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독립 국가로서 첫 성공이라고 할 수 있는 올해 브라질 월드컵 출전을 위해 10월에 선출된 보스니아 팀의 훈련 캠프를 시작하는 5월 16일 금요일 아침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대부분의 시민들은 국가 축구 팀의 출전권이 정부 역기능, 60%의 실업률 및 무슬림,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간에 해결되지 않은 민족 불화에 시달리는 전후 기간 중에 경험한 최고의 것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화요일 저녁부터 비가 멈추지 않고 내렸다. 대부분의 물이 사라졌지만 필드의 남서쪽 코너에 물이 남아 있어 축구 경기장보다는 습지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라예보는 5월 17일 토요일 내내 비가 내려 심각한 범람과 이류로 인해 4백만 인구 중 50만명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집을 잃게 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에서 운이 좋은 지역들 중 하나이다. 파괴되고 피해를 입은 집, 물 위를 떠다니는 죽은 가축들, 근심으로 가득찬 가족들의 사진들이 야간 뉴스를 채운다. 이것은 대부분 시민으로 이루어진 2백만명의 난민들과 10만명의 죽음을 야기한 보스니아 내전 이후에 생긴 보스니아 최악의 참사이다.
보스니아 팀의 버스는 선수들을 10시까지 필드로 데려가기 위해 오전 9시 30분에 도착할 예정이다. 방문객에게 커피를 빠르게 대접하는 Senad, Nihad, Sead는 여전히 해야할 일이 있다.
8시경 비가 멈췄고, Nihad는 오래된 손수레로 필드까지 운반한 그물을 골대에 걸 기회를 얻었다. Senad와 Sead는 선이 똑바른지 확인하기 위해 코너들 사이에 밧줄을 펼치고 석회 가루를 뿌린다. 그들은 어두운 파란색과 검은색으로 된 항공 재킷을 입은 건장한 Securitas 요원들이 버스가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열 때 나이를 불문하고 희망과 자랑스러움이 담긴 눈으로 박수를 치고 있는 100여명의 팬들의 인사를 받으며 필드에 마무리 손질을 더하고 있다. 구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가장 위대한 축구 선수 중 한명이며 사라예보에서 북쪽으로 100킬로미터(65mi) 떨어진 자비도비치에서 태어난 Safet Sušić 감독은 어두운 창문 너머를 돌아보며 짧게 손을 흔들어 인사한다.
문이 열리고 연습 장비를 갖춘 16명의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들이 내려온다. 이 선수들에는 팬들에게 "어린 왕자"라고 불리는 앳된 얼굴의 AS 로마 미드필더 Miralem Pjanić(24세), 부상 때문에 브라질 월드컵 대표팀 명단에서 제외될 뻔했으나 다시 합류하게 된 독일 분데스리가 SC 프라이부르크 수비수인 Mensur Mujdža(30세), 외국에서 경기해본 적이 없는 유일한 선수로서 보스니아의 두 정치적 독립국 중 하나인 스릅스카 공화국 수도인 바냐루카에서 FC 보라츠의 골문을 지키기로 선택하는 대신 백업 골키퍼로 합류하는 Asmir Avdukić(33세), 내전 중 할아버지와 20명의 친척들이 살해 당했고 현재는 분데스리가 VfB 슈투트가르트에서 주역을 맡고 있는 기질적인 스트라이커 Vedad Ibišević(29세)가 포함된다.
필드는 아름답고 매끄러워 보이지만 사용할 준비가 되어있다. 마치 결과물에 의심이 없었던 것처럼 "저희 셋만 있어도 작업을 마칩니다"라고 관리 요원 중 가장 어린 Senad가 말했다. "지난 며칠 동안 다른 것은 하지 않고 작업만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것이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 작업을 했습니다."
일부 보스니아 사람들은 근래 체념으로 유명한 발칸 지역에 위치한 불운한 국가인 보스니아에서 자신감이란 매우 보기 드문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축구 선수들이 모이게 되면서 그것이 변화되었다.
"보스니아인과 세르비아인은 비관주의 성향과 암울함, 패배주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겐 낙관주의가 결핍되어 있습니다"라고 보스니아계 세르비아인인 스포츠 해설자 Marjan Mijajlović가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사라예보 기반의 FACE-TV를 위해 스포츠 중계를 중지시키고 2009년 스포츠 중계 중에 sevdah 또는 전통 보스니아 노래에서 용이라고 칭송되는 19세기 보스니아 전쟁 영웅 Husein Kapetan Gradaščević에서 유래한 "Zmajevi" 또는 "용"이라는 별명을 팀에게 붙여 주었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고 Mijajlović(42세)가 말한다. 그는 2008-2009년에 신흥 VfL 볼프스부르크에게 첫 분데스리가 타이틀을 안겨주었고 2011년 맨체스터 시티로 이적하여 3년 안에 영국 프리미어 리그 타이틀을 거머쥐도록 팀을 도운 28세 포워드 에딘 제코에 대해 "Džeko를 보십시오. 그가 얼마나 자신감있게 경기에 임하는지를 보십시오"라고 언급한다. "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으면 지지 않습니다."
게다가 재정이 풍부하지 않고 팀을 선택하기엔 선수 인력이 적은 작은 나라인 보스니아의 월드컵 출전권이 더욱 믿기지 않은 이유는 내전이 발생했을 때 대부분의 선수들이 어린 아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은 축구에 미친 나라를 첫 월드컵에 보내어 사람들이 그토록 원했던 기쁨을 주고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환호하는 것은 아니다. 보스니아로부터 분리되기를 원하는 세르비아 및 크로아티아의 독립주의자들은 보스니아 선수단이 이기지 않기를 바란다.
대부분이 보스니아계 무슬림이지만 카톨릭 크로아티아인과 정통 세르비아인으로 구성된 팀은 국제적인 축구 경쟁자로서 그리고 보스니아의 독립주의자들에게 균형추로서 나라의 다양한 민족들이 협력했을 때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실제로 32세의 세르비아인 미드필더 Zvjezdan Misimović와 그가 어시스트한 팀의 득점왕인 무슬림 Džeko는 팀에서 가장 득점을 많이 얻는 콤보를 형성한다. 오늘날 보스니아 팀을 응원하기 시작하는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들의 수가 점점 늘고 있고 이것을 지켜보는 일부 사람들은 평화유지군, 정치인들, 외교관들, 외국 지원 인력들도 할 수 없었던 것을 팀이 이뤄낼 수 있을지 궁금해 하고 있다. 바로 나라를 연합하는 것 말이다.
"우리는 팀 내에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마치 하나와 같습니다" PFC CSKA 모스크바에서 "장군"으로 불리는 스타 미드필더 Elvir Rahimić(38세)가 말했다. 그는 예선전에 걸쳐 보스니아를 위해 선수로 뛰었지만 수시치는 그가 브라질에서 코치로 있어주기를 부탁했다.
"우리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팀과 같은 기능을 한다고 보고싶습니다. 그것이 이상적일 것입니다" 라히미치가 말했다. "우리는 누가 무슨 [국적]을 가졌는지, 이름이 무엇인지를 보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그런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정부의 정치인들도 우리가 국가 팀에서 했던 것과 같이 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한다면 이 나라에 굉장한 일이 될 것입니다."
대중에게 연습 경기를 숨기는 많은 팀들과는 달리 하루에 두 번, 각각 두 시간씩 행해지는 보스니아 팀의 훈련 과정들은 대중에게 공개되며, 이번 주 금요일 오후 수백 명의 팬들은 얕게 내리는 비를 개의치 않고 1500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금이 간 콘크리트 옥외 관람석으로 향한다. 그들은 트레이닝복을 입은 어린이들, 파란색 베레모를 쓴 아저씨들과 할아버지들, 디자이너 청바지를 입은 젊은 아가씨들, 어린 자녀와 함께 온 엄마들이다. Asim Zukanović라고 하는 노신사는 사랑니를 발치하자마자 곧장 경기장으로 왔다.
Sušić 감독은 네 명의 코치 Rahimić, Borce Sredojević, Elvir Baljić 및 Tomislav Piplica와 함께 선수들을 인솔하고 있다. 선수들은 네명씩 팀을 이루어 오렌지색과 노란색으로 된 플라스틱 디스크 콘으로 테를 두른 30평방미터(33평방야드) 공간 안에 서 있다.
"여기서 골대는 없습니다. 이것은 반응에 관한 것입니다" Sušić(58세) 감독이 제의했다. 그는 호각을 불고 재빨리 반응하는 선수들 가운데로 공을 던진다.
타이트한 공간에서의 속도는 번개처럼 빠르다. 선수들은 10미터 거리에서 날아오는 약 5개의 낮고 어려운 패스를 솜씨 좋게 받고 수비수가 끼어들기 전 가까이에 있는 팀원에게 똑같은 강도의 패스를 보낸다. 드리블은 하지 않는다. 선수들은 공을 처리하기 전 공에 한두 번만 닿을 수 있다. 이 상태에서 세번째 닿을 경우 수비수가 기습할 시간을 허용하게 되고 게임은 끝나게 된다.
이것의 강도는 극명하다. Pjanić가 공중볼을 상대에게 잘못 보냈을 때 그는 소리를 지르며 무릎을 꿇고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잠시 후 그는 일어나서 게임을 다시 따라잡는다.
선수들 간 끊임없는 말이 오가는 중 Sušić 감독은 큰 소리로 지시사항을 전한다. "필드 바꿔, 머리 올리고!" "해결책을 더 빨리 찾아봐!" "공 붙들고 있지 마!" 분데스리가 클럽 샬케 04 소속 20세의 수비수인 Sead Kolašinac는 패스를 하기까지 너무 오래 기다려 수비수가 낚아챌 기회를 허용한다. Sušić 감독은 소리지른다. "거기 인사하려고 서있나?"
FK 사라예보, 파리 생제르맹(팬들은 클럽 내 프랑스인이 아닌 선수 중 가장 위대한 선수로 그를 뽑았다) 및 유고슬라비아 국가 팀의 휘황찬란한 드리블러였던 Sušić에게 나온 이 말은 아이러니하다. 그의 위업들은 유튜브에서 볼 수 있으며 심지어 그의 기술을 기념하는 보스니아 노래 "Not Alone, Safet"도 있다.
Sušić 감독은 많은 득점으로 이어진 공격형의 창의적이고 재밌게 볼 수 있는 종류의 축구로 보스니아 밖의 보스니아인들을 축구 열성팬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실제로 보스니아가 유럽 예선에서 기록한 30골은 잉글랜드, 독일, 네덜란드만 견줄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항상 공격하려는 것처럼 보인다"라고 말하는 프랑스 스포츠 일간지 L’équipe의 리포터 Luc Hagège는 수시치를 보며 자랐고 그를 축구팬으로 만든 것은 Sušić라고 한다.
축구는 보스니아 문화에서 중요한 부분이며 도시와 시골에 대형 축구 필드와 소형 축구 필드가 풍부하게 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군인들이 19세기말 게임을 소개하여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에 첫 클럽이 탄생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는 축구 강국이 되어 제14회 월드컵에서 8강에 들었고 1990년에 국가가 해체되기 전 4강에 두 번 들었다. Sušić 이전의 감독으로는, 파리 생제르맹을 이끌었고 이번 월드컵에서 알제리를 이끌 Vahid Halilhodžić 감독, 사라예보의 뛰어난 드리블러였고 그의 기술과 그를 기리는 노래 "The Sunday That Hase Left"가 유튜브에 있는 Asim "Hase" Ferhatović 감독이 있다.
이는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현세대의 보스니아 선수들이 상속받을 예정이었던 유산이다. 갈등이 시작되었을 때 대부분의 선수들은 청소년이었다. 일부 선수는 저격수와 포화의 위협 아래의 보스니아에서 자랐고 가족과 함께 떠난 선수들도 있고 몇 선수는 보스니아가 아닌 다른 국가에서 태어났다.
제코는 인터뷰에서 포화로 인해 그의 집이 어떻게 피해를 입었는지 회상했었다. 그 포화로 인해 그의 가족은 난민 가족들이 이미 머물고 있던 다른 집으로 옮겨가야만 했다.
ESPN Magazine지 5월호에서는 Ibišević(29세)가 7살이었을 때, 그의 어린 여동생이 잠에서 깨어나 수백미터 밖에서 집집마다 샅샅이 뒤지고 있는 세르비아 무장 군인들의 주의를 끌지 않기를 바라며 Gerovi의 마을 밖에 있는 숲 속에 어머니가 파놓은 굴에 숨었던 것에 대해 인용했다. 그의 가족은 2000년에 보스니아를 떠났고 스위스에서 잠시 머무른 후 보스니아 밖에서 보스니아 인구가 가장 많은 미주리 세인트루이스로 이주했다.
2003년, 전미 대학 경기 협회는 가장 귀중한 디비전 I 축구 선수 목록에 유일한 신입생인 세인트루이스 대학 선수를 지명했다. 이는 짧은 머리가 회색이 되어가는 Ibišević가 NSCAA의 First-Team All-America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Conference USA의 신인상을 석권한 뒤에 이루어진 것이다.
잉글랜드 스토크 시티의 골문을 지키며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에서 최고의 골키퍼 3명 중 한명으로 여겨지는 Asmir Begović는 3살의 나이에 가족과 함께 보스니아 남부의 트레비네를 떠났다. 그는 독일에서 난민으로 지내던 시절 4살에 처음으로 골키퍼 장갑을 끼고 나서 자신이 아버지와 같이 프로 골키퍼가 되고 싶어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10살이 되었을 때 그의 가족은 캐나다의 에드먼튼으로 거주지를 옮겼고 그는 그곳에서 농구, 배구, 농구 및 테니스도 했다.
Begović는 그의 여정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우리는 가족으로서 결속되어야 했었고 감사하게도 똘똘 뭉쳤습니다" 결혼하여 어린 딸이 있는 26세의 Begović는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겸허히 받아들였고, 일이 일어나는 데는 이유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이 우리가 가질 수 있었던 최선의 태도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분명 이 경험을 통해 조금 더 빨리 성숙하게 되었고 매사에 조금 더 책임감을 가지고 처리해야 했습니다."
결국 Begović는 보스니아 팀에 합류하기 전까지 다른 나라의 청소년 국가 대표팀 소속 선수 9명 중 한명으로서 캐나다의 20세 이하 선수단에 있었다. 프랑스, 독일, 스위스 등지에서 난민으로 살았던 그의 팀원 중 다수가 보스니아를 위해 뛸지 그들을 받아준 나라를 위해 뛸지 결정을 쉽게 내린 반면 Begović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저는 캐나다에 많은 관계와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제 인생에서 꽤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들을 떠나는 것은 어려웠습니다"라고 Begović가 말한다. 그의 부모님은 그가 집에서는 보스니아어로 말하고 읽으며 보스니아 요리를 하면서도 밖에서는 캐나다의 삶에 융합되도록 격려하셨었다. "보스니아를 대표한다는 것은 제가 거절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제 가족 중 많은 분들이 여기 있기 때문에 저는 이 경험들을 그들과 공유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태어났고 그것은 아주 큰 연관성을 가집니다."
사라예보에서 북서쪽으로 75킬로미터(47마일) 떨어진 제니차에 있는 fifa의 인증을 받은 새로운 필드와 트레이닝 센터 옆에 있는 언덕 꼭대기의 목초지에서 Arnel Arnautovic(11세)와 함께 축구공을 차고 있는 Irfan Vugdalić(9세)는 만약 7월에 보스니아가 월드컵에서 우승을 한다면 그 자리에 모닥불을 만들어 축하할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제니차 시내에 있는 Bilino Polje 경기장을 볼 수 있다. 이 곳에서 예선 홈경기가 치뤄졌고 경기 결과는 4:1이었다. 카톨릭 교회의 첨탑이 경기장 서쪽 끝에 솟아있다. 뾰족 탑이 동쪽 끝을 향하고 있으며 두 탑 위로 제철 공장의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른다.
Vugdalić의 아버지 Suad(38세)는 다른 꿈을 가지고 있다. "저에게 이 곳을 떠날 기회가 있다면 저는 떠날 것입니다. 생각해볼 필요도 없습니다"라고 그가 말한다.
그와 그의 아들은 축구를 하기 위해 거의 매일 필드로 간다. 하지만 비가 퍼부어댄 이번 주 월요일 오후에는 평소보다 더 일찍 이곳에 나왔다. 약 한시간 전 3시 30분쯤 금품과 민족적인 그래피티가 연루된 분쟁에서 한 남자가 다른 남자를 총으로 쏘아 죽였다.
그러나 Suad Vugdalić는 현지인들이 자랑스럽게 용의 둥지라고 부르는 제니차에서 보스니아 축구 팀이 홈경기를 치뤘을 때의 삶이 좋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리히텐슈타인과의 마지막 홈예선을 고려해보라.
"집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거리에 나와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행복뿐이었습니다" 그가 회상한다. "아무도 실업률이나 일 또는 누가 무슨 종교인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살았던 날로 우리를 데려가 주었습니다. 심지어 바냐루카와 비옐리나에서 온 세르비아인들이 보스니아 유니폼을 사기도 했습니다."
"몇 년 전만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에요" 그의 아내 Arnela가 덧붙인다. "많은 사람들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하나의 나라로 보기 시작했어요."
선수들이 보스니아인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경기에서 승리한 방식 때문이기도 하지만 선수들이 그들처럼 전쟁과 난민 생활의 어려움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선수들은 어려운 시간을 겪은 후 보스니아에 친구와 가족들이 있기 때문에 많은 보스니아인들이 여전히 힘겨운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안다. 실제로 경기장과 그들이 머물고 있는 Hotel Herzegovina 사이의 팀 버스에서 고군분투하는 광경을 일상적으로 볼 수 있다. 농부들이 밭에서 등을 구부리고 일한다. 한 남자는 목발에 의지한 채 한쪽 발을 절뚝거린다. 창백한 노년의 여인이 구걸한다. 주인을 잃은 개들이 사방을 떠돌아 다닌다. 이것이 선수들을 현실적인 사람들로 만들어 연습 중간에 호텔에서 사진 요청을 하거나 팬들과 사진을 찍히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저희는 사람들이 전쟁 중에 무엇을 겪는지 알아요." 5형제 중 막내로 자그레브 밖의 난민 캠프에서 축구를 배웠던 미드필더 Senijad Ibričić(28세)가 말했다. "축구는 사람들의 마음에 행복을 주고 우리에게는 투지를 줍니다."
선수들은 사람들을 도울 다른 방법도 찾으려 한다. Begović는 보스니아와 영국에 있는 어린이들을 위한 복지 시설 설립을 위한 재단을 시작했고, 제코는 그가 골 득점을 올리듯 그의 자선 사업을 위해 가능한 많은 뉴스를 만들어내려 한다. 훈련 캠프 중간에 그들은 북쪽의 Gradačac에서 21세 이하 국가팀과 자선 경기를 치른다. 현지 신문은 Pjanić가 홍수 피해자들을 위한 보급품을 구입하기 위해 가는 길에 약국에 어떻게 들렀는지 보도한다. 일요일에 있는 연습 경기들 사이에 여러 선수들은 새로운 골수 이식 병원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전화를 받는다.
한시간의 이야기 후에 Rahimić, Kolašinac, Avdukić, 그리고 또다른 백업 골키퍼인 Jasmin Fejzić(28세)는 에스프레소를 마시러 슬며시 나간다. 그들은 홍수 때문에 사라예보와의 주말 경기가 취소된 제니차의 팀 FK Čelik이 좋았는지 어땠는지 호텔 웨이터와 토론한다.
선수들은 첫 월드컵에서 나라를 대표하는 것이 도전이 될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여전히 자신감이 넘친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느긋하게 즐기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좋은 팀이라는 것을 압니다." 슬로바키아전에서 25미터(27야드)의 장거리 결승골을 터뜨려 팀이 조에서 상위권을 유지하게 한 22세의 미드필더 Izet Hajrović가 말한다.
그의 태도는 많은 보스니아인들에게 전염되었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자신감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보스니아인들이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과 성공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라고 제니차에 있는 Mak Dizdar 초등학교의 교장 Mensur Milak이 말한다. "이것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위한 아주 큰 것입니다. 축구 이상으로 말입니다."
재능과 노력은 선수들을 하나로 만들었지만 성공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간의 올바른 호흡이라고 그들 모두가 동의한다. 그것은 세 명의 무슬림, 보스니아계 세르비아인과 보스니아계 크로아티아인으로 구성된 코치로부터 시작한다.
"우리의 관계는 강한 우정, 정직 및 존중에 기반합니다. 이것이 통일성, 응집력 및 직업 윤리를 세우는 것을 도왔습니다"라고 세르비아인 수석 코치 Sredojević(56세)가 말한다. 선수로서 성공하려면, "친구로 보여야 합니다"라고 그가 덧붙인다.
그러나 특히 브라질에서의 경기에서 이기고 분단된 국가를 일으켜 세워 가능한 연합하고자 하는 압박감을 고려해볼 때 서로 간의 올바른 호흡을 유지하는 것은 때때로 행하는 것보다 말하는 것이 더 쉬워보인다. 2월에 친선 경기에서 보스니아가 이집트에게 패배한 후, 라커룸에서는 약간의 "혼란"이 있었다고 5월 말 1899 호펜하임과 계약한 Ermin Bičakčić가 시인한다. 훈련 과정 동안 갑자기 발끈하거나 선수들이 충돌하거나 발목을 움켜쥐고 쓰러져 관중들의 불안한 한숨을 유발했다.
슬로바키아전에서 결정적인 동점골을 넣어 2-1로 팀에게 승리를 안겨다준 비착치치(24세)는 팀이 연합에 위협이 되는 것들을 다스려왔다고 믿는다. "우리는 팀으로서 성장했습니다" 그가 유창한 독일어로 말한다. "혼자서 이기는 선수는 없습니다. 또한 저희 모두는 너무나 많은 것을 겪은 사람들을 위해 무엇인가 하고자 하는 강한 동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동기가 우리의 호흡을 만들어냅니다.
"누구나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요. 누구나 각자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요. 다 과거의 일이에요.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절대로 잊지 않습니다."
수요일 아침. Stadion FK Famos에 햇살이 비추고 있다. 두 줄로 선 선수들은 서로를 마주하고 있고 라인의 끝을 향해 질주하기 전 패스를 주고 받고 있다. 발빠른 움직임과 집중한 얼굴이 보인다. 팀원들이 서로의 리듬을 찾기 위해 생각해낸 방법은 올바른 순간에 라인을 떠나는 것이다. 걸음이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느리면 타이밍이 무너진다.
"팀워크가 가장 중요합니다" Sušić 감독이 팀에게 말한다.
수비수 Muhamed Bešić는 그의 클럽인 부다페스트 페렌츠바로시에 대한 책무로 인하여 팀에 며칠 늦게 합류했음에도 불구하고 건강하고 예리해보인다. Sušić 감독은 팀의 첫 월드컵 경기에서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선수인 아르헨티나의 리오넬 메시를 맡을 수 있는 팀 내 유일한 사람은 Bešić(21세)라고 했다.
Bešić는 그가 태어난 베를린의 티어가르텐이라 불리는 팀에서 첫 청소년 연습 전 긴장했던 것을 회상한다. 하지만 지금의 Bešić는 그의 앞에 놓인 과제에도 불구하고 전혀 긴장하지 않는다.
"저는 메시와 대항하여 경기할 것을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그를 또 다른 한 명의 선수로 봅니다. 저는 제 경기에만 집중하겠습니다"라고 Bešić가 말했다. 그의 팔은 "Mama"(엄마), "Papa"(아빠), "Faruk"(그의 형제)와 사라예보에서 북쪽으로 150킬로미터(95마일) 떨어져 있으며 그의 가족의 출신 지역인 "Falešići"라고 적힌 문신으로 덮여있다. 보스니아는 약소국이지만 베시치는 팀이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기지 않을 거라면 왜 축구를 하겠습니까" 신생 국가의 최대의 희망이 그와 그의 동료 용들과 함께 간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그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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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mar Sacirbey (osacirbey@hotmail.com)는 릴리전 뉴스 서비스의 특파원이며 1992-1995년 보스니아 내전 중 전 보스니아 외교관이다. 그는 1967년 미국으로 이주한 보스니아 난민의 아들로서 축구를 사랑하며 자랐고 현재는 청소년 축구 코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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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ris Memija (harismemija@gmail.com)는 사라예보의 보도 사진가로 주로 중국 신화 통신을 위해 일한다. 그의 사진은 Corbis Images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