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 65, No. 22014년 3월/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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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나니: 그리스-이슬람 융합 의학 // 글/사진 STEWART GORDON
16세기까지 세계 최초의 의학 교과서였던 책. 그림의 페이지는 1632년에 필사된 페르시아의 사본이다.
위 왼쪽: everett collection / alamy
위: the art gallery collection / alamy
위 왼쪽: 15세기 초에 학자이자 의사였던 Mansur ibn Ilyas는 이 인간 근육계의 그림을 Tashrin-i Badan-i Insan (인체 해부(The Anatomy of the Human Body))에 넣었다. Ibn Sina의 백과사전 Al-Qanun fi al-Tibb (의학 규범(Canon of Medicine))이 나오고 4세기가 지나서 나온, 16세기까지 세계 최초의 의학 교과서였던 책(). 그림의 페이지는 1632년에 필사된 페르시아의 사본이다.

모터사이클과 스쿠터를 탄 젊은 남녀들이 높은 정문을 지나 캠퍼스 안에 주차한다. 인도 푸네(Pune)의 우나니의과대학(Unani Medical College)의 새 학기 첫날 학생들이 앞다투어 걸어서 강의실이 있는 3층짜리 건물로 들어간다. 이들은 우르두어와 영어를 섞어서 이야기하며, 몇몇은 미국의 해부학, 생리학 교재를 들고 다닌다. 이 첫 순간부터 고금과 동서를 아우르는 우나니 특유의 혼합을 보면 다른 의학적 사고방식을 만났을 때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 어디서 왔는가? 무엇을 주는가?

인도 푸네의 우나니 의과대학의 정문
인도 푸네의 우나니 의과대학의 정문

우나니 (unani)라는 말은 오늘날 터키 서부에 있는 고대 그리스의 이오니아 주를 가리킨다. 대학 교수이자 우나니 역사의 전문가인 Qaisar Khan에 따르면, 이러한 유형의 의학의 가장 깊은 뿌리는 그리스와 로마의 신체의 4요소 - 흙, 공기, 불, 물 - 의 관념과 신체의 근본적인 물리적 상태 - 주로 냉온과 건습 - 의 균형이 깨졌을 때 병이 난다는 생각이라고 한다. 균형이 깨지면 소화관, 간, 심장, 뇌와 같은 장기들이 영향을 받는다. 의사는 맥박, 호흡, 눈, 대소변을 관찰하여 불균형이 생겼음을 알고 고칠 때 약만이 아니라 휴식을 취하고 특정한 요법을 쓰며 식단과 생활 습관을 바꾸라는 조언도 한다. 우나니가 의학적으로 먼저 이용하는 것은 오랜 전통을 지닌 약초 혼합물인데, 이는 소화관 문제나 고혈압과 같은 특정한 증세를 치료한다. 그러나 우나니 의학은 약초를 기초로 하는 여타 대체의학체계와 달리, 식물에서 활성 성분만 추출하는 것이 아니라 식물을 통째로 사용한다고 Khan은 말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우나니의 역사는 오직 그리스와 로마에서 시작되었다. 그때에도 의료 처치는 의사들이 이론을 토론하고, 치료 방법을 찾고, 필사하고 개선시키면서 요법, 사상, 그리고 사고하는 학파들이 경쟁하는 중에 이루어졌다고 그는 지적한다. 고전 세계에서 이 의학적 사고와 의료 처치를 공유한 곳은 오늘날 중동, 중앙아시아, 북아프리카, 인도까지도 아우른다. 산스크리트어와 그리스어 의학 교재에 소개된 근본 4요소의 생각은 놀랍도록 흡사한데, 이 요소들이 네 가지 "기분" (젖은, 마른, 뜨거운, 찬)에 일치한다는 것까지 같다. 

서기1세기 초의 교재들과 고고학 자료를 보면 로마와 인도의 무역, 사상의 교류가 빈번했으며 흔한 일이었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의학 사상은 더 멀리 퍼져, 산스크리트 학자들이 실크로드를 따라 중앙아시아로 가서 일했으며 의학적 교류도 꽃을 피워 인도 남부와 중국에까지 이어졌다. 

총 5권으로 된 Ibn Sina의 의학 규범에 있는 이 14세기 도화는 한 곳에서 환자 상담과 약 제조를 모두 하는 장면을 그린다.
식물을 기초로 하여 혼합하는 자연적인 단순한 의학 과정이 이 크게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을 이 우나니 약사에게서 볼 수 있다.
맨 위: biblioteca estense / Bridgeman Art Library
위: mark de fraeye / wellcome images
맨 위: 총 5권으로 된 Ibn Sina의 의학 규범에 있는 이 14세기 도화는 한 곳에서 환자 상담과 약 제조를 모두 하는 장면을 그린다. 식물을 기초로 하여 혼합하는 자연적인 단순한 의학 과정이 크게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을 위의 우나니 약사에게서 볼 수 있다.

6세기에는 군데샤푸르(Gundeshapur) (오늘날 이란 서부)에 있었던 의과대학으로 비잔틴 제국, 페르시아, 인도, 중국, 시리아, 그리스와 로마의 의사들이 몰려갔다. 이들 중에는 불교도, 힌두교도, 네스토리우스 기독교도, 유교도와 유대인이 있었다. 638년 이후 무슬림 치하에서 군데샤푸르 학교는 압바스 왕조 시대에 바그다드에 있던 지혜의 집(House of Wisdom)의 모델로서 수세기 동안 존속했다. 지혜의 집은 8세기의 칼리프 Harun al-Rashid가 그리스어와 라틴어 교재를 아랍어로 번역하는 광대한 프로젝트를 시작한 곳이다. 

8세기 말, Harun al-Rashid의 장관 중 하나가 약을 구할 뿐만 아니라 인도의 의사들을 모시고 오라고 인도로 특사를 보냈는데 인도 의사들이 정말 이주해 와서 바그다드에 정착했고, 이곳에서 인도의 전통 의학 교재들이 아랍어로 번역되었다. 9세기경에 이르면 이슬람 약전이 그리스 전통 의약뿐 아니라 통상 인도 의약도 처방하게 된다. 

종이가 전해지면서 의학 서적 사본이 바그다드에서 멀리 페르시아를 거쳐 실크로드에 있는 대상들의 도시들, 동으로는 아프가니스탄, 서로는 아프리카와 이슬람 치하 에스파냐에까지 빈번하게 전해졌다. 지식인들은 이를 보고 신체, 건강, 식단, 병을 치료하는 실제적인 사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서기 900년경, 서적과 의료 종사자들의 이동은 부하라에서 카이로까지, 바그다드에서 모로코까지 논문, 서신, 논평과 질문이 왕래하여 폭넓은 지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했다.  

무슬림 의사들이 고전의 기초로부터 발전시킨 건강을 향한 폭넓은 접근을 이 시기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두 의사의 저작들에서 만날 수 있다. 서구에서 Rhazes라고 한 Al-Razi (865–925)는 바그다드, 테헤란 근처의 라이(Rayy)에서 개업했으며, Avicenna라고 불린 Ibn Sina (980–1037)는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 각국의 궁정을 옮겨 다녔다.  

이 두 사람이 받은 교육은 철학, 형이상학, 천문학, 신학, 수학, 시학과 응용공학을 아울렀다. 결과적으로 의학에 관해 저술한 이들의 저작은 환자의 환경, 기질, 생활습관과 같은 경험적인 요소와 함께 우주론적인 원인이 자주 나온다. 

압바스 왕조 시대의 바그다드(Baghdad)는 그때부터 쇠퇴한 유일한 그러나 그와 같은 책이라도 고통을 덜어 주고 병을 치료해 준다면 중요한 책일 따름이었고, 바그다드에 있는 왕궁과 이슬람 세계 여러 도시의 지식인들은 인도에서 온 약을 구하려 했는데, 순전히 약효가 좋았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강황은 항세균 작용을 하여 곪는 것을 예방하고 상처가 빠리 치유되게 한다. 강황을 먹으면 항세균 물질의 일부가 몸에 남는다. 기분 이론에도 불구하고, 개업의들은 하나를 보고 효과적인 치료법을 알아냈다. 이 경험적인 지식은 의학 서적으로 전해져, 당대의 가장 유명한 의학 서적인 Ibn Sina의 놀라운 저작 의학 규범이 나와서, 많은 부분이 인도에서 유래한 36종 이상의 수많은 열대 식물과 그 파생물을 소개했다.  

13세기에 의학 규범의 라틴어 번역본이 이태리를 통해 북쪽 유럽으로 퍼져 중세 유럽의 주요한 의학 교재가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바그다드 칼리프의 힘이 약해져 변경의 중앙아시아,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에서 압바스 왕조를 잇는 나라들이 줄지어 일어나 새 왕조를 열었다. 이들과 함께 의학 규범도 건너 가서 페르시아어와 우르두어로 번역되었다. 이러한 모습으로 보아, 압바스 왕조 시대의 바그다드(Baghdad)는 그때부터 쇠퇴한 유일한 "황금시대"가 아니었으니, 의사들은 압바스 왕조를 이은 나라들의 궁정에서도 저술을 하고 새 방법을 개발했다. 

13세기에 무굴 제국이 인도 북부를 정복함에 따라, 델리 왕조가 많은 무슬림 의사들을 끌어들였다. 이들은 그곳에서 전부터 그 명성과 번역 교재로 아유베르다라고 알고 있던 고대 인도의 의학 체계와 접했다. 

우나니 의학 치료의 기초는 식물에 있다. 맨 위 왼쪽:  우나니 의학의 이 처방서는 인도 북서부에서 흔히 쓰고 파키스탄에서 우세한 언어인 우르두어로 쓰였다. 맨 위 오른쪽/위 오른쪽 인도 하이데라바드(Hyderabad)에 있는 우나니 약국의 혼합에 쓰이는 성긴 약초와 약초 시럽  위 왼쪽: 약초원은 푸네에 있는 우나니 의과대학의 중심이다.
우나니 의학 치료의 기초는 식물에 있다. 맨 위 왼쪽: 우나니 의학의 이 처방서는 인도 북서부에서 흔히 쓰고 파키스탄에서 우세한 언어인 우르두어로 쓰였다. 맨 위 오른쪽/위 오른쪽 인도 하이데라바드(Hyderabad)에 있는 우나니 약국의 혼합에 쓰이는 성긴 약초와 약초 시럽 위 왼쪽: 약초원은 푸네에 있는 우나니 의과대학의 중심이다.

 

그 어원이 산스크리트어로 "생명 과학"인 아유베르다 의학은 그 시기에 이미 1,000년 이상 된 것이었다. 아유베르다 의학에서 신체가 4요소로 구성되었다는 것과 네 가지 기분을 기술한 것이 무슬림 의사들에게 익숙했지만, 아유베르다 의학이 강조하는 에너지의 흐름과 에너지 중심(차크라)은 새로운 것이었고 1,000종에 달하는 열대 식물을 혼합하여 만든 약제를 선정하여 백과사전처럼 소개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결과적으로, 무굴 제국에 정복된 지 수십 년이 지났을 때, 몇몇 아유베르다 의학 교재가 아랍어로 번역되었고, 14세기 초가 되면 처음에 무굴 제국 궁정에서 아랍어로 쓰이는 의학 논문이 통상적으로 지방의 아유베르다 의학 처치법과 토착 의약을 다루게 된다. (반대로 몇몇 그리스-이슬람 교재가 산스크리트어와 인도의 방언으로 번역되기도 했다). 무슬림 의사들은 데리 술탄 왕조와 후의 중부, 남부 인도의 무슬림 왕조에서 아유베르다 의사들과 함께 일했다. 1590년에 역사가이자 무슬림 아유베르다 개업의였던 Muhammad Qasim Firishta가 자신에 대해 평한 글에 아유베르다 처치법과 후에 우나니 의학이 된 것 사이의 이 대화가 들어 있다. 

이란, 터키, 아라비아에서 흔히 쓰이는 의학을 다룬 책들을 정독하고 나니 그는 인도 의사들의 저작을 공부하고 싶어졌다. Muhammad는 그들의 이론과 함께 그 의학 처치법이 잘 정립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이에 그는 그 의학 원리와 응용법, 초기 증상이 흔하지 않은 병을 치료하는 그 의학 체계를 편집하여 책을 쓸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방식으로 각 의학 계통이 다른 계통에게서 배웠다. 

폭력과 혼돈의 1707년이 지나고, 궁정 의사들에게 무굴 제국의 붕괴라는 딜레마가 닥쳤다. 일부는 남았고 다른 이들은 오우드(Oudh), 하이데라바드, 미소르(Mysore)와 같이 살아남은 무슬림 왕국에서 후원자를 찾았다. 또 다른 사람들은 북인도, 벵골, 인도 남부, 구자라트, 데칸 고원을 넘어 더 작은 왕국과 마을로 갔다. 무굴 제국의 붕괴로 인해 후에 "우나니"라고 불리는 의학이 인도 아대륙 전역에 퍼지게 된 것이다. 

18세기 말까지, 그리스-이슬람 의학은 인도에 단순히 아랍어 tibb(“의학”)으로만 알려졌다. "우나니"라는 말을를 최초로 언급한 것으로 알려진 문헌은 18세기 말 델리에서 쓰인 두 의학 논문으로, Takmila-i Unani (그리스어의 완성(Perfection of the Greek)), 그리고 Mu’ali-jat al-Nabawi (예언 치료(Prophetic Treatments))이다. 같은 시기에 서쪽의 오토만 제국으로 이주한 인도 의사들을 - 당시 그리스는 그 속주였음 - "우나니"라고 했다. 이 말은 빠르게 tibb와 동의어가 되었다. 

푸네와 델리를 보여주는 지도
지도: 셔터스톡

19세기 하반기에 우나니 의사들은 서구 의사들과 마찬가지로 대학, 시험, 졸업장, 면허, 동업 협회를 마련하고 의학의 표준을 세우면서 처치법의 체계를 세웠다. 이렇게 하는 중에 전통적인 도제 제도와 협력하여 발전하기도 했고 경쟁하기도 했다. 

서구 전통과 달리, 우나니 의과대학에는 처음부터 여학생이 있었다. 우나니 의학을 익힌 여성 개업의도 언제나 영업을 했고, 이들이 하는 일은 평소에 집안에 갇혀 있던 여성들을 진료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이는 전에 없던 전문직이었다. 이는 부분적으로 학식이 있던 보팔의 Begum과 같은 몇몇 여성 통치자 치세 덕이었는데, 그녀는 19세기 말에 30년 이상 인도 중부를 다스렸다. 여성도 건강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생겼고 여성 우나니 의학들이 학교에 다니며 훈련을 받을 필요가 생기자 여성 개업의의 수가 급속히 늘었으며, 오늘날도 우나니 의과대학의 남녀 학생 비율은 거의 비슷하다.

인도 하이데라바드에 있는 니자미아 우나니 병원(Nizamia Unani Hospital)에서 관절염 환자가 치료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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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하이데라바드에 있는 니자미아 우나니 병원(Nizamia Unani Hospital)에서 관절염 환자가 치료를 받고 있다. 아래 오른쪽: 1938년의 병원 설립을 기념하는 인도 우표
1938년의 병원 설립을 기념하는 인도 우표
DBI Studio / Alamy

1985년, 인도 입법부는 우나니를 5대 대체의학 AYUSH 클러스터(아유베르다 Ayurveda, 요가 Yoga, 우나니 Unani, 시디 Siddi, 동종요법 Homeopathy)의 하나로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정부가 공인하자 우나니 의과대학이 더 많이 설립되고 우나니 의사가 더 많이 배출되어 대중적으로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지난 20년 동안 인도 정부의 Central Council of Indian Medicine은 우나니 의과대학의 커리큘럼과 기준을 정립했고, 인쇄물과 온라인으로 전국적으로 공인된 처방서를 출판함으로써 우나니 의학의 발전과 체계화에 재정 지원을 했다. 라틴어와 현지 언어로 식물 이름을 기재한 이 데이터베이스는 여러 증상에 보이는 효과와 사용하면 안 되는 사례, 제시한 투약 용량으로 인해 현재에도 사용된다. 처방법, 유망한 식물을 과학적으로 실험하며, 그 결과를 피어 리뷰 학술지에 기고해 출판하는 지역의 우나니 연구 센터도 재정 지원을 했다. 이 센터의 실험 결과는 서구에서 제약 회사를 설립할 때 쓰이는 반복실험, 통계분석과 같은 요청을 받고 있다. 오늘날 의과대학 41곳에서 지원을 받는 우나니 의사 약 50,000명이 인도에서 일한다. 면허를 받은 아유베르다 의사보다 10배 더 많은 수이다. 

많은 우나니 의사가 1947년 인도와 분리된 파키스탄으로 이주했다. 파키스탄에서는 정부가 우나니 의학을 공인하고 훈련을 시작한 것이 196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 정부는 위원회를 설립해 우나니, 아유베르다, 동종요법 의학의 표준을 세워 개업의를 등록시키고 면허를 주었으며 연구를 후원했다. 인도 보건복지부가 전국의 우나니 의과대학을 관리한다. 거의 같은 수, 50,000명의 우나니 의사가 이 대학들에서 교육을 받으나, 이들은 시골 지역에서 1차 치료가 필요한 환자들을 대부분 진료하기에 더 의미 있는 보건 분야의 일을 하는 셈이다.  

우나니 의사가 환자의 맥박을 짚는 방식은 아유베르다만이 아니라 중국의 방법도 닮았다. 의사는 여러 손가락을 필요한 위치에 대어 각 장기를 진단할 수 있다.
우나니 의사가 환자의 맥박을 짚는 방식은 아유베르다만이 아니라 중국의 방법도 닮았다. 의사는 여러 손가락을 필요한 위치에 대어 각 장기를 진단할 수 있다.

현대 우나니 처치법에는 핵심적인 균형 사상과, 몸이 스스로 낫는 것이며 의료는 그것을 도울 따름이라는 원리를 포함한 오랜 전통이 남아 있다. 식물이 우나니 약제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의사는 환자의 맥박, 눈, 대소변을 검사하여 가족 병력과 개인의 습관을 자세히 맞춘다. 이를 통해 개인 맞춤 의료를 제공한다.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우나니 의학은 소화관 질병, 고혈압과 같이 서구 의학이 해결치 못하는 만성 질환을 잘 치료한다는 명성을 얻었다. 환자들은 의사가 자신들을 환자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 보고 헌신하는 것과 병력, 증상이 나타날 때의 정황을 주의깊게 듣는 것에 끌린다.  

이 점에 비추어, 우나니 의학은 단순히 책에 나오는 일련의 믿음의 병에 응용하는 것 이상이다. 우나니 의학은 수천 년 전에 시작하여 많은 나라와 여러 시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이르는 실제적인 치료법 연구인 것이다. 지금도 우나니 의학은 약초를 발굴해 개발하고 있다. 이제는 의료 자재를 공급하는 업체들이 단일식물 약제를 대부분 준비하여 인도 전국과 해외로 보급한다. 정부가 이 약제들을 검사하고 안전성을 점검한다.  

1985년, 인도 입법부는 우나니를 5대 대체의학 AYUSH 클러스터(아유베르다, 요가, 우나니, 시디, 동종요법)의 하나로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의사 양성에 있어서도 도제 제도는 사라지고 입학 시험이 대세가 되었다. 인도의 우나니 의학생은 다는 아니지만 대부분 무슬림이다. 우르두어나 영어로 진행하는 5년 커리큘럼에는 18개월마다 치르는 국가 시험이 들어 있고, 인턴십 1년, 자격 시험이 있는데 자격 시험을 처음 보는 사람 중 60에서 70퍼센트만 합격한다. (불합격자는 6개월 뒤 다시 응시할 수 있다). 

의학박사이자 우나니 의과대학 교수인 Rehan Safee의 이야기에 따르면, 우나니 커리큘럼의 대부분은 전세계 의학생들에게 낯설지 않다고 한다. 예를 들어, 해부학 교재는 미국의 최신판을 쓰고 있다. 시신 해부도 과정에 들어 있다. 도서관은 서구 및 우나니 의학 참고문헌과 대체로 약초를 이용한 약제법에 초점을 맞춘 학술지를 많이 소장하고 있는데, 약초 약제법은 의료 반응의 첫걸음으로 강조되는 것이다. Safee는 우나니 의학이 늘 가장 좋다거나 어떤 의료 상황에서도 배타적인 대응 수단이라는 환상은 갖지 않는다고 한다. 그는 자동차 사고로 인한 부상에서 치료하기 힘든 감염에 이르기까지 여러 경우에 서구식 병원에서 가장 잘 치료하는 때가 많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나니 의학은 관절염, 고혈압, 건선, 간염, 소화관 문제와 같은 만성 질환을 효과적으로 치료한다는 명성을 얻었다. 

푸네의 의과대학 안 정원에서 학생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19세기부터 여성 우나니 개업의의 수는 남성과 거의 비슷해졌다.
푸네의 의과대학 안 정원에서 학생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19세기부터 여성 우나니 개업의의 수는 남성과 거의 비슷해졌다.

의대생 중에는 의학, 약학, 외과학, 부인과학이나 예방의학의 석사 학위를 딸 계획을 세우는 사람, 교사, 연구자가 되려는 사람도 있다. 다른 이들은 노인요양소, 병원 또는 National Rural Health Mission으로 간다. 서구 의대생들과 마찬가지로 일반의로 개업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의학박사 Arshad Pathan은 말하기를, 대학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의사로 영업을 하는 사람들이 보는 환자 중 약 70퍼센트가 무슬림이 아니라고 한다. 

학생들이 우르두어와 영어를 함께 써서 이야기하고 미국과 인도 교재를 같이 보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으니, 이는 약초 처치법을 고유의 의료 전통으로 지키면서도 다른 의학 체계에 가장 좋은 것이 있으면 실용적으로 가져다가 쓰는 수천 년 된 전통이 이어지는 것이다. 푸네의 우나니 의과대학 같은 대학에서의 엄격한 양성 과정 덕분에 우나니 의학이 장수하는지도 모른다.  

Stewart Gordon Stewart Gordon는 미시간대학교의 동남아시아 연구센터에 소속된 독립적인 학자이다. 최근의 저작When Asia was the World은 중국어, 한국어, 아랍어를 비롯한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그의 다음 저작 A History of the World in Sixteen Shipwreckswww.stewartgordonhistorian.com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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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article appeared on page 34 of the print edition of Saudi Aramco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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