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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후반 전성기에 수천 명의 사람이 거주하며 22개의 망루가 있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던 알주바라 유적지의 상당 부분이 이제 모래로 덮여 있다. |
고고학자 앨런 윔슬리에 따르면, 카타르 북동부 연안에서 만의 얕은 코발트 빛 물이 서서히 빠지면서 모래와 작은 돌무더기가 나타나 알주바라(“모래 언덕”)라는 이름은 짐작할 수 있지만, 그 역사적 명성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알주바라는 페르시아만에서 가장 보존이 잘 된 진주 서식지일 뿐만 아니라 아라비아 반도의 뛰어난 도시 계획 사례라는 점이 매우 분명하다”고 설명한다. 또한 “이 지역에서 연안 무역 마을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정도”로 중요하다고 덧붙인다.
고고학자들이 주로 천 년 단위로 연구하는 지역에서 1세기가 약간 넘는 기간에 모래에서 풍요로운 마을로 그리고 다시 모래로 바뀐 지역에 대해 펼치는 인상적인 주장이다. 근처 페르시아만 중남부 밑바닥의 진주를 통해 부를 축적한 알주바라는 1700년대 중반부터 후반까지 부유한 무역의 중심지였다. 이 지역의 부유한 상인 계급이 당시 화려한 성곽 도시를 만들어 수천 명이 이곳에 거주했다. 1800년대 초에 공격을 받아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지만, 전해지는 이야기를 통해 “백색 금”인 진주로 번성한 산업화 이전 페르시아만 연안 경제의 활력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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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진주의 다른 이름이었던 “백색 금”을 통한 페르시아만 전체의 호황에 관한 이야기를 이루는 퍼즐 조각이라 할 수 있는 6만 개가 넘는 도자기 조각이 알주바라에서 발견되었다. |
진주채취는 매우 오래전 고대부터 내려온 산업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진주 중 가장 오래된 것은 7,5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며, 쿠웨이트의 알사비야와 아랍에미리트의 움알쿠웨인 신석기 유적지에서 발견되었다. 이러한 유적지와 다른 유적지를 통해 당시에도 진주는 보석으로서 높은 신분을 상징했으며 묘실을 장식하는 데에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로버트 A. 카터는 2012년 Sea of Pearls(진주의 바다)라는 책에서 “진주는 수백 년 동안 거의 모든 페르시아만 연안 거주민의 생각과 생활방식에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진주가 알주바라에 얼마나 중요했는지 그리고 그 역사적인 시대에 알주바라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카타르 이슬람 고고학 및 문화유산 10년 프로젝트(qiah)의 주제이다. 이 프로젝트는 2009년에 시작되어 카타르 박물관청(qma)의 고대 유물 부서와 코펜하겐대학교가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다. 1980년대와 2000년대 초기에 제한적으로 발굴 작업이 있었다. 그러나 마을 소멸의 주요 원인이라고 추정되는 사건, 즉 1811년에 알주바라가 오만 선박의 폭격을 받아 불에 타 폐허가 된 사건은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최근까지도 이 마을의 정확한 규모와 특성은 대부분 수수께끼로 남아있었다. 역사가들은 폭격의 영향으로 거주민이 떠나면서 마을이 완전히 버려졌다고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다. 이제 QMA 프로젝트는 지금껏 알려진 내용과는 다른 더욱 복잡하고 미묘한 점유, 부분적 이주 및 재점유 과정을 나타내는 증거를 찾고 있다.
자료는 부족하지만, 알주바라의 이야기는 1600년대말 중앙 아라비아에서 등장한 부족 연합인 우투브 출신 일족들이 1760년대에 정착하면서 시작된다. 현재 이웃 나라인 바레인을 지배하고 있는 알 할리파 일족도 그중 하나였다. 우투부는 쿠웨이트에 본거지를 두었고, 1765년경에는 진주채취를 위한 배 약 800척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알주바라를 식민지로 개척하고 그곳에 무역 거점을 세웠다. 당시 바스라와 같은 다른 무역 중심지들은 전염병 확산의 부담과 페르시아의 공격 위협에 직면한 상태였으므로 페르시아만의 다른 지역 출신 상인들은 알주바라를 선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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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웅장한 요새는 알주바라가 몰락하고 거의 100년 후인 1938년에 건설되었으며, 현재 복원 중이다. |
우투부의 지휘 아래 진주채취용 배를 보유한 알주바라는 빠른 속도로 번창하여, 10년도 안 되는 기간에 어마어마한 규모의 마을이 건설되었다. 무역은 페르시아만을 가로질러 인도양 너머로까지 확장되었다. 하지만 급속한 성장은 얼마 가지 않았다. 페르시아만 연안을 따라 지금의 두바이와 아부다비 지역을 포함하여 다른 진주채취 거주지가 생겨 경쟁을 하게 되었으며, 해안 마을 간 경제적 경쟁 관계의 긴장 상태는 분쟁으로 인해 와해되는 경우가 잦은 지역 부족 및 일족 동맹의 취약성으로 인해 더욱 심화되었다.
1770년대말도 정치적으로 더 광범위하게 불안정한 시기였다. 부시르의 페르시아인들이 바다에서 약 40킬로미터(25마일) 북쪽에 있는 바레인 섬에 통치자를 세웠다. 페르시아인에게 알주바라는 갑자기 나타난 위협이었으며, 1783년의 전투로 적개심은 최고조에 달했다. 우투부가 승리하고 바레인을 장악했다. 바레인으로 이주한 알주바라 주민은 대부분 알 할리파 일족 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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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xis pantos / qiah / qma |
사진에 있는 이전 모스크의 윤곽은 알주바라가 더 큰 규모의 연안 무역 및 농업 지역의 일부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로서, 알주부라 북쪽의 프레이하에 있다. |
사람들과 경제적 중심도 함께 바레인으로 이동하는 현상은 두 번째 위협으로 인해 더욱 가열되었다. 이번 위협은 내륙에서 왔다. 이슬람교 신학자 모하메드 이븐 아브드 알와하브를 중심으로 연합한 다른 부족 집단들은 중앙 아라비아에서 이동하며 알주바라를 포함한 해안 지역을 위협했다. 바레인은 섬이라 어느 정도 안전했다.
한편 세계적 강대국들도 이 지역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영국은 알주바라 북동쪽의 페르시아만 연안을 따라 라스 알카이마 지역을 기반으로 한 카와심 부족을 봉쇄해야 했다. 영국은 영국 선박이 페르시아만을 통과하여 인도를 오갈 때 받은 해적 공격을 카와심 부족이 지휘했다고 주장했다. 카와심 부족을 진압하기 위해 영국은 자국 선박에 대해서도 영국과 비슷한 걱정을 한 오만과 협정을 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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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xis pantos / qiah / qma |
카타르 박물관청의 고고학 관리자 파이살 알나이미는 이후에 다른 마을이나 도시가 그 위에 생기지 않아 알주바라는 “뛰어난 문화적 무결성을 지닌 장소”라고 말한다. |
1809년에 와하브의 영향을 받은 부족들이 카와심족과 합세하여 알주바라를 점령했다. 따라서 영국과 오만 연합은 한 번에 두 마리 토끼를 잡을 기회를 얻게 되었다. 영국은 카와심 부족이 점령한 다른 항구를 이미 공격했으며 오만은 알주바라 공격을 계획했다. 1811년 어느 날 오만은 배를 타고 마을로 접근하여 대포를 발사했다. 공격으로 인한 공포와 화재로 마을은 대부분 폐허가 되었다.
성장과 몰락이 너무 빨리 일어나 알주바라의 전성기에 대해 기술하는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공격이 일어난 지 10년 이상 지난 1824년에 동인도회사의 조지 반즈 브룩스 지휘관은 알주바라를 “폐허가 된 큰 마을로서, 만에 자리잡고 있으며 파괴되기 전에는 상당한 규모의 무역이 이루어지던 곳”이라고 기록했다. 지금 진행 중인 프로젝트에서는 이렇게 암시적이고 불분명한 역사를 바탕으로 18세기 후반 마을이 한창 번성하던 시기의 특징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난 4년 동안 70명이 넘는 전 세계 전문가로 구성된 팀이 매년 가을과 겨울에 몇 개월간 머물며 현재 페르시아만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 유적지로 인정받는 알주바라 지역에 관한 연구, 조사, 발굴, 자료 분류 등의 작업을 해왔다. 이 팀은 마을의 구획, 사람들의 활동 및 활동 장소, 알주바라 주민의 생활방식, 매우 빠른 시간 안에 부를 축적한 방법 등을 밝혀내기 위해 노력 중이다.
이런 문제들을 생각하며 예전에 마을이 있던 장소를 둘러보았다. 61헥타르(150에이커)의 면적으로 축구장 수십 개를 합한 것과 비슷한 넓이이다. 육지 쪽으로는 남아있는 2.5킬로미터(1.5마일) 길이의 방어벽이 경계를 이룬다. 방어벽 높이는 5미터(16피트)에 달하며, 간격을 두고 22개의 망루가 있다. 지구 물리학 연구, 레이더 추적 및 전통적인 땅파기 방법 등을 통해 성벽 내부에서 규칙적인 바둑판 무늬의 거리 모양과 매우 웅장한 규모의 거주 구역, 작업장 및 기타 공간 등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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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펜하겐대학교의 잉골프 튜에센 프로젝트 감독이 방문객들에게 알주바라의 시장과 작업장 구역을 안내하고 있다. 지난 4년간 70명이 넘는 전 세계 전문가로 구성된 팀이 매년 가을과 겨울에 현장에서 연구, 조사, 발굴, 자료 분류 등의 작업을 해왔다. |
고고학 감독자 톰 콜리는 주택이 대부분 안마당 주변으로 세워졌다고 지적한다. 일부 주택은 크기와 디자인 면에서 눈에 띄게 화려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콜리는 “건축 자재는 다양하지만, 정교하고 중요한 건물엔 질이 더 좋은 돌을 사용했음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필자에게 거칠게 다듬은 비치록을 석회로 만든 회반죽으로 밀봉 및 보호하는 기본적인 건축 기술을 보여주었다. 마당이 있는 한 주택의 회반죽 벽에서 다우선을 새긴 보존이 매우 잘 된 그림을 발견했다. 다우선은 이 마을 역사에서 해상무역의 중요한 역할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조사 결과를 보고 알 수 있듯이, 알주바라가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수준의 건축물이 있다는 점은 급변하는 부의 이동을 나타낸다. 미국에서 19세기 골드러시를 겪으며 급격한 변화와 단기간 많은 부를 축적한 마을의 페르시아만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을은 1760년대와 1780년대에 한 번씩 가장 넓게 확장되었으며, 이 확장 계획으로 인해 어부들과 가족이 그 전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더 작은 규모의 막사 및 오두막 밀집 구역이 대체되었음이 이제 명백하게 드러났다. 해변 바로 위, 마을의 서쪽 끝에서 발굴한 구역이 특히 흥미롭다. 여러 개의 기둥 및 말뚝 구멍, 화덕, 불 구덩이 등은 마을 건설의 주요 단계가 일어나던 시기에 이곳이 막사 또는 오두막 형태의 임시 거주지로 사용되었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해마다 5월부터 9월까지 “백색 금” 채집, 즉 진주채취 기간에 거주하며 진주 채집자로 일하기 위해 경제적 목적으로 이 마을에 온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한편 진주채취 말고도 다양한 방법을 통해 마을이 번창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있다. 마을의 바다 쪽 중심부에서 큰 창고와 시장이 발견되었다. 고고학 감독자 마이크 하우스는 “이 지역에서는 대장간 및 기타 공예 사업을 포함하여 다양한 상품의 생산과 무역이 이루어졌다”고 설명한다. 그는 야외에 담으로 둘러싸인 구역으로 안내하며 가축 사육에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알주바라 사람들은 “진주 마을”의 단순한 노동자와는 거리가 멀고 “항상 다양한 방식으로 돈을 버는 방법을 시도했다”고 하우스는 덧붙였다.
진주채취는 알주바라가 번창한 몇 가지 원인 중 하나일 뿐임을 보여주는 등, 마을 역사의 또 다른 상징적인 장을 여는 방향으로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즉, 1811년에 있었던 악명높은 공격은 알려진 것처럼 알주바라가 몰락한 원인과는 거리가 멀다. 고고학적으로 실제 공격의 영향은 그리 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선 이 마을은 이미 정점을 찍고 쇠퇴기에 있었다. QIAH의 고고학 관리자인 윔슬리는 “다양한 건축물의 층을 분석한 결과, 오만이 대포를 발사했을 때 알주바라는 이미 쇠퇴기에 있었다”고 생각한다며, “일부 주요 건물은 오만의 공격이 있기 수년 전에 버려진 것이 확실하다”고 말한다. 이런 새로운 증거는 오만 해군이 나타나기 훨씬 이전에 이미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기 시작했음을 나타내는 역사적 자료를 뒷받침한다.
마찬가지로 1811년 공격으로 많은 사람이 떠났지만, 이런 현상은 오래가지 않았다. 최소한 일부 사람은 곧 돌아와 임시 구조물에 살았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1820년대의 재정착을 나타낸다. 이 시기에 내부벽 건설과 무너진 건물 재건 등이 이루어지며 원래 마을 크기의 1/5정도로 규모가 축소되었다. 이와 비슷하게 상업 분야도 축소되고 재건되었으며, 일부 손상된 건물은 파괴되거나 잔해에서 구한 대부분 저품질 재료를 사용하여 재건축되었다.
지역 전체에서 부족 간 긴장 관계도 계속되었으며, 1878년에 알주바라는 또 공격을 받았다. 이번 공격은 지금의 카타르 건국자 중 한 명인 셰이크 자심 빈 모하메드 알타니가 주도한 것이며, 그의 후손들이 현재 그곳을 통치하고 있다. 알주바라는 19세기말까지 축소된 상태로 유지되었으며, 사람들이 다시 떠난 후에는 산발적으로만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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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존 전문가 나디아 타소울리가 조각을 맞추며 부서진 도자기를 복원하고 있다. 오른쪽: 마리안 슈왈츠가 현미경을 사용하여 동전에 새겨진 내용을 가리는 부식 물질을 제거하고 있다. |
성벽 및 지붕 잔해와 함께 지금까지 알주바라에서 가장 많이 발견된 것은 도자기이다. 2009년부터 약 6만 개의 도기 조각이 조사되었는데, 대부분은 유적지 전역에서 발견된 쓰레기 더미에서 찾았으며 외벽의 육지 쪽에 많이 있었다. 도예 연구가 아그니에츠카 비스트론은 “많은 도기 조각 더미를 종류와 날짜별로 분류해야 한다”며, “꽃 디자인 모양의 미묘한 차이 등 놀라울 정도의 섬세함 덕분에 도기 조각의 시기를 짐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비스트론은 라스 알카이마 지역의 줄파 용기, 이란 쿠니 지역의 도기, 액체 운반에 사용된 길고 가는 “어뢰” 단지, 장식된 담배 파이프, 알리 지역의 바레인 마을 공예가가 만든 물병, 출처는 정확하지 않지만(인도 또는 이란으로 추정) 신비스러운 검은색 용기 등 다양한 도기를 보여주었다. 18세기 및 19세기의 중국 자기 조각과 중국의 것보다는 나중에 생산된 유럽의 자기 조각도 있었다. 구멍에 줄을 끼운 흥미로운 파란색과 흰색의 그릇을 통해 특별히 중요하거나 값비싼 물건은 부서져도 버리지 않고 고친 후에 다시 사용했음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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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자들이 학생들에게 도기류를 세척하고 분류하는 법을 설명하고 있다. 해마다 약 1천 명의 학생이 알주바라를 방문하여 유적지와 역사를 배우고 진행 중인 고고학 작업을 관찰한다. |
다른 유물을 통해서는 요리법과 거주민의 주식 등을 알 수 있다. 당연히 생선을 주로 먹었지만, 놀라운 점도 있다. 많은 양의 생선뼈 중에서 오늘날 페르시아만에서 보기 어려운 톱상어의 뼈가 발견되었으며, 흔한 종으로는 요즘 잡히는 것보다 훨씬 큰 크기의 뼈가 있어 오늘날 수산업이 물고기가 최대 크기로 자라기 전에 잡는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그리고 물론 진주를 만드는 굴도 먹었다. 먹은 후에 껍데기는 쓰레기 더미에 버렸으며 3미터 깊이의 더미도 발견되었다. 대추 압축 장소가 많이 발견되어 대추 시럽을 생산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쌀, 밀, 보리, 파바 콩뿐만 아니라 코코넛, 복숭아, 살구, 호두, 포도, 자두와 같은 과일 등의 증거를 통해 다양한 무역 네트워크와 구매력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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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xis pantos |
19세기 건물의 외부에서 발견된 버려진 굴 껍데기에 부분적으로 형성된 진주가 있다. 굴이 이물질 위에 탄산칼슘의 보호막인 진주층을 분비하면서 진주가 형성된다. |
진주채취와 직접 연관된 유물 중에서 실제 진주는 몇 개뿐이다. 현장에서 발굴한 유물 품목을 관리하는 홀리 파튼은 진주의 가치와 휴대성을 고려할 때 예상했던 일이라고 말한다. 거주민이 이사 또는 도피할 때 가장 먼저 챙긴 물건이 진주였을 것이다. 하지만 18세기 진주 상인의 궤, 진주채취 칼, 적철광으로 만든 눈물방울 모양의 다이빙용 추, 광석 형태의 산화철 등 진주를 채취하는 사람이나 무역상들이 사용한 물건은 다양하게 남아 있다. 이런 물건을 사용하여 다이버는 진주를 찾아 파도 밑으로 50미터(160피트) 이상 내려갈 수 있었다. 200개가 넘는 모든 물품은 2014년 12월 개장 예정인 새로운 국립 박물관에 전시하기 위해 도하로 보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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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적철광(철광석)으로 만든 다이빙용 추를 사용하여 진주채취를 위해 50미터 이상 밑으로 내려갈 수 있었다. 위: 금 와이어에 달린 자개 구슬은 흔치 않은 발견물이다. 거주민은 알주바라를 떠날 때 대개 보석도 함께 가지고 갔다. 아래: 이 유리와 파양스 구슬은 굴대에 문질러 층을 부드럽게 했다. 오른쪽: 이 납작하게 편 은귀고리는 도시 성벽 내부의 쓰레기 더미에서 발견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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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중국 그릇의 파편일 가능성이 있는 사진의 도자기 조각은 나중에 펜던트 상감 세공으로 재사용되었다. 유리 병마개와 마찬가지로 19세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오른쪽. 위: 윗부분이 제거된 개오지 조개껍데기는 보석이나 게임용 조각으로 사용되었다. 이것들은 알주바라의 시장과 상업지구에서 발견되었다. |
발견된 유물에 대한 관심만큼이나 알주바라의 도시 지형이 페르시아만 거주지에 관해 알려주는 바에 대한 관심도 높다. 30년간 시리아, 요르단, 팔레스타인 등에서 고고학을 연구한 윔슬리는 알주바라에 오래된 전통적인 중동 마을의 복잡하고 유기적인 도시 체계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며 이렇게 설명한다. “이슬람 도시는 본래 무계획적으로 무질서하게 개발된다는 고정관념이 알주바라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훨씬 정돈되어 있어 마을의 설계와 건축을 담당한 중앙 기관이 있었음을 나타낸다.” 이런 방향을 누가 제시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당시의 여러 조언자에게 도움을 받은 학식 있는 개인이 비전과 계획을 제시했을 가능성이 높다.
발견 내용과 새로운 궁금증은 페르시아만 작은 마을과 소도시의 도시 고고학에 관한 이해가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마을 대부분의 직접적인 증거가 현대 개발 과정에 묻혀 지금은 볼 수 없게 되었지만, 알주바라는 사람들의 생활, 직업 및 주변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 등을 이해하는 데 매우 훌륭한 기회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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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nieszka bystron / qiah / qma |
이제 마을의 구조가 대부분 파악되어 사람들의 생활 방식, 일하는 방식, 타인과의 관계 등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
필자는 사람들의 생활 등을 더욱 자세히 파악하기 위해 북쪽으로 해안을 따라 몇 킬로미터 이동하여 알주바라와 같은 또다른 “잊혀진” 마을인 프레이하로 갔다. 프레이하는 역사가들이 연안 무역 항구의 불안정한 운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 도자기 유물에 따르면 프레이하가 알주바라보다 시기적으로 앞서지만, 유적에서 거주지의 불안정한 경기 패턴 등 알주바라와 비슷한 유형이 나타난다. 프레이하가 가장 흥미로운 지역인 이유는 주요 항구의 내륙 쪽 고지대 수원지 주변에 형성된 거주지이기 때문이다.
오래전에 죽은 대추나무 그루터기가 이곳이 농장이었음을 나타내며, 그 지역에서는 얻기 힘든 제철 신선 식품을 공급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미루어볼 때 유사한 형태가 다른 곳에서도 연안 내륙지방의 일부를 형성했을 것으로 가정할 수 있다. “알주바라 및 그 주변”의 20개 요새에 대한 19세기 참고자료는 이전 농장 체계와 담으로 둘러싸인 구역을 나타내는 연구결과로 뒷받침된다. 약간 내륙 쪽 담수원 부근에 위치한 시골의 소규모 거주지 네트워크는 해안 마을에 위성과 같은 역할을 하며 특히 중요한 물품을 알주바라에 공급했다.
페르시아만 남부의 소규모 무역 “도시 국가” 네트워크를 통해 상호 간은 물론 내륙 지방과도 사회적, 경제적으로 연결되어 있었음을 자세히 알게 된 것이 지금까지 QIAH 프로젝트에서 얻은 가장 가치있는 결과 중 하나이다. 1811년의 폭격은 중요하지만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었다는 것과 알주바라가 진주채취 이외의 다른 일을 통해서도 번성했다는 것 역시 중요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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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구 후에 알주바라의 요새는 카타르 박물관청의 방문자 센터가 된다. |
이 모든 것은 지역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건으로 인해 결국 쇠퇴하게 된다. 페르시아만 진주 무역은 1920년대부터 일본의 양식 진주가 유입되면서 무너졌다. 1869년부터 수에즈 운하가 반구의 무역 경로를 재편성하면서 페르시아만에서 지역으로 운송하는 양이 글로벌 운송량보다 크게 줄었다. 지역적으로는 수자원의 과도한 개발로 가뭄과 농업 쇠퇴가 가속화되었다. 지금까지 알주바라의 보존 작업은 재건축과 여러 외벽 구역, 망루 중 하나, 가장 넓은 거주 구역의 몇 가구를 통합하는 일로 제한되었다. 복원된 건물은 아직 없지만 성벽은 안정화되었으며 가능한 곳에 옛날의 회반죽 부분을 다시 붙이고 필요한 경우 새로운 회반죽을 사용했다. 이런 작업을 통해 250년 전 마을의 전성기 모습을 재현하고, 100년 만에 처음으로 모랫길을 따라 걷고 한때 알주바라 거주민을 보호했던 마을 경계의 성벽 한 구역에 서 있을 수 있게 되었다.
카타르 박물관청의 고고학 책임자 파이살 알나이미는 “알주바라는 뛰어난 문화적 무결성을 지닌 장소”이고, “카타르뿐만 아니라 지역 전체의 역사에 대한 독특한 관점을 제시”한다고 설명하며, “알주바라의 풍요로운 문화유산을 세계에 알리게 되어 영광”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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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파리(www.jamesvparry.com)는 역사가, 저자, 강사로 활동하며 아라비아 반도의 역사와 문화를 전문으로 다룬다. 중동의 여러 국가에서 거주 및 활동한 경험이 있으며 현재 영국 노퍽에 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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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 브리튼(brittondan@hotmail.com)은 프리랜서 사진가이자 코펜하겐대학교 소속 고고학자로서 스튜디오, 현장 및 연을 이용한 촬영 등을 통해 카타르 박물관청을 대표하여 알주바라에서 QIAH 프로젝트를 기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