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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63, No. 32012년 5월/6월

In This Issue

뾰족 아치의 탄생
람라 지하 저수조의 뾰족 아치는 789년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였던 하룬 알 라시드가 명하여 건축한 구조물이다.

텔 아비브에서 약 한 시간 정도 남동쪽으로 떨어진 8세기의 람라 지하 저수조는 사실은 그다지 저수조처럼 보이진 않는 모습을 하고 있다. 정원 화단에 놓여 있는 것처럼 길게 늘어진 흰색의 돌무더기와 그 사이사이 보이는 구멍으로는 줄을 매단 두레박을 늘어뜨릴 수 있을 것 같은 모양으로, 아랍 이름으로도 Bir al-'Aniziya, "염소치기의 연못"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 중요성 뿐 아니라 왜 "아치의 연못"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다.

저수지의 지하 방으로 이어지는 이끼가 낀 계단형의 낮은 천장을 두드리며 "머리 조심하세요"라고 관리인은 말했다. 연기가 피어 오르는 진초록색의 물이 타고 흐르고 있었다. 수면에 이는 물의 파장을 통해 햇빛이 비치고, 동굴 같은 아치의 네트워크가 어지럽게 이어지고 있었고, 각각은 뾰족한 기둥에서부터 위쪽으로 우아하게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역사학자 및 건축학자에게는 "첨두 아치" 또는 간단하게 "뾰족" 아치로 알려져 있는 이 아치들은 789년 에 만들어진 것으로, 이슬람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아치들로 당시 건축 역사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변화는 미학적이면서 동시에 구조적이다. 이후 건축물들과 비교해 보면, 반원형인 "로마 아치"는 다양한 각도로 우아하게 끝이 점점 가늘어지는 뾰족 아치이며, 높이가 높아질수록 더 가벼워진다. 구조적으로 뾰족 아치는 대개 로마 아치에 비해 3배나 무거운 무게를 떠받칠 수 있어서, 과거에는 서구 유럽의 거대 중세 성당 건축자들이 아찔한 높이까지 벽과 천정을 올릴 수 있게 해 주던 핵심 건축 기능 중 하나였으며, 이를 기반으로 어지럽기까지 한 고딕 스타일이 탄생할 수 있었다. 고딕 건축가들은 람라의 지하 저수조와 아랍 세계의 다른 구조물들에 크게 도움을 받았다. 이 구조물들에서 뾰족 아치는 유럽의 건축 어휘에 그런 단어가 등장하기도 몇 세기 이전에 이미 나타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가능했을까? 어떻게 샤르트르와 상스, 솔즈버리, 그리고 다른 수많은 고딕 건축물의 높이 솟아오르는 듯한 인테리어가 태양이 이글거리는 아랍 도시의 지하 저수조의 그것을 이어받을 수 있었을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나는 5개국과 몇 세기에 걸쳐 있는 뾰족 아치들을 추적하였다. 그리고 그 여행의 끝에서, 바로 고딕 건축물이 태어난 도시, 파리를 만났다.

"총은 별로 무섭지 않아요"라고, Alistair Northedge는 이 멀고 먼, 그리고 때론 위험하기까지 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중동의 다른 정치적으로 위험한 지역들에 위치한 고고학적 보물들을 따라 갔던 자신의 여행을 한 마디로 압축해 설명했다. 나는 파리의 유명한 국립 도서관 옆, 국립 미술 사학회에 있는 비교적 편안한 분위기의 그의 사무실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뾰족 아치의 기원을 추적하는 일은 상당히 까다로운 작업이었다고 Northedge는 말했다. 오래된 예들, 예를 들어, 이라크 북부 지역에 있는 사산 왕조의 6세기 거대 크테시안 아치라든가 시리아의 Qasr ibn Wardan 지역의 오래된 비잔틴 교회 등에 있는 아치를 모두 전형적인 뾰족 아치로 볼 것인지, 아니면 뾰족 아치의 앞 세대를 이루는 포물선 형태의 구조물로 볼 것인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기 때문이었다.

hemis / alamy
7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쿠사이르 아무라의 부드러운 뾰족 아치는 구조적인 측면에서 매우 장식적인 기구였을 수 있다.

"일부 초기 출입구들에서 아치들이 뾰족한 형태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라고 Northedge는 말했다. "그러나 이것들이 의도적으로 심미학적으로 표현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8세기 전반의 옴미아드 시대에 의도를 갖고 이를 심미학적으로 건축했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입니다."

Northedge의 판단에 따르면 뾰족 아치의 가장 초기 형태 중 몇몇이 Qasr al-Kharanah 및 Qusayr 'Amra 같은 요르단의 "사막의 성"에서 나타난다. 이들은 각각 710년과 715년에 지어진 것으로, 당시는 옴미아드 왕조가 시리아를 지배하던 때였다.

뾰족 아치(오른쪽)은 반원형 아치(왼쪽)의 3배에 달하는 무게를 지지할 수 있다.

"뾰족 아치는 꽤 가볍고 얇습니다. 그러나 중앙에 2개의 서로 다른 호가 교차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라고 그는 설명했다. 원호 아치는 중심이 하나인데 반해, 뾰족 아치는 중심이 최소 2개는 됩니다. 중심점 간의 거리가 아치의 정점에서 양측이 만나는 각도를 결정합니다. "뾰족한 정도"를 결정하는 것이죠." 먼 옛날 초등학교 시절에 배웠던 기하학이 도움이 될 것이다. 곧게 뻗은 몸체 중간에 스파이크가 나와 있는 제도용 컴퍼스를 생각해 보라. 선의 한 쪽 끝에서 다른 쪽으로 연필을 이동시키면 중심점이 하나인 반원이 완성된다. 하지만 스파이크를 중앙에서 한쪽으로 치우치게 이동시키고 원호를 그리면, 중심점이 중앙의 다른 쪽으로 옮겨가고, 두 번째 원호는 서로 교차하는 2개의 원호를 만들게 된다. 바로 뾰족 아치인 것이다.

둥근 아치가 셀 수 없이 많은 로마의 수도(송수로)에 쓰일 만큼 튼튼하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이 아치도 높은 곳에 가면 이들이 벽으로 향하는 바깥쪽을 지지하는 무게가 분산되기 때문에 약해진다. 따라서 아치가 높을수록 벽이 더 강력하고 두꺼워져야 한다. 실용성이 떨어지거나 비용 문제가 발생되지 않으려면 벽이 그렇게 두꺼워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뾰족 아치는 아래 쪽이나 땅으로 향하는 무게를 상당 부분 버텨내기 때문에 보다 얇고 높은 벽을 지탱할 수 있는 것이다.

뾰족 아치가 동양에서 서양으로 건너 갔다는 사실은 미술사가, 고고학자 및 건축가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활동했던 영국의 유명한 건축가이자 런던에 있는 세인트폴 대성당의 설계자이기도 한 Christopher Wren경은 "우리는 현재 이것을 고딕 방식의 건축물이라고 부르는데…, 나는 오히려 이것을 사라센 [아랍] 양식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주장에 대해 누군가 조금이라도 의심을 한다면, 페즈에 있는 모스크나 궁전, 또는 무어인들이 건축한 스페인의 성당을 보라고 이야기할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버려졌던 Wren경의 통찰력은 대학에서 사용한 첫 미술사 교재 중 하나였던 Medieval Art(1904)의 저자인 W. R. Lethaby(1857-1931)를 비롯한 후대 건축사학자들에 의해 재조명되었다. "고딕 양식에는 구조나 강도면에서 동양의 특징이 훨씬 많이 드러난다"라고 Lethaby는 적고 있다. "페르시아의 이집트 사라센 및 무어 양식이 고딕과 매우 흡사한 양식들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유럽에 뾰족 아치에 대한 지식을 소개한 것은 동양에서 돌아온 십자군의 기사들이었다는 의견이 이러한 견해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이론에 반론을 제기한 이들도 많았다. 이후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알려진 T. E. Lawrence이라는 이름의 별난 옥스포드 학생은 1908년 그의 졸업 논문에서 "십자군이 자신들이 성지에서 보았단 요새에서 무엇인가를 가져 왔다"는 데는 "아무런 증거도 없다"고 주장했다.

현대에 와서 가장 먼저 뾰족 아치의 동양 기원설에 대해 지지했던 이들 중에는 그 유명한 K. A. C. Creswell도 속해 있다. 1879년 런던에서 태어난 Creswell은 AUC(American University in Cairo)의 첫 번째 이슬람 미술 및 건축 교수였으며, 일반적으로 이 분야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여러 권으로 구성된 그의 저서 Early Muslim Architecture와 그에 못지 않게 방대한 Muslim Architecture of Egypt는 책장에 늘어 세울 경우 그 길이가 거의 1미터에 달한다. 단련된 저술가였던 Creswell은 공학자의 눈으로 연구를 수행하며, 이집트에서 유프라테스강 지역에 위치하는 수많은 건축물들의 사진을 찍고, 분류하며, 측정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뾰족 아치의 진화"는 "두 중심점의 점진적인 분리"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 중동의 여러 지역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아치들의 날개 폭의 아주 작은 변화와 차이를 비교함으로써 이러한 발전 과정을 기록했던 그는 뾰족 아치는 원래 "시리아가 기원"이며, "유럽에서는 11세기 말이나 12세기 초까지는 어떤 예도 알려져 있지 않다"라고 결론지었다.

Northedge는 아랍 땅에 있는 아치의 역사는 오직 돌, 그 위에만 쓰여져 있기 때문에 Creswell이 진행한 것과 같은 연구들이야말로 역사가들이 계속해서 진행해 나가야 할 최상의 증거 자료라고 이야기했다. 또 "그들[초가 무슬림 건축가들]은 자신들의 건축물에 대해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라며 그는 탄식했다.

Northedge의 사무실에서 가까운 거리에 유럽 최고의 고딕 성당의 석공들이 뾰족 아치에서 첫 번째 암시를 받은 곳이 있다. 바로 생 드니의 대수도원 성당이다. 이 곳의 전체 디자인은 고딕 건축물의 탄생지이자 이의 산파 역할을 했던 쉬제르(Suger) 수도원장의 집으로도 유명하다.

미술관 수집품/alamy
파리, 생 드니의 수도원장 쉬제르에게 뾰족 아치는 공학적 측면에서도, 철학적 측면에서도 모두 의미가 있었다. 수도원장의 이미지(위)가 생 드니 수도원(아래)을 밝게 비추는 수많은 스테인드글라스 창 중 하나에 나타나 있다.

1081년 태어난 쉬제르는 그가 열살 때 가난했던 그의 가족이 "노동 수사"로 그를 맡겼던 생 드니에서 일생을 마칠 것처럼 보였다. 이후 왕이 될 루이 6세와 함께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던 쉬제르는 1122년 수도원장이 되었다. 그 당시 무너져가던 8세기 수도원 성당은 엄청난 수리와 확장 공사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1135년 쉬제르는 건축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이제는 그 이름도 잊혀진 수많은 건축가들이 함께 했던 이 프로그램은 성당의 어두운 내부의 로마네스크 양식을 무엇인가 밝게 빛나고 가벼우며, 말 그대로 새로운 양식으로 바꾸자는 것이었다. 그의 설계는 최초로 고딕 건축물의 가장 중요한 구성 요소가 되는 것들을 담고 있었다. 뾰족 아치, 그리고 이 뾰족 아치들이 더 많은 무게와 건물 상부의 둥근 천장을 지탱할 있게 해 주는, 동양의 또 하나의 신기술이었던 플라잉 버트레스(Flying Buttress). 그 결과는 하늘로 솟아 오를 것 같은 천정과 중력을 거스르는 듯한 벽, 그리고 돌보다 훨씬 많은 스테인드글라스가 조화를 이룬 입이 벌어질 정도로 놀라운 내부 모습이었다. 이 창들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은 쉬제르의 표현 그대로인 "빛의 왕관"으로 거대한 실내 장식을 비추었고, 수도원장의 전체 건축 구성에서 상징적이고 신학적인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었다.

John kellerman / alamy

"어리석은 마음들이 이를 진실을 향해 일어서고, 이 빛을 보며 과거의 죽음에서 소생한다"라고 그는 말했다. 즉, 빛은 신비주의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되었으며, 세속에 얽매인 인간의 마음과 영혼을 신에 더욱 가깝게 들어 올리겠다는 뜻이었다. 이것은 고대 후기 교회의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주장과 같은 것으로, 쉬제르는 그들의 가르침을 동경했으며, 특히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라고 알려져 있는 5세기의 시리아 기독 신학자를 신봉했다. 그는 신의 존재를 "세례의 빛과 모든 이의 마음을… 비추는 빛의 흐름"이라고 보았다. 2세기 후, 유사한 비유가 코란(24:35)에도 나와 있다. "신은 하늘과 땅의 빛이다. 신의 빛에 대한 비유는 또 마치 벽감과 그 안에 있는 등불과도 같다. 유리로 둘러싸인 등불과 마치 빛나는 별과 같은 유리…. 빛에 빛을 더하라! 신께서 그의 빛으로 인도하리라"

그의 철학적 견해가 그대로 반영된 쉬제르의 생 드니 수도원 설계에는 긴 지붕이 있었다. 루이 6세의 일대기에 그는 그의 성당에 대한 영감을 어디서 받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는 단서를 남겨 두었다. 그것은 부르고뉴 남부에 있는 클뤼니 수도원에서 왕의 임무를 수행할 때였다. 그것은 1130년이었고, 생 드니 대성당 건축을 시작하기 5년 전이었다.

쉬제르에게는 아마도 말을 타고 1주일이 넘게 걸렸을 파리에서 클뤼니로의 여행은 내게는 기차로 4시간이 걸리는 여행이었다. 그러나 사실 나는 그보다 약 200년이나 늦어 있었다. 프랑스 대혁명의 반 종교적 열정의 희생양이었던 수도원은 18세기 후반에 해체되어 그를 이루던 돌은 하나하나 지역 건축업자들에게 팔려 나갔다. 그럼에도 클뤼니의 명성은 아직도 방문객들의 끌어 들이고 있으며, 마치 그것이 중세 유럽에서 가장 거대한 교회이자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베네딕트회의 한줄기였던 퀼뤼니파 수도사들의 본산이었던 때와도 다를 바 없었다.

1130년 쉬제르가 방문했을 당시 클뤼니 성당에 있던 수뮈르의 성 후고(Hugh of Semur)의 30미터짜리 아치의 수는 200개를 넘었다.

생 드니와 마찬가지로 클뤼니에도 매우 독창적이고 야심 찬 수도원장 휴고가 있었다. 역사가들에게 클뤼니 3기로 알려져 있는 그의 수도원 중축의 역사는 1088년에 시작되었고, 그가 죽은 후에도 쉬제르가 방문했던 바로 그 해인 1130년까지 계속되었다. 클뤼니 3기가 거의 끝날 무렵에도 복원 전문가들의 도움으로 동양에서 서양으로의 아치의 여행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30미터 높이의 뾰족 아치를 비롯해 여러 가지 것들이 남아 있었다.

우리가 들어 섰을 때 "여기서는 아치가 교회를 열고 빛으로 가득 차게 했던 방식을 볼 수 있습니다"라고 Matthias Mai씨는 말했다. 외벽의 채광창은 아치에 달려 있던 둥근 "원형 창"과 함께, 많은 빛을 받아 들여, 휴고 원장과 동시대를 살았던 전기작가가 묘사했던 대로 "하늘의 백성들이 걸어가는 곳"과 같은 효과를 주고 있었다.

나의 시선은 아치의 궤도를 따라 확실히 차이가 나는 뾰족 아치로 옮겨 갔다. 쉬제르가 방문했을 때는 신랑의 양쪽 통로 및 익랑을 따라 200여 개의 아치가 자리를 잡고 있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장관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성당의 평면판 비디오 스크린이 쉬제르가 봤었을 광경을 컴퓨터 영상으로 재현해 보여 주고 있다. 완벽하게 고딕 양식을 아니지만 확실히 로마네스크 양식으로부터는 벗어났던 클뤼니 수도원의 모습을 말이다.

"휴고 수도원장은 역대 최고의 건축가 중 한 사람이었으며, "클뤼니 수도원을 놀라울 정도로 유기적으로 통합된 고딕 양식이 일어난 일 드 프랑스 지방으로 확장했던" 원동력이었다고 클뤼니 연구 및 발굴에 일생을 마쳤던 미술사가, Kenneth J. Conant는 기록했다.

만약 클뤼니 수도원의 뾰족 아치가 쉬제르에게 영감을 주었고, 그를 통해 모든 고딕 건축물에 영향을 주었다면, 그렇다면 과연 휴고 수도원장은 어디에서 뾰족 아치를 알았던 걸까?

"그는 공학 기술을 이해하고 있었고, 자신이 하고 있던 일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라고 Mai씨는 말했다. "그 시대에 가장 많이 교육 받고 현명했던 지식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여행 또한 잘 할 수 있었고 말이다. 클뤼니 수도원 개축을 시작하기 5년 전인 1083년, 휴고는 근동 지역의 건축물에 관심이 있는 수도원장이 있던 한 이탈리아의 성당을 방문했었다. 바로 로마에서 남동쪽으로 약 130km 떨어진 몬테카시노의 베네딕트회 수도원이었다.

내가 묵었던 호텔 로비에 전시되어 있던 제 2차 세계대전 시기의 회반죽 외형과 탄창 부분 및 박살난 헬멧은 Hotel la Pace(평화 호텔)이라는 이름과는 그리 어울리진 않았다. 거기에는 몬테카시노 전투라는 딱 들어 맞는 예가 있었다. 그 곳에 있던, 황량한 바위투성이 언덕 위에 희미하게 보이던 그 유명한 수도원은 독일군의 본거지로 의심 받아 연합군에 의해 맹렬한 폭탄 공격을 받았다. (비극적인 실수, 그러나 실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몬테카시노가 공격을 받아 황폐화된 다섯 번째 사건이었다. 589년 롬바르드 족에 의해, 884년 무슬림에 의해, 1030년 노르만 족에 의해, 그리고 1349년에는 지진의 공격의 뒤를 잇는.

그래서, 거기에는 11세기 풍의 장식적인 바닥과 중세 유럽의 수도원 및 가장 강력한 수도회의 창시자였던 성 베네딕트에게 헌납된 로마 시대의 탑과 예배당을 제외하곤 클뤼니보다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비록 수도원은 자신의 마지막 형태가 된 바로크 양식으로 완전하게 복원되었지만, 중세 건물의 이런 저런 요소들이 동양과의 건축학적 연결성을 알려 주는 흔적들과 함께 살아 남았다. 예를 들어, 앞서 말한 바닥은 다채롭고 기하학적인 코즈마테스크 패턴(사각형, 다이아몬드형 및 육각형이 이어진 형태)으로 꾸며져 있는데, 이는 시리아, 팔레스타인 및 이집트에 있는 비잔틴 양식의 바닥 모자이크를 모델로 한 것이었다. 주 교회의 거대한 직사각형의 청동 문은 수도원의 방대한 소유 토지, 부속 건물 및 기증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1066년에서 1071년까지 몬테카시노를 개축했던 데시데리우스 수도원장의 명령에 따라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주문 제작된 것이었다. 유럽 필사본 작성의 중심이자 베네딕트 수도회의 본산이었던 수도원은 권력과 부의 정점이었다. 세상 경험과 여행 경험이 풍부한 데시데리우스는 동양에서 단순히 이국적인 것 이상의 건축 자재들을 충분히 수입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수도원의 도서관 사서였던 오스티아의 레오는 그의 성당 개축 보고서에 데시데리우스가 "모자이크와 바닥 포장 기술은 물론 목판과 설화 석고 및 석재 작업에도 전문가인 명인들을 고용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플로 사절을 파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장인들의 출신 지역을 감안해, 코난트와 다른 학자들은 이들 중에 무슬림이 있었을 수도 있다고 이야기한다. 기독 서구 사회였던 중세의 교회 작업 인력에 무슬림 기술자와 석공이 존재했다는 것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중세학자 John H. Harvey도 십자군 전쟁과 무슬림이 지배하던 스페인의 기독교 레꽁끼스타(reconquista, 국토회복운동) 시기에 많은 무슬림 전쟁 포로들이 프랑스와 로마 및 콘스탄티노플에서 노역에 참가했다고 말하고 있다.

비록 오스티아의 레오가 총알 자국이 가득한 몬테카시노 수도원, 주랑 현관(위)에 대해 적고는 있지만, 이들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그럼에도 이들의 실제 수공 작업은 아니지만 바닥 타일 장식(아래)이 레반트 지역 출신의 석공 및 장인의 양식적 영향을 증명하고 있다.

Harvey는 "죄수들 중에는 분명 무어 공병 출신의 중요한 기술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승리자는 언제나 그들의 지식과 그들의 진보된 기술을 활용하려 했었을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고 적고 있다. 한 웨일스 연대기에 따르면, 한 죄수는 심지어 영국 왕, 헨리 1세의 왕궁 건축 책임자 자리까지 올랐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가나안 출신의 레이에라는 이름의 포로로, 석공술에 있어 매우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나라의 가장 유명한 수도원과 성, 그리고 교회를 건축했고, …수많은 웨일스 및 잉글랜드 사람들에게 미술을 가르쳤다."

데시리우스가 초청한 기술자(무슬림이든 아니든)들이 개축을 담당했든 아니든, 여기에 들어 있는 뾰족 아치는 여전히 학자들 간에는 논란의 대상이다. Conant는 그들(초청된 무슬림 기술자)이 만든 것이라고 믿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전에 수도원을 방문했었던 그는 부속 예배당에 있는 뾰족 아치가 중세 시대까지 그 기원이 거슬러 올라간다고 이야기했다. 또 그는 몬테카시노가 입구의 뾰족 아치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카푸아에 있는 산 안젤로 인 포르미스 성당의 모델이 되었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오스티아의 레오가 작성한 보고서가 많은 의심을 없애 준다. 여기에 레오는 주 교회의 주랑 현관이 fornices spiculos("약한 뾰족 아치")를 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뿐만 아니라 레오는 데시데리우스가 언제, 어디서 뾰족 아치를 처음 보았을 것인가에 대한 단서도 남겨 두었다. 1065년, 수도원장은 이슬람의 여러 무역 도시로 향하는 중세 유럽에서 가장 번화했던 해상 관문이었던 아말피로 말 그대로 쇼핑 여행을 떠났었다.

오늘날 흠 잡을 데 없이 완벽한 휴양 도시가 된 아말피는 소렌토 반도의 남부 경사면의 깊은 협곡 입구에 자리잡고 있으며, 나폴리에서 남동쪽으로 70km 정도 떨어진 살레르노만을 따라 빨간 타일 지붕의 살구빛의 스터코로 만들어진 집들이 이어져 있다. 아마도 데시데리우스는 그 곳까지 배로 여행을 했겠지만, 나는 렌트한 차를 타고 티라니아해의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할 수 있도록 절벽을 따라 지그재그 모양으로 난 해안 도로를 달리는 쪽을 선택했다.

"이곳 저곳에서 온 은, 금, 그리고 직물보다 풍요로운 도시는 없다."고, 데시데리우스의 방문을 두고 11세기 후반의 시인 William of Apulia는 말했다. "화려한 도시, 알렉산드리아와 안타키아로부터 다양한 물품들이 도착해 있다. 그리고 여러 바다를 건너 온 사람들. 그들은 아랍인을 만났고, 리비아인을 만났으며, 시칠리아인과 아프리카인들도 알고 있다. 이들은 상품을 수출하고 또 구입한 제품을 가지고 돌아오기 때문에 전 세계 거의 모든 곳에서 그 명성이 자자하다."

무슬림에게도 아말피의 명성은 같았다. 10세기 터키의 지리학자였던 Ibn Hawqal은 자신의 저서, Book of Routes and Kingdoms에서 아말피를 "롬바르디아 지역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 가장 웅장하고 화려하며, 가장 풍요롭고 부유한 도시"라고 칭송하였다.

이러한 양측의 감탄은 상업에 깊이 뿌리 박힌 것이었다. 9세기에 이 작은 아말피 공화국은 비록 명목상은 동로마 제국의 땅이었지만, 정기적으로 아바스 왕조, 파티마 왕조, 옴미아드 왕조를 비롯해 여러 무슬림 세력과 이베리아 반도의 해안에서 흑해를 넘나들며 상업적으로 그리고 외교적으로 서로 접촉해 왔었다. 서부 지중해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였던 아말피의 유일한 맞수는 동, 서양의 상품을 교환하는 전달자로서의 역할을 하던 베니스 밖에 없었다. 아랍어가 새겨진 지역에서 주조된 쿼터 디나르 동전인 타리(tari)를 한가득 안고 각종 목재와 아마포, 지역 특산품이 가득 실린 화물선을 타고 아말피 상인들은 아랍의 시칠리아 지역, 북 아프리카, 시리아 및 팔레스타인의 여러 항구에서 기름과 밀랍, 그리고 각종 향신료와 금을 거래하였다. 콘스탄티노플의 시장을 누비며, 그들은 금과 각종 보석과 향수 및 미술 세공품은 물론, 당시 비잔티움에서 제국의 옷감을 수출하는 것은 불법이었기에 항구에서 밀수입을 통해 구할 수 밖에 없었던 보라색 비단 같은 값비싼 직물들을 교환했다 .

"아말피 사람들은 동쪽에서도 아직 알려지지 않은 동방의 세공품을 가져오려 시도한 첫 번째 사람들이었다."고 12세기의 윌리엄(William of Tyre) 대주교는 기록했다. "그들이 그 곳으로 가져간 필수품들 때문에 그들은 그 땅의 중요 인물들로부터 유리한 조건을 확보할 수 있었고 자유롭게 그 곳을 왕래할 수 있도록 허락 받았다."

바그다드나 카이로, 튀니스 같은 동쪽의 도시들은 지역의 비호 아래 번성한 상업 식민지를 유지할 수 있었고, 그 대가로 자신들의 무역 파트너들에게 매우 호의적인 자유 방임 주의를 채택하였다. 9세기 바티칸에서 이탈리아 남부 지방의 아랍인들을 축출하자는 운동을 폈을 때, 아말피는 협조를 거부했고, 심지어 아랍 배들에게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하기까지 했다. 비록 이는 교황을 실망시켰고, 다른 이탈리아 지방 자치 정부의 완고한 공화주의자들을 멀어지게 했지만, 그로 인한 이익은 있었다. 이후 아랍 군대가 남부 이탈리아를 공격했을 때도 아말피만은 그대로 남겨 두었던 것이다. 12세기의 지리학자이자 세계 여행가였던 Benjamin of Tudela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곳의 주민들은 무역에 종사하는 상인들로, 높은 언덕과 우뚝 솟은 험한 바위산에 살기 때문에 씨를 뿌리거나 수확하지 않는다. 대신 돈으로 모든 것을 구매한다. 아무도 그들과는 전쟁 하지 않는다."

자연 외에는. 1343년에 바닷속에서 지진이 있었고 해일이 덮쳐 도시의 절반이 바다로 가라앉았다. 그러나 이후 완벽한 복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도시의 한복판에 있던 성당 광장(Piazza Duomo)이 지금은 항만에 인접해 있다. 물론 여전히 광장은 도시의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주요 장소로,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상점과 젤라또 가게 및 분수가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광장마저도 무색하게 하는 도시의 심장이자 정신은 성 앤드류 대성당( Cathedral of St. Andrew)이다. 이 성당은 1891년에 13세기의 원래 아랍-노르만 양식의 로마네스크의 영광을 그대로 재현해 복원되었다. 요란한 무어 양식의 줄무늬(ablaq, 아랍어로 "다채롭다"는 뜻), 화려하게 반짝이는 모자이크와 뾰족 아치, 그리고 건물의 외관은 아말피가 이슬람 세계에서 단순히 비단과 향신료만 수입했던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하는 명확한 증거라 하겠다.

아래: vova pomortzeff / alamy
맨 위: 13세기 중반에 건축되었음에도 서로 엇갈리게 꼬여 있는 아말피 그리스도 고난 성당(Basilica of the Crucifix) 회랑의 뾰족 아치는 이 항구 도시의 영속하는 이슬람 디자인을 정확하게 보여 주고 있다. 위: 이 바실리카(그리스도 고난 성당) 지하에 있는 17세기의 프레스코화는 데시데리우스가 1065년에 보았을 법한 건물이 그려져 있다. 그 건물에는 그의 몬테카시노 개축 작업에 영감을 주었을 뾰족 아치가 포함되어 있다.

이슬람 미술사가이자 현재 뉴욕 MoMA(New York Museum of Modern Art)의 디렉터인 Glenn Lowry는 1983년에 작성한 논문, Islam and the Medieval West에 "이탈리아 남부 지방에 무슬림 세력이 행사한 예술적 영향력은 이 지방의 정치적, 경제적 역사에 명확한 한 부분을 차지하였다."라고 썼다. "그 결과, …이슬람 미술은 남부 이탈리아 지역의 어휘 생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그 영향은 매우 오래 깊게 지속되었다."

이는 확실히 데시데리우스가 당시 공사 중이었던 성당의 높은 계단들을 올라갈 때에도 어떤 영감을 주었다. 그는 머지 않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될 독일의 왕, 헨리 4세에게 바칠 선물을 구입하기 위해 아말피로 가야 했다. 몬테카시노가 젊은 군주의 총애를 받을 수 있길 희망하면서 말이다. 수입된 진귀한 물건들이 즐비한 도시의 상점들을 돌며 데시데리우스는 앞서 언급한 밀수된 보라색 비단이 떠오르는 왕의 비위를 맞추기에 적합한 선물이라고 결론내렸다. 그리고 교회를 위한 몇 개의 은그릇도 빼놓지 않았다. 그러나 오스티아의 레오에 따르면 수도원장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데시데리우스는 아말피 성당의 청동 대문을 봤다. 그리고 너무도 마음에 들었기에, 오래된 몬테카시노 교회의 문 치수를 적어 콘스탄티노플로 보냈다. 몬테카시노에도 그러한 교회 문이 생길 수 있도록 말이다."

오늘날 성당의 방문객들을 맞는 문은 데시데리우스가 건축되고 있던 모습을 보았던 교회 바로 옆에 서 있던 그보다 이른 9세기 교회인 그리스도 고난 성당(Basilica of the Crucifix)로까지 그 기원이 거슬러 올라간다. 특이하게도 새 교회는 이전 교회와 증축된 부분을 통해 연결되어 있었고, 그리고 그로 인해 6개의 측랑이 있는 성당은 "이 성스러운 건물을 기독교 교회라기보다는 아랍의 모스크와 더 유사하게 보이게 하는" 수많은 기둥과 아치들로 가득했다. 현재는 주 성당과 분리되어 있지만 여전히 이 성당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18세기에 두 성당은 모두 바로크 양식으로 다시 장식되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의 이 대성당의 복원은 신랑(身廊)과 함께 역사가들이 10세기 및 11세기의 뾰족 아치라고 믿는 아치들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그 아치 위에 뾰족 아치로 틀이 짜인 곁줄로 된 예첨창들이 여자들이 예배를 드리던 이층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복원의 정확성은 지하실에 있는 17세기 초반 벽화에서 확실히 드러난다. 이 벽화에는 바로크 양식으로 전환하기 전 성당의 내부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는 데시데리우스가 보았을 교회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에게 영감을 주었을 아치들, 청동 문이 합쳐져 몬테카시노의 비슷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다시 한번 오스티아의 레오는 콘스탄티노플의 건축자들에 이어 데시데리우스가 아말피인은 물론 롬바르드인들도 채용했다는 이야기를 통해 이러한 추정에 대한 증거를 제공한다.

대성당은 느리게 걸으며 나는 신랑에 있는 뾰족 아치들을 기록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위에 있는 반구형 "멜론" 돔의 분할되어 있는 부분이나 든모 홍예 부분에 들어가 있어 놓치기 쉬운 작은 것들까지 빠짐없이 기록했다. 새 교회의 건축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돔의 아치는 성 앤드류 성당의 중동 기원설에 대한 "의식적인" 암시였을지도 모르며, "전형적인 북아프리카 및 이집트 건축물"과도 닮아 있다고 Lowry씨는 말한다.

"이는 아스완이나 카이로의 능은 물론 마라케시에 있는 Qubbat Barudiyan(1120년) 같은 좀더 정교한 건물에서도 볼 수 있다."라고 그는 덧붙였다. "실제로 무슬림 세계의 장례식 건물과 든모 홍예 및 멜론 돔의 일반적인 연관성은 그 두 형태 및 전후 관계가 중동을 여행하고 중동에서 살았던 수많은 아말피 사람들과 유사하다는 가정을 상당히 설득력 있게 해 준다."

나는 잠깐 그 문장의 놀라운 중요성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Lowry가 주장하고 있는 내용은 성 앤드류 대성당의 건축자들이 단순히 이슬람의 건축적 특징만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종교적 설정에서의 특별한 사용까지도 흉내내려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모방이 아니다. 이를 전면적으로 선택했다는 뜻이다. 십자군의 야만적인 적대감에 의해 빛을 잃은 시대에 기독교도와 무슬림 사이에 존재했던 종교적인 측면과 지적인 측면에서의 공감대는 1076년, 교황 그레고리 7세가 알제리의 왕, An-Nasir ibn Alnas에게 쓴 편지에 보면 잘 나타나 있다고 Lowry씨는 이야기하고 있다. 형제와 같은 어조로 그레고리 교황은 선지자 아브라함에 대한 자신들의 공통된 존경심을 표했으며, "서로 다른 방식이긴 하나 하나의 신을 믿고 그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다."고 인정하였다. 또한 Lowry씨는 그레고리 교황은 지역의 기독교인들을 돌봐 줄 주교를 보내달라는 왕의 요청에 대한 답으로 그 편지를 썼다고 적고 있다.

대성당의 옆문을 나서 나는 천국의 회랑이라고 이름 붙여진 그 옆의 뜰로 들어 갔다. 내가 만약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이 장엄한 공간에 옮겨졌다면, 나는 일어나자마자, 이 곳이 안달루시아나 모로코, 또는 튀니지의 한 궁전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특징상 그 설계는 이슬람 양식이었다. 아말피의 세도 높은 상인 계급의 묘지로 1266년에서 1268년 사이에 지어진 이 회랑은 120개의 쌍으로 이루어진 가느다란 흰색 대리석 기둥을 떠받치는 낮은 담으로 둘러 쌓인 중앙의 정원과 종려나무로 유명하다. 기둥의 상단에서 솟아 나온 바릴리프(얕은 돋을새김) 모양의 이른바 "인터레이싱(서로 교차된 형태)" 뾰족 아치가 마치 연못에 돌을 던졌을 때 나타나는 물 위의 링과 같이 서로 교차해 있다.

해질 무렵 나는 이 조용한 공간에서 아말피의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답답한 거리로 이동하다 아랍 건축물의 영향을 보여 주는 또 다른 증거를 발견했다. 도시를 잇는 그물 모양의 하얀색으로 덮인 좁은 골목과 구불구불한 통로들은 남서쪽으로 약 300 해리 정도 떨어진 튀니지의 역사적인 시디부사이드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그 놀라운 유사성 때문에 아마도 한 마을이 다른 마을로부터 분리해 나온 것은 아닐까 하는 비현실적인 상상마저 가능할 것 같았다. 마치 5억년 전 각각의 대륙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나는 모든 도로가 향해 있는 아말피의 항만에 닿았다. 비록 수평선 너머로 아프라카의 반짝거리는 불빛은 볼 수 없었지만, 나는 그 불빛과 함께 좋은 향기가 나는 향신료와 가득 쌓인 보석 및 비단을 싣고 바다에서 돌아오는 삐걱거리는 사각돛을 단 상선을 상상해 볼 수 있었다. 이 배들은 좀더 오래 가는 물건들도 실어 날랐으리라. 바로 서양 건축물의 얼굴을 바꿀 그러한 아이디어들도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의 흔적, 특히 뾰족 아치의 흔적은 이탈리아 남부에서 프랑스로, 명확한 역사 및 연대기적 경로를 따라 북으로 이동해 갔다. 뾰족 아치가 최소 10세기까지는 서양에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것, 동양 건축물에서 영감을 받은 장치이자 양식이었으며, 어쩌면 어떤 경우에는 심지어 전쟁이나 상업적 계약에 의해 서양으로 건너 왔을 무슬림 석공에 의해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확실했다.

그러한 석공들이 아말피 대성당 아치에 마무리 손질을 하게 될 때까지는 비슷한 아치로 된 우아한 아케이드(아치형 지붕의 회랑)가 거의 1세기 동안 기도자들을 위한 또다른 집으로서 비슷한 기능을 수행했었다. 그리고 그 흔적은 나를 다음 장소, 바로 튀니지의 사헬 해안가에 있는 마흐디아의 대모스크로 이끌었다.


손에 쥐어진 단도"는 15세기 튀니지의 역사가, Ibn Khaldun가 마흐디아의 전략적인 반도의 특성을 설명하며 쓴 표현인데, 마흐디아는 튀니스에서 지중해 방향으로 남쪽으로 약 250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실제로 단도의 칼날 끝과 같은 위치에서 곧장 가며 그들이 항상 갈망하던 지역인 바로 이집트가 있다. 10세기 초반 이 은유적인 단도가 아닌 진짜 칼을 휘둘렀던 사람이 바로 파티마 왕조의 창시자, 우바이드알라였다. 이 거만한 장군은 그 전 세기에 멀리 떨어진 바그다드의 아바스 칼리프가 임명한 명목상의 통치자로서 북아프리카와 시칠리아를 통치했던 무슬림 지배자, 아글라비드를 몰아냄으로써 튀니지의 권력을 차지했다. 군대보다는 무역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아글라비드는 우바이드알라의 군대 및 야망에 대적할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비록 유능했으나 잔인했던 통치자였던 우바이드알라는 그가 권력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왔던 이들을 암살했으며, 그에게 반대했던 신학자와 법률가들을 공개적으로 태형에 처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이슬람을 다시 구제할 사람, mahdi("선택된 자")라고 칭했다. 반대파들은 그를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전략적인 반도에 자신이 건설한 도시에 그가 직접 칭한 자신의 이름으로 마흐디아라는 이름을 내렸다.

위: 916년 지어진 튀니지의 마흐디아에 있는 대모스크는 당시 아말피 상인들에게 알려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반대로 그 건축가들은 카이르앙의 대모스크(아래)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그 곳의 아치는 9세기 초반에서 중반으로까지 그 역사가 거슬러 올라간다.

916년에 우바이드알라는 반도와 본토를 연결하는 좁은 지협 위에 마흐디아 대모스크의 건축을 명령했다. 대부분의 원래 모스크들은 파괴되었거나 일부 재건축 또는 복원되었다. 매우 중요한 예외적인 몇몇 부분을 제외하고선 말이다. 바로 정문 입구와 아케이드가 그것이다.

오로지 통치자와 그 측근들만을 위한 것이었을 입구의 통로를 걸어 들어가며, 나는 4변형의 대립하는 뾰족 아치들이 맞붙어 있는 형태의 교차 궁륭의 둥근 천장이 얹혀 있는 뾰족 아치로 된 복도를 지나갔다. 그 구조는 마치 유럽의 고딕 양식의 교회에서 온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사실은 이것이 그 쪽에서 그러한 양식에 대해 꿈도 꿔보지 못했던, 최소 1세기도 전에 건설된 것이었다. 과연 이 아치들을 지탱하고 있는 금빛의 석회암 덩어리를 다듬었던 일부 석공들이 후에 아말피까지 여행해 갈 수 있었을까? 자신이 살던 도시에 있는 예배당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며 고향의 이야기를 들려주던 무슬림의 상인들이 유럽의 호기심 많은 이들에게 이 곳에 대해서도 설명해 줄 수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이 곳을 지나던 아말피 상인이었을까? 바로 이 아케이드를 따라 걸었던 그가 집으로 돌아가 바다 건너에 자신이 고향에서 보았던 그 어떤 것보다 멋진 건물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 주었던 것일까? 문헌적 증거의 부족으로 어떤 말도 할 수 없지만, 10세기 초까지 끊임없이 아말피 상인들에게 회자되었던 이 아랍 항구에는 뾰족 아치가 정착되어 그 탁월함을 자강하고 있었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그 곳에 서 있는 동안 나는 그 먼 몇 세기 전으로 돌아가 있었고, 허리가 굽은 구리빛 얼굴의 노인이 나를 흔들어 깨웠을 때 비로소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모스크 관리자인 Ibrahim Nouri씨는 내가 건물의 역사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기뻐하며, 나에게 원래 모스크가 끝나는 곳과 복원된 모스크가 시작되는 곳에 말 그대로 시간의 이음매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이러한 종류의 건물은 다시 만들 수가 없습니다."라며 사무적인 존경심을 표했다. 그는 그 이유가 "그것은 믿음에 의해 건축된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며, 은연중에 아치의 사용에는 단순한 기술 이상의 의미가 있음을 암시했다.

Nouri씨가 언급한 믿음은 내륙으로 130km 들어와 있는 북아프리카에서 가장 성스러운 도시인 카이르앙의 유적들을 건축하는 데도 영향을 미쳤다.

670년, 아랍의 장군, Oqba ibn Nafi가 북아프리카로 진군하던 중에 세운 이 사막 도시는 말 그대로 "잠시 쉬는 곳"이라는 의미의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중앙에 두 개의 구조물을 가진 군주둔지로 만들어졌다. 중앙의 두 구조물은 모스크와 지휘관들의 숙소였다. Oqba의 모스크 중에는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지만, 현재 카이르앙의 대모스크는 9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무슬림 사원 중 하나이자 이후 모든 북아프리카 모스크의 모델이기도 하다.

카이르앙에 있던 고대 도시의 총안(銃眼)이 뚫어져 있는 벽들로 3면이 둘러싸인 모스크는 밖에서 보면 높은 벽과 끝이 뾰족해지는 사각형의 미나레트(뾰족탑, 730년에 축조된 것으로 예상됨)로 이루어진 요새와도 같아 보인다. 특히 이 미나레트는 모스크의 나머지 부분들보다 1세기 내지는 그보다 더 이전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그 형태가 보존되어 있다는 측면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미나레트이다. 수 많은 부벽으로 감싸인 서쪽의 입구 통로가 햇볕이 강한 고대 도시와 모스크의 햇볕이 내리쬐는 지붕 없는 안마당, 또는 이중 베이(경간구획) 구조의 아케이드로 둘러싸인 sahn 사이에 잠시나마 그늘을 제공했다. 아케이드의 3면은 모로코와 스페인 남부 지역의 이슬람 건축물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약간 뾰족한 마제형 아치로 되어 있다. 그러나 예배당 앞부분의 남쪽의 주랑 현관은 연대순으로나 미적 특성으로나 완전히 달랐다. 모스크의 나머지 부분들보다 약 40년 앞선 836년에 건설된 이 구조물의 예리한 뾰족 아치는 예배당의 끝과 입구 통로를 측면에서 접하고 있다. 나는 운 좋게도 그 날 연구 조사차 모스크를 방문하고 있던 튀니지 국립 문화재 연구소(National Heritage Institute)의 Mohammad el Hedi Belahmar씨로부터 건축가들이 왜 뾰족 아치의 이 특정 용도를 선택했는지, 그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예배당의 입구에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입구의 현관이 중요하다는 뜻을 강조하기 위해서 말이죠."라고 Belahmar씨는 말했다. 또한 공간의 균형을 잡는 무제를 해결하는 뾰족 아치에 의해 8개의 끝부분에 고정되어 있는 8개의 둥근 베이(경간구획)가 시각적인 균형감도 제공한다고 했다. 또 Belahmar씨는 북아프리카에서 뾰족 아치를 사용하는 것은 이 모스크가 지어질 당시만 해도 상당히 새로운 것이었으며, 아치의 특이한 모양은 형식 및 이름에서 시간을 거쳐 아랍화되었던 그 태생이나 페르시아의 영향을 생각하게 한다고도 했다.

"프랑스에서는 arc brisé라고 부릅니다. 아랍어로 kaous munkassar라고 하는데, 둘 다 '쪼개진 아치'라는 뜻입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초기 무슬림 건축가들이 느꼈을 매력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건물에 보다 큰 내구성을 제공하는 공학적 해결책"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었다.

그날 저녁 나는 또 다른 건축의 대가이자 카이르앙 이슬람 미술 박물관(Museum of Islamic Arts)의 디렉터인 Lotfi Abd Eljaoued씨로부터 다른 의견도 들을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뾰족 아치는 건물을 열어 건물에 많은 빛을 가져다 주었습니다."라고 카이르앙에 있는 La Kasbah 호텔(메디나 중심에 있는 요새령 리조트)의 랜턴 불빛이 밝은 수영장 가장자리에 앉아 Eljaoued씨는 말했다. "빛은 중요했습니다. 모스크에 새겨져 있는 신의 이름들을 보면, 그들 중 상당수가 빛과 관련해 그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코란 24장, Al-Noor("빛")이 그 한 예로, 무슬림 전통에 따르면 신 Al-'Aleem("전지한 신")의 이름을 읊으면 신성한 이해력을 통해 말 그대로 모든 것을 알게 된다고 한다. 빛의 개념에 대한 그러한 해석은 쉬제르 원장의 해석과도 비슷하게 들렸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은 정말 뾰족 아치의 사용해 기술적인 것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확실히 무슬림의 석공들은 고딕 성당의 극적인 높이감을 표현하기 위해 뾰족 아치를 사용하진 않았다. 한 쪽이 다른 한 쪽에 영감을 줄 수는 있지만, 이러한 차이가 발생한 이유는 문자 그대로 근본적인 것이었다.

"초기부터 기독교 교회 건축은 길고 높이 솟은 건물식의 바실리카(대성당)가 지배적이었죠. 반면 이슬람 건축은 안뜰이 있는 집의 구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낮고, 넓고, 둘러 쌓여진 형태죠."라고 nyu-Abu Dhabi, 미술사 객원교수이자 중세 이슬람 미술 전문가인 Yasser Tabbaa씨는 말했다. "오토만식이든 페르시아식이든 후기 모스크들 중에는 높은 건물을 원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전자의 경우는 돔을 사용했었고, 후자의 경우는 iwans[높은 둥근 아치로 되어 있으며 3면에 출입 공간이 있는 형식])을 사용했죠. 그렇지만, 플라잉 버트레스를 사용해 안정화를 꾀한 것은 하나도 없었어요."

969년, 빛에 아닌 영토와 부에 의해 자극을 받은 파티마 왕조는 아바스 왕조 통치자들의 손에서 마흐디아 반도의 단도 끝이 있는 땅, 바로 이집트를 뺏고자 했다. 그리고 그러한 통치자들 중 한 명은 바로 아치 여행의 다음 건축물인 이븐 툴룬 모스크(Mosque of Ibn Tulun), 바로 파티마 왕조가 카이로라고 재명명한 도시와 같은 이름을 가진 모스크를 책임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835년 바그다드 노예의 아들로 태어난 Ibn Tulun은 아바스 왕조 군대의 여러 직책을 거쳐 칼리프 al Mu'tasim의 지배 하에 있는 당시 융성한 미술과 건축의 중심지였던 이라크의 사마라 지역을 관장하는 위치로까지 출세했다. 868년 당시 이집트의 수도였던 푸스타트를 섭정하는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 Ibn Tulun은 병원 및 송수로를 포함한 토목 공사 프로젝트를 통해 도시를 확장하고 번성하게 하였다. 야망과 함께 사회 복지에 대한 의식도 있었던 그는 임명된 지지 2년이 지나지 않아 바그다드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 자신의 왕조인 툴룬 왕조를 열었다. 새로운 왕국은 새로운 수도를 필요로 하였고, 따라서 Ibn Tulun은 중심지를 푸스타트 북동쪽 지역에서 궁전 단지와 정원 및 그와 그의 신료들이 폴로를 즐길 수 있을 정도로 넓은 maydan(공공 광장)까지 갖춘 al-Qata'i("안뜰" 또는 "막사, 숙소"라는 뜻)라고 불리는 호화스러운 국정 중심지로 이동시켰다. 특히 그 곳에서 Ibn Tulun이 이룬 최고의 성과는 놀라운 규모(2.5헥타르/6.5에이커)의 모스크 단지였다. Ibn Tulun의 도시 및 모스크 단지의 설계는 통치자의 사마라식 전통과 취향을 반영한 것이었다. 치장 벽토를 바르고 붉은 색 벽돌을 쌓아 만든 모스크는 식물 모양을 주제로 한 복잡하고 장식적인 미장 공사와 사마라의 유명한 말위야(Malwiya, 달팽이 껍데기) 미나레트를 연상시키는 나선형의 외부 계단으로 된 미나레트를 특징으로 한다. 그리고 높은 두 개의 벽이 모스크를 둘러 싸고 있어, 안에 고요하고 평화로운 환경이 연출된다. ziyada라고 불리던 벽 사이에 있는 공간에서는 학자들이 모여 코란과 신학, 점성술, 의학 등에 대해 토론했다. 더운 여름날 열띤 토론으로 목이 마르면 안뜰에 있는 분수에서 차가운 레모네이드가 제공되었다. 그리고 전설에 따르면 노아의 방주에서 가져 왔다는 나무 들보에 코란의 끊임없이 이어지는 구절들이 새겨져 있어 지금도 내부 벽을 따라가며 살펴 볼 수 있다.

9세기 후반에 지어진 Ibn Tulun의 모스크에 있는 뾰족 아치는 Ibn Tulun의 고향, 이라크 사마라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것들과 유사하게 벽돌로 된 벽에서부터 시작된다.

전체 구조물에 형태와 웅장함을 제공하는 것은 예배당을 떠받치고 있으며 우아한 뾰족 아치들이 줄줄이 덮인 안뜰을 에워 싸고 있는 수많은 벽돌로 이루어진 벽들이다. 모스크 건설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이러한 형상들과 이슬람 및 기독교의 협력에 연관성이 있음을 알려 준다. 10세기 이집트 역사가 al-Balawi에 따르면, Ibn Tulun은 그의 새 모스크에 300개의 기둥이 필요하고 이들이 오직 지역 교회 건물에서 약탈하지 않고서는 확보할 수 없는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이는 옳지 않으며,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 이야기를 들은 한 콥트 교회 출신의 과거 건축가이기도 했던 죄수가 석재나 대리석 기둥 없이 벽돌 벽을 선택하는 모스크 설계를 제시했다. Ibn Tulun은 "매우 기뻐하며 그를 사면하고 작업을 위임했다."

비록 콥트 교도인들이 건설에 참여했을 수는 있겠지만, 모스크 설계는, 대부분의 미술사가들이 동의하듯이 확실히 이슬람 양식, 그 중에서도 벽돌 벽을 좋아했던 사마라 양식이다. 앞서 Northedge씨가 내게 언급한 것처럼 모스크의 뾰족 아치가 이보다 앞선 시리아-이라크 양식을 본뜬 패턴이냐의 여부는 우리가 양말만 신은 채 모스크를 거닐 때 내가 AUC(American University in Cairo)의 이슬람 미술 건축과, Bernard O'Kane교수에게 했던 질문이다. 말쑥한 차림의 안경을 쓴 O'Kane 교수는 이 도시에 30년이 넘게 살아도 여전히 남아 있는 활발한 아일랜드 사투리로 Northedge씨와 같이 과연 무엇이 무슬림 건축가들 사이에 뾰족 아치의 사용을 고무시켰는지에 대한 명확한 답변을 피했다. 그러나 그는 Eljaoued씨가 추측했던, 상징적인 빛으로 구조물을 채우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 있는 설명이라는 점에는 동의했다.

O'Kane 교수는 "예를 들어, 파티마 사람들은 빛을 가리키는 칭호나 별명을 따라 모스크의 이름을 지었습니다."라고 지적하며 몇 가지 좋은 예를 들어 주었다. "Al-Anwar는 al-Hakim 모스크의 원래 이름입니다. '화려하게 반짝이는' 이라는 뜻이죠. Al-Azhar 역시 같은 의미입니다. Al-Aqmar는 '달빛은 받은 모스크'라는 뜻입니다. 모스크에 새길 코란의 구절을 선택할 때도 자주 빛과 관련된 구절들을 선택했죠. 그래서 깨달음, 또는 빛은 비춘다는 개념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인상적인 내부 장식과 역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Ibn Tulun의 모스크는 실제로 연대순으로는 뒤에 위치하고 있어 근처에 있는 나일강 중류의 로다 섬에 있는 나일로미터(나일강의 수위계)에 비해 크게 주목 받지 못하는 편이다.

카이로를 건설하기 108년 전에 만들어진 나일로미터의 수문은 이집트에서 알려진 것들 중 가장 오래된 뾰족 아치로 되어 있다.

861년 나일로미터는 매해 나일강 호수의 높이를 측정했다. 다음 해에 풍년이 될 지, 흉년이 될 지를 예측하는 중요한 의식이었다. 구조는 간단하다. 물의 높이를 측정할 수 있도록 중앙에 눈금이 새겨진 기둥이 세워진 13미터 깊이의 구멍이 뚫려 있는 석조 건축물이다. 그런데 그 구덩이의 중간 쯤에 이집트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뾰족 아치로 된 둥근 천장의 벽감들이 있습니다.

"세심하게 살펴 보면 이 벽감들의 뾰족 아치가 지름의 3분의 1 지점에 있는 2개의 중심점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라고 Creswell은 특유의 지극히 분석적인 어조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이 아치들이 고딕 건축가들이 '삼각형의 정점('tiers-point)'이라고 부르던 것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나 이들은 다른 고딕 아치들보다 3세기나 앞선 것들이다."

지금은 막혀 있는 벽감들은 한때 나일강 홍숫물의 방수로로서의 역할을 했었다. 아치들은 중요한 구조적 기능을 했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장식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나일로미터의 설계자이자 페르시아의 천문학자였던 Abu'l 'Abbas Ahmad ibn Muhammad ibn Kathir al-Farghani는 아치를 당시의 건축적 특징에 편입시켰다. 그 동기가 무엇이었든 이는 9세기 중반까지 뾰족 아치가 이집트 및 마그레브 지역에서 실제로 유행했으며, 한 세기 또는 그 후에 이탈리아 남부 지역으로 전파되었을 것이란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행은 훨씬 동쪽에서 시작되었고, 이슬람의 경로를 따라 아라비안 반도에서 서쪽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이 여행의 주요 기점은 바로 메카와 메디나의 뒤를 잇는 이슬람 3대 성지 중 하나인 예루살렘이다.

금으로 뒤덮인 지붕과 담청색 타일로 유명한 바위 사원(Dome of the Rock)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 중 하나이다. 실로 건축학적 측면에서 예루살렘 뿐 아니라 전 중동을 보여 주는 건물이다. 근처에 있는 알아크사 모스크(Al-Aqsa Mosque)와 함께 al-Haram al-Sharif, 즉 "성전산"을 구성하고 있다. 실제로 무슬림들은 이 곳에서 선지자 무함마드가 그의 기적 같은 "야행(Night Journey)" 때 하늘로 승천했다고 믿고 있다. 모스크가 아니라 성지인 이 건축물은 무함마드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거대한 돌로 둘러 쌓여 있는데, 한 때 그 곳에서 예수는 가르침을 받았고, 솔로몬과 헤롯을 그 위에 성전을 쌓았다.

lars r. jones / aga khan visual archive, mit
예루살렘 바위 사원의 내부 열주 위에 보이는 아치의 끝부분들은 688년에서 691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이제는 희미하지만, 건축학적 문제에 대한 답을 제공하고, 비잔틴 기독교 양식과 이슬람 양식을 비로소 구분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비록 내부와 외부 모두 몇 세기에 걸쳐 장식과 복원을 거쳤지만, 바위를 둘러 싸고 있는 아치형 열주에 2개의 동심원이 있는 바위 사원의 8각형 구조는 옴미아드 왕조의 칼리프 Abd al-Malik가 명령을 내렸던 때와 동일한 형태로 남아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이슬람 건축물인 이 건물 안에는 일부에서 이슬람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뾰족 아치라고 말하는 뾰족 아치들이 있다.

성전에서 유물들을 관리하고 있는 Yusuf Natsheh는 알아크사의 이슬람 박물관 디렉터인 Ahmad Taha의 회사 건물을 방문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 건물은 수학적 완벽성으로 유명하다. 예를 들어, 바깥쪽 벽의 길이는 돔의 너비 길이이자 바닥에서 시작된 높이만큼의 길이인 20미터이다. 화려한 내부는 빛나는 모자이크와 대리석 벽판, 색칠된 목세공품들로 가득하고, 돔을 떠받치는 내부 주랑의 아치들은 교차하는 밝은 색과 어두운 색의 돌이 줄무늬(ablaq, 코르도바의 대모스크 및 아말피 성당의 외양과 비슷한 모습)를 이루고 있으며, 살짝 뾰족하다. 전체적인 인상은 화려하게 휘어지는 비잔틴 양식의 내부 구조와 같은 느낌이었다. Taha씨가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옴미아드 왕조에서는 일꾼들과 관리자로 기독교인들을 고용했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래서 많은 비잔틴 양식적 요소들이 있는 겁니다. 모자이크를 만든 미술가와 일꾼들이 시리아의 기독교인이었던 비잔틴 사람들이었으니까요."

이와 같은 작업자들이 바위 사원의 뾰족 아치에도 관여했던 것일까? 가능한 일이다. 뾰족 아치는 비잔틴 건축물에서는 일반적인 형태는 아니지만, 시리아에서는 그 예를 찾아 볼 수 있다고 Creswell도 적고 있고, Northedge 역시 얘기했었다. 그러나 왜 이 특정 시기에, 이 특정한 장소에 사용했던 것일까? 여행 내내 나는 아치의 발전에 대한 실용적인 동기와 철학적인 동기 모두에 대해 들어 왔다. 그리고 그 두 가지가 합해진 것은 이 곳에서였다.

완벽하게 기능적인 차원에서 뾰족 아치는 기술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었다. 모든 원형 열주에서 외부에 있는 아치의 첫머리는 내부에 있는 것보다 크다. 한쪽의 반지름이 벽의 두께 때문에 다른 쪽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이는 아치의 아래쪽 표면(아치의 내륜)이 안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그래서 시각적으로 균형이 깨져 보인다는 뜻이다. 바위 사원의 건축가들은 아치의 안쪽 측면을 뾰족하게 하여 내륜을 균일하게 동등한 수준으로 끌어 올림으로써 이러한 문제를 해결했다. (그리고 외부 열주에서는 이를 팔각형으로 만듦으로써 이 문제를 피했다. 그러나 오늘날 내부 열주의 양측의 아치들은 이후 시행된 복원 작업으로 인해 뾰족하다.)

그러나 여전히 그보다 더 중요한 동기가 있을 수도 있다. 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바위 사원이 유대교와 기독교에 대한 이슬람의 승리를 선언한 것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 한다. 이는 그 위치와 설계에 의해서 매우 확실해진다. 일반적인 비잔틴 양식의 교회 및 특히 가까이에 있는 성묘 교회를 모델로 한 바위 사원은 그들을 능가하고 새로운 믿음을 정의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코란의 구절(4:171)들을 새긴 비문은 바로 이슬람과 기독교 간의 신학적 차이를 강조하고 있다. "신은 하나시니,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들보다 훨씬 높은 곳이 계시니라." 이처럼 선명하게 장식된 선언들 한가운데서 아치의 높이 솟은 형태는 어떤 의미를 가지려 한 것일까?

"초기 이슬람 건축 역사에서 이 건물의 중요한 위치를 감안해 볼 때, 우리는 뾰족 아치의 채택이 건축학적 용어로 새로운 종교에 대한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하기 시작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수행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라고 The Formation of English Gothic의 저자인 건축사가, Peter Draper는 적고 있다.

이것이 바로 여행 시작 무렵에 Northedge씨가 말한 "의도적인 미의식"이었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여전히 전통적인 견해는 nyu Abu Dhabi의 Tabbaa씨가 기술한 대로, 바위 사원의 뾰족 아치의 역사는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거나 만약 그것이 최초의 것이라면 그다지 큰 의미 없이 단지 "현지에서 점차 조정"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Draper씨가 말한 대로, 어느 쪽이든 궁극적으로 이들은 이슬람 건축물의 "매우 특색 있는 특징"이 될 것이다. Northedge가 주장한대로, 요르단 동쪽 사막에 있는 옴미아드 왕자들의 멀리 떨어진 요새와 사냥용 오두막이 있는 이 곳 예루살렘, 남서쪽으로 약 30마일 떨어져 있고 대륙 쪽으로도 약 10미터나 들어 가 있는 눈에 덜 띄는 이 곳에서 시작되었을지도 모르는 바로 이 스타일이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이 섬유 유리로 된 구명용 고무 보트를 타고 람라 지하 저수조의 반투명한 태양빛이 드리운 물에서 노를 젓고 있었던 이유였다. 보트의 폭이 넓은 조종실에는 아치들을 아주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는 최고로 유리한 자리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 곳에서 한쪽 벽에 "신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이란 뜻의 고대 아라비아 문자로 적힌 글과 칼리프 하룬 알 라시드의 명령에 따라 "172년 하지 달에"(789년 5월)라는 글을 볼 수 있었다. 그처럼 그 지하 저수조는 Creswell이 강조한 대로 아바스 왕조의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조물이자, "유일하게 독립적으로 서 있는 뾰족 아치를 조직적으로 배치한 알려진 가장 오래된 건축물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였다. 기둥과 기둥 사이에서 물 표면으로 솟아나온 우아하고 완벽한 아치들은 6개의 대칭적인 통로를 형성하고 있었다. 마치 물에 수장되어 오랫동안 잊혀졌던 한 고딕 교회에 있는 것처럼. 참으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인가에 대한 그러한 모든 노력은 당시에도 거의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쩜 이 지하 저수조를 찾는 대부분의 이들은 아마도 그 이면에 있는 공학 기술이 탄생시킨 작품을 감탄하기 보다 단순히 물통에 물을 채우고자 이곳에 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람라는 Draper가 말한대로 "새로운 유형의 건축 언어"를 보여준다. 앞서 중동에 흩어져 있던 사례들이 이러한 새 언어의 첫 소리를 낸 것이라면, 람라의 뾰족 아치는 이를 처음으로 완벽하게 문장으로 만들어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언어는 이후 몇 세기에 걸쳐 발전하고 전파되었으며, 중세 유럽의 고딕 교회에서 건축적 서사시로서 정점을 찍었다.

뾰족 아치에 대한 연대기를 완성하기 위한 탐구 속에서 나는 이곳 저곳에서 실질적인 기능들은 추적해 갈 수 있었지만 그 경로에 남아 있는 사상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이 훨씬 어렵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는 Lowry가 쓴 대로 중세에는 "서양과 무슬림 간의 접촉의 정도가 정적이지 않고 매우 활발하여 한 양식의 예술적 영향력이 다른 것들로 쉽게 변화"해 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기독교의 서양이 이슬람의 동양에서 뾰족 아치를 채택했던 것처럼, 이슬람 역시 페르시아나 비잔티움, 인도, 아시아, 아프리카, 심지어는 유럽으로부터까지 문화적 어휘들을 채용했었다. 이를 염두에 두고 Natsheh씨는 자신의 스승이었던 고 Ahmad Fikri(Creswell과 동시대의 학문적 라이벌) 교수의 말을 빌어 나에게 이슬람 미술의 역사를 요약해 주었다.

"이슬람 미술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이슬람 미술을 똑똑하고 예쁜 어린아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그는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이 아이의 눈은 로마에서 온 것이고, 손은 페르시아에서 온 것이며, 다리는 콥트교도의 이집트에서 온 것이다. 그래서 이 모든 요소들이 혼합되어 멋지고 똑똑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렇다면 미술의 역사상 가장 심오한 움직임 중 하나였던 고딕 양식은 이 똑똑한 아이의 유전자를 담고 있는 것이다.

Tom Verde 프리랜서 작가인 Tom Verde([email protected])는 Saudi Aramco World의 단골 기고가로 이슬람 연구 및 기독교-이슬람교 간 관계 분야의 박사 학위를 갖고 있습니다. 그는 이 글을 많은 여행을 함께 했던 자신의 스승이자 조언자, 멘토이자 친구였단 고 Ibraham Abu-Rabi씨께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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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팀

This article appeared on pages 34-43 of the print edition of Saudi Aramco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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