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 65, No. 22014년 3월/4월

In This Issue

칠레의 지구 온난화 글/사진 DEANA SIDNEY
맨 위: the stapleton collection / bridgeman art library (상세) 

살사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있는가? 타바스코 소스, 해리사, 스리라차, 파프리카, 고추가루가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있는가?

구세계 교역을 통해 요리 변혁을 일으킨 것 중 전형적인 신세계 캅시쿰은 미르카 또는 메르게스라고 하는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간단한 옛날 새끼양 소시지를 바꾸어 놓았다.  13세기 요리법이 이를 후추, 계피, 고수로 따뜻하게 양념하는 것이었다면, 오늘날 메르게스는 말린 캅시쿰으로 화끈한 매운맛을 내면서 뉴욕에서 홍콩에까지 즐기는 음식이 되었다.
조리법: 메르게스와 캅시쿰 변형
구세계 교역을 통해 요리 변혁을 일으킨 것 중 전형적인 신세계 캅시쿰은 미르카 또는 메르게스라고 하는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간단한 옛날 새끼양 소시지를 바꾸어 놓았다.  13세기 요리법이 이를 후추, 계피, 고수로 따뜻하게 양념하는 것이었다면, 오늘날 메르게스는 말린 캅시쿰으로 화끈한 매운맛을 내면서 뉴욕에서 홍콩에까지 즐기는 음식이 되었다.
구세계 교역을 통해 요리 변혁을 일으킨 것 중 전형적인 신세계 캅시쿰은 미르카 또는 메르게스라고 하는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간단한 옛날 새끼양 소시지를 바꾸어 놓았다.  13세기 요리법이 이를 후추, 계피, 고수로 따뜻하게 양념하는 것이었다면, 오늘날 메르게스는 말린 캅시쿰으로 화끈한 매운맛을 내면서 뉴욕에서 홍콩에까지 즐기는 음식이 되었다.

구세계 교역을 통해 요리 변혁을 일으킨 것 중 전형적인 신세계 캅시쿰은 미르카 또는 메르게스라고 하는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간단한 옛날 새끼양 소시지를 바꾸어 놓았다. 13세기 요리법이 이를 후추, 계피, 고수로 따뜻하게 양념하는 것이었다면, 오늘날 메르게스는 말린 캅시쿰으로 화끈한 매운맛을 내면서 뉴욕에서 홍콩에까지 즐기는 음식이 되었다.

작가 Deana Sidney는 캅시쿰을 넣기 전과 후의 메르게스 가정 요리법을 소개하고(아래) 오늘날 뉴욕에서 르게스를 만드는 사람들과 팬들의 모습을 담는 비디오 투어를 한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메르게스는 고추를 넣어 선명한 진홍색이 나는 북아프리카의 사랑받는 새끼양 소시지입니다. 저는 이 음식의 700년 된 요리법을 발견하고 스스로 그 질문을 했습니다. 중세 방법은 고추의 화끈한 매운맛이 아니라 후추, 고수, 계피 같은 따뜻한 향신료로 부드럽게 양념을 하는 것이었다. 캅시쿰 고추의 화끈한 매운맛은 오늘날 요리에서 나온 것이다.  

콜럼버스가 대양을 건너 고추를 갖고 돌아가지 않았더라면 중국, 인도네시아, 인도, 부탄, 한국, 헝가리, 그리고 아프리카와 중동의 수많은 나라들의 요리법은 오늘날의 모습과 근본적으로 달라졌을 것이다. 신세계를 발견한 지 50년도 채 되지 않아 고추는 구세계를 구석구석 따뜻하게 했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그렇게 멀리 퍼졌을까? 답을 알면 놀랄 것이다. 나도 놀랐다.

맘루크와 오스만 무슬림이 신세계 후추를 발견한 데 공이 크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나는 앞서가기 시작했다.

세계적인 후추의 전설은 기원전첫 천년에 또다른 후추 - (후추(학명 Piper nigrum)) - 와 그 사촌인 인도 긴 후추(필발), 자바 큐베브의 폭발적인 전래에서 시작되었다. Piper nigrum 이 처음 자란 곳은 인도의 말라바 해안이지만 그 입맛은 구세계에 퍼졌다. 값이 아무리 비싸도 사람들은 후추를 사려고 혈안이 되었다. 예를 들어 로마인은 처음 이집트에서 그 맛을 보고는 후추를 사려고 인도까지 배를 타고 갈 정도였다. 플리니우스(Pliny)는 그 값이 비싸다고 불평했다. "인도가 로마 제국의 돈 5천만 세스테르티우스를 긁어 가지 않는 해가 없다." 

어느 면에서, 바다와 육지를 통해 알려진 구세계에 교역과 더불어 문화와 요리를 전하는 전세계의 무역 시스템은, 후추가 자라고 분배되고 소비되는 데 따라 후추의 입맛을 따라갔다.

맨 위: “이 라 에스파뇰라(La Española)” 해안의 스케치는 콜럼버스가 첫 항해에서 직접 그린 것이라 한다. 콜럼버스는 또, 현지인들이 후추를 보여주면서 그와 선원들에게 위의 말린 올스파이스 베리도 많이 보여주었다고 기록했다.
private collection / bridgeman art library
맨 위: “이 라 에스파뇰라(La Española)” 해안의 스케치는 콜럼버스가 첫 항해에서 직접 그린 것이라 한다. 콜럼버스는 또, 현지인들이 후추를 보여주면서 그와 선원들에게 위의 말린 올스파이스 베리도 많이 보여주었다고 기록했다.
맨 위: “이 라 에스파뇰라(La Española)” 해안의 스케치는 콜럼버스가 첫 항해에서 직접 그린 것이라 한다. 콜럼버스는 또, 현지인들이 후추를 보여주면서 그와 선원들에게 위의 많은 올스파이스 베리도 보여주었다고 기록했다.

후추 입수를 컨트롤하는 자가 막대한 부를 거머쥔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인도는 후추 재배의 비법이 있었고 공급하는 나라도 인도뿐이었다. 중국과 중동으로 이어지는 실크로드 교역로가 주요 공급로였다.  

실크로드를 보호하던 몽골 제국이 붕괴하고 1453년에 비잔틴제국이 함락되자 이제까지의 거대한 교역 파트너십이 쪼개졌다. 군벌들이 육로를 따라 통행료를 걷었다. 맘루크와 오스만제국이 육지와 바다의 요충지를 제어하여 그 영역을 지나는 상품에 벌금을 매겼다. 이렇게 되자 육로로 가는 비용이 감당할 수 없이 비싸졌다. 유럽이 후추를 구하려면 새로 바닷길을 개척해야 했다.

다닐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였는데 양쪽 모두 위험했다. 포르투갈의 바르톨로뮤 디아스(Bartolomeu Dias)가 1488년에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 인도양으로 갈 수 있음을 증명했다. 아랍 지도 제작자들과 선원들에게 힘입은 바가 있었다. 에스파냐에게는 다른 한 가지 선택이 남았다. 서쪽으로 항해해서 해도에 없는 미지의 바다(mare incognitum)를 건너 반대편으로 인도에 닿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콜럼버스는 포르투갈인이 대서양에서 지구의 자전으로 인해 일어나는 volta do mar (바다의 소용돌이), 거대한 순환 해류 또는 환류를 발견한 것을 이용했다. 그렇게 하여 항해 시간을 상당히 단축한 콜럼버스는 인도라고 생각한 곳에 닿았다(사실은 카리브해에 있는 섬이었다. 사마나 케이(Samana Cay), 마야구아나(Mayaguana) 그리고 컨셉션 섬(Conception Island)도 모두 콜럼버스가 갔을 가능성이 있다). 이때 선원들은 반란을 일으키기 직전이었다. 콜럼버스는 향신료와 인도의 다른 보물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스의 클라우디우스 프톨레마이오스(Claudius Ptolemy)가 그린 지도로 BC (
biblioteca estense / bridgeman art library
그리스의 클라우디우스 프톨레마이오스(Claudius Ptolemy)가 그린 지도로 BC ("Before Chiles" (고추 전))의 세계가 정의되기 전까지, 그 세계는 1,300년 동안 계속되었다. 위는 15세기의 사본. 인도양은 닫힌 바다로 나와 있고 적도 아래로 아프리카가 조금 보이며, 아메리카는 지도에 없다.

그의 항해일지 1492년 11월 4일 기록은(Samuel Eliot Morison 번역) 다음과 같다. "제독이 그곳의 인디언 몇 명에게 계피와 후추를 보여주었다(아마 보여주려고 카스티야에서 가져왔을 것이다). 인디언들은 무엇인지 알아보고 몸짓으로 이웃에 그것이 많다고 했다." 그들이 가져다 준 올스파이스 베리는 계피, 후추 향이 났지만 그가 찾던Piper nigrum은 아니었다. 희망에 찬 콜럼버스는 새 향신료에 후추를 뜻하는 에스파냐어 피미엔타(pimienta)를 따서 피멘토(pimento)라는 새 이름을 붙였다.

한 달 뒤에 콜럼버스가 발견한 또 다른 후추가 오늘날 세계적으로 친숙하고 없어서는 안되는 캅시쿰 후추이다. 1493년 새해 첫날 항해일지는 다음과 같다. "제독은 그들이 먹는 향신료가 풍부한데다가 후추나 말라게타 후추보다 더 귀하다고 한다[낙원의 곡식]. 제독은 남겨 놓으려는 사람들에게 될 수 있는 대로 그것을 많이 챙기라고 했다." "인디언"들은 이 후추를 아지(aji)악시(axi)라고 부른다. 2주 뒤의 항해일지는 다음과 같다. "이들의 후추 악시도 많은데 후추보다 더 향이 강하다. 이곳 사람들은 이 후추가 아주 몸에 좋다는 것을 알아서 이것 없이는 밥을 먹지 않으려 한다." 히스파니올라에서 한 해에 50[척] 분량을 실어 내갈 수 있다."

노예가 된 아프리카인들은 캅시쿰 고추와 밀가루 범벅에 기름 부은 콩을 섞은 "침 소스"를 먹으며 끔찍한 항해를 견뎌야 했다. 포르투갈 선원들은 영국 선원들이 라임을 먹듯이 캅시쿰을 먹어 장기간 해상 항해에서 올 수 있는 병을 막았다. 이들이 다른 나라 선원들에게도 이 비법을 알려주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1500년에서 1502년 사이에 포르투갈에서 제작된 칸티노(Cantino) 세계 지도. 왼쪽에서 4/1 지점에서 남북으로 그은 선이 1494년 르데시야스 조약에서 정한 선이다.  에스파냐는 선 서쪽을 통치하고 포르투갈은 동쪽을 통치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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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00년에서 1502년 사이에 포르투갈에서 제작된 칸티노(Cantino) 세계 지도. 왼쪽에서 4/1 지점에서 남북으로 그은 선이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에서 정한 선이다. 에스파냐는 선 서쪽을 통치하고 포르투갈은 동쪽을 통치하기로 했다. 에스파냐가 휠씬 더 넓은 영토를 얻었으나 포르투갈은 브라질을 차지하여, 새로 발견한 아리카를 도는 해로를 독점했다. 이 해로는 아래의 남대서양 환류를 이용해 항해할 수 있다.
에스파냐가 휠씬 더 넓은 영토를 얻었으나 포르투갈은 브라질을 차지하여, 새로 발견한 아리카를 도는 해로를 독점했다. 이 해로는 남대서양 환류를 이용해 항해할 수 있다.

인도인, 특히 가난한 인도인들에게 캅시쿰 고추는 아주 빠르게 퍼졌다. 이 캅시쿰의 이 혜택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인도의 식품학자 K. T. Achaya는 인도 남부의 작곡가 Purandaradasa (1480-1564)가 고추를 "가난한 이의 구세주, 먹으면 불이 나는 듯하며 좋은 음식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했다는 것을 알았다.

"향신료쟁이" 콜럼버스는 신세계에서 6,000년 동안 귀한 작물이었던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두툼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찌르는 듯한 맛이 있는 가지과 식물의 열매인 캅시쿰 고추(Capsicum annuum)에는 캅사이신이라는 무미, 무취의 화학성분이 있어 먹는 사람의 입을 "깨무는" 듯하고 몸을 따뜻하게 하며, 이 더운 기운에 대한 반응으로 뇌가 엔돌핀을 분비하기 때문에 기분이 좋아진다.

후추는 콜럼버스가 찾던 것이 아니었지만 그는 새 후추의 가치를 낙관적으로 생각하여 왕궁 후원자들에게 신세계를 소개할 때 aji도 보여주었다. 페르디난도와 이사벨라는 그리 감명을 받지 않았지만 캅시쿰 고추는 점점 빠르게 돌아가는 세계 무역 네트워크에서 인기 있는 상품임을 증명했다. 

고추의 역사에서 가장 권위가 있다 할 수 있는 Jean Andrews는 콜럼버스 덕분에 포르투갈인이 1500년에 브라질로 항해하기 전부터 캅시쿰 고추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고 한다. 에스파냐 선박들이 포르투갈령인 카나리아 제도, 그리고 아조레스 제도에 있는 베르데 곶에 정박하는 때가 많으므로 이는 사실일 것이다. 아프리카, 지중해, 후에는 인도와 신세계로 오가는 배가 모두 이곳들에 기항했던 것이다. 리스본을 오가는 길에 있는 이 제도들로 작물, 가축, 향신료, 금, 상아, 노예 등 모든 것이 지나갔으니 뱃사람들이 틀림없이 물품과 정보를 교환하고 사고 팔았을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콜럼버스는 아조레스에 기항하여 리스본에 몇 주 동안 머물면서 첫 신세계 항해를 마치고 에스파냐로 돌아가기 전에 포르투갈 왕을 만나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에서 Andrews와 다른 후추 학자들은 캅시쿰의 씨가 1493년에 흥미진진한 신세계의 물건들이 그랬듯이 궁정에 퍼지거나 에스파냐 뱃사람들에 의해 거래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들은 구세계에서 그토록 빨리 퍼진 캅시쿰은 후에 포르투갈인이 브라질에서 발견한 것(Capsicum frutescens 또는chinense)이 아니라 콜럼버스가 가져온 씨(Capsicum annuum var. annuum)라고 한다. 그러나 캅시쿰을 멀리 그리고 널리 전한 것은 에스파냐인이 아닌 포르투갈인으로서, 포르투갈인은 그 무역로를 통해 동양, 아프리카, 인도 무역 활로를 확보했다. 20년 만에 캅시쿰은 구세계 어느 곳에서나 냄비에 들어가 식탁에 오르게 되었다.

헝가리 생리학자 Albert Szent-Györgyi는 비타민이 풍부한 캅시쿰을 이용해 구연산 순환을 설명하면서 비타민 C를 분리한 공으로 1937년에 노벨상을 받았다. 캅시쿰에 함유된 비타민 C 덕분에 캅시쿰의 맛에 중독되어 더 많이 먹게 됨으로써, 전세계 가난한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중독이 된다.

처음 나왔을 때 캅시쿰은 여러 이름으로 통했다. 브라질의 포르투갈 정착지 이름을 따서 페르남부코(Pernambuco) 후추, 또는 인도의 주요 향신료 항구의 이름을 따서 캘리컷 후추라 알려졌다. 원래의 이름인 아지악시 또는 인도에서는 아치(achi)라고 불리기도 했다. 포르투갈인은 자바에서 캅시쿰을 에스파냐 후추라고 했는데, 독일인과 스웨덴인은 아직도 그렇게 부른다. 시간이 흐른 뒤 아즈텍 나우아틀어인 고추(chile)로 불리게 되었다.  

1984년에 역사가 C. R. Boxer는 고아에서 리스본까지 후추를 운반한 포르투갈 상선들이 인도로 돌아가는 뱃길에서 캅시쿰을 다시 갖고 갔을 것이라고 한다. Jean Andrews는 캘리컷에서는 아직 얇게 썰어 말린 캅시쿰 고추를 "배로 들어온 후추"라는 뜻으로 카팔 몰로카이(kappal molokai)라고 부른다고 한다.

1513년에 오스만 제국 지도 제작자 Piri Reis는 이 지도를 그리기 위해 14곳을 조사했다. 항정선이 지도상의 위도, 경도를 날짜상으로 앞선다. 지도에서 서아프리카, 남대서양, 아메리카를 그린 이 조각밖에 전해지지 않는다.  이 즈음 고추는 중동, 아시아 각지를 비롯한 구세계의 여러 항구로 들어갔고, 아조레스 제도, 대서양 섬들과 북아프리카에서 자랐다.
bilkent university / wikimedia commons

1513년에 오스만 제국 지도 제작자 Piri Reis는 이 지도를 그리기 위해 14곳을 조사했다. 항정선이 지도상의 위도, 경도를 날짜상으로 앞선다. 지도에서 서아프리카, 남대서양, 아메리카를 그린 이 조각밖에 전해지지 않는다. 이 즈음 고추는 중동, 아시아 각지를 비롯한 구세계의 여러 항구로 들어갔고, 아조레스 제도, 대서양 섬들과 북아프리카에서 자랐다.

16세기 식물학자 Matthias de Lobel은 포르투갈인이 16세기 초에 후추처럼 캅시쿰을 고아에서 수출했을 것이라고 한다. 캅시쿰은 1510년경에 인도네시아에 있었다. 후추의 권위자 Dave de Witt는 캅시쿰이 1516년경 아조레스 제도, 마데이라(Madeira)와 베르데 곶과 마찬가지로 포르투갈인이 요새와 무역 기지를 세운 서아프리카 해안에서도 자랐다고 한다. 그 뒤 1550년대에 포르투갈은 페르시아인의 도움을 얻어 터키와 데탕트를 맺고 향신료 항로를 다시 열었다. 새로 개척된 중동 시장에서 캅시쿰은 상인 역할을 한 선원들을 통해 거래되었다.

캅시쿰을 퍼뜨린 것은 포르투갈인만이 아니었다. 베니스도 여전히 유럽, 무슬림 세계 대부분과 교역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에스파냐, 포르투갈은 오스만 제국과 끊임없이 전쟁을 하며 무역을 했다. 인도에서 북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무역과 군사 충돌을 통해 배가 나포되고 승자 쪽이 화물을 나누면서 각국 사이에 교류가 이루어졌다. 오스만 술탄 술레이만 1세(Suleiman the Lawgiver, 유럽에서 "대제"라 불림)가 1526년에 발칸 반도를 지나 헝가리를 정복하자 캅시쿰 고추가 들어와 군량을 생산하기 위해 경작한 밭에서 자랐고, 오스만 군대가 물러간 뒤에도 캅시쿰은 계속 재배되었다. 1569년경, 어느 헝가리 귀족이 자신의 밭에 있는 Türkisch rot Pfeffer (터키 피망)의 목록을 만들었고, 곧 헝가리의 모든 집은 곧 경제 사정에 상관없이 Capsicum annuum 의 변종인 파프리카에 열을 올렸다. 헝가리 역사가 Zoltan Halasz는 1963년에 파프리카에 관한 자신의 책에서 캅시쿰 후추가 헝가리에서는 오스만 식민관료들과 가까웠을 농부, 가축 치는 사람, 어부들이 캅시쿰을 처음으로 썼다고 한다. 

발달심리학자 Jason Goldman은 "매운 고추를 섭취하면 정신적, 육체적 건강에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고 했다. 매운 고추를 먹으면 입의 통증수용기가 캡사이신에 반응한다. 이 반응으로 인해 엔돌핀 분비까지 촉진되...... 이렇게 분비되는 엔돌핀이 "달릴 때의 흥분"과 유사한 자연스러운 흥분을 일으킨다. 전반적으로 느끼는 편안한 기분 역시, 몸의 통증을 겪고 있다면, 자연 진통제가 된다.

캅시쿰이 처음 들어갔을 때 모든 이들이 환영하지는 않았다. 처음에 가지고 온 에스파냐인은 밭을 꾸미는 데 밖에 캅시쿰을 쓰지 않았다. 이태리는 물론 심지어 포르투갈도 별로 반기지 않았다. 16 세기 초에 유럽 왕실들의 밭은 이를 전파하는 데 큰 관심을 보였다. 1542년에 오스만 상인들 덕분에 독일에서 캅시쿰이 자라기는 했지만 북유럽 국가들은 호기심에서가 아니면 캅시쿰에 별반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스만 상인들은 독일에서 다른 상품들과 함께 활을 만들 주목을 수입했다.

말린 고추는 바다를 통해 전세계로 뻗어나갔다. 맨 위 왼쪽부터:  신세계의 Capsicum annuum의 변종에는 구아힐로(guajillo), 안초(ancho)가 있다. 더 작은 Capsicum frutescens의 변종인 뉴멕시코는 새가 처음에 밭에서 씨를 물어 가 퍼뜨린 데 연유해

말린 고추는 바다를 통해 전세계로 뻗어나갔다. 맨 위 왼쪽부터: 신세계의 Capsicum annuum의 변종에는 구아힐로(guajillo), 안초(ancho)가 있다. 더 작은 Capsicum frutescens의 변종인 뉴멕시코는 새가 처음에 밭에서 씨를 물어 가 퍼뜨린 데 연유해 "새의 눈" 고추라 불리며 현재 동남아시아에서 흔하다. "인도" 고추는 인도에서 가장 흔한 변종 중 하나이다. 인도는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고추를 더 많이 재배하고 수출한다. 맨 아래 왼쪽: 맨 아래 왼쪽: 아래에서 잘게 조각난 모습으로 보이는 중동 원산인 인기있는 캅시쿰 고추 세 종류, 마라스(Maraş), 우르파(Urfa), 알레포(Aleppo)가 이 지역에서 널리 애용된다. 맨 아래 오른쪽: 신선한 세라노(serrano), 포블라노(poblano), 잘 익은 할라페뇨(jalapeño). 

사실, 캅시쿰 고추는 수백 년 동안 유럽 요리에서 인기있는 품목이 아니었다. 식품 역사가 Ken Albala는 다음과 같이 쓰면서 이에 대한 이론을 제시했다. "상인들은 동양과의 후추 무역로를 확보할 급박한 이유가 있었다. 이들은 고추를 가져오지도 않았을 뿐더러 언급도 하지 않았다. 고추는 17세기가 끝날 때까지 유럽 요리책에 나오지도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하층민들까지 고추를 먹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요리 역사가들이 동의하는 대로, 그 당시 농부의 요리나 밭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고 할 정도로 희귀하다.

그래서 처음 소개되었을 때의 후추의 효과를 확실히 말할 수는 없다. 후추 작물 기록은 현실적으로 전무하다. Andrews는 캅시쿰 후추가 유럽의 부동산 대장과 오스만 제국의 양심적인 기록에서 "밭 작물"이었으며, 세금을 물지도 기록되지도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캅시쿰 고추가 기록이 남은 귀한 작물이었던 옥수수, 신세계 콩과 함께 취급되었다고 생각해도 무리는 아니다. 항해식량으로 이것을 지급받은 선원들은 주인들이 훨씬 더 값나가는 후추와 다른 상품을 거래할 때 캅시쿰 고추를 거래했다.

전세계 요리에서 고추가 어떻게 쓰이는가? 인도는 Capsicum annuum, Capsicum frutescens 또는 치넨스(chinense)를 쓴다. (유명한 "유령 고추"처럼 가장 매운 고추는 대부분 Capsicum chinenense 또는 frutescens이다). 터키인은 Capsicum annuum을 쓰고 몇몇 지역에서는 햇볕에 말린 다음 야간에 덮어서 "땀을 낸다". 중국은 Capsicum annuum, chinense를 쓴다. 한국은 Capsicum annuum을 쓰고, 헝가리는 Capsicum annuum 의 변종을 많이 써서 헝가리의 유명한 파프리카 계열을 만들었다. 아프리카 고추는 대부분 Capsicum annuum이지만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모든 종을 기를 수 있다. 모로코에는 고추 종류가 다양하지만 대부분은 Capsicum annuum의 변종이다.

사람이 심지 않아도 새가 자연적으로 고추를 멀리 그리고 널리 퍼뜨린다. 새는 포유류와 달리 캡사이신에 반응하지 않고 밝게 빛나는 열매를 잘 먹는다. 절대 후추를 살 수 없는 하층민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고추를 길렀다. 고추는 음식의 맛을 좋게 할 뿐 아니라(정작 사용자들은 모르고 있음) 영양의 질까지 높인다. 고추는 중동 전역, 중국, 아프리카 등 쌀과 곡식을 식용하는 많은 문화권에서 추가로 애용되었다. 인류학자 E. N. Anderson은 다음과 같이 썼다. "양조 기술을 발명한 이래로 고추의 전파가 구세계에 가한 효과보다 큰 요리의 발전은 없었다...... 고추는 이를 받아들일 만큼 문명적인 사람들의 요리에 말할 수 없이 큰 혜택을 주었을 뿐 아니라, 비타민 A, C, 철분, 칼슘, 다른 미네랄이 풍부하고 절여서 저장하고 식용하기가 아주 쉬우며 어느 곳의 어느 조건에서든지 잘 자란다."

인도인, 특히 가난한 인도인들에게 캅시쿰 고추가 아주 빠르게 퍼졌다. 캅시쿰의이 혜택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인도의 식품학자 K. T. Achaya는 인도 남부의 작곡가 Purandaradasa (1480-1564)가 고추를 "가난한 이의 구세주, 먹으면 불이 나는 듯하며 좋은 음식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했다는 것을 알았다. 포르투갈 선원들은 영국 선원들이 라임을 먹듯이 캅시쿰을 먹어 장기간 해상 여행에서 올 수 있는 병을 막았다. 이들이 다른 나라 선원들에게도 이 비법을 알려주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불행한 이야기도 있는데, 노예가 된 아프리카인들은 캅시쿰 후추와 밀가루에 기름을 부은 "침 소스"를 먹으며 끔찍한 항해를 견뎌야 했다. 

식품 역사가이자 아랍 요리책 번역가인 Charles Perry는 "호라산(Khorasan, 현재 이란, 아프가니스탄, 투르크메니스탄에 걸친 지역)에서 온 페르시아 상인들이 카슈미르와 네팔에 피망을 전했는데, 그곳 언어로 고추를 가리키는 말이 khorsani이다." 북쪽 교역로를 통해서도 인도 불교도가 여행을 하면서 혹은 옛날 교역로를 계속 이용하며 중국 도자기, 비단과 고추를 교역하던 페르시아 상인들의 일단에 의해 중국의 내륙 지역 쓰촨성과 후난성으로 고추가 전해져 이 지역들이 매운 고추를 생산하게 되었다.

오늘날 세계의 수퍼마켓에서 유통되는 신선한 고추는 대부분 Capsicum annuum의 변종이다.
오늘날 세계의 수퍼마켓에서 유통되는 신선한 고추는 대부분 Capsicum annuum의 변종이다.

50년 남짓한 시간 동안 캅시쿰은 전세계에 퍼졌다. 후추가 내는 열 - 염기성 피페린에서 나오는 이 받던 사랑은 더 강력한 캡사이신의 매력을 지닌 캅시쿰 고추에게 넘어갔다. 식품 역사가 Ken Albala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고추는 아메리카를 발견한 직후 전세계에 퍼진 얼마 되지 않는 음식 중 하나이다. 태국, 인도, 중국 사천성이나 헝가리까지도 고추가 없다고 생각해 보라. 나에겐 그 이유에 대한 이론이 있다. [캅시쿰]은 후추보다 훨씬 더 넓은 곳에서 자라며 열대에서 수입해 오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매운 향신료로서 거의 어느 곳에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문화권에서는 고추가 환영받는 것이 더뎠다. 일찌기 후추와 피망을 모두 교역한 상인 중 하나인 페르시아인은 고추를 반기지 않았다. 페르시아 요리에서 쓸모가 없기도 했다. Charles Perry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페르시아인도 khoresh-e bamyeh (오크라 죽 - 오크라에 있는 무엇인가 때문에 고추가 필요하다) 같은 일부 요리에 피망을 넣기는 한다. 그러나 그때는 결코 고추를 넣었을 때처럼 맵지 않았다."

중동의 여러 요리가 캅시쿰 고추를 완전히 끌어안았다. 현지에서 새로운 변종이 생기는 경우가 많았다. Capsicum annuum는 여러 이종과 잘 교배하기 때문이다. 터키, 시리아 전역의 시장에서는 신선하거나 건조하거나, 갈았거나 조각낸 많은 변종에 그 "고향" 이름이 붙어서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마라스(Maraş), 우르파(Urfa), 알레포(Aleppo) 등이다.  

아프리카는 필리필리(pili pili, 스와힐리어로 "고추고추")를 사랑한다. 아프리카에서 이는 피리피리(piri piri)나 새의 눈 고추라고도 한다. 말라위, 남아프리카공화국, 가나, 나이지리아, 잠비아, 짐바브웨, 모잠비크, 남수단, 에티오피아 남부에서 자란다. 이들 지역과 인도, 인도네시아에서 상업 재배된다. 아프리카 전역에서 포르투갈인이 전래한 프리프리 핫소스를 먹는다.

쓰촨성의 요리에는 매운 고추가 빠질 수 없게 되었다. 한국인은 세계 어느 나라 사람보다도 1인당 캅시쿰 고추를 많이 먹는다. 한국인의 김치와 고추장에 들어가는 재료이다. 부탄은 고추를 열광적으로 좋아한다. 고추를 듬뿍 넣은 에마 다치(ema datshi)는 전국민적인 음식이다. 인도 남부는 빈달루 요리가 발산하는 열을 사랑하여 남아메리카나 멕시코의 생산량보다 훨씬 많이, 전세계 총 캅시쿰 생산량의 상당 부분을 재배한다. 오늘날도 루이지애나 핫소스는 미국 석유 노동자들이 찾아가서 전한 덕에 원래 입맛이 순한 중동에서 인기를 얻었다.

Andrews는 고추(pepper)라는 말이 처음부터 혼동되어 쓰였다고 한다. 긴 고추 pippali의 이름은 인도보리수, peppul에서 왔다. 피팔리(Pippali)는 또한 후추의 이름이 되기도 했다. 긴 후추와 더 친숙한 검은 알후추는 모두 캅시쿰 고추와 달리 같은 Piper과에 속한다.

캅시쿰 고추의 변종 중 무엇이 세계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지 궁금한가? 고추가 기원한 볼리비아에서부터 고추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연구한 식물학자 W. Hardy Eshbaugh가 답을 줄 것이다. 그는 논문 "고추: 운좋게 발견한 새 작물의 역사와 이용"(Peppers: History and Exploitation of a Serendipitous New Crop Discovery)에서 “Capsicum annuum이 사람이 재배하는 종 중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이다. 콜럼버스 시대 이래로 전 지구에 퍼졌다."고 말한다. 퍼듀대학교(Purdue University)의 논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천명한다. "Capsicum chinense도 이른 시기에 발견되어 세계적으로 퍼졌지만 C. annuum보다 널리 퍼지지는 않았다. 이 종이 세계에서 널리 퍼지지 않은 이유는 남아메리카에서 늦게 발견되었고 C. annuumC. chinense이 소개되기 전에 구세계에서 확고히 명성을 떨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캅시쿰 고추가 그렇게 인기를 얻은 이유는 분명하다. 먹을 것이 곡식 약간과 채소밖에 없다면, 캅시쿰 가루를 조금 넣어 식사를 좀 더 든든하게 할 수 있다. 요리에 캅시쿰 고추를 소량 넣으면 콩과 쌀에 비타민을 첨가할 수 있다. 요리에서 새로 고추맛이 나고 이미 요리하던 것에 더하기 때문에 요리라는 용어에 새 분위기를 더했다. 한 가지 맛이 다른 맛을 내고, 그렇게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다.

고추가 요리를 어떻게 바꾸었는가? 내가 처음 고추의 길을 추적하게 한 새끼양 소시지의 "전과 후" 요리법에 그 답이 있다. 13세기의 "전" 요리법과 고추를 많이 넣는 "후" 요리법을 비교하면 알 수 있다. 모두 맛있지만 개성이 있다. 학자와 모험가의 차이를 생각해 보라.

Charles Perry가 번역한 13세기 요리책 알 안달루스(Al Andalus)에 나오는 미르카(메르게스 소시지)에 원래 요리법이 있다.

미트볼(바나디크 banadiq)만큼 영양가가 있고, 다지면서 익기 때문에 소화가 빨리 된다. 먼저 새끼양의 다리나 어깨 고기를 미트볼처럼 될 때까지 다진다. 기름을 붓고 (무리 나키 murri naqi’), 고추, 고수 씨, 라벤더, 계피를 넣어 그릇에 반죽한다. 비계 3쿼터를 칼로 썰거나 도마에서 가볍게 다지고 그릇에 넣어 튀기는 동안 녹인다. 비계는 세게 두들기지 않는다. 소를 만드는 기구를 이용해 씻어낸 내장에 집어넣고 크기를 마음대로 하여 실로 묶어서 소시지를 만든다. 신선한 기름에 튀긴다. 다 익어서 노릇노릇해지면 식초, 기름으로 소스를 만들어 따듯할 때 먹는다. 고수 잎의 즙, 박하, 다진 양파로 소스를 만드는 사람들도 있다. 냄비에 기름, 식초를 넣어 요리하기도 하고 라히비(rahibi)에 양파를 곁들이고 기름을 많이 넣어 노릇노릇해질 때까지 튀기기도 한다. 어떤 방법을 써도 좋다.  

 

Deana Sidney Deana Sidney (deanasidney@gmail.com)는 뉴욕 영화 제작 디자이너이며 음식, 패션, 역사에 대한 글을 쓰고 옥스포드 푸드 심포지움(the Oxford Food Symposium)에 정기적으로 참가한다. 그녀의 블로그 "Lost Past Remembered"를 방문하는 독자들은 요리법을 배우러 왔다가 이야기를 계속 보고 있는 때가 많다.

 

This article appeared on page 2 of the print edition of Saudi Aramco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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