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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63, No. 32012년 5월/6월

In This Issue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항해: 무스카트의 보석
뒷 쪽의 돛대에서 바라 본 무스카트의 보석 갑판: 모든 널빤지와 선내 마루는 코코넛 섬유로 되어 있다.

높은 파도는 우리를 번쩍 들어 올렸다 다시 해구 사이로 깊숙이 빠져 들게 하며 선체를 훑고 지나갔다. 때때로, 세찬 파도가 출입문을 통해 압축됐던 공기가 몰아치듯 맹렬히 우리를 공격했다. 배의 우현으로 물이 끊임없이 들어찼고, 갑판을 넘어 갑판 승강구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 아래 있는 모든 사람과 모든 물건이 물에 흠뻑 졌었다. 재빠르게 돛대를 붙잡고 선 선원들은 뒷 갑판에 있는 각자의 위치에서 두 발로 버티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우린 벵갈 만에서 동쪽으로 50노트(92 kph, 60 mph)의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선체의 선도는 부러질 듯 팽팽해져 있었으며, 하나의 커다란 돛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압력은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아주 작은 사고라도 바로 큰 재난을 불러 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몰아치는 비와 팔락거리는 우비 모자에서 뿌려대는 물 때문에 듣는 것조차 힘들었던 우리는 18미터의 배가 잘 버텨 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마침내 2시간도 넘게 맹위를 떨치던 비바람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비록 이틀 이상 폭풍우가 우릴 괴롭혔지만, 최악의 상황은 지나갔다. 무스카트의 보석은 오만에서 싱가포르까지 가는 5개월에 걸친 인도양 항해 중 가장 어려운 시련을 당당하게 이겨냈다.

열대의 사이클론을 이겨냈다는 것은 어느 범선에게든 참으로 자랑할만한 위업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무스카트의 보석은 그 중에서도 매우 탁월하다. 9세기에 건조된 아랍 선박으로, 갑판과 구조는 모두 잇대어 만들어진 것이었고, 성공시킨 항해는 모두 뛰어남 그 이상이었다.

벵갈 만에서 열대의 사이클론을 이겨낸 것으로 무스카트의 보석은 그에 대한 가장 험난한 시험을 통과했다.

폭풍우가 지나고 며칠이 지난 밤, 나는 수평성에서 수평선으로 원호를 그리며 떠 있는 무수한 별들을 바라보며 나는 배의 키 앞에 서 있다. 겨우 2노트(3.7 kph, 2.5 mph)의 속력만을 내고 있을 뿐이고, 물이 잔잔해서 모든 별빛이 비춰 보일 정도다. 마치 우주 공간을 날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들리는 소리라곤 선체를 치는 파도소리, 조용히 들여오는 아랍어로 주고 받는 대화, 갑판의 삐걱거리는 소리와 발 뒤에 돌돌 말려 있는 밧줄뭉치 사이에서 들려오는 귀뚜라미 울음 소리 뿐이다. 비록 시간은 2010년 6월의 어느 밤이지만, 배는 마치 타임머신과도 같이 우리를 수세기전 과거로 데리고 간 듯하다.

인도양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난파선인 
                    “벨리퉁의 난파선”은 서양의 아라비아 반도 및 페르시아와 동양의 중국 사이에 직접적인 해상 무역이
                    있었음을 보여 주는 가장 오래되고 확실한 증거를 제공했다.

우리는 오만의 수도 무스카트에서 약 석 달 반 전에 항해를 시작했지만, 실제로 우리의 진짜 여행은 평범하기 그지 없었던 1998년의 그 어느 날 시작되었다. 해삼 무리를 찾아 인도네시아 벨리퉁 섬 아래 2킬로미터를 헤엄치고 있던 두 명의 다이버가 약 17미터 아래 해저에서 그보다 훨씬 값진 것은 발견해냈다. 낮은 흙무더기 속에 반은 모래에 묻힌 채 무리를 지어 있던 것은 중국의 도자기와 커다란 항아리, 그리고 바닷물에 침식된 나무로 된 갑판보의 끝부분이었다. 다이버들은 12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화물을 잔뜩 실은 아랍 상선의 잔해를 발견한 것이다. 인도양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난파선, 그것은 서양의 아라비아 반도 및 페르시아와 동양의 중국 사이에 직접적인 해상 무역이 존재했었다는 가장 오래되고 포괄적인 증거를 제공했다.

폭풍이 중앙 돛대를 세차게 내리쳤을 때, 선원들은 이와 같은 비상 시에 쓰기 위해 실어 둔 여분의 밧줄과 나무를 대어 이를 보강했다.

"벨리퉁 난파선"에서는 6만여 점의 도자기와 공예품들이 발견되었다. 여기에는 손상되지 않은 초기의 중국 청화백자, 작지만 값진 금은 세공품, 그리고 '바오리 2년(876년), 7월 6일'이라고 새겨진 중국 남부 창사의 정교한 녹색 자기와 그릇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화물의 특성상 이 배가 중국의 항구, 광저우에서 항해를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는 캠브리지 대학의 Robert Harding 교수가 주장한 내용에도 부합하는데, 그는 중국이 당나라 시대(618–907)에 중동에 고품질의 자기류를 수출하기 시작했고, 무슬림 상인들도 807년 중국으로 항해를 시작했다고 저술했다.

짐을 가득 실은 이 배는 당시 세계를 주름 잡던 두 강대국인 당나라(수도 장안)과 아바스 왕조(750-1258, 수도 바그다드)를 잇는 여행을 시작했던 것이었다. 그 배의 목적지는 바로 이란 남부에 있는 시라프 내지는 페르시아 만에 있는 바스라였을 것이다. 15세기 유럽인들이 인도양에 도착하기 이전까지 이는 12,000킬로미터에 달하는 역사상 가장 긴 항해였다.

벨리퉁 난파선과 그 배에 실린 화물은 역사학자들에게 그 시기의 선박 건조 및 탐험은 물론 아시아와 중동의 초기 무역에 대해 더 많은 사실을 밝힐 수 있는 다시 없는 기회를 부여했다. 2005년, 이 난파선이 매우 중요한 고고학적 발견이라는 사실을 인식한 싱가포르 정부는 초기 인양 작업을 진행하고 즉시 발견된 물건들에 대해 세심한 분석 작업을 시작했던 뉴질랜드 회사로부터 발견된 공예품 전체를 3,200만 달러에 구입했다.

alessandro ghidoni
맨 위: Saleh al-Jabri 선장은 배의 kamals 중 하나를 사용하는데, 이는 천년 동안 항해사들이 별의 고도를 사용해 위도를 결정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8세기까지 경도를 판단하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번 항해는 내 25년 바다 인생에서 가장 큰 도전이었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위: 배의 강도는 스티칭(박음새)의 완성도에 따라 달라진다. 모든 이음매는 코코넛 섬유로 꿰매고 채워졌으며, 모든 송곳 구멍은 전통적인 인도양의 초크와 송진 그리고 어유로 만들어진 접착제를 사용해 메워졌다.

벨리퉁 섬은 말라카 해협 동남쪽에 위치한 싱가포르 남쪽 약 620km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말라카 해협은 오랫동안 무역의 핵심 항로였다. 선박은 구입한 후 싱가포르는 외교 및 학술 채널을 동원해 이 발견이 갖는 문화, 역사 및 정치적 기회를 십분 활용하려 했다. 이러한 노력에 있어 정부의 중요한 파트너는 해양 유적으로 유명한 아라비아 반도의 남동쪽에 위치한 오만의 술탄이었다.

2008년 오만의 외무장관은 벨리퉁 난파선에 거의 흡사한 선박을 제조하는 데 자금을 지원하겠다고 합의했다. 오만의 지도자인 술탄, Qaboos bin Sa'id는 이 프로젝트에 개인적으로 큰 관심을 보이며, 선박의 이름을 무스카트의 보석이라고 명명하고, 배가 완공되었을 때 싱가포르인들에게 오만에서 선물을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싱가포르는 이를 전시할 수 있는 특별 박물관을 건축하기로 결정했다.

이 선박이 높은 진본성 및 품질 기준을 충족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오만에서는 선박 건조팀의 책임자로 호주의 해양 고고학자이자 아랍의 선박 건조 역사에 있어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Tom Vosme 박사를 초청하였다. 이들은 이 9세기의 아랍 선박을 건조하는 것뿐 아니라 이 배를 타고 인도양을 직접 항해해 봄으로써 항해 특징과 내구성까지도 조사하고자 하였다. 둘 모두 수많은 어려운 문제들이 따르는 작업이었다.

21세기에 진짜와 똑같고, 그것도 항해에 견딜 수 있는 9세기의 배를 건조하겠다고 시도하는 것은 실로 엄청난 일이었다. 불행히도 전통적인 조선공들에 대한 커다란 신뢰만 있을뿐 눈으로만 선박을 건조해 왔던 현대의 역사학자들에게는 실제로 20세기 이전의 아랍의 조선술에 대한 어떠한 계획이나 기록, 또는 문서로 작성된 설명서 하나 존재하지 않았다. 12세기에 조선공이라면 즉시 발견했을 심각한 설계상의 결점, 바다에서라면 재난을 몰고 올 수도 있는 그러한 결점이 오늘날 가장 많은 지식을 갖고 있다는 조선 기사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드디어 2008년 10월부터 오만의 수도, 무스카트 남동쪽에 있는 해안 도시 Qantab에서 조선공 및 고고학자들로 이루어진 조선팀이 17개월에 걸쳐 무스카트의 보석을 건조하기 시작하였다.

벨리퉁 난파선이 어느 정도까지는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발굴자들이 조사한 해저에는 원래 선박의 약 20%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난파선에 대한 세밀한 분석은 그 목재가 주로 9세기 동아프리카 해안에서 번성했으며, 선박 건조에 이상적이었던 탄탄한 견목재인 아프젤리아(Afzelia africana)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리고 모든 선박의 구성 요소, 즉 뼈대와 전통보 및 갑판이 전부 최소 2천 년은 거슬러 올라간 전통적인 서인도양 선박 건조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갑판은 끝과 끝이 맞물려 있는 카라벨 스타일로, 전체 널빤지들이 직접 교차해서 꿰매져 있었고, 이음매 양쪽에는 충전물이 채워져 있었다. 이러한 특성들을 바탕으로 Vosmer 박사는 벨리퉁 난파선이 인도양 북서부 지역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alessandro ghidoni
alessandro ghidoni
맨 위: 선체가 가장 먼저 건조된 배에는 20톤 이상의 목재가 필요했고, 사람 손으로 일일이 건조되었다. 위: 선체를 이루는 각각의 널빤지는 오른쪽 곡면에 맞도록 증기를 쐬어 구부려야 했다. "정말 천 년도 전에 이 거대한 나무[아프젤리아(Afzelia)]를 베고, 운반해서, 선박은 건조했던 사람들에게 경외심마저 들었습니다."라고 Tom Vosmer 박사는 말한다. "노동 강도가 엄청났을 겁니다."

설계 및 구조에 대해 누락된 정보들은 아랍의 널빤지를 이어 만든 배들에 관한 역사적 문헌이나 도해, 현존하는 사례나 사진들에서 얻거나 추론해야 했다. 그리고 이렇게 수집한 정보는 최신 선박 공학 소프트웨어를 사용해 분석하고 통합하였다. 마침내 Vosmer 박사와 그의 동료인 호주인 Nick Burningham씨, 그리고 벨리퉁 난파선을 발굴했던 해양 고고학자인 Mike Flecker 박사가 가지고 있는 모든 흔적들을 취합해 만든 컴퓨터 설계도를 완성하였다. 이 최종 결과물은 밧틸(battil)이라고 알려져 있는 오만산 배를 크게 확장한 모습과 비슷했다.

영국의 전문가들이 이 설계도를 토대로 약 10분의 1 크기로 2개의 견본을 작성했고, Vosmer 박사가 사우스햄튼 대학에서 하나는 예인 수조에 넣어, 다른 하나는 풍동에 넣어 테스트를 실시하였다. 배의 설계도가 점점 완성되어 갔다. 때때로 고통스런 시행착오도 여러 번 거쳤지만, 이는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서는 매우 중요한 과정이었다.

조사관들이 두 부분에서 설계의 취약점을 찾아 냈고, 항해를 시작하기 전에 수정해 나갔다. 처음에 그들은 선미의 모양을 수정했다. 곡면의 경사도를 약간 줄여서, 저항력을 줄이고 효율성을 높였다. 두 번째로는 주 돛대와 뒷 돛대 간의 간격을 늘렸다. 원래 설계대로 하면 뒷 돛대에 "그림자"가 지거나 주 돛대로부터의 바람을 차단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늘어난 공간으로 인해 선원들이 보다 효율적으로 두 돛대 사이에서 작업할 수 있었다.

그리고 Vosmer가 엄선한 오만과 인도의 조선공 및 목수들과 이탈리아 및 미국의 해양 고고학자들로 구성된 조선팀이 드디어 2008년 10월, 무스카트 남동쪽의 해안 도시인 Qantab에서 배의 건조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후 17개월 동안, 이들은 찌는듯한 무더위를 견뎌내고, 9세기 아랍의 선박 기술자들이 도입했던 지식과 기술을 재발견하고 실행에 옮기며 연이은 설계 문제들을 해결해 갔다. 문헌이 너무 적었기 때문에, 무스카트의 보석을 건조하는 데는 이론을 세운 다음 이를 실험하여 분석하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매우 지치고 힘든 과정이 요구되었다.

선박 건조에는 15톤의 아프젤리나 아프리카나(Afzelia africana)(더 이상 동아프리카 해안에는 자라지 않기 때문에 가나에서 채취함)와 5톤의 티그 및 그 밖의 다른 목재 수 톤이 사용되었다. "정말 천 년도 전에 이 거대한 나무[아프젤리아(Afzelia)]를 베고, 운반해서, 선박은 건조했던 사람들에게 경외심 마저 들었습니다"라고 Vosmer 박사는 말했다. "노동 강도가 엄청났을 겁니다." 그리고 이를 모두 한데 묶기 위해 선박 기술자들은 코코넛 섬유를 사용해 손으로 직접 짠 130킬로미터의 밧줄을 사용하였으며, 널빤지와 이음매 사이의 방수를 위해 수백 리터의 코코넛 및 상어 기름을 사용했다. 그리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기술과, 결단과 열정이 쏟아 부어졌다.

인도양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난파선인 
                    “벨리퉁의 난파선”은 서양의 아라비아 반도 및 페르시아와 동양의 중국 사이에 직접적인 해상 무역이
                    있었음을 보여 주는 가장 오래되고 확실한 증거를 제공했다.

진본성을 지키기 위해 기술자들은 톱, 까뀌, 끌, 망치, 그리고 널빤지에 평행선을 표시할 때 사용하는 qalam이라고 부르는 간단한 측정 기구를 비롯해 전통적인 수공구들을 사용했다. 다만 현대 기술을 용인한 부분도 몇 군데 있었는데, 그것은 손의 힘을 사용하는 아랍의 활비비(송곳의 일종)인 전통적인 migdah가 아닌 전기 드릴을 사용한 부분이었다. 이 활비비는 매우 기발하고 효과적인 장치이긴 하지만, 전기 드릴에 비해서는 10배나 느린 것으로 드러났다. 연결을 위해 선체에 37,000개의 구멍을 뚫어야 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리고 겨울 계절풍을 이용한 항해를 위해 촉박한 마감일 안에서 작업을 서둘러야 했던 점을 생각할 때, 이러한 어느 정도의 타협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것이었다.

Vosmer 박사와 그의 팀이 해결해야 했던 가장 중요한 선박 건조 문제는 널빤지의 모양을 어떻게 잡느냐는 것이었다. 당시 모든 아랍 배들과 마찬가지로 벨리퉁의 난파선은 먼저 선체부터 건조되었다. 이는 전통적인 서구의 건조 기술과는 정반대의 것으로, 서구 건조 기술에서는 뼈대가 먼저 건조되고 나중에 갑판이 올려져, 늑재에 맞춰 고정된다.

선체 선행 방식은 선체를 이루는 널빤지들이 뒤틀리거나 서로 간에 접착되도록 앞부분이 휘어진다. 수많은 시험 끝에 건조팀은 나무로 된 스팀 상자를 제작했다. 이 스팀 상자에 2시간 동안 널빤지를 넣어 두면, 5-7미터 길이의 널빤지가 구부리기 쉬워져 선체의 적절한 부분에 고정시킬 수 있는 상태로 변한다. 다만 널빤지들이 이 상자에서 나온 뒤 단 몇 분 동안만 유연한 상태를 유지하기 때문에 기술자들은 신속하게 작업을 수행해야 했다. 그러나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시스템은 효과가 있었고, 각 층의 널빤지들이 제 위치에 올려 졌을 때, 선체는 그 우아한 모습을 드러냈다.

식사 시간엔 9개국에서 모인 17명의 선원이 식판을 들고 갑판에 둘러 앉아 전통적인 목재 조리대인 matbakh에서 준비된 밥과 말린 물고기로 된 간단한 식사를 했다.

함께 널빤지들을 이어가는 작업은 이의 모양을 잡는 일 만큼 중요했다. 널빤지에 구멍을 뚫고 나면, 섬세한 손길로 이를 한데 밧줄로 꿰매어 이어야 했다. 배의 강도가 전적으로 그러한 스티칭 작업의 완성도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벨리퉁 난파선에 대한 조사를 통해 일련의 코코넛 섬유로 된 충전재들이 이음매 양쪽에 추가되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그런 다음 밧줄로 이를 연결한 것이었다.

eric staples
맨 위: 배 안의 숙소 역시 9세기의 모습을 그대로 지켰다. 다만 바닷물이 새는 것을 막기 위해 비닐 시트를 선택한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위: 무스카트의 보석은 손잡이를 조정해 운전하는 한 쌍의 키와 밧줄로 움직이는 중앙의 키로 구성되어 있었다. 전자는 전통적인 9세기 방식이고 후자는 새로운 기술이다.

처음 이 시스템은 이렇게 연결된 이음매를 마모에 좀더 취약하게 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실지로 몇 세기가 지나 아랍의 조선 기술자들은 외부의 충전재를 없애고 대신 외부 이음매를 납작하게 하여 마모에 위험을 줄이고 끌리는 것도 방지하였다. 그러나 무스카트의 보석의 기술자들은 이전 방식을 고수하기로 하였고, 머지 않아 그 이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외부 충전재는 꿰어진 밧줄과 이음매 자체에 완충 효과를 주었고, 일단 어유가 스며든 후에는 바닷물에 대한 보다 두터운 장벽을 제공하였다.

밧줄 기술자들은 조를 이뤄 작업하였다. 한 팀이 선체를 담당하면 다른 팀은 외부를 맡았다. 이들은 나무로 된 커다란 밧줄 스파이크와 나무 망치, 밧줄을 임시로 고정시키는 나무로 된 작은 마개 등을 비롯해 가장 단순한 도구들로 작업했다. 한 사람이 밧줄을 널빤지에 뚫린 구멍에 끼워 넣고 적당히 잡아 당긴 후 충전재 위로 밧줄을 지나가게 한 다음 구멍으로 통과시켜 다른 쪽에 있는 동료에게 넘겼다. 밧줄이 당겨지는 강도가 매우 중요했다. 너무 세면 툭하고 끊기거나 꺾이고, 너무 약하면 널빤지 사이에 틈이 생긴다. 밧줄로 널빤지들을 이어 붙이는 작업이 끝났을 때, 각각의 구멍에는 빽빽하게 뭉쳐진 코코넛 섬유로 조심스럽게 채워졌고, 초크, 송진 및 어유를 사용해 인도양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진 접합제로 봉인되었다.

벨리퉁 범선을 재건조하는 데 따른 문제들이 해결되자 프로젝트의 두 번째 단계가 시작되었다. 2010년 2월 16일, 무스카트의 보석은 무스카트의 무트라 항구를 미끄러지듯 헤엄쳐 넓은 대양으로 나아갔다. 오만인 선장 Saleh al-Jabri가 이끄는 17명의 다국적 선원들과 함께. 인도까지 가는 느리고도 무더운 항해 여정 동안 우리는 점차 고된 일들을 견뎌내야 했지만, 바다에서의 삶은 참으로 단조로움 그 자체였다.

식사 시간에 우리는 식판을 들고 갑판에 둘러 앉아, 전통적인 목재 조리대인 matbakh에서 준비된 밥과 말린 생선 같은 간단한 음식을 먹었다. 바람이 거의 불지 않는 상태가 되고 온도와 습도가 급격히 올라가자, 우리는 자연 앞에서의 인간의 무기력함을 절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몇 세기 전의 뱃사람들과 그랬을 것처럼 장엄한 저녁놀 빛에 경탄하였고, 뱃머리에서 장난치는 돌고래들의 장난에 즐거워했다. 또한 우리는 언어와 문화의 차이, 그리고 비좁은 공간, 수면 부족 및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열기로 인한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한 배의 선원으로서 협력하고 공통의 목표를 향해 열심히 일했다. 우리는 인도, 스리랑카,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이탈리아, 호주, 미국, 영국 및 오만에 이르기까지 9개국의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았고, 각자의 재능과 경험을 존중하는 법을 배웠으며, 각자가 성공적인 항해를 위해 수행하고 있는 저마다의 역할에 감사해 했다.

한 선원이 야자잎으로 엮어 만든 돛의 구멍을 마모시킬 수도 있는 마닐라 섬유로 된 장비에 보호 장비를 덮고 있다.

우리가 바다에서 수행해야 할 일 중에는 배의 가장 중요한 각종 기능들의 효과를 기록하는 일도 포함되었다. 예를 들어, 무스카트의 보석을 설계하고 건조하는 동안 Vosmer 박사와 그의 팀이 고민했던 중요한 문제는 배에 어떤 종류의 돛을 장착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벨리퉁 난파선에는 장비에 대한 증거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Vosmer 박사는 초기 문헌과 도해를 연구하여 실마리를 찾아내야 했다. 그가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벨리퉁 난파선은 큰 삼각돛이 아닌 사각돛을 달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기원전 4세기부터 아랍인들이 큰 삼각돛이나 긴 돛(앞쪽의 일부분이 잘라진 삼각돛)을 사용했었다는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학설에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Vosmer 박사에 따르면, 15세기 유명한 아랍의 선원이었던 Ahmad ibn Majid는 일반적인 사각형의 모양을 취하고 있는 페가수스자리가 인도양을 항해하던 선박의 돛의 모양과 닮아 있다고 썼다는 것이다. 게다가, 12세기 중반부터 16세기까지 인도양을 누비던 배들을 그린 수많은 그림들이 사각 돛을 달고 있는 아랍의 선반을 그리고 있다. 특히 몇몇 그림은 주 돛이나 배 후미에 있는 돛 꼭대기에 까마귀의 둥지가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었는데, 이는 큰 삼각돛을 단 배에서는 볼 수 없는 형상으로, 배가 맞바람을 받거나 바람을 타고 가는 경우에는 돛대의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돛의 활대를 전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다에 나가자 우리는 사각 돛이 얼마나 실용적인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바람을 맞거나 탈 때 다루기가 훨씬 쉬울 뿐 아니라 적절하게 균형을 잡을 경우에는 겉보기 풍속("실제 풍속"과 배의 이동하는 물체에서 측정한 풍속의 합)이 거의 51도에 가까웠다. 이는 올바른 상태에서는 더 많은 바람을 "이용"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고 효과적으로 항해해 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아마도 이것이 인도양을 누비던 많은 배들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사각 돛이 지속되었던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또 다른 질문은 무스카트의 보석에서 사용할 조항 장치의 종류였다. 벨리퉁 난파선이 특히 흥미로운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 배 설계 기술의 기술적 변환기에 건조되었다는 점이었다 . 9세기 이전 천년 동안 배는 그 방향을 조정하는 데 쿼터 러더(선체의 양쪽에 고정된 긴 노 모양의 키) 방식을 사용했다. 각각은 키 손잡이를 통해 조정하였다. 배가 우현으로 바람을 받으며 달릴 때(예, 오른쪽에서 부는 바람을 이용해 달리는 경우)는 키잡이가 전면의 키를 사용하고, 그렇지 않은 때는 반대가 되는 식이었다. 그러나 9세기경 아랍에서는 배의 선미재에 하나의 중앙 키를 고정하기 시작했다.

말레이시아 해안의 멋진 여명이 세계에서 가장 분주한 항로인 말라카 해협에 무스카트의 보석이 도착하고 있음을 알리고 있다.

뱃사람들은 새로운 기술에 있어 상당히 보수적인 편이다. 그 동안 통용되던 확실한 방식을 고수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인지 각종 문헌 및 도해 상의 증거들도 이 새로운 유형의 키 방식으로의 완벽한 전환이 이루어지기까지 약 3세기가 걸렸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건조 기술자들은 무스카트의 보석에 양쪽 시스템 모두를 갖추었다. 적절하게 사용할 경우, 이들은 서로를 잘 보완하였다. 과거 뱃사람들이 완벽하게 전환을 끝내기까지 그토록 오랜 시간을 기다렸던 것도 이 때문인지 모른다. 바람이 매우 적을 때는 중앙 키가 가장 효과적이었다. 반면 바람이 약간 불거나 중간 정도로 불 때는 쿼터 러더 방식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그리고 바람이 세고 바다가 거칠 때는 종종 두 시스템을 동시에 사용하였다. 중앙의 키가 추가적인 제어력을 제공하기 때문이었다.

아마 이 항해에서 얻은 가장 중요한 기술적 성과는, 대부분의 초기 유럽인들의 관찰 내용과는 반대로, 널빤지를 이어 만든 배가 매우 튼튼할 수 있다는 것이다. 15세기 마르코 폴로는 페르시아의 호르무즈 해협에 있는 이러한 배들을 보고 이렇게 기록했다.

호르무즈에서 건조한 선박은 최악이다. 항해를 하기에 위험하여, 이를 사용하는 상인과 사람들을 커다란 위험에 처하게 한다. 선박의 그러한 결점은 건조에 못을 사용하지 않는 점에서 기인한다... 그들은 코코넛의 껍질을 벗겨 짠 일종의 밧줄로 이들을 한데 엮는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은 이러한 주장과는 첨예하게 다른 것이었다. 실제로 무스카트의 보석은 설계자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구조 면에서 훨씬 강력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벵갈 만의 폭우를 비롯해 항해 내내 수많은 험난한 폭풍우를 견뎌내야 했지만, 선체에는 아무런 손상도 발생하지 않았다. 또 항구를 들고 나면서 밧줄을 통해 예인되며, 예인선에 밀리고 부딪치는 굴욕을 겪어야 했고, 부두에 닿아 혼잡한 항만의 오염 물질들에 노출되었을 때도 전혀 손상을 입지 않았다.


건조에 적용되었던 기록의 진본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에도 불구하고 무스카트의 보석의 향해 기간 동안 우리는 안전상의 이유로 방향을 잡는데 별이 아닌 인공위성을 사용하는 gps가 제공하는 보다 정확한 정보를 토대로 항해를 해야 했다. 이 장치는 사용하는 데 특별한 기술이 요구되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우리는 오래 전 뱃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도구 없이도 그렇게 잘 항해할 수 있었을까를 생각하며 끊임없이 겸허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아랍의 선원들은 13세기부터 나침반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이는 서양 배들의 표준 장비가 되었다. 이 이전에는 카말(kamal)이라고 불리는 간단하지만 독창적인 도구를 사용했는데, 이는 직사각형의 나무로 된 도구였는데, 여기에는 고정된 옹이가 달린 줄이 매달려 있었다. 팔 길이만큼 펴서 잡으면 아래쪽 끝이 수평선에 닿는 카말은 수평선에서 기준이 되는 별(북극성)의 고도를 측정해 위도를 파악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경도를 측정하는 믿을 만한 방식은 갖추고 있지 않았다.

뛰어난 아랍 탐험가인 Ibn Majid와 Sulaiman al-Mahri가 쓴 15세기 및 16세기의 놀라운 문헌에는 고대 뱃사람들이 태양과 해류와 바람, 그리고 바다의 색깔과 바다 생물을 관찰해 낮 동안 항해를 계속했던 방법이 설명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항해사들의 놀라울 정도로 세부적인 천체에 대한 지식이 야간 항해의 주된 수단이었다고도 기록하고 있다. 미국의 해양 역사학자이자 이번 항해의 참가자 중 한 사람이기도 했던 Eric Staples 박사가 항해를 시작하기 전은 물론 항해가 진행되는 내내 이러한 문서들을 연구하였다. 카말의 사용에 관해 가능한 많은 것을 알아내고, 오래된 문헌에서 찾은 방법과 현대적 방법들을 비교하기 위해, 그는 몇 가지 버전의 장치를 도입해 아랍의 항해사들이 전통적으로 사용했던 14개의 별과 별자리의 고도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다.

오만을 떠난 지 138일째 되던 날, 무스카트의 보석은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 곳에 기증되어 Maritime Experiential Museum에서 영구적으로 전시되고 있다.

카말을 사용하는 일은 심지어 이상적인 환경에서조차 상당한 연습이 필요하다. 그런데도 구름 낀 밤이나 폭풍우가 치는 동안에는 사용할 수가 없다. 다행히 우리의 항해는 벵갈 만에서의 폭풍 이후에는 비교적 평화롭게 진행되었고, 그래서 우리는 보다 규칙적으로 별자리 읽기를 시도해 볼 수 있었다. 매일같이 우리는 말라카 해협의 남쪽에 위치한, 우리의 최종 기착지에서 두 번째 떨어져 있는 말레이시아의 페낭을 향해 동쪽으로 이동해 갔다. 수마트라의 해적과 세계에서 가장 분주한 대양 항로를 오가는 초대형 유조선을 피하기 위해 주의해 가면서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출발한 지 138일이 지나 우리는 싱가포르의 항구에 도착했고, 수많은 지지자들과 동료, 친구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뒤이어 오만과 싱가포르의 고위 인사들이 주최한 환영회가 이어졌고, 선장 al-Jabri로부터 싱가포르의 대통령 S. R. Nathan에게로의 무스카트의 보석의 공식적인 이 양식이 진행되었다.

"이번 항해는 내 25년 바다 인생에서 가장 큰 도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랍의 해양 역사에 대해 우리가 배운 것들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대단한 가치가 있는 항해였습니다"라고 al-Jabri 선장은 말했다.

배의 도착을 준비하는 모든 자질구레한 일들을 처리하는 와중에 항해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그것은 대단한 모험이었고, 우린 고대 아랍의 배와 항해술에 대해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러나 무엇보다 고대 아랍 선원들이 지나갔던 궤적을 그대로 따라 항해했던 우리의 경험은 그들의 지식과 기술, 그리고 용기에 대해 무한한 경의를 표하게 했다.

9세기, 나침반도 없이, 어렵게 얻은 바다와 바람, 그리고 별에 대한 경험과 지식만을 가지고 그들은 인도양의 거대한 바다를 헤쳐 나갔으며, 교역은 물론 신뢰와 우정을 바탕으로 사람과 국가를 하나로 이어 주었다. 이것이 바로 무스카트의 보석의 진정한 전설이며, 앞으로도 계속 다음 세대를 위해 그를 찾는 방문객들에게 전할 메시지인 것이다.

Peter Jackson Robert Jackson([email protected])은 오만의 무스카트 미국국제학교(he American International School of Muscat)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At Empire's Edge: Exploring Rome's Egyptian Frontier(Yale, 2002)가 있으며, 현재 그는 서인도양 지역의 초기 무역의 역사에 관해 연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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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팀

This article appeared on pages 25-33 of the print edition of Saudi Aramco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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