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 65, No. 42014년 7월/8월

In This Issue

아름다움을 응시하다 // 글 ANA CARREÑO LEYVA
1860년대 초, 허드슨 리버 스쿨의 화가 사무엘 콜맨은 처음으로 스페인을 방문한 미국 예술가들 중 한 명이었다. 'The Hill of the Alhambra'(1865년)는 회화적인 아름다움과 장엄함이 더 높은 의식으로의 감각을 자극한다는 대중의 이상을 반영한다. 
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Art resource, 아래: José Miguel Puerta Vílchez
1860년대 초, 허드슨 리버 스쿨의 화가 사무엘 콜맨은 처음으로 스페인을 방문한 미국 예술가들 중 한 명이었다. "The Hill of the Alhambra"(1865년)는 회화적인 아름다움과 장엄함이 더 높은 의식으로의 감각을 자극한다는 대중의 이상을 반영한다. 
ana al-rawdh qad ashbahtu haliya

tammal jamali 

tastafid sharha haliya 




전 아름다움으로 치장한 

정원입니다. 당신이 제 아름다움을 

응시하고 있다면 절 알아볼 것입니다.


—Ibn Zamrak(1333-1393년)의 아랍 시, 얕은 양각의 쿠픽체 문자, 알람브라의 두 자매의 방에서

유럽의 최남단에 있는 스페인의 안달루시아 지방에 있는 그라나다로 향하는 모든 방향에서 알람브라 성곽, 궁전, 정원을 볼 수 있다. 알람브라 뒤로는 시에라네바다 산맥이 있고, 근대 건물들 사이로 천 년 이상의 역사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시내의 도시적 전경이 아래에 펼쳐진다. 북쪽으로는 알바이신(또는 무어인 지구)의 입체적인 풍경이 반대편 언덕에 보이고 시내의 골목의 구불구불한 미로를 마주하고 있다.

알람브라는 오랫동안 스페인의 이슬람 예술의 가장 귀중한 보배로 인정되어왔다. 알람브라는 역사적, 수학적, 영적, 신비주의적, 감각적, 몽환적인 관점으로 충만한 미학의 완벽한 본보기로서, 그라나다와 전 세계의 셀 수 없이 많은 예술가들에게 심오한 영감을 주었다. 역사적이든 과학적이든 낭만적이든 전위적이든 현대적이든, 각 예술가는 자신만의 스타일로 알람브라를 이해하고 결과적으로 알람브라가 자신의 영향력을 드러내도록 했다. 

맨 위 및 위 오른쪽(Owen Jones): Bridgeman images, 위 왼쪽(Gómez-Moreno): Album / Art resource
19세기 역사주의 화가들은 알람브라를 낭만적인 향수로 가득찬 서사적인 시각적 스타일로 표현한 사건들의 상징과 배경으로 사용했다. 맨 위: "The Fall of Granada in 1492", Carlos Luis Ribera y Fieve, 1890 및 (위, 왼쪽) "Boabdil’s family leaving the Alhambra", Manuel Gómez-Moreno González, 1883는 모두 카톨릭의 정복 및 그로 인해 추방당하는 나스르 술탄과 그의 가족을 그린 것이다. 위 오른쪽: 과학적이고 낭만적인 시선으로 알람브라의 많은 디자인을 기록한 웨일즈 건축가 오웬 존스는 1856년 알람브라를 "무어 예술의 완벽성의 정점"이라고 단언했다.

무슬림 스페인은 오늘날의 안달루시아가 파생된 곳이며 중세 시대에는 알안달루스라는 이름을 가졌었다. 알람브라 궁전은 마지막 8세기 동안 알안달루스를 통치한 무슬림 지배자들인 나스르 술탄들에 의해 13세기에서 15세기 사이에 지어졌다. 15세기, 알람브라의 안뜰은 불분명한 미래를 떠안은채 과거의 찬란한 영광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었다. 나스르 왕조는 정치적 생존을 위해 북아프리카 마리니드 왕조의 군사적 원조뿐만 아니라 조공의 대가로 그리스도교 왕국인 카스티야의 보호에 의지했다. 이러한 외부적 압박과 내부적 권력 싸움으로 약해진 나스르 왕조의 1492년 추방은 무슬림 스페인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이 기념비적인 건축물이 이러한 위태로운 조건 아래 세워져 세월의 경과에 저항했다는 것이 더욱 놀랍다. 왜냐하면 나스르 왕조가 사용할 수 있었던 재료는 회반죽, 치장 벽토, 나무 및 평범하고 쉽게 작업할 수 있는 돌같이 단순하고 빈약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대단한 재료는 없었으나 엄청난 지식으로 그것을 만회했다. 그들의 이름 없는 건축가들은 실용적인 관점을 포함하여 숫자를 인간의 가장 심오한 개념으로 여기는 신비주의적이며 영적인 관점으로 매우 높은 수준의 고대 그리스 및 이슬람 수학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러한 기준을 따라 알람브라의 비례와 장식에 숫자, 우주 및 사람들 간의 관계를 반영했다. 예를 들면 고대 그리스 개님인 "황금 비율" 또는 황금비는 끝이 없는 기하학적 구조, 설계된 정원의 무성함, 굉장한 회반죽 장식 및 무수히 많은 우아한 쿠픽체 판 등 궁전 전체에 사용됐다.

왼쪽: Wikimedia commons, 오른쪽: Bridgeman images
워싱턴 어빙의 알람브라 이야기가 출판된 해인 1832년, 예술가 데이비드 로버츠가 스페인에 방문하지만 그는 후에 유명해진 이집트 및 레반트로의 여행을 떠나기 직전 1838년에 "코마레스 탑" 왼쪽을 그렸다. 오른쪽: 로버츠와 같이 1870년대에 알람브라의 "Porte de Justice"을 그린 프랑스 예술가 Francois Antoine Bossuet는 우아하고 따뜻한 빛, 세세한 항목(사진술 발명에 받은 영향) 및 아래 사진들에도 눈에 띄는 기법인 과장된 공간과 관점을 강조하는 작은 인물 등 잘 발달된 낭만적 오리엔탈리즘 기법을 사용했다.  

1492년, 카스티야의 그리스도교 군주들은 알람브라를 점령하고 귀족 및 상인들은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무어식 건물 및 유대인 건물을 취했다. 16세기 초, 스페인의 카를 5세(독일의 카를 1세)가 그라나다를 수도로 삼기 위해 사용하려고 했던 르네상스식 궁전에 자리를 내주기 위해 알람브라 궁전 일부가 허물어졌다. 기록이 보존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궁전이 무너졌는지 알지 못한다. 

르네상스식 궁전이 세워졌고 오늘날까지 서있지만 그라나다는 결코 카를의 수도가 되지 않았다. 알람브라가 사용되지 않은 채로 2세기가 지나 과거의 영광이 먼지로 덮이고 망각 속에 긴 꿈이 되어 시간에 굴복하고 말았다. 아름다운 방과 정원들은 불법 거주자와 방랑자의 거처가 되었다. 밝혀진 것처럼, 이것은 새롭게 태동한 낭만주의 예술가들에게 이상적이고 매력적인 풍경이 되었다. 

19세기 초에 시작되어 100년이 넘게 걸린 그라나다의 극적이고 도시적인 근대화 계획은 이슬람식 건축학적 유산의 상당 부분을 훼선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1828년, 뉴욕의 작가 워싱턴 어빙은 짧은 스페인 여행 중에 그라나다를 방문했다. (12년 후 그는 나라를 대표하는 대사로 스페인에 돌아왔다.)

(2): Bridgeman images
또한 1832년, 프랑스 제도가 Joseph-Philibert Girault de Prangey가 20대 후반의 나이에 알람브라를 방문했다. 그때의 방문 시 새겨진 "사자의 안뜰"(왼쪽)은 드라마틱한 효과를 위해 안뜰의 높이 및 구역을 과장한다. 나른한 기타 연주자는 "졸고 있는 동방"이라는 일반적인 동양학자의 생각에 대한 비유로 보여질 수 있다. 같은 해에 영국 수채화가 존 프레드릭 루이스는 스페인에서 2년 간의 거주를 시작했다. 알람브라 탑을 응시하는 여인이 그려진 이름 없는 그림(오른쪽)은 그 기간에 그려진 것이다. 두 예술가의 작품들은 널리 공개되어 찬사를 받았다.

그라나다의 역사, 특히 알람브라의 역사는 어빙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심지어 그는 다 허물어져가는 궁전에 거처를 마련했다. 그는 도시의 다른 역사적인 지역뿐만 아니라 이곳을 보존하는 것의 중요성을 정치인들과 사회에 납득시키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그 일환으로 어빙은 1832년 런던에서 출판된 그의 고전 베스트셀러 알람브라 이야기에 알람브라의 영감을 담았다. 수십년 후 출간된 판에서는 구스타브 도레, Joseph-Philibert Girault de Prangey 및 다른 낭만주의 문학 작품 및 여행 문학의 삽화를 그렸던 다른 예술가들과 같이 유명한 예술가들이 삽화를 그렸다.  

어빙이 알람브라를 유명하게 만든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실은 그 스스로가 한 세기 일찍 유행을 이끈 사람이었다. 유럽 예술의 자침이 대륙의 최남단 안달루시아 및 북아프리카를 향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낭만주의의 열기로 타오르고, 18세기 초 천일야화, 18세기 말 백과사전식 Description de l’égypte와 같은 책들에 뿌리를 내린 동양적인 미학의 인기에 자극을 받은 낭만주의 예술가들은 남쪽으로 몰려갔다. 그들은 주제와 관련되고 도상학적인 핵심을 알안달루스의 역사 및 문명에서는 일반적으로, 그라나다에서는 더욱 구체적으로, 그리고 알람브라에서는 거의 전부를 발견했다. 그라나다와 알람브라는 유명해졌고 갈망의 대상, 세속적 순례지가 되어갔다. 주로 영국과 스코틀랜드(일부는 프랑스 및 독일)의 작가, 화가 및 시인으로 구성된 알람브라를 동양의 입구 또는 "동양 그 자체"라고 격찬한 낭만주의 여행가들 사이에서 더욱 유명해졌다. 그들은 특히 리처드 포드의 1845년작 Guide for Travellers in Andalusia and Readers at Home와 같은 새로운 장르의 여행 책들로 인해 용기를 얻었거나 여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심지어 "실낙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잃어버린 왕국" 그라나다에서 울리는 메아리, 시각적으로 혼합된 문화 및 사람들의 민족적인 특성, 이 모든 것이 낭만주의 예술가에게 이상적인 예술 작품이었다. 이것은 예술가들이 아무리 마셔도 고갈하지 않는 샘물과 같았다.


다음을 제외하고 Courtesy of the artists의 이미지입니다: 1) Museo Sorolla, Madrid; 2), 3) Bridgeman images; 7) Courtesy Juan Manuel Segura & Francisco Jiménez collection, Granada; 8) Album / Art resource; 10) ©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 Vegap, Madrid; 13) Archivo oronoz

예술가들에게 알람브라에서 가장 인기있는 주제는 이러한 그림들 중 대부분에서 배경으로 나타나는 코마레스 홀 또는 왕의 홀과 인접한 코마레스 안뜰로도 알려진 직사각형의 아라야네스의 안뜰일 것이다. 안뜰로부터 홀로 이어지는 완벽하게 연결된 기둥들과 아치들, 그리고 안뜰 공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연못 표면에 비췬 기둥들과 아치들이 대칭을 이룬다. 이 안뜰과 코마레스 홀에서 술탄은 방문자를 접견하고 사절단을 대접했다. 연못은 건축물보다 하늘을 더 많이 비추어내고 연못의 근본적인 고요한 단순함은 기둥과 아치천장의 화려한 장식뿐만 아니라 그것이 목격한 사회적 및 정치적인 활동들의 복잡함과 대조를 이룬다. 예술가들에게 이곳은 178년에 걸쳐 풍경이 끊임없이 뛰어난 광경으로 다시 만들어지는 곳이다.

맨 위 왼쪽부터:  1. Joaquín Sorolla of Valencia, Spain, 1917; 2. 판화, Girault de Prangey, 1836-37; 3. American Impressionist Frederick Child Hassam, 1883; 4. American Orientalist Edwin Lord Weeks, 1876. 그림 5-15 그라나다 예술가들의 그림: 5. Juan Vida, 1996; 6. Leonor Solans, 2005; 7. Eugenio Gómez-Mir, 1920; 8. José Maria López-Mezquita, 20세기 초; 9. Jesús Conde, 2009; 10. José Guerrero, 1974; 11. Socram, 2009; 12. Silvia Abarca, 2014; 13. José Maria Rodriguez-Acosta(1904년) 및 그의 조카, 14. Miguel Rodriguez-Acosta, 2007; 15. 다른 많은 사람처럼 Brazam(1993년)은 알람브라의 "빛의 투명함, 물소리"가 자신에게 잊을 수 없는 각인을 남겼다고 한다.


그라나다 대학의 예술사가 Ignacio Henares Cuéllar가 설명한다. "낭만주의 예술가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는 영적인 세계의 반향이라는 그들의 새로운 숭고 이론의 기준을 알람브라가 충족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은 안달루시아의 낭만주의 여행가들에게 구체화되며 특히 알람브라는 현대성의 커다란 첫 장을 진행시킨 다채로운 낭만주의 상상력인 지중해 오리엔탈리즘의 민족적인 기초를 정의하게 됩니다." 

특히 19세기 후반부에 알람브라는 "대부분이 데이비드 로버트, 존 프레드릭 루이스 또는 구스타브 도레의 맥을 잇는 교양있는 여행객"을 위한 목적지였다고 알람브라 및 헤네랄리페의 의회 총재 Maria del Mar Villafranca가 설명한다. 또한 "Mariano Fortuny와 살았던 [Henri] Regnault와 같은 유명인들은 아마도 가장 상징적이고 본이 되는 여행가일 것입니다. 그는 예술 수집가이자 예술 개혁가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특히 미국의 Edwin Lord Weeks 및 독일의 Adolf Seel 등 더 다양한 국적의 예술가들에게 퍼져나갔다.

낭만주의의 보호 아래 오리엔탈리즘이라 알려지게 된 예술적 흐름이 출범했다. 오리엔탈리즘은 종종 식민주의 사상과 태도가 혼합된 채로 유럽 예술가들이 대체로 무슬림, 아랍 및 북아프리카 소재에서 영감을 발견했던 곳이라면 어디든지 지중해 전역에 걸쳐 풍경 회화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화가이자 그라나다 대학의 미술 교수인 Jesús Conde에 따르면 대부분의 동양학적 충동은 갈수록 다양해지는 세계에서 그들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유럽인들의 탐구에 뿌리를 둔다고 한다. "동양을 정의하고자 하는 필요가 전체적인 움직임을 만들어냈습니다" 그가 말한다. "우리는 유럽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우리를 정의할 필요가 있고, 그것은 '다른 것'을 거울에 비춰볼 때만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한다. 당시 서양은 산업화와 실용주의의 등장으로 지루하고 숨막히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었다. 이에 대한 환멸은 더더욱 '서양에서 도주'하여 다른 문화뿐만 아니라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고대 문명의 유적과 보물들을 향해 떠나기를 부채질했다. 모두가 그러한 이국적인 땅에서 여행하며 그들의 갈망을 해결하고 드러내기 원했다.

왼쪽: © 2014 Succession H. Matisse / Artists Rights Society (ARS), 오른쪽: ©2014 M.C. Escher CO., All rights reserved, www.mcescher.com
1910년 3일 동안 방문했던 프랑스 화가 앙리 마티스는 "마지막 낭만주의 예술가이자 첫번째 근대 예술가"였다고 Maria del Mar Villafranca가 말한다. "마티스에게 알람브라가 준 영향은 모방으로 이어졌다기보다 그보다 더 심오한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후에 그의 스타일에 스며든 모티프를 그의 1911년 작 "Interior with Aubergines"(왼쪽)의 문양에서 볼 수 있다. 그와 비슷하게, 1922년에 방문한 네덜란드의 예술가이자 수학자인 M.C. Escher는 궁전이나 미술품을 그리지 않고 알람브라 예술에 개인적인 영감을 얻어 그의 1941년 목판화 "Fish"(오른쪽)에서와 같이 그가 알람브라에서 보았던 전통 이슬람식의 기하학적인 식물 문양을 닮은 무한 반복 가능한 문양으로 연결했다.

이러한 방법으로 낭만주의 예술가들은 알람브라에서 본질적인 장면, 즉 예술가들이 표현해낼 수 있는 만큼의 수많은 시각적 이미지를 그리기에 엄청난 도상학적인 장치를 발견했다.

낭만주의자들은 남쪽으로 몰려갔던 동시에 그들이 그렇게 피해가고자 했던 산업주의는 그들의 예술적 기회를 확장시켰던 새로운 분배 및 소비 방법을 그들의 예술에 제공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많은 미술품이 귀족들 또는 카톨릭 교회의 재정적 후원을 받았었고 일반적으로 궁전의 벽이나 종교적인 건물들로 쓰였다. 그러나 새로운 제조 기술은 석판 및 판화의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하여 인쇄물과 미술품을 더 저렴하게 만들었다(이는 수많은 모조품을 양산하기도 했다). 예술은 새로운 사회 계층인 부르주아가 관중이자 구매자로서 접근할 수 있는 시장 상품이 되었다. 

또한, 낭만주의 문학 도서에 삽화를 제공하고자 하는 필요와 수단은 이전에는 수작업의 노고가 담긴 원고에서만 가능했던 문학 작품을 위한 시각적 차원을 대중화시켰다. 이는 예술가들을 다양한 주제로 이끌었고 그들은 낭만주의 작품의 서정적인 따뜻함을 생생하게 나타내는 과제를 즐기는 동시에 사진술의 등장 덕분에 사실적인 그림들을 정밀하게 반영하기 시작했다. 

서정적인 사질주의로 중동의 소재를 다룬 것으로 유명한 데이비드 로버트는 낭만적인 안달루시아가 가져다 준 도상학을 선택한 감각을 가졌던 영향력 있는 예술가 중 한명이다. 지역에서 가장 유명했던 작품 "Tower of Comares"(6페이지 참조)는 현실이 환상 속에 녹아든 진정한 낭만주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와 비슷하게, 판화가 구스타브 도레는 분명하게 전설적인 특성의 기묘한 인물들을 사용하고 빛의 세기, 색감 및 알람브라 건축물의 밝기 등을 숙달하여 알람브라 풍경에 사람들을 솜씨좋게 담아냈다. 그의 분명한 사실주의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러한 놀라운 관점으로 작품을 보는 사람은 즉시 낭만주의 동양학자의 몽환적인 세계로 이동하게 만들었다.

왼쪽: Museo Sorolla, Madrid, 오른쪽: Courtesy of the artist
마티스가 알람브라를 방문한 해에 발렌시아 화가인 Joaquín Sorolla가 40대 후반의 나이로 스페인 남부 지방, 특별히 알람브라에서 인상주의, 상징주의, 모더니즘이 결합된 "Torre de los Siete Picos"(왼쪽)을 포함한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알람브라 벽에 나란히 위치한 집에서 자란 현대화가 Miguel Rodriguez-Acosta는 빨간색에 경의를 표한다. al-hamra라는 이름의 아랍어 기원은 빨간색이라는 뜻이다. 그의 2009년 작품인 "Vesperal"("성가")는 색감, 패턴, 기하학 및 화법이 균형을 이룬다(오른쪽).

존 프레드릭 루이스의 판화, 수채화 및 유화는 널리 재생산되었으며, 그는 "잃어버린 문명"의 미학 또는 환상적인 "알안달루스 낙원"의 주요 재료로서 건축물 및 아라베스크를 포함시켜 동양 및 지중해 분위기를 강조했다. 반면 사실주의자이자 스페인 학자인 리처드 포드경과 그의 아내 해리엇 포드는 여행 지향적인 본문과 동반된 실증적인 세부사항이 담긴 많은 그림을 그렸고 그 그림들은 나라를 사실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 되었다. 

또한 이 때 "미술품 중개인"이 등장하여 예술가와 소비자 사이의 브로커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중개인은 사적인 상업 예술 갤러리를 열어 예술 작품을 두었고 결과적으로 예술품의 소재(이 경우 알람브라)는 상품이자 실제 투자 물품이라는 새로운 위치에 올라섰다. 그라나라 갤러리의 오너 Ceferino Navarro는 알람브라의 존재가 구석구석 스며들어 "그라나다에 거주하는 모든 예술가는 이곳에서 태어났든지 외부에서 왔든지 상관없이 알람브라의 영향과 관계 없이 살기 어려우며 알람브라에 영원성을 부여하려는 유혹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시내 주요 거리인 Gran Vía de Granada를 따라 있는 Miguel Ángel Hortal 소유의 갤러리에는 알람브라 그림들이 창문을 통해 보여서 지나가는 행인의 시선을 끌며 수많은 미술 애호가들은 알람브라를 소재로 한 최신 심미적 추세를 반영하는 작품들을 이곳에서 구매한다.

11922년 네덜란드 수학자이자 예술가인 M. C. Escher는 그라나다에 방문해 알람브라에서 수학적이고 기하학적인 세계를 발견했다. 그는 "알람브라 궁전의 벽과 바닥에 있는 색이 입혀진 모자이크들을 통해 무어인들이 기하학적인 형상을 이용하여 빈 공간 없이 면을 채우는 기술을 숙달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적었다. 하지만 그의 영감은 그가 독자적인 스타일을 개발하는 촉매로 쓰였고 알람브라를 그리도록 이끌지는 않았다. 이는 그가 알람브라에서 보았던 전형적인 전통 이슬람식 기하학적, 식물 문양, 필기체를 닮은 방식을 사용하여 사람과 동물의 추상화를 사용한 무한 반복 가능한 문양으로 암시적으로 연결한 그의 작품들에서 발견할 수 있다. 

Escher의 반응은 외광회화, 상징주의, 인상주의 또는 아방가르드 학교의 관점을 실행하는 것으로 이어지기도 했던 "예술가들의 여행 경험이 더 경험적이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들을 생성할 때"인 20세기에 흔한 것이었다고 Villafranca가 말했다. 

Escher가 방문하기 12년 전 겨울, 프랑스 예술가 앙리 마티스가 그라나다에서 3일을 보냈다. 알람브라는 최근 대중적인 관광지로서 개방되어있다. 2010년 "마티스와 알람브라"라는 이름의 전시회를 조직한 Villafranca는 이 짧은 기간이 그가 "전통 표현과 가지는 휴식이 예술의 선두로 가는 비결"이라고 느끼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고 말한다. 색의 달인으로 알려진 그는 특히 북아프리카 여행 후 이슬람 예술에 오랫동안 매혹을 느꼈다. 하지만 그라나다는 결정적인 촉매제로서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새로운 형식의 통찰이자 격자 모양의 벽을 통해 스며드는 빛과 그림자의 향연임이 판명되었다. 

왼쪽: Courtesy of the artist, 오른쪽: Museo nacional centro del arte reina Sofia
왼쪽: 현대 그라나다의 선명한 표현주의 화가 Maria Teresa Martín-Vivaldi의 1996년 작 "Hall of the Two Sisters"에서 알람브라의 가장 유명한 돔의 아치형 지붕, 창문 및 타일은 굴절되고 흩어진다. 오른쪽: 스페인 내전에 이은 추방 후, Manuel Ángeles Ortiz는 특별히 알람브라에 헌신했다. 1959년 그가 그린 "Paseo de los cipreses" ("사이프러스 길")에서 외견상 단순한 기하학이 예상치 못한 아찔한 관점을 만들어낸다.

그는 그의 아내에게 적었다. "알람브라는 경이로운 업적이다. 나는 그곳에서 강렬한 감정을 느낀다." 그는 알람브라에서처럼 이슬람 예술이 가득한 이곳에서 장식 미술과 "순수" 미술 간의 정신적 경계를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마티스에게 알람브라가 준 영향은 모방으로 이어졌다기보다 그보다 더 심오한 것으로 이어졌습니다"라고 Villafranca가 말했다. 그 후 알람브라의 모티프에서 얻은 영감은 배경 또는 대상의 중심 모티프 또는 질감 디자인 등으로서 그의 작품에 항상 존재했다. Villafranca는 그가 "마지막 낭만주의 예술가이자 첫번째 근대 예술가"였다고 말한다.

"제게 영감이 필요할 때면 항상 알람브라로 가서 금색 빛에 파묻힙니다"라고 그라나다의 추상화가 Manuel Rivera(1927-1994)가 말하곤 했다. 그는 스페인 내전 후 아방가르드를 안내하는 것을 도운 El Paso 사업체의 설립자 중 한명이다. 그와 20세기 초 예술가들에게 알람브라는 영감의 지표로 잔존했다. 

위 왼쪽: Colecciones museograficas del patronato de la alhambra y generalife;
맨 위 및 위 오른쪽(2): Courtesy of the artists
알람브라 정원은 "예술가는 자연을 모방해서는 안되며 대신 자연으로부터 새로운 현실을 구축해야 한다"고 믿던 근현대 예술가들에게 되풀이되는 소재였다고 그라나다 예술가 Juan Vida이 말한다. 위 왼쪽: "La Vista de la Alhambra" ("알람브라 전경"), Gustavo Bacarisas, 1909-10. 맨 위: "Muro vegetal" ("식물 문양 벽"), Jesús Conde, 2012. 위 오른쪽: "Alberca Azul" ("파란 연못"), José Manuel Darro, 2000.

이와 흡사하게, 마티스에게 영향을 많이 받은 그라나다의 선두 화가 Manuel Ángeles Ortiz(1895-1984)는 "추상적인 환기로 기억과 그 형식의 미묘한 암시를 잡아낸" 그의 능력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그라나다 현대화가 José Manuel Darro가 말한다. "나스르 기하학은 초대이자 지적인 도전입니다"라고 그가 더했다. "알람브라가 생생한 이국적 소재로서 또는 풍경으로서 거의 포화 수준으로 많이 그려졌을지라도, 그 조각의 언어와 기하학을 재생산해내는 것은 덜 흔했습니다."

나스르 왕조의 근원적인 언어 및 기하학은 1927년 그라나다에서 태어난 Miguel Rodriguez-Acosta의 현대 그림에 깊은 영향을 주기도 했다. 가족의 이전 집에 있는 그의 스튜디오는 궁전 정원에서 몇 분만 걸으면 된다. 그는 가족의 일화를 소개하며 알람브라가 그라나다인들에게 아름다움의 상징이라고 설명한다. "제가 어렸을 때 가족과 함께 베르사유로 여행을 갔을 때, 프랑스 궁전의 정원 근처를 걷고 있었어요. 아버지는 유모에게 그 곳이 마음에 드는지 물었지요. 그라나다에서 태어나 다른 표현을 찾을 수 없었던 그녀는 '모든 알람브라 같은 알람브라네요!'라고 말했습니다."

아름다움의 전제로서 알람브라와 함께 자란 그는 오늘날 가장 국제적으로 알려진 그라나다의 예술가 중 한 명이다. 그의 작품은 색감, 패턴, 리듬을 통해 표현된며 그것들은 그의 뿌리와 평생에 걸친 이탈리아 전통에 대한 그의 개인적인 애착 간에 "풍부한 동반 효과"를 달성하기 위해 용적 측정 특성과 정원을 참조한다고 Maria Dolores Jiménez-Blanco가 2003년 회고전 카탈로그에서 적었다. "Rodriguez-Acosta는 자신의 무한한 섬세함으로 끝없는 색상 층으로 이루어진 질감을 창조하여 몇 세기가 흘러 금이 가고 부서진 회반죽벽의 일상적 관조 표현이 가능했습니다." 그녀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의 작품 표면을 구성하는 체계적인 붓 터치는 작품에 동작의 신속성을 부여하며 그의 작품을 20세기 표현추상주의의 추세와 연결시킵니다. 또한 이는 알람브라 안벽의 윗 부분에 있는 회반죽 줄 세공과도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왼쪽: Courtesy of the artist, 오른쪽: Colecciones museograficas del patronato de la alhambra y generalife
그라나다 예술가 Augusto Moreno는 2008년 작 "Susurra el moro" ("무어인의 속삭임")(왼쪽)에서와 같이 소성 및 산화 공정을 통해 금속판에 작업한다. 오른쪽: Julio Juste의 "Castillo Inferior" ("낮은 성") 시리즈의 "Baño Árabe" ("아랍 목욕탕")(1988년)는 알람브라의 함만(목욕탕)에 영감을 받은 것으로 나스르 장인들이 알람브라의 건축물에 사용했던 검소한 재료들을 떠올리는 재료들인 종이, 판지, 나무로 만든 콜라주이다.

스페인과 국제적으로 알려진 그라나다의 또다른 예술가 Juan Manuel Brazam는 그가 만약 다른 곳에서 태어났더라면 그는 물리적으로 동일할지 몰라도 그의 작품을 달랐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캔버스는 더욱더 알안달루스, 나스리드 왕국 및 알람브라의 예술로 양육되고 있다고 그가 말한다. 그는 "빛의 투명함, 물소리, 물줄기를 내뿜는 분수"로 그의 그림을 채운다. 그는 모자이크가 새겨진 무늬의 이미지는 통일성, 추상 및 기하학을 조성한다고 말했다. 

화가이자 판화가인 Maria Teresa Martín-Vivaldi는 일련의 작업에서 알람브라를 사용했다. 아치형 천장과 타일에 색감과 관점을 부여하여 기념비적 건축물이 나타나고 흐려지고 흩어지는 꿈같은 장면을 만들어냈다. Asunción Jódar는 알람브라에 거했던 여자들의 외진 또는 지나치게 단순화한 외부의 관찰을 차단 또는 상쇄하는 은밀한 세계에서 영감을 찾는다. 

얼마나 불가능해 보일지와 상관없이 항상 다시 새로워진 시야를 앞당기는 것처럼 보이는 젊은 그라나다 "신흥" 예술가들 가운데 알람브라를 기반으로 한 그림들의 확산이 지속된다. Belén Esturla, Silvia Abarca 및 Leonor Solans 모두 그들의 방식으로 색을 다루어 빛의 새로운 그림자의 모습을 담아낸다. 그라나다의 조각가 집안에서 태어난 Augusto Moreno는 도기에 유약을 바르는 전통과 달리 소성 및 산화 공정을 통해 동판에 작업한다. José Javier García Marcos는 그를 추상표현주의로 끌어 당긴 맹렬함이 담긴 색을 사용한다. 

(2): Courtesy of the artists
왼쪽: Miguel Rodriguez-Acosta가 2007년에 발표한 "La Alhambra"라고 불리는 일련의 스케치들 중 하나는 José Manuel Darro의 2010년 작 "Rincon de la Alhambra" ("Corner of the Alhambra")(오른쪽)와 같이 색과 패턴을 끌어내어 최소 단위로 나눈다. "알람브라가 생생한 이국적 소재로서 또는 풍경으로서 거의 포화 수준으로 많이 그려졌을지라도, 그 조각의 언어와 기하학을 재생산해내는 것은 덜 흔했습니다." 알람브라가 Darro가 말한다. "저는 이러한 양식을 갖춘 세계에서 특정한 결정을 가지고 제 작업에 접근했습니다."

예술이 모든 감성적인 시야를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모든 창조물을 수용한다는 널리 알려진 정의에서 벗어나, 우리는 알람브라가 아름다운 건축물 이상의 것, 벽 위의 아라베스크 식물 문양 그 이상의 것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알람브라는 쿠픽체로 적혀진 단어 그 이상의 것을 말하며, 분수와 연못에 비췬 반향은 난간과 밝은 안달루시아 하늘 그 이상의 것을 비춘다. 알람브라 궁전의 진정한 힘은 그 자체의 걸작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알람브라를 넘어선, 시공간을 넘어선, 인간이 상상한 정원 그 이상을 넘어선 창의성을 불타오르게 하는 힘에 있다. 

정원과 궁전의 아름다움을 응시하는 사람들은 시인 Ibn Zamrak이 두 자매의 방의 벽에 영원히 새겨놓은 정원과 궁전의 존재, 본질을 실제로 알아가기 시작한다. 이 본질은 우리가 사실을 아는 것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예술가들이 보여주었듯이, 우리가 진리 또는 심지어 통찰을 얻는 방식으로 파악된다. 그러면 알람브라 그 자신이 예술가가 되어 우리와 함께 작업할 것이다.  

Ana Carreño Leyva Ana Carreño Leyva (acarrenoleyva@gmail.com)는 스페인 문화 잡지 El Legado Andalusí의 창립자이자 전 편집자이며 그라나다에 있는 Fundación El Legado Andalusí의 전 통신 디렉터이며 이곳에서 수많은 전시회의 큐레이터를 맡기도 했다. 2007년, 그녀는 Antonio Enrique의 The Hermetic Alhambra(Port-Royal Ediciones)를 번역했다. 취미 화가인 그녀는 어릴적 부모님이 자신을 알람브라에 처음 데려갔을 때를 기억한다. "마법과 꿈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 같았어요. 저는 제 상상의 눈을 통해 그곳을 보았습니다."
Manuel Gómez-Moreno González의 1883년 작 'Boabdil’s family leaving the Alhambra' 는 카톨릭의 정복 및 그로 인해 추방당하는 나스르 술탄과 그의 가족을 그린 것이다. 워싱턴 어빙의 알람브라 이야기가 출판된 해인 1832년, 예술가 데이비드 로버츠가 스페인에 방문하지만 그는 후에 유명해진 이집트 및 레반트로의 여행을 떠나기 직전 1838년에 로버츠와 같이 1870년대에 알람브라의 'Porte de Justice' 을 그린 프랑스 예술가 Francois Antoine Bossuet는 우아하고 따뜻한 빛, 세세한 항목(사진술 발명에 받은 영향) 및 아래 사진들에도 눈에 띄는 기법인 과장된 공간과 관점을 강조하는 작은 인물 등 잘 발달된 낭만적 오리엔탈리즘 기법을 사용했다.   또한 1832년, 프랑스 제도가 Joseph-Philibert Girault de Prangey가 20대 후반의 나이에 알람브라를 방문했다. 그때의 방문 시 새겨진 '사자의 안뜰'(왼쪽)은 드라마틱한 효과를 위해 안뜰의 높이 및 구역을 과장한다. 나른한 기타 연주자는 응시하는 여인이 그려진 이름 없는 그림은 그 기간에 그려진 것이다. 두 예술가의 작품들은 널리 공개되어 찬사를 받았다. 1. Joaquín Sorolla of Valencia, Spain, 1917;  3. 미국 인상파 화가 Frederick Child Hassam, 1883; 2. 판화, Girault de Prangey, 1836-37; 4. American Orientalist Edwin Lord Weeks, 1876. 5. Juan Vida, 1996; 6. Leonor Solans, 2005; 7. Eugenio Gómez-Mir, 1920;  8. José Maria López-Mezquita, early 20th c.; 9. Jesús Conde, 2009;  10. José Guerrero, 1974;  11. Socram, 2009; 12. Silvia Abarca, 2014; 13. José Maria Rodriguez-Acosta, 1904, Miguel Rodriguez-Acosta, 2007; 다른 많은 사람처럼 Brazam(1993년)은 알람브라의 '빛의 투명함, 물소리' 가 자신에게 잊을 수 없는 각인을 남겼다고 한다. 1910년 3일 동안 방문했던 프랑스 화가 앙리 마티스는 '마지막 낭만주의 예술가이자 첫번째 근대 예술가' 였다고 Maria del Mar Villafranca가 말한다. '마티스에게 알람브라가 준 영향은 모방으로 이어졌다기보다 그보다 더 심오한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후에 그의 스타일에 스며든 모티프를 그의 1911년 작 'Interior with Aubergines' (왼쪽)의 문양에서 볼 수 있다. 그와 비슷하게, 1922년에 방문한 네덜란드의 예술가이자 수학자인 M.C. Escher는 궁전이나 미술품을 그리지 않고 알람브라 예술에 개인적인 영감을 얻어 그의 1941년 목판화 'Fish'(오른쪽)에서와 같이 그가 알람브라에서 보았던 전통 이슬람식의 기하학적인 식물 문양을 닮은 무한 반복 가능한 문양으로 연결했다. 마티스가 알람브라를 방문한 해에 발렌시아 화가인 Joaquín Sorolla가 40대 후반의 나이로 스페인 남부 지방, 특별히 알람브라에서 인상주의, 상징주의, 모더니즘이 결합된 'Torre de los Siete Picos' 을 포함한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알람브라 벽에 나란히 위치한 집에서 자란 현대화가 Miguel Rodriguez-Acosta는 빨간색에 경의를 표한다. al-hamra라는 이름의 아랍어 기원은 빨간색이라는 뜻이다. 그의 2009년 작품인 'Vesperal' ('성가')는 색감, 패턴, 기하학 및 화법이 균형을 이룬다. 왼쪽: 현대 그라나다의 선명한 표현주의 화가 Maria Teresa Martín-Vivaldi의 1996년 작 'Hall of the Two Sisters' 에서 알람브라의 가장 유명한 돔의 아치형 지붕, 창문 및 타일은 굴절되고 흩어진다. 스페인 내전에 이은 추방 후, Manuel Ángeles Ortiz는 특별히 알람브라에 헌신했다. 1959년 그가 그린 'Paseo de los cipreses' ('사이프러스 길') 에서 외견상 단순한 기하학이 예상치 못한 아찔한 관점을 만들어낸다. 'Muro vegetal' ('식물 문양 벽'), Jesús Conde, 2012. 'La Vista de la Alhambra' ('알람브라 전경'), Gustavo Bacarisas, 1909-10. 'Alberca Azul' ('파란 연못'), José Manuel Darro, 2000. 그라나다 예술가 Augusto Moreno는 2008년 작 'Susurra el moro' ('무어인의 속삭임') 에서와 같이 소성 및 산화 공정을 통해 금속판에 작업한다. Julio Juste의 'Castillo Inferior' ('낮은 성') 시리즈의 'Baño Árabe' ('아랍 목욕탕')(1988년)는 알람브라의 함만(목욕탕)에 영감을 받은 것으로 나스르 장인들이 알람브라의 건축물에 사용했던 검소한 재료들을 떠올리는 재료들인 종이, 판지, 나무로 만든 콜라주이다. 왼쪽: 2007년 Miguel Rodriguez-Acosta의 작품 'La Alhambra' 스케치 시리즈 중 하나, 색과 패턴을 끌어내어 거의 최소 단위로 나눈다. 'Rincon de la Alhambra' ('Corner of the Alhambra'), 2010, José Manuel Darro

 

This article appeared on page 4 of the print edition of Saudi Aramco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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