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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과 전통 숍하우스가 싱가포르의 아랍 지역에 있는 술탄 모스크 가까이 위치한 Boussora 거리에 줄지어 있다. |
세계 은행은 싱가포르를 세계에서 사업하기 가장 쉬운 국가로 평가한다. Alattas, Aljunied, Alsagoff, Alkaff 및 Ibn Talib 가족이 역사상 가장 성공적이었던 아랍인 대이동 중 하나였던 1800년대 초반 이 곳으로 온 이유는 그야말로 사업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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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 바로 아래에 있는 작스 카페(Zac’s Cafe)에서 싱가포르 아랍 네트워크 회원들이 모인다. Alwi Abu Baker Alkaff가 중앙에 앉아있고, 그의 공동체인 예멘의 하이드라마우 고향 사진이 뒤에 걸려있다. |
19세기부터 20세기까지 싱가포르의 아랍인들은 710평방킬로미터(275평방마일) 섬 영토의 절반이 넘는 땅을 소유했다. 하지만 이것은 싱가포르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인구 밀도가 높은 국가가 되고 540만명의 주민 중 15.5%인 837,000명의 일인당 백만장자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가 되기 전인 오래 전의 이야기이다. 후미진 곳의 교역소가 지도상에서 가장 기술화된 선진 국가, 고층 건물과 최고급 쇼핑 센터로 빛나는 도시 국가로 발전하기 전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리고 캄퐁 글람 지구(종종 아랍 지역이라 부름)가 트렌디하게 탈바꿈하기 전 유행을 좇는 사람들은 오늘날의 이 장소에 자리를 잡고 돌아다녔다.
조상들이 도착한 후 5세대에서 6세대가 지났지만, 수많은 아랍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뿌리를 잊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들의 선조들은 남부 예멘에 있는 하이드라마우에서 왔으며, 이 유대감 깊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여전히 스스로를 하이드라마우인, 아랍인 및 이슬람 교도로 밝히면서 싱가포르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저희가 아이였을 때, 제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곤 하셨습니다. 말을 듣지 않으면 '하이드라마우로 보내버리겠다'고요"라며 부드러운 목소리의 여자 사업가인 Khadijah Alattas는 토요일 오후에 싱가포르 아랍 네트워크(ANS)에 소속되어 있는 일부 여성과 소수의 남성이 모인 자리에서 회상한다. 이 그룹은 현지 자선 사업을 위해 몇 년 전 문화 행사를 개발하기 위해 형성되었다.
테이블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Alattas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자신들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각자 할 때 그들에 유산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아무도 하이드라마우에서 영원히 살고 싶어하지는 않았지만 한 번쯤은 방문해보고 싶어했다. 하이드라마우에 사는 남자와 결혼하겠느냐는 질문을 했을 때 젊은 여자가 고개를 격렬히 흔들면서 미소를 띈 채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아직도 그들은 과거의 가족이 주는 압박과 오늘날의 선택으로 인해 싱가포르 외부의 아랍 공동체 사람과 결혼하는 일이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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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y Evans 사진 라이브러리 / AlamY |
싱가포르 항구에 있는 이 거주지는 1870년대 즈음에 만들어졌으며, 이 때 싱가포르의 아랍인들은 섬 영토의 절반 이상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19세기 초반에 이주하기 시작했고, 남부 예멘에 있던 가문의 뿌리를 잊지 않았다. |
아랍 지역의 작스 카페에서 그룹이 모임을 가지고 있다. 이 곳은 도시의 금융 지구에서 몇 정거장(지하철)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사실상 ANS의 리더인 Alattas가 일하는 곳이다. 작스는 벽 크기의 하이드라마우 산 풍경 사진으로 장식된 중동 식당이다. 카페는 열린 창을 통해 술탄 모스크의 멋진 광경을 보여준다. 이 모스크는 싱가포르에서 가장 크며 벽 밖에서도 기도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이다.
모스크 근처에는 무스카트 거리가 이어진다. 2년 전, ANS는 싱가포르 정부와 오만이 주요 도로에 다시 활력을 불어 넣기 위해 벌인 합작 프로젝트의 완료를 축하하는 그랜드 리오프닝에 참여했다. 이 곳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2개의 아치와 지금 싱가포르 아랍 유산을 묘사하는 4개의 벽화가 있다.
작스 카페는 카퐁 글람에 있는 수많은 "숍하우스" 중 하나이다. 숍하우스는 한때 아랍 상인과 무역상들의 영역으로, 아래 층은 소매 상업을 위해 남겨두고 위층은 가족들이 거주하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오늘날에는 바틱, 원단, 향수 또는 노천 카페를 찾는 관광객들이 습기찬 야외에서 낮이나 밤에 시샤를 피울 수 있는 주요 여행지가 되었다. 하지만 아랍 거리에 있는 숍하우스 중 네 가구만 아랍인 가족이 소유하고 있다.
그 중 한 곳인 Aljunied Brothers는 Zahra Aljunied의 아버지(85세)인 Junied가 운영하는 중국 및 말레이시아 의복 및 양복점이다. Zahra Aljunied는 말이 빠른 사서로 말할 시간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그녀는 싱가포르 아랍인들에 대한 첫 번째 전시회 준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 전시회는 2010년에 국립 도서관에서 열리고 개인 문서, 사진, 공예물을 포함했었다. 족보를 유지하는 것은 하이드라마우 공동체의 전통이며, 그녀는 "Aljunied 계보학자"라고 부르는 할아버지의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공동체에 있는 다른 사람과는 달리, 그녀는 할아버지와 함께 예멘에 두 번 방문했고, 대부분 그녀의 컬렉션 작업을 위해서였다.
작스에서 그녀가 수집해온 옛날 사진들을 보여주자 여자들이 Aljunied의 컴퓨터로 모여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사진에 놀랐다. 그녀가 글래머러스한 이브닝 가운을 입은 여자들이 담긴 1950년대 초반의 흑백사진을 보여주자 한 명이 소리쳤다. "저건 우리 할머니야!" 그녀의 할머니로 밝혀진 사람은 다른 여자의 이모이면서, 또다른 여자에게는 사촌이었다. 하지만 눈에 띄게 닮은 가족은 없었다. 하이드라마우 무역상들은 1500년대부터 시작해 남동부 아시아로 광범위하고 멀리 여행하였고, 몇 세기 동안 다른 인종의 사람들과 결혼하였다. 이들의 수많은 후손들이 가진 특성은 싱가포르, 특히 말레이시아 본토인을 형성하는 다른 공동체가 혼합되었음을 반영한다.
Aljunieds와 다른 주요 아랍 가문은 본거지인 인도네시아 팔렘방에서 싱가포르로 이주하기 전까지 약 300년 동안 남동부 아시아에 많이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싱가포르라는 이름은 13세기에 이 곳에 상륙하고 사자를 봤다는 말레이시아 왕자에게서 유래했다고 한다. 말레이시아어로 Singapoura는 "사자 도시"를 의미한다. 영국이 1819년 "사자 도시"를 식민지로 만들었을 때 이미 일부 아랍인들이 이 곳에 있었다. 하지만 19세기 싱가포르의 "현대적" 설계자인 Thomas Stamford Raffles 경은 더 많은 사람들이 싱가포르에 오도록 독려하여, 섬을 주요 지방 무역 중심지로 만들겠다는 그의 야심을 충족시키려 하였다. 아랍인들은 캄퐁 글람이라 부르는 이전 말레이시아 마을을 자신의 보금자리로 만들었다. 캄퐁은 말레이시아 어로 "마을"을 의미하며 글람은 그곳에 자랐었던 현지 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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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객들에게 유명한 관광지인 아랍 거리에는 시샤를 피울 수 있는 길거리 카페와 다양한 현지 제작 제품이 있는 가게들이 있다. |
"싱가포르 역사를 살펴보면 [작가] Raffles가 아랍인들을 좋아했다는 인상을 줍니다"라고 싱가포르 국립대학교(National University of Singapore)의 사회학 교수이자 하이드라마우 역사에 대한 ANS권위자인 Syed Farid Alatas가 말한다. "사실, Raffles는 아랍인들을 싫어했습니다. 그는 아랍인들에 대해 끔찍한 이야기를 했었죠. 하지만 그는 이러한 전략적 위치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아랍인들을 눈여겨 보았습니다.
"Raffles이 왔을 때, 여기서는 크게 진행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는 무역망을 만들고 싶어했고, 아랍인들은 이미 좋은 무역망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지역 전체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랍인들이 유용하다는 것을 알았죠. 그래서 그는 아랍인들이 싱가포르에 오기 쉽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아랍인들을 이용했죠. 다른 식민지 통치자처럼 말이에요."
싱가포르의 상직적인 건물은 식민지 시대의 래플즈(Raffles) 호텔이다. 이 곳은 본래 1887년 Syed Mohammed Alsagoff의 사유지에서 임대한 땅 위에 지은 것이다. 자산임대는 그야말로 1950년대까지 아랍인들이 하는 가장 큰 사업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정부가 여전히 공동체 간의 대화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정책을 수립했을 때 변화했다.
대부분의 아랍인 재산은 전통적으로 waqf라 부르는 이슬람교도 위탁 사업체가 보유했다. 그러나, 1947년 임대차 규제법에서 정부는 2차 세계대전 이전의 모든 건물 소유자, 즉 대부분의 waqf 재산 소유자는 인플레이션에 맞춰 임대료를 높이는 것에서 제외했다. 결과적으로, 신탁 재산의 가치가 상당히 감소했다. 하지만 1967년 토지 취득법이 등장하면서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싱가포르 정부가 섬을 세계 사업 중심지로 더욱 변화시키려는 청사진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도시 개발을 위한 토지 부족이 극심해졌다. 이 법으로 인해 정부는 가격이 얼마로 결정되는지 관계없이 도시 재개발을 위해 어떠한 재산, 특히 전쟁 전의 재산을 취득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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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Harper / Corbis |
1800년대 초반 싱가포르에서 영국은 섬을 상업의 전략 중심지로 만든다는 목표를 세웠고, 이것이 성공하여 오늘날 싱가포르의 광범위한 컨테이너 항구가 생기게 되었다. |
이는 중앙 싱가포르에 굉장히 많은 부동산을 소유한 아랍인들이 시장 가치보다 훨씬 떨어지는 가격으로 재산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나의 주요 재산만 싱가포르 아랍인의 손에 있다. 도시 중심부의 외곽 지대에 있는 고급 아파트 복합단지인 Treetops Executive Residences(트리탑 중앙관저)로 Talib 가족의 개인 빌라가 한때 있었던 곳이다. 1953년 아파트로 개조한 뒤 철거하여 2000년 트리탑을 위해 길을 내주었다.
1800년대에 조부가 자신의 형제와 함께 트리탑 토지를 구입한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Khaled Talib는 그의 가족인 토지 취득법으로 인해 토지를 잃게 되었다고 언급한다. "예전에는 싱가포르에 600가구의 숍하우스를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고작 40가구뿐입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일부는 [시장 가격으로] 팔았지만 수많은 가구는 취득했죠."
또한, 그는 "아랍 가문이 소유한 싱가포르 대부분의 땅은 의무적으로 법적 신탁 관리를 받게 되었는데, 지금은 만료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재산은 팔리고, 상속지분이 분할되었으며, 토지 취득 대상에서 분리되었습니다. 반면에 저희의 신탁은 현재 진행 중입니다. 저희 재산이 혁신되어 싱가포르의 변화하는 풍경에 맞도록 보장하여 변화하는 시간에 빠르게 적응하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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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찍은 이 싱가포르 결혼식 사진에서 신부의 악세사리는 그녀의 아랍 유산을 강조한다. Alsagoff 가문의 일원인 그녀는 메카 출신인데, 그녀의 아버지가 무역상일 가능성이 있다. |
수많은 아랍인들이 기록 관리라는 열악한 일을 했었고 Zahra Aljunied도 이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전 1954년 영국 정부가 제 아버지에게 종교 건물을 지을 땅이 필요하고, 100년 임대를 약속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발견했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아버지는 모스크를 지을 것이라 추측했지만, 그 곳에 교회를 지었죠." 오해한 것보다 더 심각한 점은 아버지가 서명한 임대차 계약서를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고, 결국 가족은 영구적으로 땅을 잃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는 싱가포르에서 하는 일반적인 대화의 일부가 아니다. 싱가포르의 부족한 면에 대해 탐색하는 현지 영화 제작자이자 토지 부족 문제에 대한 단편 영화를 제작한 Tan Pin Pin은 싱가포르 아랍인들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제가 아랍 거리나 바그다드 거리를 돌아다닐 때는 왜 이 곳을 그렇게 부르는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녀는 Aljunied 도로나 Alkaff 정원이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절대 궁금해하지 않았다.
"제 증조부는 1890년대 후반 중국에서 이곳으로 왔습니다"라고 그녀는 말한다. "우리 중 대부분은 영국의 일벌로 이 곳에 온 것이었어요. 제 생각에 저희는 돈만 존중했어요. 아시잖아요, 사업이란거. 그게 일반적인 방책이었죠. 이곳은 사업 중심지에요. 사람들은 그 이상으로 깊게 보지 않아요."
그녀는 자신의 id 카드를 꺼내서 민족상으로는 중국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카드의 카테고리에는 중국인, 말레이시안, 인도인 등이 있다.) "이 카테고리는 행정부가 사업을 제어하고 안정성을 위해 [민족] 비율을 유지하기 쉽게 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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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거리의 Aljunied Brothers Parfumerie는 아랍 지역에서 얼마 남지 않은 아랍인 소유 가게이다. 이 가게에는 바틱 의상과 악세서리가 있다. |
7,000명에서 10,000명 사이로 추정되는 수의 아랍인들은 "기타" 민족이 되었다. 하지만 Alatas는 정부가 공식적인 토박이라고 간주되는 말레이시아 사람에게 교육 보조금을 제공하기 시작했을 때 스스로를 말레이시아 사람이라고 선택하지 않은 사람이 많을 경우 실제 숫자는 더 높을 것이라고 말한다.
"1980년대에는 정부가 실제로 다른 민족이 자기들만의 고유성을 개발하도록 독려하기 시작했습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제가 추측하기엔 정부가 관광을 위한 좋은 상품이라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이것은 싱가포르의 다문화 측면을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고, 여러 민족이 자신들의 유산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하는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런 독려가 ANS의 설립에 박차를 가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지역 자선단체를 지원하기 위해 지난 11월 주최한 갈라 저녁식사는 매스컴 보도를 받아 그룹에게 더더욱 영감을 주었다. "저흰 저희의 문화를 보여주는 동시에 저희가 싱가포르에서 효과적이고 생산적인 일부분이라는 점을 증명하고 싶었습니다"라고 Khadijah Alattas는 말한다.
1980년대까지 싱가포르 아랍인들은 예멘으로 거의 돌아가지 않았다. 예멘이 정치적인 격변기에 접어들면서 1960년대에는 귀향이 이미 줄어들고 있었다. 또한, 1967년 싱가포르는 군입대를 의무화했고, 전통적으로 10대 후반에 예멘을 방문했었던 젊은 남자들은 더 이상 방문할 수 없게 되었다. 만약 싱가포르 아랍인들이 오늘날 떠난다면, 대부분 일을 하기 위해 호주로 이주할 것이다.
하이드라마우 지역도 더 이상 싱가포르에서 한 때 호화 주택을 지었던 친척에게 송금에 더 이상 의존할 수 없다. 하지만, 싱가포르의 아랍 공동체는 아랍인들이 예멘 문화에 영향을 주는 소수의 방식을 즐긴다. 예를 들어, 예멘 음식 중 프론 크래커와 어육 페이스트는 싱가포르의 말레이식 요리에서 유래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싱가포르 자체가 국제적인 음식 피난처가 된 반면, 아랍 이민자들이 서구에서 그랬듯이 아랍인들은 가정 이외에서 자신들의 전통 음식을 홍보하려 하지 않았다. 여성을 "고귀한"이라는 의미의 샤리파라 부르는 사랑스러운 전통을 제외하면 아랍어로 얘기하는 사람도 극히 드물다.
그들의 강력한 유대감은 족보와 종교에서 나온다. 수많은 가족이 자신의 혈통이 956 ce에 바그다드에서 하이드라마우로 이동했던 Prophet Muhammad의 10세대 후손인 Mohamad bin Isa Al Muhajir에서 시작되었다고 밝혔다. 오늘날 공동체 대부분의 가족은 금요일 저녁에 있는 가족 모임에서 자녀들에게 종교 공부를 하도록 도와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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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mon Reddy / Alamy |
싱가로프 강을 가로지르는 래플스 플레이스(Raffles Place)의 고층 건물들로 틀이 짜여진 이 Thomas Stamford Raffles경 동상은 그가 1819년 상륙했던 위치에 세울질 것으로 믿어졌지만, 섬의 영국인 정착지에 세워진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전략적 위치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아랍인들을 눈여겨 보았습니다"라고 Syed Farid Alatas는 말한다. |
Imam Hassan Al-Attas는 대대로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해왔다. 그는 그와 아내가 대가족과 함께 사는 집에서 저녁을 먹는 동안 Syed Farid Alatas는 그들의 선조의 역사와 믿음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하이드라마우인이 이슬람교를 전도하기 위해 왔다고 말합니다. 그렇겠죠. 하지만 대부분 전도를 위해서 온 것은 아니었어요"라고 Alatas는 말한다. "불안정성, 내분 등 압박하는 있었는데 그 중 기근이 가장 큰 원인이었죠."
"수천년 전, 하이드라마우는 매우 비옥했지만, 지난 500년간 갈수록 덜 비옥해지면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을 뒷받침하기 위해 일자리를 찾기 위해 떠나기 시작했어요. 하이드라마우의 교육이 기본적으로 종교적이기 때문에, 무역상이 되고, 지주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일 때문에 다른 국가로 나가게 되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그 중 특히 다른 민족 간의 결혼으로 사람들을 개종시켰습니다."
"그와 동시에, 개종한 일부 철학자들이 있다"라고 Imam Hassan가 덧붙인다. 그는 가족 자체가 살아있는 본보기이다. "그들은 공동체가 커지면서 특정 직위를 맡게 되면서 개종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종종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면 전도사를 했을지도 모르지만 전도사 일을 무역으로 보충했을 것입니다."
Imam Hassan 및 Alatas는 싱가포르의 중앙 동부 거리 이름은 다른 요인과 이 곳의 전략적 위치에 더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싱가로프가 무역을 위한 중앙 지점이었던 것처럼, 이 곳은 인도네시아 등에서 동쪽으로 향하는 순례자들이 메카 순례를 가는 길에 물자를 받기 좋은 중간 휴식 지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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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의 아랍 지역은 다양한 방문객과 현지인들을 밤낮으로 끌어들인다. 아랍 원주민들의 후손들은 여전히 유산을 기념하지만, 대부분 도시 곳곳에 흝어져 살고 있다. |
Hassan은 정부가 인근의 인구를 기준으로 자금을 규제하고 건축 허가증을 발행하여 모스크 건설을 합리화하기 전인 1952년에 아버지가 이 곳에 자신의 모스크를 지었다고 언급한다.
"싱가포르는 제 아버지가 살아계시는 동안 많이 변했어요"라고 그는 말한다. "아버지에겐 영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이렇게 여권이 3개 있었죠. [1963년에]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로부터 분리되었을 때 싱가포르 여권 하나만 가지게 되셨습니다. 하나 변하지 않은게 있다면 제 아버지가 하이드라마우인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랍어로 설교하시던게 기억나는군요. 말레이시아인도 특히 금요일 기도 중에 설교를 들었는데, 그 사람들은 아랍어를 알아듣지도 못했어요."
이슬람교도 종교평의회가 형성된 후인 1970년대부터 모든 이슬람교도 직원은 자동으로 매달 월급에서 1싱가포르 달러를 모스크 건축 비용으로 지불했다. "자금이 충분히 있을 때, 정부에서는 인도인이나 말레이시아 공동체가 될 수 도 있었겠지만 이슬람교도 공동체 중 한 곳의 종교평의회에 이를 제공해 모스크를 지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라고 Imam Hassan은 말한다. "오래 전에 지은 모스크 중 일부는 나무로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더욱 아름다워지고 완전히 현대적인 시설들을 갖추고 있죠."
상대적으로 오래되었다고 하지만 싱가포르에 있는 거의 모든 것이 매우 현대적이다. 아랍 지역과 같은 인종 거주지는 다른 도시 지역처럼 깔끔하고 잘 정렬되어 있다. 이 곳은 아침부터 밤까지 다양한 관광객들이 오는 장소이지만 원주민의 후손 대부분은 빛이 나는 탑과 깨끗하고 현대 싱가포르의 나무가 줄지어진 거리와 정원이 있는 곳에서 살고 있다.
그들은 교수, 외교관, 은행가, 작가, 비서로서 국가의 사업 이미지를 정의하는 전문직으로 종사하고 있다. 물론 숍하우스 소유자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에게 오카로드 길이나 싱가포르의 다른 매끈한 도로를 걷거나 도시의 Merlion(머라이언)(반사자 반인어) 동상이 마스코트와 관광 명소 역할을 하는 마리나만 근처를 산책하는 것은 아랍 거리에서 기도 소리를 듣는 것만큼 편하다.
"싱가포르식 도매업이라는 건 없습니다"라고 Khaled Talib가 말한다. 그는 싱가포르인의 정체성이 지닌 복잡성을 요약한다. "전 일년 동안 UAE에 있던 적이 있었고, 싱가포르 클럽에 가입하려고도 했어요. 클럽의 회장인 중국 사람과 통화할 때 그는 제가 싱가포르 사람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도 알 수 있듯이 싱가포르인에 대한 생각이 저와는 다릅니다. 그래서 전 스스로를 싱가포트 태생 아랍인, 말레이 사람들의 유숙객, 이 땅의 원래 주인이라고 분류하고 싶습니다."
"집에서는 아직도 할와와 무할라비야를 디저트로 만들고 있어요. 어떤 것들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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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a Yunis (www.aliayunis.com)는 아부다비에 기반을 둔 작가이자 영화제작자이다.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은 소설인 The Night Counter(Random House, 2010)를 집필했다. |