩슬러를 영입했다. 열정적이고 뛰어난 맨해튼 거리 소년에서 빌보드 작가가 된 웩슬러는 1947년에 “리듬 앤드 블루스”라는 말을 만들었으며, 이 스타일은 곧 “R&B”로 줄여서 부르게 되었다. 에르테군과 웩슬러는 같이 일하면서, 그들의 주요 대상은 더 이상 시골의 흑인이 아니라 10대와 백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1954년에 빅 조 터너의 “Shake, Rattle and Roll”이 빌 헤일리 앤 히즈 코메츠(Bill Haley & His Comets)와 엘비스 프레슬리 같은 백인 음악인들 버전으로 녹음되면서 그 생각은 더욱 명확해졌다. 에르테군과 웩슬러는 블루스가 R&B를 넘어서 새로운 로큰롤을 원하는 10대의 취향을 충족할 수 있도록 변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혼 후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한 네수히 에르테군은 1955년에 팻츠 도미노가 음반을 녹음한 임페리얼 레코드에서 일하겠다고 발표했다. 아흐메트는 자신의 형이 경쟁업체를 위해 일한다는 생각을 참을 수 없어 형에게 뉴욕으로 와서 애틀랜틱 레코드의 재즈 부서를 맡아달라고 설득했다. 1년도 안되서 네수히 에르테군은 모던 재즈 쿼텟과 재즈 베이스 연주자 찰스 밍거스와 계약하고 그들의 음반을 녹음했다. 1958년에 에르테군은 바비 다린을 스튜디오로 데려와서 최신 엔터테인먼트 매체인 텔레비전으로 “아메리칸 밴드스탠드(American Bandstand)”를 시청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Splish Splash”와 “Queen of the Hop”을 녹음하여 모두 성공을 거두었다.
1960년의 어느 날 밤 에르테군의 인생에 또다른 중요한 일이 발생했다. 공산당 정권이 들어선 후에 조국을 떠나온 루마니아 출신 여성을 친구들이 그에게 소개해준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미카였고 두 사람은 이듬해에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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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초반 애틀랜틱 레코드가 미국 최고의 음반회사가 되는 데 일조한 롤링스톤즈와의 계약 과정을 에르테군은 “고통스럽고 열광적인 구애”라고 설명했다. 날짜가 정확하지 않은 위 사진에서 에르테군은 믹 재거와 비앙카 재거 사이에 서 있다. |
애틀랜틱 레코드의 성공에 힘입어 아흐메트와 미카는 호크니, 워홀, 마그리트의 그림으로 가득한 맨해튼 타운하우스에서 호화롭게 생활했다. 두 사람은 1971년 터키 여행 중에 보드룸에 있는 에게 해의 한 휴양지에 매혹되었다. 미카는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할리카르낫소스의 마우솔로스 왕 영묘 유적지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의 돌을 사용하여 이 휴양지를 복원했다. 배니티 페어 잡지는 보드룸에서 아흐메트와 미카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여름 초대장을 “시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티켓”이라고 설명했다.
다른 티켓도 여러 가지가 있었으며, 그들의 파티에는 스타 음악가, 외교관, 자본가, 영화배우, 아방가르드 예술인, 문학인 등이 함께 했다. 1972년에 뉴욕의 세인트 레지스 호텔 옥상에서 롤링스톤즈를 위해 에르테군이 연 파티의 초대 손님 중에는 테네시 윌리엄스, 밥 딜런, 헌팅턴 하트포드, 오스카 드 라 렌타와 프랑수아즈 드 라 렌타, 여러 귀족 등이 있었으며 카운트 베이시와 머디 워터스가 음악을 연주했다. 재클린 오나시스, 트루먼 카포티, 다이애나 브릴랜드, 말버러 공작도 모두 에르테군의 집을 자주 방문했다.
롤링스톤 잡지는 그를 이렇게 묘사했다. “에르테군은 세련되고 부유한 동양의 사령관과 오즈의 마법사를 합쳐놓은 것 같은 외모에, 힙스터 스타일의 은어로 흐릿하고 걸걸하게 느릿느릿 약 다섯 가지의 다른 억양을 섞어 말하면서 반쯤 감긴 눈으로 귀갑안경을 통해 주위의 모든 것을 살폈다. 그는 항상 염소수염을 정교하게 다듬은 채 주름 하나 없는 옷을 입고 나타났다... 그는 언제나 무엇이 올바른 일인지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60년대와 70년대에 음반의 성공이 이어졌다. 소니와 셰어의 “I Got You Babe”는 세계적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1970년에 에르테군은 롤링스톤즈와의 배급계약을 위해 로스앤젤레스로 급히 찾아가 나중에 “고통스럽고 열광적인 구애”라고 표현했던 설득 과정을 시작했다. 에르테군과 믹 재거는 팽팽한 줄다리기를 했다. 재거는 많은 제안을 받은 상태였지만 결국 에르테군이 그를 차지했다. 하지만 믹 재거가 애틀랜틱 레코드 사무실에 약 45분간 계속해서 전화하게 만든 후에야 가능했다. 믹 재거가 진땀을 흘리는 동안 에르테군은 전화기 옆에 앉아 태연하게 전화벨 소리를 듣고 있었다. 롤링스톤즈와의 계약으로 애틀랜틱 레코드는 미국 최고 음반 회사로서의 위상을 굳혔다.
1980년대에 드러나기 시작한 에르테군의 박애주의적인 면모는 1995년에 문을 연 로큰롤 명예의 전당을 건립하는 추진력이 되었다. 그는 박물관 건축가(I. M. 페이)와 위치(클리블랜드)를 선정했다. 박물관의 형식적인 면과 로큰롤의 거친 자연스러움과의 균형이 필요한 상황에서 에르테군의 외교력이 적절한 감각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됐다.
2006년 10월 29일에 83세의 에르테군은 맨해튼의 역사적인 비컨 극장에서 열린 클린턴 재단을 위한 롤링스톤즈의 자선 콘서트에 참석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이야기를 마친 후에 에르테군은 무대 뒤 라운지에서 기다리다가 갑자기 넘어지면서 콘크리트 바닥에 머리를 부딪쳤다. 바로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혼수상태에 빠지고 6주 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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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테군이 설립을 도왔던 로큰롤 명예의 전당 입성 기념식에서 롤링스톤 잡지 창업자인 잔 웨너와 믹 재거와 함께 서 있다(2004년). |
마이크로소프트 공동 창업자인 폴 앨런은 자신의 보잉 757기를 빌려주어 에르테군의 가족과 친구들이 에르테군의 시신을 이스탄불로 옮겨 부모님과 형(1989년 사망)이 묻힌 술탄테페 지역의 가족 묘지에서 장례를 치를 수 있게 해주었다. 에르테군의 시신은 전통적인 흰색 수의인 케펜에 싸여 땅에 묻혔다.
이듬해에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은 뉴욕에서 열린 추모 공연에서 에르테군에 대해 경의를 표했다. “에르테군은 재미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감성적이고 사려깊으며 놀라울 정도로 관대하고 배려심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음악을 사랑하고 그의 음악가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친구들에게도 엄청나게 의리를 지켰습니다. 미국에서는 워싱턴 주재 비공식 영구 터키 대사로서, 그리고 터키에서는 미국 측 대변인으로서 활동하며 터키를 매우 아꼈습니다.”
1968년에 에르테군과 계약하여 애틀랜틱 레코드에서 3억 장이 넘는 음반 판매고를 올리는 데 일조한 바 있는 레드 제플린은 같은 해 런던의 O2 아레나에서 음악 거물을 기념하는 추모 공연을 열기 위해 다시 뭉쳤다. 추첨으로 배포한 장당 125파운드(250달러) 가격의 표 2만 장을 구하기 위해 전 세계 2천만 명이 넘는 팬이 다투었다.
레드 제플린의 리드 싱어 로버트 플랜트는 2012년 인터뷰에서 “모두 우리가 그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기 위해 뭔가를 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이 공연의 수익금은 아흐메트 에르테군 교육 재단에 기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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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 에르테군(가운데)이 옥스퍼드 대학교에 새로 개장한 에르테군 하우스 밖에서 작년의 아흐메트 에르테군 교육 재단 장학생들과 함께 서 있다. |
미카 에르테군은 2012년 2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남편은 음악에 깊이 빠져 있었지만, 교육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세상에는 갈등이 많기 때문에 인간이 서로 이해하고 세상을 더욱 인간적인 곳으로 만들기 위해 지원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롤링스톤은 2007년 1월 25일 발간된 호에서 에르테군을 “위대한 리듬 앤드 블루스, 재즈 및 록 음악가와 계약하여 그들의 경력, 교육, 음반 등에 관한 조언을 해주고, 이런 음악적 보배들에게 안식처였던 역사적인 음반 회사인 애틀랜틱 레코드를 설립한 가장 훌륭한 음반 사업가”라고 표현했다.
에르테군은 언제나 좋은 곡을 들으면 그것을 알아차리고 그 누구보다 먼저 음반으로 만들었다. 45RPM, 8트랙 녹음테이프, 카세트테이프, CD의 시대를 거쳐 오늘날 디지털 음악까지 에르테군의 음악은 아직도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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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랄드 자르(zarrcj@comcast.net)는 작가, 강사, 개발 컨설턴트로 활동하고 있다. 전직 외국 근무 장교였던 그의 저서로는 Culture Smart! Tunisia: A Quick Guide to Customs and Etiquette(2009, Kuperard)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